덕숭산 벽초선사
이랴 이야~쟁기질이 법문이라, 손수 사찰 짓고 종일 노동
일꾼 다름없는 ‘머슴 주지’ 법거량 말장난에 목판 부수고
오직 보고 행함에서 禪 찾아
홍성에서 예산으로 들과 들에서 봄이 자라고 있다.
석니(釋尼)뜰이다. 백제시대부터 이 들녘은
석가모니와 비구니를 뜻하는 이름으로 불렸으니 무슨 연고였을까.
훗날 한 선사가 이 들판을 가꾸고,
비구니들에게 성불의 길을 닦아주리라는 것을 들 예언한 것일까.
이 들을 개간해 일군 이가
덕숭총림 2대 방장 벽초 선사(1899~1986)였다.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벽초는 9살 때 탁발 나온
만공 선사에게 감화돼 수덕사로 출가했다.
그의 부친 연등 스님도 함께 출가해 그는 연등을 은사로 삼아
만공의 손상좌가 되지만, 실제로는 만공이 거두고 다듬은 직제자였다.
그는 만공을 따라 금강산 유점사와 오대산, 지리산 등
명산 대찰을 찾아 무섭게 정진해 생사의 철벽을 타파했다.
법 물으면“자신을 알라” 경책
1930년에 수덕사로 돌아온 그는
1940년부터 무려 30년 간 주지를 지냈다.
빈한하기 그지없던 수덕사를 오늘날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백양사와 함께 5대 총림의 하나로 일군 이가 벽초였다.
그는 통념상의 주지가 아니었다.
불목하니(절 머슴)나 다름없이 몸소 일을 했다.
오늘날 수덕사와 정혜사, 견성암, 전월사 등
덕숭총림 안 사찰들의 대부분이 그의 손에 의해 지어졌다.
특히 벽초는 세계 최대의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을
설계도 없이 돌을 하나하나 올려 지어갔다.
일터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던
그는 다른 일꾼과 다름이 없었다.
그들과 함께 일하다 목이 마르면 함께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고
다시 일꾼들을 독려하며 일을 시작했다.
그는 힘이 장사였다. 20대 때는
맨손으로 늑대를 때려잡았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졌다.
그는 목소리가 워낙 커서 산 아래 견성암에서 일하다
덕숭산 정상 부근 정혜사를 향해
‘무슨 무슨 연장을 가져와라’고 전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한 번은 물건을 훔쳐서
슬금슬금 도망치던 족제비가 그가 내지른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기도 했다고 한다.
1946년 스승 만공이 입적한 뒤 벽초는 덕숭산의 호랑이였다.
덕숭산에서 수행한 선승들이라면
견성암과 정혜사 사이의 보초를 잊지 못한다.
산 위 정혜사는 괴각(괴짜) 선승들이 많기로 유명했던 비구선원이다.
산 아래 견성암은 수많은 여성수행자들이 정진하는 비구니선원이다.
혹 비구와 비구니가 야밤에 산에서 만나는 것을 막기 위해
삼경에 보초를 선 이가 바로 벽초였다.
만약 벽초에게 걸리면 뼈를 추리기 어려웠기에
젊은 비구·비구니들은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들판에서 일꾼들과 술을 한 잔 마신 그는
덕숭산에 들어서면서 “야! 이 놈들아. 공부해라. 공부해라!”라고 외쳤다.
그러면 덕숭산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가 입을 열어 한 법문이라면 이것이 전부였다.
그는 스승을 흉내 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스승의 법이
타성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해낸 장본인이었다.
화두선을 체계화한 송나라 대혜선사는
당시 수행자들이 자신의 스승인 원오 극근 선사가
선사들의 법거량을 담아 펴낸 <벽암록>에만 도취해 말장난을 일삼자
그 목판을 모아 쪼개 불태워버렸다.
그 역시 말과 글을 버렸다.
수좌(참선수행자)들이 법(깨달음)을 물으면
오직 “이놈(자신)을 알라”고 경책할 뿐이었다.
그는 승려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도 반대했다.
먹물이 들면 겉으론 중이지만
마음은 속인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말과 글에서 법을 찾지 말고,
보고 듣고 움직이는 모든 것에서 법을 찾야야 한다며
행동으로만 법을 보여주었다.
선재동자가 수많은 마음 세계의 선지식을 순례하고
최후에 도달한 실천의 화신 보현보살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버리지 말라” 시궁창 국숫발 주워 먹어
그는 석니뜰의 개울보를 막아 땅 120마지기를 개간해
덕숭산 대중들을 먹여 살렸다.
개울보는 비만 오면 터지곤 했는데,
그는 그 때마다 끼니도 잇기 어려웠던 아랫마을 사람들을 불러다
노임을 주고 보를 막았다.
한 번은 그가 없는 사이에 제자 원담(현 덕숭총림 방장)이
굴착기를 불러 단단히 보를 쌓았다.
절에 돌아온 그는 칭찬은커녕 “원담이 내 일을 망쳤다”며 혀를 찼다.
인근 빈민들의 자존심을 지켜주면서
주던 생계거리를 없애버린 데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그는 또한 시줏물을 함부로 버리는 것을 가장 경책했다.
벽초의 손상좌(원담의 제자)인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은
공양주를 하면서 시궁창에 빠진 국숫발을 주워 먹던 기억이 생생하다.
“부엌 수챗구멍이 아랫 마당으로 연결돼 있었는데,
노스님(벽초)이 구멍 속의 몇 가닥의 국수를 바가지에 주워 담고 있었어요.
얼른 받아들어 씻지도 못하고
‘제가 먹겠습니다’고 먹을 수밖에 없었지요.”
누가 반농반선(半農半禪)이라 했던가.
87살로 열반할 때까지 무슨 일이건 그것에 전념했으니
전농전선(全農全禪)이 아닌가.
방장 원담 선사에게 평소 법문이라곤 하지 않았던
벽초의 법문을 청했다.
봄날 들판의 쟁기질하는 소를 향해 드디어 벽초의 법문이 나온다.
“이랴, 이랴. 쭈 쭈 쭈 쭈. 이랴, 이랴…”
조연현 기자
출처 : 한겨레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