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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夷 - 15. 무협(武俠)
동양의 판타지라 일컬으며 일부 유치한 어른들이 즐기는 동화(童話) 정도로 치부되는 '무협', 그 속에는 어떤 비밀이 담겨 있는가? 그 무협이 동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지금, 아시아의 숨겨진 역사를 밝혀 보고자 한다.
무협(무협지, 무협소설)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소설의 한 분야인가? 순수 창작에 의해 탄생된 가상의 세계인가? 아니면, 실재했던 세계였는가? 어떻게 무협이 탄생하게 되었는가? 무협의 기원은 있는가? 기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협지와 무협영화 등을 통해 꿈을 꾸어왔고, 그 꿈속에서 우리는 무협세계에 대한 몇몇 궁금증을 늘 가져왔었다. 그러나, 그 궁금함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는 곳은 그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했다. 이에 본인은 동이종교를 탐험하는 과정 중에 그 비밀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기에, 여기에서 잠깐 다루어 보기로 하겠다.
무협세계, 즉 무협지로 대표되는 무협이라는 창작의 세계는 지나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원이 되는 무협은 어디에 있는 세계일까? 그 곳은 바로 동이의 세계이다. 왜, 무협지가 지나에서 발생하였을까? 왜, 우리는 무협에 대해 몰랐던 것일까? 무협은 동이의 일상사였고 그 후손이자 후예라 할 수 있는 우리는 그 당사자라 할 수 있으므로, 시시콜콜한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담은 일기장과 같은 무협지가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무협세계를 목격하고 동경한 속세의 인간들 즉, 지나는 자신들의 목격담을 무협지로 완성한 것이다. 현재, 무협소설의 시작은 당대(唐代)라고 하며 무협의 기원은 선진시대(先秦時代)로 보고 있다.
동양의 무협이나 서양의 환타지는 역사적 사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신화나 전설, 설화가 사실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 무협이나 환타지 둘 다 동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무협만 다루겠다. 환타지는 나중에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무협뿐만 아니라 한국고대사, 더 나아가서는 인류사를 밝히는 데 있어 반드시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렇지 않고서 고대사를 정립하려 하면 그 노력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그것은 동이(東夷, 龍族)가 종교집단, 형제단(Brotherhood)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동이가 민족적인 형태나 성질을 띠었다고 하더라도 그 근본이나 탄생원인은 종교적 목적에 있으며 그 본질은 종교집단이라는 것이다.
동이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동이를 말한다는 것은 '수박 겉 핥기'에 지나지 않는다. 동이를 종교집단이 아닌 민족이나 종족, 국민의 개념으로만 이해해서는 고대사를 결코 밝혀 낼 수 없을 것이다. 동이라는 민족이 존재하였고 그들이 가진 종교가 동이종교(神敎, 불교, 신선도, 巫敎, 풍류도 등)였다 라고 바라보는 시각은 정말로 잘못된 것이다. (동이의) 종교가 있었고 그 종교로 인해 만들어진 집단 내지는 민족이 바로 동이라는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실수를 범하고 있지만 동이에 대한 올바른 식견을 가지게 되었을 때, 동이의 정체를 올바로 알게 되었을 때 고대사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무협과 동이의 관계를 규명해 보기로 하겠다.
무협은 구비문학(口碑文學)이다. 그 완성이 현대에 이루어진 무협은 설화나 민담을 통해 전해지던 이야기를 소설화한 것이다. 무림(武林)의 비사(秘事)를 직접, 간접 경험하거나 전해들은 이들이 옛날이야기를 풀어놓듯이 후손들에게 전하여 온 것을, 현대에 문화(소설, 영화 등)로 완성한 것이 무협이다.
무협은 그 구성 요소로서의 기본이 되는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무(武)와 협(俠), 그리고 구파일방(九派一幇)과 오대세가(五大世家)이다. 그 세 가지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그것은 무협이 아니다. 현 무협소설계는 편의상 또는 창작의 자유로움, 재미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그 세 가지 중에 어느 하나 또는 둘을 등장시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는 거의 모든 경우에 다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협은 심심지 않게 빠지고 있으며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찬밥 신세로 전락한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정통무협이라 말하려면 저 세 가지 무, 협,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누구의 주장처럼, 무협에 있어서는 협이 먼저이고 무는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하다. 무협의 목적은 누가 뭐라고 해도 협이다. 협이 빠진 무협소설은 무협소설이 아닌 무술소설 내지는 격투소설에 불과하다. 현대에는 무술소설 내지는 격투소설이 주름잡고 있으며 판타지가 접목되는, 말 그대로 정체불명의 '괴상망측'한 잡지가 판을 치고 있다.
또, 협과 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가 들러리로 등장하거나 아예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들이 빠지면 무협이 아니다. 무협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이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협을 세상에 실현하는 과정에 있어 무를 사용하는 것'이 무협이다. 이것이 무협의 정의(定義)이다.
그럼, 그 세 요소들을 살펴보자.
무(武)는 사전적으로 여러 의미(호반, 무인, 무사, 군대의 위용, 병법, 병장기, 발자취, 굳세다, 잇다 등)를 가지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뜻과 크게 차이가 없다. 그런데, 항간에 전하기로 (출처가 불분명) 무는 '창(戈)과 같은 무기(武器)로 병란을 막아 그치게(止)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무는 그 글자 자체에 이미 무협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된다. 무는 결과적으로 보면 폭력(상대를 제압하는 행위)에 다름이 없겠지만, 불법적인 폭력을 제압하는 법적인 폭력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겠다. 요즘, 유행하듯이 사용되는 용어인 공권력이라는 뜻으로 보면 맞다고 할 수 있다.
무협에 있어 무는 무술(武術)의 의미가 아닌 무공(武功)의 의미이다. 원래의 의미는 그렇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무술은 물리력을 사용하는 기술을 가리키며 어느 정도 익히면 사용할 수 있는 운동기술을 가리키지만 무공은 상상으로만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는 것으로서 물리력과 비물리력 모두를 사용한다. 무협의 무는 장풍이나 경공, 전음 등의 비물리력을 포함한 무술, 즉 무공을 의미한다.
협(俠)은 정의, 도덕, 윤리 등을 말한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개개인의 인간 됨됨이에 국한되지 않으며 오히려 사회적인 의미로 더 크게 부각된다. 사실, 사회적인 협과 개인적인 협은 구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협이 확대되어 사회적인 협이 되는 것이고 사회적인 협이 실현되었을 때 개개인에게도 평화와 안정이 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협에 있어서의 협은 사회적인 협을 말한다. 일반적인 무협지에서는 개개인의 협, 즉 사사로운 은원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경우가 많이 있고 그것이 결말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경우도 다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무협지는 그 결말에 있어 항상 사회적인 협을 화두로 삼고 주인공이 어떻게 그 사회적인 협을 실현하는 가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사회적인 협을 실현한 사람을 일컬어 영웅(英雄) 또는 대협(大俠)이라 한다.
구파일방은 소림, 무당, 곤륜, 아미, 화산, 개방 등을 말하며 오대세가는 남궁세가, 제갈세가, 사천당문, 황보세가, 하북팽가 등이다. 그러나, 이들은 완전하게 정해져 있지는 않다. 작가나 성향에 따라 그 구성 문파들이 조금씩 바뀌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한 문파가 그 세력이 강대해지거나 유명해져서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 끼거나 반대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한 문파가 그 세력이 약해졌다 하여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서 제(除)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강호, 무림'이며 무협세계라는 것이다. 그들을 제외한 수많은 군소문파들은 그들의 하위개념일 뿐이며 그들의 영향아래 놓여 있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문파들 중에서 그 명성을 떨치고 위치를 확고히 한 대표적인 문파들을 고른 것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이다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사와 전통이 깊다거나 명성과 위치가 확고하다거나 그러한 것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선정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점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은 선정(選定)이 아니라 고정(固定)이라는 것이다.
시초에, 누가 어떻게 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그들(소림, 무당, 남궁세가 등)을 집어넣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번 선정된 그들은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강호무림'에 대한 것이다. 이른바, 무림인들이 활동하는 모든 곳이 강호무림이라 하는데 어느 정도는 맞다고 할 수 있으나 정확하게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강호무림이며 그들이 무협세계라는 것이다. 그들이 세상(속세, 天下, 中原)을 지배하고 이끌어 가는 것이다.
세상은 그들의 지배 하에 놓여있다. 그들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란(亂)을 평정하고 협(法)을 실현시킨다. 그래서, 그들을 정파라 하는 것이며 사사로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난을 일으켜 그들과 대적하는 무리들을 사파(邪派)라 하는 것이다. 또, 정파와 직접적인 대결을 벌이는 무리들을 마도(魔道)라 한다.
그러면, 사파와 마도는 어떻게 다른가?
무협세계의 모든 문파들은 정파(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하위개념에 놓여 있다. 즉, 군소문파들은 정도(正道, 俠)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였을 때 정파의 제재(制裁)를 받게 되는 것이다. 군소문파들 중에 정도를 벗어난 문파들을 사파라 하며 그 문파들은 정파(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교정대상(敎正對象)이 되는 것이다. 그와는 다르게, 마도는 정파의 하위개념이 아니며 대등한 위치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파와는 다르게, 마도는 정파에게 있어 교정대상이 아닌 제거대상(除去對象)이다. 사파는 정파의 지배아래 놓여 있는 것이지만 마도는 정파의 세계, 즉 무협세계를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려 하는 것이다.
사파는 자신들의 이익을 쫓아 협을 어기는 것이지만 마도는 자신들의 협(俠, 魔道)으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것이다. 사파는 사람이 사는 곳, 사람의 욕심이 있는 곳이라면 비록 정파의 지배 하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항상 존재해왔고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마도는 정파와 결코 병립할 수 없는 투쟁의 대상이다.
마도는 무엇인가? 정파가 주인공이며 정파의 세상인 무협에서는 마도가 악(惡)으로 묘사되지만 마도의 입장에서는 선(善)이라 할 수 있다. 즉, 기독교세계에 있어 불교는 마도이며 불교세계에 있어 기독교는 마도인 것이다. 현대는 각 종교들이 서로 병립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지만, 종교가 세상을 지배하는 중세유럽의 기독교(카톨릭)세계에 있어서 이슬람은 마도에 불과할 뿐이다. 무협지에서 조로아스터교(배화교, 현교, 명교, 마니교 등)를 마교(魔敎, 魔道)라 하며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유불선의 세계에서 조로아스터교는 제거의 대상일 뿐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무협과 동이의 관계를 탐구해 보자!
우리가 무협을 접하면서 소홀히 지나치기도 하는 무협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무림이 관(官)과 무관(無關)하게 활동한다는 것이다. 관과 무관하다는 것은 관의 지배 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자면, 사사로이 은원관계를 해결하거나 악당들을 척살(살인행위)해도 관에 의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무고한 사람을 해하는 행위는 범죄이므로 그에 합당한 처벌을 정도무림(正道武林, 正派武林,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게서 받게 되어 있다. 몇몇 소설에서 무림과 관이 서로 엮이는 경우도 있지만 원칙적으로 무협에서는 무림을 관과 무관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면, 왜 무협에서는 무림과 관이 무관한 것인가? 왜 관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일까? {여기서의 관이란 현대적인 용어로 공권력, 국가권력, 법치 등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정리하면, 다음의 세 가지 정도를 들 수 있다.
그럼, 어느 경우가 진짜 이유일까? 첫 번째로 든 이유가 이유로 될 수 없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무협의 협이라는 단어에서 이미 무법시대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실제로 대부분의 무협지에서도 국가권력이 존재하는 시대를 시대상황으로 설정하고 있다. 협, 즉 법이 있었기에 무협세계가 존재한다. 법(法, 俠)에 의해 정파가 사파를 다스리는 것이며 마도를 척결(剔抉)하는 것이다. 무협세계는 약육강식 하는 동물의 세계가 결코 아니다. 힘(폭력)을 믿고 약자를 괴롭히는 일은 범죄에 해당되며 곧바로 정파에 의해 제재를 받게 되어 있다.
두 번째의 이유는 이유로서 설득력이 있는가? 관이 이야기 전개에 방해가 된다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흥미를 더욱 유발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협에 있어 관이 배제된다는 것은 거기에 특별한 이유가 따로 있다는 말이 된다.
결국, 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이유는 무림이 관의 상위에 있어서, 관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그 외의 이유는 떠올리기 힘들다. 중세유럽의 카톨릭 세계가 아주 좋은 비교가 될 수 있는데 관의 위에 무림이 있었다는 것은 제정일치의 사회를 말한다.
그러나, 보통의 무협지에서 그려내는 시대(송, 원, 명, 청 등)에는 종교단체가 국가권력(공권력)의 위에 있지 않았다. 동아시아에서 종교단체가 공권력의 위에 있었던 시대는 기원을 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무협이 그려내는 시대인, 무림이 관의 상위에 위치한 시대는 기원전의 세상이라는 말이다.(예:소도) 기원후의 세상에서는 국가통치이념으로서의 종교(불교, 유교 등)가 항상 통치권력과 함께 해 왔으나 특정 종교단체들(예:화랑도, 소림사 등)은 국가권력의 밑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과 기원후는 어떻게 다른가? 기원전은 제정일치이고 기원후는 제정분리의 사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무협은 제정일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동이(東夷)의 세계는 기원전의 세계로서 제정일치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무협세계는 동이의 세계, 즉 조선을 본 따 만들어진 것이다. 지나사(支那史)의 어디를 보아도 종교가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모습은 눈에 띄지 않는다. 조선, 단군왕검이 다스리던 동이의 세계가 바로 제정일치의 세계인 것이다.
혹자는, 고대국가에 있어 왕이 제사장을 겸직하면서 점을 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거나 하늘에 제사를 지낸 것을 가지고 제정일치라 하는데 이는 미흡한 지식이다. 그것들은 제정일치사회에 있어 하부구조(종교세력의 지배를 받는 정치세력들)의 증거가 될 수는 있으나 제정일치의, 상부구조(정치세력들을 지배하는 종교세력)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지나사에서 은나라만이 제정일치의 사회였다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 은나라가 제정일치였다는 증거는 없다. 왕이 몇 가지 종교적인 행사를 주관하고 또 종교와 관련하고 있다하여 제정일치라 하는 것이 아니다. 제정일치란 종교세력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종교세력, 즉 현대의 종교단체에 해당하는 집단이 모든 것,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전반을 통괄하는 것을 제정일치라 하는 것이다. 은나라는 제정일치의 하부구조에 해당될 수는 있겠지만 상부구조 즉, 제정일치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의 국가들이 제정일치의 사회가 아니라면 제정일치의 무림세계는 동이의 세계인 조선(朝鮮)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많은 이들이 제정일치와 제정분리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데, 모든 것의 위에 있는 것은 종교이며 그러한 종교에 의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정치라 말하고 그러한 사회를 가리켜 제정일치라 하는 것이다. 즉, 정치는 종교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말이다. 가까이는 중세유럽의 카톨릭세계가 그러하며 좀 더 멀리는 古조선이 그렇다. 삼한의 소도를 가리켜 제정분리라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결코 삼한은 제정분리가 아니었다. 제정분리란, 현대사회에서와 같이 정치(국가권력, 법치)가 모든 것의 위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정치가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 종교에서 정치가 분리되어 독립한 위치에 서는 것, 오히려 정치가 종교의 위에 서는 것을 말한다. 결국, 제정일치란 종교가 지배하는 것을 말하며 제정분리란 정치가 지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은 제정일치의 사회에서 제정분리의 사회로 바뀌어 왔다.
국가가 소도를 어찌하지 못한다는 것은 종교(소도)가 국가권력의 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국가권력과 종교권력이 병립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해가 두개 있을 수 없듯이 한 체제 안에서 두개의 권력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소도의 천군과 국가의 왕이 따로 병립하고 있다며 삼한을 제정분리라 하는데, 그러한 제정분리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소도와 국가의 권력이 따로 병립하고 있다면 그것은 두개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단군왕검의 고조선은 제정일치라 말하며 삼한은 제정분리라 한다. 그런데, 환단고기에서는 고조선이 삼한이라 하며 현재 밝혀지고 있는 사실들에서도 삼한이 고조선일 가능성이 높다. 즉, 어찌 하나의 개체를 가지고 제정일치라 하면서 제정분리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삼한을 제정분리라 말하는 것은 현재의 로마교황청(바티칸시국)과 이탈리아를 하나의 국가로 바라보는 것과 같다. 분명 현재의 로마교황청(제정일치)과 이탈리아(제정분리)는 서로 대등한 두개의 국가이다. 로마교황청과 이탈리아가 하나의 나라이고 서로 간섭을 못하는, 즉 독립된 활동을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다는 말인가? 분명히 말하지만, 제정분리는 종교가 정치(국가권력)의 지배 하에 놓여있는 것을 말한다. 삼한은 제정일치였으며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이제, 무협의 세가지 요소가 동이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들여다보도록 하겠다.
무협의 기원을 알아보려면 무협의 주인공, 즉 무림인이 누구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또, 그 무림인이 누구인지 알려면 그들이 익히고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무공이 무엇인지, 그 무공을 익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무공의 그 실현이 불가능하다느니, 가상의 세계에만 존재한다느니 등등의 논쟁은 이 글과는 무관하다. 이 글은 무협을 다루고 있지 무공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협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주된 이유가 바로 '무'에 있다. 무, 즉 무공 때문에 무협이 문학계에서 문학으로서의 그 가치가 절하되고 있으며 무협애독자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에게 삼류잡지의 취급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린이들의 동화는 아니고 그렇다고 성인들이 읽기에도 너무 허무맹랑하다 보니 소설로서의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처럼 무협이 무시를 당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이고 지나나 다른 나라에서는 상당한 문화적 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또, SF소설이나 판타지(Fantasy)가 우리나라에서 문학으로서의 한 분야로 굳건하게 자리 잡은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무협을 접해 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느끼듯이, 무공은 현대인의 상식(常識)에서는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특이한 소재이다. 그런데, 그 무공이 일반인 거의 모두에게 그렇게 인식되고 있지만 일부의 소수에게는 현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다. 상상 속이든 편집(偏執)에서든 무공은 전래되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신선도사들이 펼치는 도술(道術), 바로 그것이다. 가까운 과거의 '단(丹)'이라는 소설이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는데 도술과 무공의 관계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전우치전, 홍길동전, 박씨전 등의 고전소설에서도 무공이 곧 도술임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전래되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신선이나 백발도사들의 도술(道術)과 불교의 승려들이 펼치는 법술(法術)은 북유럽신화를 기반으로 탄생한 판타지에 등장하는 각종 마법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술법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은 지역이나 문화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을 뿐이며 그 근본적인 형태는 동일하다. 그것들은 현대에 초능력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따라서, 현대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인 '초능력'이라는 단어가 그들을 대표할 수 있을 것이다.
무공이 초능력이라면 일반인 아무나 쉽게(?) 익힐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초능력은 어떻게 발휘되는가? 말하는 사람들에 따라 다른데, 천성적으로 타고난다든지 사고로 우연히 습득한다든지 또는 훈련을 통해 익힌다고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초능력은 훈련을 통해 익히는 것만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스포츠기술'을 익히듯이 쉽게 배워지는 것이 아닌 깨달음의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습득되는 것일 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공 자체를 목표로 삼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은 반드시 어느 일정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결론적으로, 무공은 신선도사들이 신인합일(神人合一)을 목표로 수행하는 과정에 있어 저절로 습득되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현대의 우리는, 무협 속에서 무공을 익히는 것이 스포츠기술(무술)을 익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아무나(?) 쉽게 접하고 배우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 실제 세상에서는 왜 무공을 상상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결론지은 것일까? 그 원인은 무공에 대한 인식 부족이다. 무공은 수행자들의 수행과정에 있어 저절로 얻어지는 부수적인 것, 즉 목표가 아니라 과정 중의 여러 현상들 중의 하나일 뿐인데도 목표로 오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과정을 목표로 삼으면 반드시 한계에 부딪치고 더 이상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퇴보의 길을 걷게 되어 있다. 이것이 진리의 작용이다. 그래서, 무공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상상의 세계에서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즉, 종교의 퇴보가 무공의 퇴보로 이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제정일치에서 제정분리의 사회로 바뀌는 것, 모든 것인 종교가 정치의 아래로 내려오게 된 것은 종교의 퇴보를 의미하며 종교의 퇴보는 올바른 목표의 상실을 의미하며 목표상실은 과정의 혼란을 야기한다. 따라서, 과정에서 저절로 얻게 되는 무공은 퇴보를 거듭하게 되고 상상 속에 머무르게 된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무공은 마법이며 도술이고 초능력이다. 그 누가 뭐라 해도 무공은 초능력이다. 그럼, 그 초능력을 익히고 사용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현대의 무협지에서는 그 무공을 아무나 쉽게 접하고 익히며 사용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전설이나 설화, 민담 등을 통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신선, 도사, 법사(불교승려) 등으로서 종교인들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된 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무협의 무인은 일반인이 아닌 종교인들인 것이다.
일부의 사람들은, 무협의 문파들이나 무인들을 조직폭력집단이나 조직폭력배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둘은 천지차이(天地差異)이다. 조직폭력집단인 야쿠자, 삼합회 등의 기원도 따지고 들어가면 무협의 문파들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지만 전혀 그 성질이 다르다. 무협의 문파들을 조직폭력집단이라 말한다면 과연, 조직폭력집단이 아닌 조직이나 국가, 단체가 있을까? 자신들은 법에 의해 힘(武力, 공권력)을 쓰고 있다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그들은 조직폭력집단으로 보일 수 있으며 그들의 무력이 폭력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럼,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바로 협(法, 正義, 義理)에 있다. 그리고, 그 협은 종교적 진리를 말한다. 무협소설과 무술소설의 차이는 협에 있고 그 둘은 천양지차인 것처럼 무협문파와 폭력집단의 차이도 그와 같다. 무협의 문파는 종교집단으로서 종교적 진리에 입각한 협을 세상에 구현하려하지만 폭력집단은 자신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불법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럼, 무협의 무인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같이 지나의 화하족(夏華族)일까? 신선도사의 유래는 어디에 있는가? 지나의 도교(道敎)에서 유래한다고 믿는 이들이 대다수이지만, 사서들을 뒤져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지나의 도교와 우리의 선도(?仙道)가 다르다 하지만 그 둘은 다르지 않다. 즉, 유불선(儒佛仙, 儒佛道)의 뿌리가 동이종교이며 그들은 동이종교의 개신교(改新敎)라 할 수 있다. 유불선의 뿌리가 동이종교라는 것은 많은 이들이 주장하고 있으며 명확하게 밝혀질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혹자는, 어떤 문명이기를 동이(?우리민족)가 발명하고 발견해냈다고 말하는 이들을 국수주의자들이라 매도하며 그 국수주의자들은 뭐든지 과장하는 것을 좋아하여 동이가 모든 것을 만들어낸 것처럼 자랑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본인에게는 그 무엇이 동이에게서 연유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불가사의로 여겨진다. 다른 이들은 '어떤 것이 동이에서 연유한다'를 연구 대상으로 여기지만 본인에게는 '어떤 것이 동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연유한다'는 것이 더 큰 관심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동이는 '선사시대에 인류문명을 선도하던 영적인 엘리트 종교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동이에게서 연유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연유한다는 것은 그 다른 곳이 정말로 천재(天才) 중의 천재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무공을 익히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동이(東夷)라는 말이다. 동이는 특수한 종교집단으로서 무당이며 사제계급이며 선비이며 신선도사이며 용족이며 무림인이다. 무림인들은 속인(俗人)이나 화하족이 아니라 종교인이며 동이인 것이다.
협(俠)! 정의 또는 의리라 할 수 있는 협은 무엇인가? 무림인들이 종교인이고 그들이 협을 부르짖는다면 그 협은 당연히 종교적 진리에 의해 만들어진 윤리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윤리, 협을 동아시아 삼국의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바로 환국의 '재세이화 홍익인간'에서 찾을 수 있다. '재세이화 홍익인간'이라는 협을 외치며 난을 그치게 하고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동이의 모습이 무협인 것이다.
무림인들이 종교인이고 종교집단이라면 그들이 추구하는 지상과제는 무엇이겠는가? 바로 포교(布敎)이다. 대중(大衆)을 계몽하고 진리의 세계로 이끌며 자신들과 함께 열반의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 바로 그 목적이다. 그것은 재세이화 홍익인간이다. 이것이 협이다. 약육강식의 금수와 같은 세상이 아닌 인의와 자비가 있고 의리가 있는 세상 즉, 협의 세상은 지나(支那)가 아닌 동이의 세계이다. 지나의 언제 어디에 협이 있었는가?
구파일방의 구파는 무엇을 본따 만들어진 것인가?
무협에서 구파는 불교 계통의 소림사, 도교 계통의 무당파, 화산파, 곤륜파, 청성파, 공동파, 종남파 등과 더불어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계통의 아미파와 점창파 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무협의 주인공인 구파의 무림인들이 단순한 무술인들이거나 폭력배들이 아니라 종교단체(종교집단)에 속한 종교인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구파의 구(九, 9)는 어떤 수일까? 단순히 '많다'는 뜻일까? 동양철학이나 동양史에서 九라는 숫자가 최대치를 의미하거나 많다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수(正數)로서의 특정한 숫자인 9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즉, 구파일방의 구는 특정한 9를 의미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특정한 9로 묘사하고 있다. 왜 구파일까? 왜 9라는 숫자로 한정하고 문파들을 9개로 설정한 것일까?
그 이유는 구파가 구이(九夷, 九桓)를 본따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멸망과 함께 거의 그 모습을 감춘 동이, 즉 구이의 모습을 모방하여 구파를 탄생시킨 것이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구이를 구족(九族)이라 하여 '동이라 불린 종족(민족)의 9개 부족(지파)'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구이가 9개 부족을 가리킨다는 근거는 없다. 앞글들에서 동이가 태양신을 숭배한 특수 종교집단이라 말해 왔었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구이도 특수 종교집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구이는 동이의 9개 파벌(문파, 세력)인 것이다.
또, 구파와 더불어 무협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오대세가는 무엇일까? 무협에서는 남궁세가, 제갈세가, 하북팽가, 사천당문, 황보세가, 모용세가, 하후세가 등으로 설정 묘사하고 있다. 이것 역시, 구파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5라는 숫자로 한정하여 세가를 정하고 있다. 작가에 따라, 그 구성 세가가 바뀌기도 하지만 5개로 한정되는 것은 구파와 마찬가지이다.
오대세가가 구파와 다른 것은 씨족(家門, 혈연관계)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구파가 종교단체들이라는 것과는 다르게 오대세가가 씨족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오대세가는 종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인가? 혹자는, 구파와 오대세가로 나뉜 것이 종교적인 문파와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분명, 구파와 오대세가로 구분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현대에는 가문이 단순히 혈연관계만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에는 가(家)와 문(門)이 혈연관계 외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제자백가(諸子百家), 국가(國家), 유가(儒家), 불가(佛家), 도가(道家) 등의 용례(用例)처럼 家는 같은 사상(思想, 철학, 종교)이나 이념으로 뭉친 집단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또, 門도 혈연관계 외의 사상적으로 일치하는 무리들이 모인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가문, 즉 오대세가는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종교적 집단'을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대세가를 혈연적이며 종교적인 집단으로 본다면 그들은, 환국 때부터 있었던 오가(五加 => 馬加, 牛加, 羊加, 狗加, 猪加)를 모방한 것이다. 구파는 특정한 한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고루 능통한 모습을 보이는데 비하여, 오대세가는 특정한 한 분야의 전문가(專門家)로 그려져 있는데, 이 또한 오가와 같은 모습이다.
그럼, 오가는 무엇인가? 오가가 단순히 오가(五家)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오방위를 가리키며 모든 백성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주장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고 단지 추측을 해 볼 뿐이다. 그런데, 본인이 추측하기로 五加는 '오방위의 사람들(백성)'이면서 동시에 五家로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왜냐하면, 각 가(加, 部)가 따로이 맡은 분야가 있었기도 하였고 많은 곳에서 家의 특성을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가의 우두머리가 단군이라 하였으며 조선 말기에 오가가 함께 다스리기도 하였고 특정 加에서 단군이 추대되기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오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家(部族)와 方位(모든 백성)의 개념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오가를 모방한 오대세가가 등장하는 무협에서도 그러한 家의 혈연적이고 전문가적인 특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五加와 九夷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현재의 지식으로서는 정말로 어려운 문제이다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오가와 구이가 따로이 존재하는 형태였는지 아니면 오가이면서 동시에 구이였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 둘의 관계를 알아보겠다. 무협에서 해답을 찾는다면, 오가는 혈연적인 의미가 강하고 구이는 종교적(사상적, 이념적)인 의미가 강한 집단으로서 서로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성질에서는 같은 동이이다. 이를 조선에 적용하면, 조선은 오가의 부족으로 이루어지고 구이의 단체로 나뉘어진 교황국(敎皇國)이 된다. 사제계급인 오가의 사람들이 조선을 구성하고 조선을 통치하면서 구이에 나뉘어 몸담아 수련을 하며 세상의 난을 평정하였다는 말이다.
무협에서는 무림맹이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무림맹주도 허수아비로 그려진 경우가 상당히 많다. 작가에 따라, 무림맹이 임시로 만들어지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오대세가가 구파에 비해 힘을 쓰지 못하고 무림맹에서도 그 지위가 약하며 또, 무림맹이나 무림맹주가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수시로 결성되고 추대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무림맹을 구성하는 문파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라는 것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의 삼한관경본기에는 후대에 막조선과 번조선으로 불리는 마한세가와 번한세가가 등장한다. 만약, 해방 이후에 환단고기를 위작하였다면 마한, 마한국, 막조선 등의 다른 용어를 다 놔두고 왜 세가라는 표현을 썼을까? 이는, 환단고기가 위작이 아니라 기존의 사서를 필사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며 더불어, 세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서로 대등한 관계에 놓인 세 개의 국가라는 개념으로서, 삼한이 이미 알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20c의 사람이라면 國이나 諸侯 등의 용어를 썼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세가라는 표현을 쓴 것은 위작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무협지에는 몇 가지 잘못된 설정들이 있는데 그 중에 두 가지는 이것이다. 무림맹이 상설기구가 아닌 것과 오대세가의 지위나 권위가 구파에 비해 낮은 것이다. 세가는 사전적으로 '대대로 나라의 중요한 자리에 있거나 특권을 누리는 집안'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권력이 세가의 위에 위치해 있다는 말이며 세가는 그 권력을 보필하는 귀족세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세가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이미 그 세가들은 어떤 권력의 신하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협에서는 세가가 어떤 권력을 보필하는 신하가 아니라, 구파나 다른 군소문파와 병렬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문파로서 그들의 위에 특별한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된다. 오대세가가 황제(국가권력)의 신하는 분명히 아니고 또, 앞에서 얘기했듯이 무림은 관의 상위에 위치해 있다. 그러면, 세가가 보필하는 권력은 무엇인가? 구파나 오대세가의 상위인 무림맹주가 그것이다. 세가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대세가는 무림맹주를 보필하는 무림맹의 실질적인 세력으로서 구파의 상위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무림맹은 임시기구나 이름뿐인 조직이 아니며 상설기구이자 세가의 보필을 받는 강력한 권력이라는 것이다.
다시, 이것을 마한세가와 번한세가에 대입하면 어떤 얘기가 되는가? 세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거대한 세력이며 국가(國家)에 버금가거나 뛰어 넘는 가문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또, 세가의 원조가 마한, 번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무협에는 삼한에 비견되는 설정이 없다. 이는 오가와 두 세가를 합하여 무협의 오대세가로 탈바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칠대세가(七大世家)라 한다.
무협과 조선을 비교하면 구파는 구이이며 오대세가는 오가이며 무림맹은 조선이며 무림맹주는 단군왕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무림맹과 무림맹주는 항상 존재하였으며 무림맹주의 지위나 권한이 상상외로 컷으며 오대세가의 규모도 매우 컷다는 것이다. 또, 오대세가와 구파는 병렬의 관계가 아니라 종속의 관계라는 말이다. 오대세가가 구파의 상위에 위치한다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오가의 사람들이 구이에 몸담기 때문이다.
억지가 될 수 있지만 현대의 지방자치제와 비교하여 설명해 보자! 혈연적(부족, 종족)인 특성을 보이는 5개의 지방자치단체가 결합하여 하나의 국가를 만들고 대통령을 선출하며 9개의 군대(육, 해, 공, 해병 등)를 보유한 것이 무협이자 조선이라는 말이다.
구파와 오대세가가 동이의 구이와 오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면, 일방인 개방은 무엇이란 말인가?
무협에서는 개방을 거지들로 이루어진 문파로 설정하고 있다. 구파와 오대세가에 비해, 거지들로 이루어진 개방은 종교적이지도 않고 사회적 공익이나 개인적인 윤리에 크게 구애받지 않아도 되는 문파라 할 수 있다. 또, 실제의 거지들도 협과는 거리가 먼 언행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협에서는 개방을 구파와 묶어 구파일방이라 호칭하여 정파무림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협을 숭상하는 이들로 그리고 있다. 또, 개방에 들어갈 때에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야 된다고 한다. 즉, 무협의 개방은 실제의 거지와는 전혀 다른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개방의 거지는 거지가 아니라 탁발승이다. 탁발승과 거지를 한 자리에 세워두고 겉모습으로 그들을 구분해보면,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겉모습으로만 탁발승과 거지를 구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고, 그 언행을 접해야만 비로소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불교, 이슬람, 힌두교 등의 종교에서는 탁발수행이 중요한 수행방법으로서 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런데, 무협과 실제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무협에서는 개방을 조직으로 그리고 있으며 우두머리나 체계가 갖춰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의 탁발승들은 탈속(出家)한 이들로서 조직이나 체계를 이룰 수 없다. 그들이 완전한 탈속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속세에 관여하고 관심을 두기도 하였을 수 있으나 무협에서처럼 그렇게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관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개방은 그렇게 많은 숫자의 거지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실제 거지와 탁발승을 구별하지 못한 이야기꾼들이 실제 거지를 개방에 넣어버림으로서 그 수를 그렇게 많다고 설정한 것이다.
종교인들의 세계는 탈속이라 할 수 있는데, 보통 세상을 속세와 탈속으로 나누지만 탈속은 다시 네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는 싯달타나 예수와 같이 완전한 자유의 경지를 이룬 탈속이 있겠고 그러한 목표를 위해 수행하는 탁발승의 모습이 더 있다. 또, 구이처럼 속세에서 출가한 모습이지만 나름대로의 제도(制度)적인 모습을 띠는 것과 구이에서 출세(出世)하여 속세의 임금이 되어 재세이화 홍익인간하는 이들이 그 네 번째 탈속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개방은 제도권의 구이에서 벗어나 비제도권으로 탁발수행의 길을 떠난 동이를 가리킨다 할 것이다. 즉, 구파와 개방은 같은 동이로서 그 근본이나 종교적 노선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파와 일방으로 나누어 구분하기도 하고 구파일방이라는 한 묶음으로 일컫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선(仙)과 속(俗)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지금까지 우리는, 속(俗)은 선(仙)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단순히, 일반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선(人+山=仙)과 속(人+谷=俗)의 人이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따라 속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미 알려져 있듯이, 고대의 인(人)은 일반적인 속세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제계급, 귀족 등의 고귀한(?) 신분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결국, 선은 신전이나 사원에서 생활하는 사제들을 가리키는 용어이고 속은 일반인의 세상을 다스리던 사제들을 말하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요즘의 카톨릭에 비교하면, 수도회의 수사들은 仙이며 교회의 신부들은 俗이 되는 것이다. 또, 出家의 의미도 속세의 가정(家庭)에서 종교단체(불교)에 입문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종교단체(佛家)에서 속세로 나가는 것 즉, 중생(衆生=속세인)을 제도(濟度)하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출가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단어인 出世도 종교단체(世家)에서 속세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에는 사회적인 성공을 의미하는 단어인 출세가 고대에는 중생제도를 의미한 말로서, 수사가 교회의 신부가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출세와 출가는 불교에서 같은 의미의 용어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요즘의 일반적인 의미로는 출가는 '집을 나가다'로 출세는 '세상으로 나가다'로 해석하여 둘의 해석이 정반대로 되어 있다. 그러나, 두 단어는 같은 의미, 같은 형태의 단어이므로 같은 식으로 해석하여 '집을 나가다, 세를 나가다'나 '집으로 나가다, 세로 나가다'로 해석해야 한다. 즉, '집을 나가다, 세를 나가다'는 중생제도를 의미하며 '집으로 나가다. 세로 나가다'는 '불가에 입문하다. 세가에 입문하다.'를 의미한다는 말이다. 결국, 家와 世는 일반적인 의미의 집과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家門과 世家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일반적인 의미의 집과 세상을 의미한다라고 해석하면 '집을 나가다, 세를 나가다'는 '불가에 입문하다, 죽다死'로 '집으로 나가다, 세로 나가다'는 '집으로 들어오다, 성공하다'로 해석되어 두 단어는 같은 의미의 용어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원래, 출세는 세가를 나가 중생을 제도할 정도의 깨달음을 얻는 것 또는 그 깨달음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말한다.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은 成功을 의미하며 그것이 후대에 사회적인 성공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출가와 출세는 '~을 나가다'로 해석해야 되며 그 뜻은 중생제도 즉, 재세이화 홍익인간이다.}
그럼, 이번에는 무협에서 흔히 등장하는 단어인 '강호, 무림, 중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무협을 창작하고 그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무협을 즐기고 있지만, 정작 그 무협에 등장하는 용어의 의미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해석이나 추측들이 난무하지만 정작 그 올바른 의미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 용어들 중에 '강호, 무림, 중원'이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강호, 무림, 중원의 뜻을 정리하면 이렇다.
*강호(江湖 - 무협) : 무인(武人, 武士)들이 사는 세상.{물리적 공간의 의미가 강함.}
*무림(武林) : 무인들의 세계.{강호에 비해 물리적 공간의 의미가 약함.}
*중원(中原) : 한족(漢族)의 중심 되는 생활영역.
*강호(江湖 - 강호사시가, 무협外) : 은자(隱者)나 시인(詩人), 묵객(墨客) 등이 현실을 도피하여 생활하던 시골이나 자연, 은서지(隱棲地).
이와 같이, 무협계에서는 강호와 무림이 같은 뜻을 가진 단어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도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부의 사람은 강호의 뜻이 일반적인 속세(무인과 일반인 모두가 사는 곳)를 의미한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무인이 종교인이므로 그들이 사는 세계도 역시 종교적 세계를 가리키고, 그 종교적 세계는 속세가 아닌 출가의 세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무협의 강호와 강호사시가의 강호는 같은 뜻을 가진 같은 단어로서, 무협의 강호는 속세가 아닌 출가의 세계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江과 湖水를 가리키는 강호가 왜 무인들의 세계를 의미하는가? (武)林이 왜 무인들의 세계를 의미하는가? 나무로 이루어진 숲과 물로 이루어진 강호, 그 둘은 서로 이질적인 물리적 특성을 가졌다 할 수 있는데 왜 같은 의미로 쓰이는가? 그런데, 이러한 의문들은 의외로 너무나 쉽게 풀린다. '가람'을 백과, 국어사전 등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가람(伽藍) : 승려들이 사는 사찰 등의 건축물 => 인도에서는 수행하는 승려가 모여 수행(修行) ·숙박하는 원림(園林)을 말하였는데, 나중에는 가람에 7가지 건축물을 갖추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것을 칠당가람(七堂伽藍)이라고 한다. 7당이란, 중국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금당(金堂)·강당·탑·식당·종루(鐘樓)·경장(經藏)·승방(僧房)을 다 갖춘 형식을 말한다. 그런데 이 칠당의 명칭과 배치는 시대와 종파에 따라 다른데 보통 남향(南向)으로 세웠다.
*원림(園林) : 집터에 딸린 숲. 공원의 숲.
*가람(伽藍)의 기원 : 가람의 뜻을 사전적으로 해석하면 '승가람마(僧伽籃摩)의 줄임말로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집, 곧 절의 건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가람(ㅏ는 아래아): 중세국어에서 강(江), 호수(湖水)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위에 인용한 글들에서 이미 무림과 강호의 뜻이 밝혀졌고 왜 그 둘이 서로 같은 의미를 지니는지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무림은 원림을 말한다. 원림의 원래 뜻은 '집터에 딸린 숲'으로서 현대의 일반적인 집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가문 즉, 홍살문과 같은 모양의 문을 통과하여 하나의 작은 도시나 궁궐과 같은 수많은 건물들에 딸린 숲을 의미한다. 원림의 기원이 알려진 바와 같이 인도에서 불교가 발생한 후에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그 이전의 前불교(동이종교)에서부터 있었는지는 밝혀내기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서 확실한 것은, 무림인이 종교인이며 원림을 무협식으로 바꿔서 무림이라 칭했다는 것이다. 각 사원들의 원림에서 종교인(사제계급, 승려)들이 수행을 쌓으며 서로 간에 협력을 하거나 갈등을 빚는 모습이 바로 무림에서의 무림인들의 생활인 것이다.
강호는 알려진 의미에서와 같이 '출가의 세계(제도적 탈속)'를 말하지만, 현실을 도피하여 숨어사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속세의 사람들이 출가의 세계를 그렇게 오해한 것뿐이다. 정치에서 물러나 강호에 드는 것을 '은서지'라 하는데 이는 오해로서, 제정일치 사회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해 그러한 것이다. 즉, 강호사시가는 정치에서 물러나 현실을 도피하여 숨어사는 사람이 지은 시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씨조선은 유교의 제정일치사회라 할 수 있는데 그 당시의 강호와 조정(왕)은 조선의 구이와 단군의 관계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호와 조정은 서로 상반되는 세계가 아니라 순환하는 하나의 체계였는데 이러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현실을 도피하여 숨어사는 사람이 임금을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는 모순(矛盾)을 보게 되는 것이다. 강호사시가와 같은 시는 임금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당연히 찬양해야 하는 것이다. 강호는 조정에 나아갈 선비를 길러 내거나 은인자중 하는 곳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강호는 원림과 같은 의미인 '수행처(修行處)'라는 뜻으로서 '원림=무림'이고 '원림=강호'로서 '무림=강호'이다. 따라서,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알려진 두 단어인 불교의 가람과 우리말 가람은 같은 뜻, 같은 발음을 하는 같은 단어가 되게 되는 것이다. 정말로, 두 단어가 같은 단어일까?
伽籃은 범어인 'Sangarama, Sangharama'를 한자로 음역한 승가람마(僧伽籃摩)의 줄인 말이며 승가(僧伽)가 중(衆), 람마(籃摩)가 동산(園)의 뜻으로 중원(衆園), 승원(僧園), 승원(僧院)을 의미하여 승려들이 모여 수행하는 곳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런데, 본인은 이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혹여, san(g)-이 접두어이고 garam이 동산(?衆園)을 뜻하며 -a는 접미사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산티(santi-영혼의 기쁜 평안), 산스크리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san-은 종교적인 어떤 의미를 가진 접두어일 수 있고 -a는 인디아(Hindu+a=India), 코리아(Kori+a=Korea), 몽고리아(Mongoli+a=Mongolia) 등에서 보이는 것 처럼 명사형접미사(?)일 가능성이 높다. 또, 승가람마의 줄임말이 가람이라는 것도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4자 단어의 줄임말을 만들 경우 첫째와 셋째 글자를 따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것이 아니라도, 둘째와 넷째 글자를 조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운데 글자인 둘째와 셋째 글자로서 줄임말을 만드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즉, 이것은 가람이 원래의 기본단어라는 것을 말하며 가람이 상가람마의 줄임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가람에 종교적인 의미의 산을 접두어로 붙이고 이에 명사형접미사를 붙여 만든 확장형(?) 단어가 상가람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범어 즉, 산스크리트(原語:상스크리타)는 문장어(文章語)로서 한국어의 한자어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그 산스크리트를 쓰는 이들에게는 따로 생활어가 존재했을 것인데 그 언어는 인도어(?힌디어)라 알려져 있다. 그 힌디어와 드라비다어(?타밀어)는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 둘은 그 기원이나 계통은 다를지 몰라도 종교적인 주요단어에 있어서는 서로 공유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즉, 범어의 garamr과 같은 단어가 드라비다어에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말이다.
가라(Kara)는 드라비다어로 나라(國) 또는 물, 물고기를 뜻한다고 한다. 그리고, 가락(Karak)은 구(舊)드라비다어로 물고기, 가야(Kaya)는 신(新)드라비다어로 물고기라는 뜻이라 한다. 정리하면 가라, 가락, 가야 등은 물과 관련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드라비다어의 가라와 범어의 가람이 같은 어원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현 한국어와 드라비다어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결론지어 진 것은 없다. 그러나, 같은 단어로 보이는 상당수의 단어들로 보아 정황상, 드라비다어와 한국어는 어떤 관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범어의 가람과 드라비다어의 가라 그리고, 한국어의 가람은 같은 어원을 가진 같은 의미의 단어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어 즉, 한국어의 모어인 동이어가 한국어, 범어, 드라비다어 등에 영향을 끼쳤고 그 흔적 중의 하나가 가람으로서 범어의 가람과 한국어의 가람은 동일단어라는 것이다.
가람은 東夷語로서 '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물은 海의 쓰임에서와 같이 단순히 물질(H2O)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人, 龍)이 모인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사람이 모인 것 즉, 무리(衆)는 물과 그 어원을 같이 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 그 사람들이 都市를 만들면 그것이 바로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라 등의 단어가 나라와 물, 물고기(人, 龍)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동이어 가람은 사람이 모인 곳을 의미하며 사람이 모인 곳은 바로, 수행처(神殿, 寺院, 龍宮)를 의미한다. 그리고, 명산대천을 순례하던 동이가 숲과 물에서 수행하였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 풍습이 후대에 이어져 불교에서도 원림을 수행처로 삼았고 수행처를 의미하는 가람을, 원림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하였고 나중에는 절(寺)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또, 숲과 함께 주요한 수행처인 물(?물가, 폭포)을 의미하는 가람이, 후대에 물이 모인 곳을 가리키는 江湖를 의미하게 되고 탈속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따라서, 범어의 가람과 중세국어의 가람은 같은 뜻과 같은 발음을 가진 같은 단어인 것이다. 후대에, 원림과 강호의 뜻을 모두 가지고 있는 단어인 가람이라는 동이어는 잊혀지고 한자어인 원림과 강호만이 무협에 남게 된 것이 무림=강호가 된 사연이다.
{혹자는, 지나인은 용을 숭배하고 우리 동이족은 삼족오를 숭배하는데 삼족오(금시조)가 용을 잡아먹고 살므로 이는 동이족이 지배자요 지나인은 피지배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기도 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우스개 소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동이가 바로 용이며 삼족오는 용과 관련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한자어인 삼족오가 우리말로는 아리새라는 것을 밝혔는데 그 삼족오의 정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글의 전개상 부득이 다룰 수 없었기 때문인데 나중에 삼족오의 정체와 용족과의 관계에 대해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中原은 '들판의 중앙 또는 중심 되는 (지역의) 들판'을 의미하는데 실질적인 의미는 '정권을 다투는, 경쟁하는 무대'를 의미한다. 즉, 중원은 나라의 중심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首都 또는 朝庭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현재는, 처음에 황하 중하류 유역을 가리켰으나 지나인의 영역이 넓어짐으로 인해 화북평원(華北平原)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원의 原은 '민엄호밑(굴바위, 언덕)部 + 泉(물의 근원)'으로서 계곡의 맑은 물이 흘러나오는 水原의 뜻인데, 나중에 들판의 뜻으로 쓰이게 됨으로서 수원을 뜻하는 源(원)이란 글자가 따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결국, 중원의 原은 언덕 또는 들판을 가리키면서 평범한 언덕과 들판이 아닌 권력의 근원이 있는 곳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중원은 현재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넓은 평야의 중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天下)의 가운데에 있는 언덕, 중심이 되는 언덕, 특정 권력이 있는 곳, 특정 권력자가 있는 곳'을 말한다. 즉, 왕이 있는 궁궐의 마당(들판) 내지는 뜰(언덕)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原이 의미하는 언덕 또는 들판을 가리키는 우리말을 한번 찾아볼 필요가 있다. 原에 가장 알맞은 우리말은 '뜰'이다. 뜰은 '집(건물)의 앞뒤나 좌우로 가까이 딸려 있는 빈터'를 가리키는데 뜰방이나 토방(土房), 흙마루로도 불린다. 정확히, 뜰은 마루와 마당사이의 공간으로서 마루보다는 낮고 마당보다는 높지만 그 폭은 비교적 좁은 곳으로서 댓돌이 있기도 하며 신발을 벗어 놓는 곳이다. 현재는 마당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하지만 뜰은 마당 보다 높은 언덕으로서 마당과는 별개의 공간이다. 뜰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 가정집이 아닌 궁궐과 같은 커다란 건물에 딸린 뜰을 보면 좋을 것이다. 뜰을 한자로 쓰면 庭이다.
*정(庭) : 뜻을 나타내는 엄호밑部와 음을 나타내는 정(廷)이 합하여 이루어진 글자이다. 廷(조정에서 신하들이 임금의 말을 듣던 곳)과 지붕이 있는 마당(엄호밑)이라는 뜻을 합하여 '뜰'을 뜻한다. 옛날엔 지붕이 없는 안뜰에서 의식(儀式)이 거행되었다. 庭은 대궐 안의 안뜰이며 원래는 廷과 같은 글자였으며 나중에 庭(정)은 건물(建物)을 가리켰으나, 더 후에 건물(建物)을 聽(청), 대궐 안을 廷(정), 여염집의 뜰을 庭(정)이라 하였다.
廷 또는 庭은 글자 자체의 의미가 이미 '왕이 있는 곳의 뜰'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庭이 쓰이는 곳은 단 한군데인데 바로 朝庭이다. 동북아시아, 한자권의 모든 국가들은 왕이 있는 곳을 조정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 조정(朝庭)은 '조선의 뜰'이라는 의미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고대 아시아가 조선이라는 것을 뜻한다.
방과 뜰 사이의 마루는 마루(꼭대기, 첫째, 근본, 기준)와 다른 단어로 인식되고 있지만 조정이라는 단어에서 그 둘이 같은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임금이 앉아 있는 곳은 마루이고 그 아래 뜰에 신하가 부복(俯伏)하는 것이므로 임금이 앉아 있는 마루는 첫째이며 꼭대기이며 기준이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정이 있는 곳을 중원이라 하며 중원은 조정 그 자체를 의미한다 할 수 있다.
명치 이후에 생겨난 단어로 알려진 정원(庭園)은 집 안의 뜰이나 꽃밭을 의미하는데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원림과 같은 단어라 할 수 있다. 정원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만들어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조정을 의미하는 庭과 원림을 의미하는 園을 합하여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결국, 정원도 왕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는 것이다.
원림은 마당(들판) 또는 뜰(언덕)에 있는 숲을 가리키는데 그 마당(뜰)이나 원림은 평범한 여염집의 것이 아닌 동이의 마당과 원림을 뜻한다. 원림은 무림으로서 동이의 수행처이자 활동지며 조선의 실질적인 힘이 되는 곳이다. 그러한 원림들 중에 중심이 되는 원림, 조선의 단군이 있는 곳의 원림이 바로 조정이며 중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왕이 있는 곳의 원림(中園)이 中原이 되는 것이다.
<성탕이 걸왕을 치려하자 이윤이 가로되, "청컨대 걸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막고 그의 행동을 살피십시오." 그러자 걸왕이 진노하여 구이의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이윤이 말하기를,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아직도 능히 구이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잘못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이에 성탕은 사죄하고 다시 공물을 바쳤다.
위 설원(說苑)의 기사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이(조선)가 다른 나라의 선악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국가라 해석한다. 요즘의 미국처럼 경찰국가를 자처하면서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조선이 강력한 국가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른 사서들과 단군세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갑오 16년...이해 겨울에 은나라 사람들이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의 걸왕이 구원을 요청하였다. 단제(13대 단군 흘달屹達)께서는 읍차 말량으로 하여금 구환의 무리를 이끌고 가서 하나라를 돕게 하니 은나라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명하여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걸왕이 약속을 어기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조약까지 깨트리려 하였다. 그러자 (단제는) 은나라와 함께 걸왕을 치기로 하고 은밀히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군을 거느리고 낙랑과 합쳐 진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관중의 빈, 기 땅에 웅거하며 그곳에 관제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하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와 도와줄 것을 요청하자 이에 말량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 구해 주도록 하였다. 그 후 하나라 왕이 또다시 군사를 보내 달라고 하니 그의 무도함을 꾸짖고 허락하지 않았다.>
<걸왕이 포악을 일삼자 여러 동이들이 쳐들어왔다.>
<걸왕이 어지럽자 견이가 '빈'과 '기' 사이에 들어와 점거하였다.>
이것을 무협식(武俠式)으로 해석해 보자! 그러면, 고대 아시아의 세계를 알 수 있게 된다. 하와 은이라는 두 군소문파(群小門派)가 서로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다툼을 벌이고 무림맹이 무림맹주의 명으로 구파를 보낸 것이 저 사건의 전말이다. 무림맹이 강력하기 때문에 두 문파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무림세계의 질서를 지킬 의무가 있기 때문에 무림맹으로서는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다. 하와 은의 다툼은 남의 일이 아니라 무림맹 자신의 일인 것이다. 하은주를 비롯하여 삼한의 72국 등은 모두 군소문파이다. 그 군소문파를 계몽하고 다스리는 것이 바로 무림맹인 조선이다.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는데 혹자가 누추한 곳이 아닙니까? 라고 묻자 군자가 그 곳에 있는데 어찌 누추하리요.>
사람들이 이것을 해석하기를, 우리는 동이족이라 불린 선진문화를 가진 민족으로서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릴 정도로 예절이 바른 군자들이 사는 나라였기에 공자가 우리나라(구이)에서 살고 싶다라고 말했다 한다. 다시 거듭 분명히 말하지만, 九夷는 九夷族이 아니라 九派이다. 구이는 소림이나 무당처럼 특정한 지역이나 사원(寺院) 또는 사상이나 이념에 기반을 둔 승려들의 집단 즉, 수행자들의 집단을 말하는데 그 유파가 아홉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위 기사는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속세의 문란함에 실망한 공자가 구이의 사원에 머무르기를 원했다는 것으로 풀이해야 옳다. 그래서, 혹자가 누추하지 않느냐고 물어본 것이며 공자는 군자가 있어서 누추하지 않다라고 말한 것이다. 사원은 수행자들이 기거하는 곳으로서 절제되고 검소한 곳이므로 속세의 화려함이나 편리함에 비해 누추한 곳이지만, 군자(수행자)가 거하는 곳으로서 도덕이 있으므로 도덕을 추구하는 공자와 같은 사람에게는 누추함을 느낄 틈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지나의 누가 동이족에서 태어났다 라고 말하는데 이는 단순히 지나의 누가 동이족의 혈통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사서들에서, 누가 용과 교미하여 알을 낳았는데 그 알에서 나온 누가 어떤 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라는 얘기가 많은데 그것은 동이의 王者 만들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동이의 누가 속세의 누구와 연을 맺어 낳은 아이는 바로 용의 자식이며 왕족인 것이다. 동이의 누가 속세로 돌아가 왕이 되거나 귀족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와 같은 예가 공자의 조상이다. 그러나, 공자의 조상이 동이라고 해서 공자가 동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은의 시조가 동이이고 그 백성의 상당수가 동이 출신이라 해서 은나라가 동이족의 국가가 될 수는 없다.
'(주나라)성왕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이 와서 축하했다'는 상서주소의 기록과 이에 대한 전(傳)의 '해동의 제이(諸夷)인 구려(駒麗), 부여 , 한, 맥 등의 무리가 무왕이 상나라를 이기자 다 길을 통하였는데 성왕이 즉위하자 배반하였으므로 성왕이 이들을 정벌하여 복종시킨 것이다.'라고 한 것 역시 무협식으로 이해하면 된다.
한 지역의 패권을 차지한다는 것은 그 지역의 속세에 대한 지배권을 갖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무림의 패권을 차지한다는 것은 천하(세상)의 지배권을 갖는 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주나라가 은나라를 물리치고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였는데 정도무림은 힘에 눌려 주나라를 무림의 패자로 인정하였으나 주나라의 왕이 바뀌자 복수(?무림질서회복)를 감행하였고 이 역시 다시 힘에 눌린 것이다. 물론, 주나라와 은나라가 다투는 과정에서도 구파를 비롯한 정도무림이 관여하였을 것은 당연지사이다. 무협에 흔히 등장하는 혈겁(血怯)은 바로 이 사건이 기억으로 남은 것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의 천하가 현 지나대륙 전체를 의미하는지 일부를 의미하는지는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주나라가 망할 때까지 조선은 건재했고 나름대로 속세를 지배하는 것으로 보이며 조선 내에 많은 소국(小國)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나대륙 전체이든 일부이든 주나라가 조선의 하국(下國)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조의선인이나 화랑도를 무술수련단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들은 결코 무술수련단체가 아니었다. 무술은 여러 공부 과목 중에 한 과목을 차지할 뿐이며 그들은 어디까지나 종교집단이다.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난을 제압하기 위해 무술을 배우고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임진왜란의 승병은 단순히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난 의병(義兵)이 아니다. 승병은 항마군(降魔軍)으로서 여러 무협지에 등장했을 법한 이름인 항마군(降魔軍)과 같은 성격으로서 무림의 평화를 지키려 한 것이다. 무술을 익히는 곳을 가리켜 도장(道場)이라 한 것이 괜한 것이 아니다. 수행자들이 무림(武林, 園林)인 도량(道場)에서 득도를 목표로 수행하면서 구파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무술도 익히기 때문이다. 몇몇 절에서 무술을 가르치고 익히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수 천년의 습속인 것이다.
강단학계는 조선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고, 이제는 무협까지 우리 것이라 주장한다 라며 비웃을 것이다. 또, 민족주의자들은 구이족을 구파라 주장하는 황당하고도 매국노적인 글이라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史實은 事實이다. 환단고기류는 정사(正史)이고 무협은 야사(野史)이며 삼국사기류는 제3자가 기록한 외국사(外國史)이다. 무협은 조선의 모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바로 그 모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