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드적 관점으로 데미지를 본 것은 아니지만 혹 진진님에게 도움이 될까싶어 오래전 글을 올려봅니다. 후배가 교양물 리포터로 제출했는데 F를 받았습니다. 아마 명백히 다른 문체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
통속이 세습된 세계에 던지는 ‘루이 말’의 도발
데미지 - 관계의 개별성을 추구하다 맞은 비극성.
7월, 후덥지근한 날이 계속되고 있다. 만져지는 것 모두가 끈적인다. 공기는 몹시 무겁게 느껴지고, 나는 고정된 채 열리지 않는 유리창을 통해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남자를 관찰하고 있다. 남자는 햇빛이 귀찮다는 표정을 하고 터벅터벅 걸어가 갯벌의 답싸리 밭으로 들어선다.
답싸리 밭은 도시의 사람들에게 잊혀진, 흔적으로만 남아있는 바다다. 그곳이 바다였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남자는 버려진 배들과 갈라지고 먼지가 풀썩이는 갯벌, 둔덕에 세워진 도시에서 수로를 따라 흐르는 까만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남자의 표정은 퍽 담담해 보인다.
그는 깊은 바다였던 자리에 저대로 날아와 밭을 이룬 답싸리 밭에 몸을 눕히고 하늘을 향해 자기 몸을 노출시킨다. 거리낌없이 7월의 태양 아래 자기를 노출시키는 그는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에게 그의 행위는 일견 사물(일상의 욕망)과의 관계를 끊고 지내는 자들의 편안함으로 다가온다. 7월의 햇빛 아래 누워있는 그의 모습은 퍽 한가로워 보여 마치 답싸리 밭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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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말은 자신의 영화 「데미지」에서 창가에 선 스티븐을 자신의 아들과 그 아들에게 괴로움이었던 약혼녀, 그리고 자신이 함께 찍은 사진을 어떤 시각도 배제한 채 마치 그것이 하나의 정물인 것처럼 바라보게 한다.
담담하게 치즈를 썰며 회상에 잠겨있는 그의 모습은 사회적 관계를 알 수 없는 의아한 힘에 의해 잃고 청산한 자의 천천한 걸음으로 골목길을 올라오는 스티븐을 보여주고, 언뜻 언뜻 자기도 모를 열정 때문에 깜빡(?) 세계를 놓아 버린 자의 회한 이후의 '관조'를 보여 주기도 한다. 이때 스티븐의 움직임은 그의 존재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물인 것처럼 그려진다. 스티븐의 회상 또는 추억의 성질은 원한이나 애수적인 감정과 다르고, 그의 회상은 정적이고 고요하다. 늘 먼 하늘을 보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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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안나 바톤(줄리엣 비노쉬)은 퍽 도발적인 눈매와 조금은 냉정함을 가지고 등장한다. 그녀가 처음 화면에 나타나는 특징은 루이 말의 사회적 담론, 계급으로 구성된 사회적 관계의 견고함에 도전하는 자신의 관점이 투영되어 있고, 안나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여자로 드러난다.
그녀는 외출할 때마다 작은 찬바람을 몰고 아열대 지방을 공격하러 나서는 듯한 위태로운 몸짓으로 나서고, 그녀가 관계하는 공간은 거센 바람으로 출렁이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오히려 기쁜 것을 맞이하러 가는 자의 열정으로 나타난다.
인습에 의한 관계를 거부한 채 삶을 개별적인 관계 맺기로만 파악하는 그녀는 아무 원죄 없이 세상에 태어나 세계가 요구하는 질서와 도덕, 가치관을 부정하고 그것의 가치관을 의도적으로 부정한다.
영국 상류사회의 보수성 속에 안나를 정면 배치한 루이 말은 안나를 극단성과 비이성성에 내맡겨 스티븐과 그의 아들을 동시에 관계하게 하고, 스티븐을 광적인 열정의 공간으로 몰아 세우지만 안나형의 사랑이 내뻗은 손은 처음부터 그 대상에게 제대로 가 닿지 않는다. 루이 말이 구상하는 개별적인 자아에 의한 독립적인 관계 맺기는 완전하게 목발을 짚고 나타난다.
『관계』
우호적이지 않은 정적(政敵)들에 둘러 쌓인 스티븐은 일상에서 탈출을 꿈꾼다. 그리고 어느 날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한 때 안나가 날려보낸 유혹을 만나게 된다.
스티븐을 향해 안나가 날려보낸 유혹의 성격은 루이 말이 의도한, 종속적인 관계의 청산과 개별적인 자아에 의한 관계 맺기가 그 중심인 안나 바톤적인 것으로의 성향이다. 그것은 스티븐의 조용하고 냉정한 성격과는 일치하지 않지만 한편으로 스티븐은 망설이지 않고 안나의 유혹에 응한다. 스티븐의 대담성은 '환기'되지 않는 일상에 대한 역겨움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스티븐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관계가 장기적으로 비밀에 쌓여질 것을 가정한 이후의 행복이기보다는 무모한 일탈에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어떤 생기와 파격이었다.
한편으로 스티븐은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지금의 관계를 청산(이혼)하는 다분히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안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그들 관계에서 충분히 감지되는 우울의 느낌을 고스란히 떠 안고 모험의 한가운데서 살아간다.
평화적인, 그러나 스티븐에게도 평화롭게 느껴졌을까 싶은 가정에 불길한 바람을 몰고 오는 말썽꾼(?) 안나는 관계를 가족과 종족으로 이어지는 사회적으로 약속된 보편성을 버리고 인간의 관계를 주체적이고 개별적인 타인과 타인, 너와 나의 관계로 파악한다.
스티븐과 그의 아들을 동시에 관계하는 안나의 행동이 그것을 말해준다.
안나는 사회가 구성한 엄격한 룰과 모럴을 벗어나 자신 안으로는 확신에 찬 발랄함으로 사회적 합의인 가족 관계를 부정한다. 스티븐은 모순적이지만 부성(이 때의 부성은 스티븐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에서 나타난다)애를 지닌 채 안나를 품어내며 때로 자기 중심적인 관계(서로에게 집중하는)만을 요구한다.
-아내를 떠나겠어. 그게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야.
안나는 스티븐이 매달리는 모습을 투정부리는 아이를 달래 듯이 바라본다. 그리고 스티븐을 향해 당신이 원하는 것은 실상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당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라고 말한다.
-못 견디겠어. 스티븐이 소리친다. 그러나 안나는 스티븐이 아침을 함께 먹는 것과 그와 함께 매일 밤을 보내는 것은 단지 그의 이기적인 욕심이고 삶의 질서가 요구하는 그 일련의 코드에 또다시 자기를 끼워 맞추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안나는 스티븐이 주장하는 것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다시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스티븐은 낙심하여 돌아서고 안나는 단선으로 늘어선 일련의 코드를 거절한 채 새로운 관계 맺기를 모색하지만 그녀가 의미를 두고 있는 관계는 인류가 살아있는 동안 다다를 수 없는 명왕성 밖의 얼음 행성 ‘1996 tl 66’을 향해 쏘아 올린 미사일 같다.
안나에게 스티븐은 자기애가 강한, 연애의 상대자가 누구라 할지라도 애정의 관계에 있을 때 상대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사랑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소유되었을 때 그것을 잘도 잊어버리고, 자신의 세력 안에 구축된 평화만을 가지겠다는 철없는 아이로 보인다.
스티븐의 욕망은 루이 말이 의도한 그대로 지상에서 인간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욕망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문제는 그 지배욕의 성취에 의해 발생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안나』
독자들은 누구나 이 영화의 관계 설정에 의아해 한다. 스티븐은 영국다운 질서를 지키는 상류계급의 일원이다. 그를 지원하는 아내와 장인, 주변의 파워는 거세고 이 관계에서 안나의 존재는 매우 왜소해 보인다. 그녀가 스티븐을 정점으로 하는 관계에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자라는 직업을 통해 거의 가치 없이 발표되는 몇 줄의 정치적 발언을 분석해 그들과 사소한 진실게임을 하는 것 뿐이다.
루이 말이 안나와 스티븐의 관계를 마치 성적인 충동에 의한 것인 양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은 그와 안나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지점이 이 외에 다른 것이 없다는 것에 기인한다. 그런데 루이 말은 왜 안나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스쳐가게 한 다음 화약고의 심지 같은 스티븐의 만남을 고집했을까? 영화가 진행 될수록 이 만남은 이해할 수 없는 의도로 비쳐지고 설명하려 해도 난감한 문제로 읽혀진다. 안나가 스티븐에게 부성애적인 사랑을 느낀 것일까? 그러나 안나는 대담하게 마틴의 가족에게 첫인사를 하면서 스티븐에게 다가가 “내가 당신을 만나지 못한다면 왜 마틴과 결혼하겠어요?”라고 반문한다. 스티븐은 단지 안나를 깊이 바라 볼 뿐이다.
안나는 스티븐과의 관계에서 정치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그러한 욕망을 위해 몸 던지기를 시도한 것일까. 그러나 영화가 끝나도록 그녀가 신분 상승을 위해 몸을 던졌다는 흔적은 읽히지 않는다. 영화에서 잘 보이지 않지만 안나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그 직업에 대한 견해를 밝히진 않지만 그 직업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진 않는다.
영화의 어느 곳에서도 안나가 스티븐에게 어떤 목적을 위해 위험한 몸(?)을 날렸다는 흔적은 없다. 그렇기에 어떤 상승을 위한 몸 던짐의 구조는 처음부터 잘못 읽혀진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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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말의 데미지를 이해하기 위해 나에게 두 번째로 읽혀지는 것은 다소 특이한 그의 대화 방법이다. 그의 영화들에 익숙한 독자들은 그가 어떤 문제의 본질을 향해 나가는 데 있어 자신의 작품이 거칠어질 수 있지만 뛰어난 영상 미나 사소하고 진부한 설명들을 생략하고 바로 문제를 향해 직진하는 파격적인 대화 방법을 자주 쓴다는 점이다.
자신의 직관으로 사물을 읽는 것이 자신의 미적인 함정에 빠질 수도 있는 점을 인정하지만 대화 중에 마치 기본 공식에 장난을 거는, 상대의 이야기를 실소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려는 행위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모럴에 대한 사소한 논쟁을 피하면서 인간이 소통해야 할 그 지점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충격을 감수하고 스티븐 안나의 관계를 배치한 것, 그의 방법은 큰 놀라움으로 진부함을 한꺼번에 덮고 바로 사물의 본질과 만나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는 이 세계의 질서가 통속이 세습된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이 우리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가로막는 장애물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방법은 때로 흑백 논리화된 비난을 받지만 복잡한 문제를 한번에 넘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가 의도한 안나 스티븐의 만남은 보수적인 모럴리스트들의 거센 반발의 강도에 의해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스티븐 안나, 절연된 세계』
스티븐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일상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고요하게 침잠된 세계를 담담하게 살아간다. 그야말로 성공된 모든 것에서 손을 놓아버린 스티븐은 그에게 치명적이었을 아들 마틴의 죽음 이후에도 인생을 살아낸다.
밝은 햇빛이 창을 투과하는 작은 룸에서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붙여두고, 시장을 다녀오고 주요 일과를 회상으로 보내며 “우리는 알지 못하는 감정 때문에 사랑에 빠지고 그것의 여운(추억)으로 세상을 살아낸다.”고 말한다. 안나는 이전의 연인에게 돌아가고 스티븐은 어느 날 공항에서 아이를 안고 걸어가는 안나를 발견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이 파탄된 것에 항의하거나 원망 없이 그녀의 삶을 존재하는 그대로 승인하며 떠나 보낸다. 인생의 대부분을 살아낸 그는 열정의 순간에 세상의 관념(인습)에 의해 놓아진 끈을 관조하며 살고 있지만 그 삶의 끈까지 놓지는 않는다.
스티븐은 사회적인 모럴 때문에 자신들의 생을 옥죄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자유로운 자들의 행위를 스캔들화시켜 스스로의 도덕에 우위를 내보이려고 하는 것에도 불평하지 않고 절연된 세계를 안아들인다. 루이 말이 정작 그려 보이고자 했던 것은 골목길을 천천히 걸어 오르는 스티븐의 모습과 삶의 태도, 삶은 영광이나 절망에 의해 유지되지 않고 그 자신의 내면적인 성찰이나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정신의 힘에 의해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 영화의 뒷부분이 이상할 정도로 길었던 것은 이것을 언급하고 싶어했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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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말은 데미지에서 우리가 맺고 있는 사회적인 관계와 모럴을 자아의 개별성과 정면 충돌시키는 것으로 우리의 관계 맺음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놓여져 있는가를 살피는 한편의 수작(?)을 만들었지만 그의 작품이 지나치게 주제 전달에 집착한 나머지 매끄러운 영상을 보여주지 못했고, 주제 전달이 도식적이었다는 점은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미 사후의 세계에 살고 있는 그에게 흠이나 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