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22.주일낮예배 설교
*본문; 롬 7:7~14
*제목; 로마교회에 보낸 사도바울의 편지(13) 율법의 기능
1. 지난 주 이야기, 성령께서 주시는 새 마음
지난 주에는 율법이 ‘나쁜 남편’으로 비유되었습니다. 늘 우리를 정죄하고 비난하고 엄하게 꾸짖는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율법이 처음부터 이렇게 나쁜 남편으로 만들어졌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율법이 나쁜 남편이 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 안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율법)을 지키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이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 것이었는데, 이때부터 우리가 왜 지옥백성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나쁜 남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죄가 율법까지 변질시킨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죄를 멀리합시다. 죄가 우리 안에 자리하면, 하나님의 은혜조차도 힘들고 어려운 것으로 바뀌고 맙니다.
예배드리는 것은 진정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이 인정되고, 더 바른 자녀의 길과 천국의 길을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우리 안에 자리하면 예배드리는 것이 귀찮아집니다. 헌신도 봉사도 충성도 다 자녀에게 주신 특권이요, 이를 통해 더 큰 은혜를 주시려 하는 것인데, 죄가 우리 안에 자리하면 모든 것이 다 고통스러운 것이 됩니다.
당신에게는 신앙의 행위들이 기쁨과 은혜입니까? 아니면 부담과 하기 싫은 것입니까? 진정 고민해야할 부분입니다. 우리 안에 죄가 자리했다는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는 복음 안에 최고의 신랑을 만났습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이한 사람들은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구원과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이런 자들에게 사도요한이 말씀을 통해서 부탁하는 것은 바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성령께서 주시는 새 마음”으로 섬기라고 하십니다.(롬 7:5~6)
성령이 아니면 믿음의 시작도, 믿음을 완성해가는 일도, 그리고 믿음의 결과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성령을 찾는 성령의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2. 율법의 기능
오늘은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알아보는 날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율법은 처음에는 우리에게 구원과 은혜를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이대로 살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선합니다. 이것이 ‘7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롬 7:7)
율법(말씀)은 선합니다. 구원과 은혜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이 율법의 기능마저 망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알게 하는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율법 없이는 죄가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하다가, 율법을 통해서 비로소 죄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두 번째 기능이 되어버렸습니다. ‘죄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밝힌 죄의 가장 근본된 실체 중의 하나는 바로 “탐심”입니다. 즉, 욕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 중에 유일하게 욕심을 가진 피조물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가진 것과 가진 행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없는 것에 사로잡혀 행복하지 못하게 살게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것을 탐하여 각종 범죄(도둑질, 강도, 살인, 전쟁 등)가 일어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버리면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주신 것을 누리며, 주신 것에 감사하면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이 알려준 죄를 빨리 처리하지 못하면, 무감각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죄가 죄된 줄 모르고, 더 나아가서는 죄인 줄 알면서도 편안하게(?) 저지르는 상태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키모인들이 늑대를 사냥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들은 늑대가 좋아하는 고기에 피를 잔뜩 묻혀서 밖에 두면서, 그 안에 칼날을 박아놓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늑대가 와서 피를 핥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사냥꾼이 묻혀놓은 피를 핥습니다. 북극의 추운 날씨에 언 피를 핥다보면 혀가 마비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때 쯤, 사냥꾼이 박아놓은 칼날이 드러나게 되어 늑대의 혀가 베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미 혀가 마비된 늑대는 자신의 피를 핥기 시작하고, 결국 과다출혈로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무감각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율법이 알려준 죄를 돌이키지 아니하면, 죽음의 지경까지 지옥 문까지 금방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폴 워셔 목사님’이 오하이오주에 가서 집회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그의 설교가 마치자 한 초등학생이 벌벌 떨면서 나와서, 자신이 지옥에 갈 것 같아 무섭다고 말을 합니다.
목사님은 그 어린 아이가 어떤 죄로 이토록 무서워하는 지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엄마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생각나서 지옥에 갈 것 같아 무섭다고 말을 합니다.
이 이야기를 옆에서 들은 교인들이 크게 웃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진지한 목소리로 그들을 나무랍니다.
“이 아이에게 성령님이 임하셔서, 이 아이의 죄를 회복시키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웃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말씀 앞에 이런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정말 무서운 것이 죄이기도 하지만, 사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죄에 대한 무감각’입니다. 이를 회개합시다.
3. 율법은 성령님을 통해서 받아야 은혜가 된다.
위대한 신학자였던 어거스틴은 어린 시절 돼지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앞집의 배나무를 발로 차서 떨어지는 배를 돼지에게 가져다주곤 했습니다.
그가 나중에 성령을 만났을 때, 그 사실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돼지를 사랑해서 한 일이지만, 이웃의 배를 훔친 나쁜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는 과정이 나쁘면 결과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을 하나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옥 불에 빠지는 것은 몇 가지 죄를 지으면 됩니까?’
처음 인류를 죄로 몰아넣은 하와는 ‘딱 한 가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 나무 열매’를 먹은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사실로 인해 충분히 지옥갈 수 있음을 깨달았고, 이를 철저히 회개하려 하였습니다.
개신교 신학의 핵심인 ‘이신칭의’를 이야기한 루터 또한 한 가지 죄가 우리 전 생명과 영혼을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죄를 하나 하나 짚어가면서 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속죄는 오직 예수님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고백이 바로 “이신칭의”(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볍게 고백하는 구원교리와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의 길이 되려면, 항상 성령님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율법을 죄가 다 망쳐, 정죄하는 도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무척이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정확하게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근본적인 죄의 출발점은 바로 “욕심”입니다.
그러나 이를 바로 고쳐내지 못하면, 죄에 무감각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그 시작점에서부터 잘라내어야 합니다. 작은 죄 하나로도 우리를 지옥불에 던져 넣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백으로 드리는 “이신칭의”가 진정한 힘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첫댓글 죄가 오게 되면, 율법조차 변질됩니다. 구원과 은혜의 수단에서 정죄의 도구로 바뀌는 것입니다. 죄가 이런 변질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두 번째 기능입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회복을 시키시려고 하실 때에 회복을 하지 못하면, 죄보다 더 무서운 "죄에 대한 무감각"이 오게 됩니다. 이렇게 되지 않도록 늘 깨어 성령님과 동행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