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벌적 등록금제로 대표되는 ''서남표식' 카이스트 개혁이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3개월 동안 3명이 자살을 했다. 사회적 비판이 잇따랐다. 그러나 변화의 움직임은 없었다. 그러다 7일 한 명의 학생이 더 자살한 뒤에야 조금 바꿔보겠다는 입장이다. <프레시안>은 4번째 자살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5일 한국과학기술원(이하 카이스트)에 찾아가 직접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학생들의 의견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미 '경쟁'에 익숙한 몇몇 이들은 "이 정도의 경쟁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비정한 학교 정책에 대한 비판 목소리도 제법 커 보였다. 다만 사회적 논란의 중심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학내 분위기 역시 예상보다 차분해보였다. 다음은 현장에서 들은 목소리들이다.<편집자>
지난 6일 늦은
오후,
대전에 위치한 카이스트 학생식당 앞에는 세 장짜리 대자보가 붙었다. 이 학교 3학년 학생이 '카이스트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우리 4000 학우다'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인 것. 카이스트에서는 지난 석 달간 세 명의 학생이 자살을 해 무한경쟁식
교육 정책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이 학생은 "
학점경쟁에 밀려나면 패배자 소리를 들어야 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서로 고민을 나눌 여유조차 없었다"며 "이 학교에서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또 "학교는 우리를
컨베이어 벨트 위에 줄 세워놓고 네모난 틀에 억지로 몸을 끼워맞추도록 강요한다"며 "결국 우리는 진리를 찾고 듣고 싶은
강의를 선택하기보다는 그저 학점 잘 주는 강의를 찾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어 이 학생은 "숫자 몇 개가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
유일하고 절대적인 잣대가 됐다"며 "진리의 전당은 이제
여기에 없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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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학생들이 올해 들어 4명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학교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학생들이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대자보가 학생식당 앞 게시판에 붙었다. ⓒ연합뉴스 |
외로운 카이스트연일 카이스트가 논란이 되고 있다. 석 달간 세 명의 학생이 자살한 것에 이어 7일 또다른 학생이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을 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이렇다 할 보완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다만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과 보직교수들은 이날 오후 기자회견을 갖고 일정 성적 미만 학생들에 대해 차등 부과해오던 수업료를 8학기 동안은 면제해 줄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8학기 이내에 학부과정을 마치지 못하는
연차 초과자들은 현행대로 한 학기당 150여만 원의 기성회비와 최고 600여만원의 수업료를 내야 한다는 방침은 고수했다
연쇄적으로 자살을 선택하고 있는 카이스트 학생들. 이들을
바라보다 또 다른 학생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아니 카이스트 학생들은 경쟁에 내몰리는 자신들의 상황을 두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난 5일 대전역에서
택시를 타고 도착한 카이스트 정문 주변에는 여느 대학에서 볼 수 있는 유흥가는 보이지 않았다. 허허벌판에 대학 하나만 세워져 있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으나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학생들은 좀처럼 볼수가 없었다.
카이스트 학생들은 시내에도 거의 나가지 않고 학교 내에서만 생활한다고 한다. 학생
전원은
기숙사 생활을 한다. 학생 절반 이상이 1개 이상
동아리에 가입해 있다. 전국 대학에서 이렇게 동아리 가입율이 높은 대학은 찾아보기 힘들다. 갑천을 끼고 들어서 있는 카이스트 캠퍼스가 왠지 고립된 섬처럼 보여지는 이유였다.
"징벌적 등록금이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그건 아니다"언론에서 카이스트 재학생의 연쇄 자살을 두고 연일 '경쟁이 죽음을 불렀다', '징벌적 등록금제가
문제다' 등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정작 캠퍼스 안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조용했다. 캠퍼스 내에는
고인을 추모하는
현수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고인이 어떤 이유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하지만 언론에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갖다 붙여서 기사를 쓰는 듯해요. 여기 카이스트 학생들 중에는 징벌적 등록금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거예요."
카이스트
홍보관 앞에서 만난 김호철(가명·22) 씨는 기자가 예상하고 있던 답과는 다른 답변을 주었다. 김 씨는 "물론 징벌적 등록금제가 고인을 죽음으로 내몬 여러 이유 중 하나일수는 있다"며 "하지만 카이스트 학생들에게 다 적용되는 징벌적 등록금제가 압박으로 다가와 죽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징벌적 등록금제는 카이스트는
2006년 서남표 총장이
취임 다음 해부터 일정 성적 이하의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일부 또는 전액 내도록 하는 차등 등록금제를 일컫는다. 그 이전까지 학생들은 등록금 전액을
국비 장학금으로 면제받았다.
이번 학기에 적용된 등록금 정책을 보면, 학기당
평점(4.3 만점)이 3.0 미만이면 0.01학점당 6만3000원씩 수업료를 내야 한다. 성적이 미달된 첫 학기엔 학생이 내야 하는 수업료의 절반을, 다음 학기에 또 미달하면 4분의 3, 세번 연속 미달 때는 전액을 납부하도록 돼 있다.
김 씨는 "나도 입학하고 난 뒤, 등록금이 성적에 따라 다르게 내야 한다는 사실을 듣고 놀랐다"며 "이로 인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며 "다들 대학에 들어오기 전부터 경쟁으로 인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징벌적 등록금제로 받는 스트레스는 중·고등학교 때 느꼈던 스트레스에 비한다면 '새 발의 피'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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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스트 정문. ⓒ프레시안(허환주) |
"경쟁? 성장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카이스트에 들어가는 건 쉽지 않다. 이 곳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이미 오랜 동안 경쟁을 해 왔다. 그렇다보니 이 곳에서의 경쟁도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학생들도 상당수일 테다.
경영과학부 수업의 일환으로 1주일 동안 10만 원의
자본금으로 수익을 올려야 하는
과제를 받아 캠퍼스 내에서
음료수를 팔고 있던 한 학생은 "외부에서 보면 카이스트라는 학교가 무척이나 경쟁에 내몰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게까지 심각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 중 경쟁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며 "경쟁을 견디지 못한다면 카이스트에 오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18살에 카이스트에 입학했다.
그는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소위 'SKY'(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에서도 경쟁은 치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카이스트에서 과도하게 징벌적 등록금제를 실시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동기부여를 위한 경쟁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십수 년을 경쟁만 하고 살아 온 이들에게 경쟁은 어찌보면 인생에서 필수적인 항목일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현재의 경쟁 방식에 적응하는 건 아니다. '적당히'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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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스트 전경. ⓒ프레시안(허환주) |
일례로 지난 4일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이 학교
홈페이지에 게재한 '친애하는 KAIST
가족 여러분께'라는 글은 "도가 지나쳤다"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높다.
서 총장은 이 글을 통해 "명문 대학 학생들은 남보다 더 잘하기 위해 경쟁을 한다"며 "이런 학생들은
경쟁력 있는 대학에서
공부하기를 원하며,
스스로 이런 대학을 선택한다"고 밝혔다.
서 총장은 "학생들의 죽음은 안타
까운 일"이라면서도 "(
해외) 일류 대학의 경우, 개교 이래 학생들의 자살 사건은 계속 있어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 세상 그 무엇도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며 "노력 없이, 고통 없이 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고 기존 경쟁 체제를
유지할 것임을 시사했다.
한 마디로 현 사회에서 경쟁은 성공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 설사 이로 인해 누군가가 불미스러운 일을 당해도 그건 어쩔수 없는 일로 치부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스스로 선택을 하게끔 내버려두지 않는다"동기부여를 위해 경쟁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공짜는 없다"고 말하는 총장이 황당하다는 게 학생들 반응이다. 학생회관에서 만난 4학년에 재학 중인 박민지(가명·24) 씨는 "아무리 우리가 경쟁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굳이' 글을 통해서 경쟁은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얼굴을 찡그렸다.
박 씨는 "우리가 경쟁에 내몰려 있다고는 하지만
연애도 하고 싶고, 친구들과 어울려 여행도 가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라며 "물론 미래의 꿈을 위해 이런 것들을 잠시 접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박 씨는 "하지만 학교에서는 우리 스스로에게 이런 선택을 하게끔 내버려두지 않는다"며 "높은 재수강비, 징벌적 등록금제 등을 통해 학생들에게 경쟁만을, 공부만을 강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학생들 스스로 공부를 할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할지를 결정하도록 학교에서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다양한 선택에 대해
지원을 해야 하지만 현재의 카이스트는 외통수로만 가고 있다는 것.
이런 생각은 박 씨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학생회관 앞에 세워진 '총장님께 보내는 질문'이라는
게시판에는 전날 총장이 쓴 글에 대한 학생들의 성토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경쟁을 통해 카이스트에 왔지만 경쟁하고자 온 사람은 없습니다''총장님, 전체 메일 문구, 전면 재검토해주세요''꿈을 쫓으려 들어온 사람들도 있지만 꿈을 찾기 위해 들어온 사람도 있다는 걸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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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회관 앞에 설치된 '총장님께 보내는 질문' 게시판. ⓒ프레시안(허환주) |
"학생들, 늘 압박을 받고 있다"이런 반응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최인호 카이스트 부총학생회장은 "학생들은 경쟁위주로 돌아가는 대학에 어쩔수 없이 수긍하면서도 이것이 문제라는 것은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며 "또한 이를 바꿔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
부회장은 "언론에서는 징벌적 등록금만을 언급하고 있지만 카이스트의 문제는 그게 아니라 경쟁을 부추기는 분위기에 있다"며 "학생들은 공부를 함에 있어 늘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최 부회장은 "잘하는 학생에게 격려하는 식이 아니라 못하는 학생에게 벌을 줘서 공부를 하도록 하는
시스템이 현재의 카이스트 시스템"이라며 "그렇다 보니 학생들은 신이 나서 공부를 하기 보다는 이리저리 치여서 공부를 하는 상황이 됐다"고 밝혔다.
최 부회장은 "결국 이로 인해 카이스트 학생사회에는 협력과 협동심 등이 사라지고 있다"며 "여유가 없는 게 아니라 여유가 없는 문화가
지금의 카이스트에는 형성돼 있다"고 설명했다.
학생식당에서 만난 3학년에 재학 중인 박승선(가명·22) 씨는 "남에게 뒤쳐지는 게 싫어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를 했다"며 "카이스트에 들어오고 난 뒤에도 뒤쳐지는 게 싫어 부단히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박 씨는 "그렇다 보니 하루하루 쫓기듯 뭔가 열심히 해야만 될 거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게 사실"이라며 "물론 이런 거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학교생활을 하는 친구들도 상당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 씨는 "걱정이 되는 건, 여기에 들어온 이상, 앞으로도 계속 누군가와 경쟁을 하며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또한 그러한 압박감은 갈수록 커질 거라는 게 두렵다"고 말했다.
최근 카이스트를 떠나 타 대학
대학원에 진학한 한 학생은 "학점으로 줄 세워 등록금 받는 거. 어떻게 보면 참 잔인하고 치사하다"고 했다. 그는 "걸리면 수백만 원 등록금을 내야 하는데 고스란히
부모님의 부담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그 죄책감이
상상을 초월한다"며 "치사하게 돈으로 불효자식 만드는 잔인함을 학교 당국자들은 알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남표 총장, 8일 학생과의 대화, 그 효과는?카이스트는 자살을
막기 위한 방법을 모색 중이다. 학교는 모든 재학생을 대상으로 심리 검사를 실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를 통해 마음 상태가 불안정한 학생들에게 별도의
상담을 실시하겠다는 것.
또한 외부
전문가들을 참석시킨 가운데 카이스트
학사 운영 방안, 자살
방지 대책 등에 대한 공청회나 토론회 등을 갖는 방안도
고려중이다. 서남표 총장은 8일 저녁, 학생들과 간담회도 가질 예정이다.
네 번째 학생이 자살을 하자 문제라고 지적되고 있는 징벌적 등록금제를
수정하는 정책도 내놓았다. 하지만 이런 방안들이 카이스트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