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위에 앉아 오른발을 왼쪽다리 위에 올려 놓고,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 위에 올린 채 손가락을 뺨에 댄 모습의 보살상으로 높이는 80㎝이다. 1912년에 일본인이 입수하여 조선총독부에 기증했던 것을 1916년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 놓았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관(冠)을 쓰고 있으며, 여기에서 나온 2가닥의 장식은 좌우로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네모꼴에 가까운 얼굴은 풍만한 느낌을 주며, 광대뼈를 나오게 하고 입가를 들어가게 하여 미소 띤 얼굴을 만들었다.
상체는 당당하면서도 곧고 늘씬한 모습이며, 하체에서는 우아한 곡선미를 느낄 수 있다. 늘씬한 팔이나 체구에 비해서 손이나 발은 상대적으로 큼직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탄력이 있고 매끄러우며 부드럽고 율동적이어서 보살상의 우아한 모습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목 뒤로 돌아 양 어깨를 감싼 천의(天衣)는 새의 깃털처럼 치켜 올라갔다가 다시 가슴쪽으로 흘려내려 왼쪽 다리에서 교차한 다음, 양 무릎을 지나 두 팔을 감아 내렸다. 하체에 입은 치마는 다소 두툼해 보이는데 U자형 주름이 능숙하게 새겨져 있다.
왼발을 올려 놓은 타원형의 대좌(臺座)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머리 뒷부분에 흔적만 있을 뿐 광배(光背)는 없어진 상태이다.
1963년 방사선 투과법으로 촬영한 결과 내부의 결함이나 고친 흔적이 없으며, 재질이나 만든 기법이 매우 특이함이 밝혀졌다.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자세, 아름다운 옷주름, 명상에 잠긴 듯한 오묘한 얼굴 등으로 보아 한국적 보살상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6세기 중엽이나 그 직후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문화유산 : 순흥의 줄다리기
용머리 울진 고려
제운루현판 공민왕
[김태형의 영주지역 불교문화유산 답사기]19 영주의 석불들①
‘향토사적기’가 유일 자료 … 영주 석불 대다수가 눈 훼손 심해
이번 호에서는 영주 지역에 산재해 있는 석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 석불 대다수는 본래 있던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석불들이 본래 봉안되었던 곳은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곳이 전부일 것이다.
아득한 전설처럼 옛 사찰의 이름이 전해지는 곳도 있겠지만 그조차도 없는 경우가 많아 본래의 위치 추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지역에서 발간된 ‘향토사적기’가 거의 유일한 자료로 이를 바탕으로 현재 영주 지역에 남아 있는 석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①보물 제60호 영주동 석조보살입상과 석탑
현재 영주시 가흥동 ‘영주공공도서관’ 경내에 있는 이 불상은 1917년 영주시 가흥동 남산들 제방공사 중 모래밭 속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발견되어 영주초등학교 앞 도로 중앙에 있다가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 광배와 부처님의 몸, 그리고 대좌의 상대석이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있으며, 전체 높이는 258㎝이다.
보살상의 머리에는 삼산관(三山冠)이 조각되어 있으며, 광배는 배 모양의 거신광으로 화염문이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의 경우 마치 마애불을 뜯어다 놓은 것처럼 불상 뒷면의 다듬질 상태가 매우 거칠어 본래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즉 마애불을 떼어낸 것인지, 아니면 불상의 뒷면 마감을 하지 못한 미완인지의 여부가 불분명하다는 뜻이다.
영주 지역 석불들의 특징 중 하나가 대다수의 불상이 눈의 훼손 정도가 심하다. 다른 지역의 경우 코의 훼손이 심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와 연관되어 안동 개목사의 연기 설화를 살펴보면 이 절은 본래 ‘흥국사(興國寺)’였지만 안동 지역에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들과 눈병 환자가 많아 절 이름을 ‘개목사(開目寺)’라 고친 후에 눈병 환자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안질 환자들이 석불의 눈을 갉아 치료약으로 사용하면서 눈이 심하게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화대석도 보호각 안에 있는데 이 석불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대사동 일원은 보물 제221호인 가흥동 마애불상군이 있는 곳으로 이 일대가 모두 사찰이었다고 한다.
한편 석불과 함께 그 곁에는 5층의 석탑이 있는데 그 유래는 1961년 즈음 영주면사무소 주차장 한켠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높이 250㎝의 이 탑은 보물 제221호 가흥동 마애불 인근의 대사동(大寺洞)에 있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보물 제60호 영주동 석조보살입상
석탑
연화대석
②백룡사 석조여래좌상
경북문화재자료 제282호인 백룡사 석조여래좌상은 본래 죽령 마루에 있었으나 1950년을 전후로 현재의 위치인 풍기읍 수철리로 절과 함께 이안되었다.
석불은 불상과 광배 연화대좌가 각각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불상의 높이는 74.5㎝, 광배 높이는 92㎝, 연화대좌는 높이 20㎝, 지름 67.5㎝이다. 광배는 화염문과 함께 화불 3구가 조각되어 있다.
비교적 작은 이 불상은 부석사 출토 석조여래좌상과 비로사 출토 석조아미타불좌상과 비슷한 크기로 이들 불상이 거의 동시대에 이루어지지 않았나 싶다.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로 보고 있다.
백룡사와 관련된 기록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어 과거 죽령을 기반으로 나그네들의 숙식과 안녕을 기원했던 소규모 암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경북문화재자료 제282호 백룡사 석조여래좌상
③신흥사 석조여래좌상
영주시 상망동에 위치한 신흥사에 봉안돼있는 경북 문화재자료 제277호 석조여래좌상은 그 출토지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첫 번째는 휴천동 조산마을의 광승사터에서 가졌다는 설과 문수면 적동리 탑거리에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신흥사에 봉안되기 전 영주 동부초등학교 교정에 있다가 1981년 현재의 위치로 이안되었다고 전한다. 불상의 원봉안처에 대해서는 지리적 요소를 감안한다면 인근의 조산마을 광승사 터가 유력하지만 절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완벽한 대좌를 갖추고 있는 이 불상은 전체 높이가 201㎝, 불상 높이는 107㎝이다. 머리는 사라졌던 것을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신흥사 경내 석굴형 콘크리트 감실에 봉안되어 있는데, 팔각의 하대석에는 안상과 복련이 조각돼 있으며, 중대석은 8면에 안상이 조각돼 있다. 상대석은 앙련이 2중으로 조각돼 있으며, 통견의 불상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영주시 상망동 신흥사에 봉안돼있는 경북 문화재자료 제277호 석조여래좌상
④안양원 석조여래좌상
영주시 상망동에 위치한 안양원은 1954년 안경우 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경내에는 보물 제60호 영주동 석조보살입상과 함께 있었던 석조여래좌상이 파불로 남아 있다. 이 불상 또한 원 위치를 벗어나 오랫동안 영주초등학교 앞에 있었다고 한다.
불상의 현재 높이는 84㎝로 편단우견을 법의가 표현되어 있다. 잘록한 허리에 오른팔이 파손되어 사라졌지만 다리에 양손이 남아 있어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의 대좌 또한 2중의 앙련이 화려하게 조각돼 있으며, 제작 시기는 통일신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안양원에는 탑의 부재로 추정되는 석사자상과 함께 건물의 주초석들이 남아 있어 과거 이곳이 사찰이었음을 대변하고 있다. 지금도 안양원 주변에서는 기와 편들이 확인되고 있어 이곳이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안양원은 『삼국유사』‘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조에 등장하는 조신이 세운 ‘정토사’라고 추정하고 있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특히 이 부분과 관련하여 『삼국유사』에는 세달사 혹은 흥교사가 등장하는데 일부에서 이 절을 부석사로 오인하여 안양원 일대가 정토사의 옛터로 로 추정하고 있지만, 세달사는 현재 강원도 영월에 그 터가 남아 있다. 또한 『삼국유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정토사는 영주가 아니라 경주 근방에 건립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안양원 석조여래좌상
석사자상
주초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