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마을과 덕신학교
이방주
옥산들에 가을이 한창이다. 큰길에서 코스모스 너머로 보이는 들판이 풍성하다. LG로를 따라 미호강을 건너면 세계 최고 볍씨마을 소로리가 거기이다. 덕신학교가 있던 독립운동가 마을 덕촌리는 옥산면 소재지를 지나야 한다, 면소재지를 지나 고가 차도를 넘어서면 오른쪽 갈림길이 하동정씨 세거지인 덕촌리 들머리이다.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면 1968년 창립되어 반세기를 넘어서 아직도 건재한 전국 유일의 이(里) 단위 신용협동조합인 덕촌신협이 보인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기가 망설여질 정도로 고요하다. 응봉산 솔숲에는 오래된 소나무들이 품격 높은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금방이라도 만세소리가 고요를 깨뜨릴 듯하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덕촌리 독립운동가 마을’ 표지석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주차장 앞 너른 잔디밭 너머로 덕신학교 기념관인 덕은재(德隱齋)가 있고, 그 뒤에는 조선 초기 문신 정수충(1401~1469)의 영당인 문절영당이 자리 잡고 있다. 덕은재와 문절영당 뒤쪽 솔숲은 독립운동가 추모동산이다. 솔가리가 양탄자처럼 깔려있는 오솔길을 천천히 걸으며 지금 한가함이 누구의 숨은덕인지 생각에 잠길 만하다. 덕은재에서 앞을 바라보면 대부분 독립운동가인 하동정씨 선영이 보인다. 멀리 미호강을 건너 부모산을 안산으로 아늑하게 들어앉았다.
덕촌마을은 450여 년 전 자리를 잡고 살아온 하동정씨 세거지이다. 이 마을이 청주시 이카이브 제1호 ‘덕촌리 독립 운동가 마을’로 지정된 것은 독립운동가 정순만, 정양필, 이화숙, 정해원 등 하동정씨 독립 운동가들이 탄생하고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특히 정순만은 1905년 을사늑약 반대상소를 하다가 실패하자 귀향하여 근대학교인 덕신학교 설립을 발의했다. 그 후 북간도로 망명하여 이승만, 윤치호와 독립협회 창립에 참여하였고, 용정에서 이상설, 이동녕과 함께 조선족 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였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 계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 아들인 정양필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며느리이며 정양필의 부인인 이화숙은 이화학당 1회 졸업생으로 상해임시정부 애국부인회 회장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덕신학교는 1905년 을사늑약에 의한 망국의 위기에서 국권 회복에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정씨 문중의 깨달음과 정순만의 발의로 1906년 사립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1907년 한국학부의 인가를 얻어 사립 덕신학교로 개교하였다. 1909년에는 교사 3명, 학생 45명이 되었고, 1916년에는 학생 85명으로 늘어났으나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에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었다. 학생과 선생들은 1920년에 설립된 옥산공립보통학교에 편입되었다. 그렇게 오늘날 옥산초등학교의 주추가 되었다.
덕신학교는 서당식 한문교육을 지양하고 국어, 한문, 역사, 지리, 산술, 농업, 서예 등의 근대식 교과과정에 의해 교육이 실시되었다. 설립 13년 만에 폐교되었으나 2016년 110년 만에 복원되어 지금도 인근학교의 현장 체험학습의 산실이 되어 후손인 정상옥 수필가가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이 마을 독립정신의 씨앗은 아마도 1909년에 설립된 덕촌교회인 것 같다. 덕촌교회는 농촌계몽과 사회교육의 앞자리에 서서 신학문교육의 불씨가 되었고 그 정신이 덕신학교에 이어졌을 것이다.
옥산은 중국 후난성에서 발견된 11,000년 전 볍씨보다 수천 년 더 오래된 세계 최고의 볍씨가 발견된 고장이다. 쌀은 우리네 육체를 살리는 생명의 씨앗이다. 덕신학교는 옥산초등학교의 씨앗이 되었고 우리 청주 교육의 씨앗이 되었다. 교육은 이념에 휘둘리지 않고 세계와 역사를 바로 보는 안목을 일깨워준다. 덕신학교는 우리네 민족정신을 일깨워준 영혼의 씨앗이라 할만하다.
(2023.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