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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짝 인생 김 정 화
요즈음 뽕짝에 취해 산다. 신곡 악보는 물론이거니와 주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오는 트로트 가수의 히트곡까지 줄줄이 꿰어내려고 한다. 자동차에도 그동안 듣던 영어 테이프를 트렁크에 밀어 넣고 뽕짝 테이프로 전면 교체했다. 그러다 보니 삶이 뽕짝이 되고 뽕짝 가사가 내 삶의 언저리가 되어 버렸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뽕짝은 신파적이고 진부하여 함량 미달의 음악성을 가졌다고 스스로 단정했다. 가수들의 율동과 관중의 반응도 촌스러워서 때때로 눈살을 찌푸렸다. 거나하게 취한 중년 남자들이 술판에서 비틀어대는 노래, 아줌마들이 관광버스에서 몸 흔들며 소리쳐야 제격인 노래라고 여겨왔다. 그저 나에게는 직설적인 가사와 단조로운 멜로디의 대명사였다. 그렇다고 딱히 잘 부르는 뽕짝 한 곡도 없으면서 배워볼 요량 한번 내어보지 않았다. 굳이 시간까지 투자하면서 뽕짝 나부랭이를 배우는 것은 퉁스러운 일이라며 허세를 부렸다.
그러다가 일이 터졌다. 연말이 되면 몇 군데 송년회를 부득불 가게 되는 데 지난 연말에는 아주 특별한 모임이 있었다. 베트남에서 이십여 년간 생활하던 고향 선배의 귀국 환영회였다. 그 선배는 모 영화배우를 연상케 하는 외모에 유머와 위트는 물론, 민요와 트로트를 넘나드는 노래 솜씨까지 거칠 것이 없었다. 초등학생 때 통기타를 치며 ‘홍콩 아가씨’를 간드러지게 불렀던 사건은 지금도 모임 때마다 회자하곤 한다. 사춘기 시절에는 뭇 여학생들의 흠모 대상이 되곤 했는데 그 속에 나도 끼어 있었음은 굳이 고백하지 않아도 알만한 친구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재회의 장소에서 뒤풀이 또한 빠질 수 없는 법. 문제는 노래방에서 시작되었다. 외국 생활을 오래한 선배는 뽕짝을 무척 선호했다. 뽕짝에는 고향 냄새가 난다고 했다. 어머니의 목소리도 담겨 있고 애틋한 첫사랑과의 추억도 묻어 있으니 뽕짝이야말로 향수를 달래주는 명약이라고 추켜세웠다. 모두 저만의 18번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우물쭈물하던 사이에 평소 ‘찜’해 놓았던 뽕짝 두어 곡이 어느새 선창 되고 말았다. 낭패감으로 닭 쫓던 개의 상을 하고 노래책을 뚫어지라 쳐다봐도 나를 구제해줄 곡은 쉽게 튀어나오지 않았다. 마지못해 친구들이 추천한 곡을 애써 불러보았으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날 나를 비켜가는 선배의 눈빛이 섭섭하여 지난 연말은 오래도록 우울했다.
누구나 새해 계획은 화려하다. 신년 계획이라는 것이 시작은 야단스러우나 끝은 대부분 쭉정이로 전락하기 일쑤이다. 올해는 시월지계(十月之計)가 십년지계(十年之計)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몇 가지 작심한 목록을 냉장고 문에 크게 붙여놓고 수시로 마음을 다지는데, 그중 하나가 ‘뽕짝 30곡 배우기’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드니 신곡 발라드나 유행하는 댄스곡은 발음도 어렵고 도무지 정서에도 맞지 않다. 이왕 시작할 바에 뽕짝으로 일장월취하여 기회가 되면 도전장을 내기로 했다.
몇 개월째 뽕짝과 동거 중이다. 아예 악보 노트를 가지고 다닌다. 몰래 펼치는 악보는 혼자만의 암호가 빼곡하다. 돌체, 안단테, 칸타빌레, 스타카토 등의 음악전문용어와는 거리가 멀다. 찍기, 뿌리기, 던지기, 내려앉기, 말아 올리기 외에도 확 끌어안기, 빠질 듯 말 듯 물수제비 하듯이 등 나만의 댓글과 모래 위의 새 발자국처럼 찍힌 부호 자국들이 노랫길을 도운다.
노래교실에도 몇 번 나가 보았다. 일백 명이 넘는 아줌마 부대가 일사불란하게 목소리를 꺾고 멈추고 휘감으며 뽕짝 물결을 만들고 있었다. 잔물결처럼 음색이 고였다가 때로는 폭우를 쏟아내듯 토해내는 성량이 교실을 흔들어 댔다. 하나같이 “나 행복해 죽겠소.”라는 넉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희한한 일은 그게 아니다. 뽕짝이 입에만 덜컥 붙은 게 아니라 마음자락까지 헤집고 들어와 떡 하니 자리 펴고 앉은 것이다. ‘종이배’를 부를 때 ‘당신이 길이라면 내가 가야 할 길이라면 내 모든 걸 다 버리고 방랑자가 되오리다’라는 가사의 절절함에 목이 메었고, ‘여자는 왜’에서 ‘떠나는 남자는 추억이 되고 남은 여자는 왜 과거가 되나요’라고 호소할 때는 그 대목에 반하여 꼴깍 잠길 뻔했다. ‘떠날 수 없는 당신’은 또 어떤가. ‘나를 너무 모르시는 당신이여’하고 외치는 첫 구절부터 가슴을 쓸어내렸고 김수희의 ‘화등(花燈)’은 제목부터 발목을 잡더니 ‘사랑의 이불자락을 소롯이 덮어주고’라는 시적 묘사에 그저 주저앉을 뻔했다.
뽕짝 속에 등장하는 ‘당신’도 여러 가지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을 비롯하여 ‘내 안에 콕 박힌 그대’도 있고 ‘내 마음의 연인’, ‘초면에 정든 사람’도 있다. 그러한 ‘당신’은 ‘칼피스 향’처럼 신선해서 ‘이 세상에 그 무엇도 쨉’이 안 된다. 야속한 ‘당신’에게는 ‘사랑한다고 왜 말을 못해요’ 따지기도 하고 ‘하필이면 왜 내가 너를’이라 응수하며 ‘가라 가라 가라지’ 소리치고 고개를 홱 돌릴 수도 있다. 때로는 ‘울지 말아라 약한 남자여’ 위로라며 ‘한 잔 술에 데낄라’ 잔을 들고 ‘인생살이가 고추보다 맵다 매워’라며 잠시 긴장을 놓아도 된다. 노래 한 곡마다 ‘당신’을 취하기도 버리기도 하니 뽕짝 인생은 눈치 볼 사람 없어 속이 다 시원하다.
나에게도 노래 부를 기회를 준다면 못이긴 척 그동안 닦은 실력을 한번 발휘해볼 텐데 막상 그런 기회는 아직 오지 않는다. 하지만 가슴 한 자락 팍 무너질 일 있어도 이제 뽕짝 노래에 마음 기댈 수 있으니 감사천만한 일이다.
장윤정의 ‘첫사랑’이 흐른다. 차 안이 꽝꽝 울리도록 볼륨을 높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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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첫사랑 저도 무척 좋아하는 노래인데...
사람은 변한다고 하더니,
변하지 않음이 문제가 될터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