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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이래 일본 정부 대응 원칙 드러나, “배상요구 제기해도 용인 못한다. 협상은 민단측과” | ||||||||||||||||||||||||||||||||||||||||||||||||
우키시마호 사건 진상규명 평양토론회에서 공개된 새 자료 두 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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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형 기자 cankjh@minjog21.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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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후 귀국선 1호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남북해외가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최초로 열린 평양토론회에서 공개된 두 건의 관련자료를 통해 우키시마호사건의 진상과 해결과제들을 살펴본다.
9월 29일 평양 인민문화궁전 1층 원탁회의실에서 열린 ‘우키시마마루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평양토론회’. 이 토론회는 우키시마호(우키시마마루) 사건을 주제로 한 최초의 남북해외·일본측의 연합토론회로 기록됐다. 우키시마호사건이란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일본에 거주하던 동포들을 배에 싣고 귀국하던 우키시마호가 같은 달 24일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항 부근에서 갑자기 요란한 폭음과 함께 두 동강 난 채 침몰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재일동포들의 숫자가 수천을 헤아릴 만큼 비극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지금껏 우키시마호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과 극적으로 생존해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에게는 천추의 한으로 남아 있는 비극의 역사 그 자체이다. 그동안 남과 북, 재일동포들의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은 다각적으로 진행돼왔다. 남측에서는 이번 평양토론회의 남측 대표단 단장인 전재진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회장이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진력해온 대표적인 활동가이다. 전 회장은 특히 우키시마호에 탔다가 극적으로 회생해 고향으로 돌아온 생존자들을 집중적으로 찾아내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기록에 남기는 활동을 벌였다. 북측에서도 이 사건을 주목해왔다. 특히 지난 2001년 이 사건을 소재로 해 ‘이북판 타이타닉’으로도 불려온 영화 〈살아있는 령혼들〉을 제작해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그동안 조선인강제련행진상조사단을 비롯한 재일동포들과 일본인 활동가들이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왔다. 이같은 세 흐름의 진상규명 노력이 드디어 이번 평양토론회로 결실을 보게 된 셈이다. 이 사건은 일본군에 배속된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이라는 점과 일제시기 일본으로 강제연행된 피해자들이 귀국의 부푼 꿈을 안고 고향으로 향하던 귀국선이었다는 점에서 일본 정부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게 상식이다. 그에 따라 사건의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그간 일본 정부의 사건 왜곡과 책임회피를 질타하며 일본 오사카법원에서 소송을 진행해왔다. 그 결과 1심은 손해배상 승소, 2심은 패소, 현재 80명이 상고 중이다. 일본 법원의 ‘자반 뒤집기’는 이 사건에 대한 일본 사회의 미묘한 기류를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작 일본 정부의 태도는 외면 그 자체이다. 사건의 진상규명 조차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조건에서 일본 정부는 사건 발생직후 왜곡된 조사결과를 재검토할 의지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일 정부가 사건 관련 기록과 문서들을 거의 공개하지 않아 왔다. 그동안 일 정부가 공개한 유일한 자료는 1953년 12월 〈수송선 우키시마호에 관한 자료〉(1989년 우키시마호 수난자 추도실행위원회가 간행한 《우키시마호사건의 기록》에 수록)가 유일한 것이었다.
이런 조건에서 열린 9월 29일 평양토론회는 일 정부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속히 자료를 공개하고 그에 따라 진상을 밝혀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는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 평양토론회에서 우키시마호사건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 두 가지가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재일측 대표단장인 홍상진 조선인강제련행진상조사단 사무국장이 내놓은 <일본 정부가 연합국(GHQ)에 제출한 우끼시마마루 폭침사건 보고서>(총 105쪽 분량, 이하 보고서)와 남측 대표단장인 전재진 회장이 제시한 사건 생존자 채길영 씨 구술 기록 〈일망후(日亡後) 상담(相談 경력사(經歷事)〉(이하 경력사)가 바로 그것이다. 홍 단장이 최초로 공개한 보고서는 우키시마호사건과 관련해 일본 정부가 작성한 자료 가운데 두번째로 공개되는 것으로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일본 정부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사건 발생 5년 후인 1950년 2월 28일에 당시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이던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연합국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에 제출한 것이다. 그동안 일본 외무성 자료더미 속에서 잠자고 있던 것을 조선인강제련행진상조사단에서 발굴했다. 지난 2000년 12월 20일, 일본 외무성은 제16회 외교자료 공개를 통해 〈태평양전쟁 종결에 의한 구일본 국적인의 보호인양관계 잡건〉이라는 전8권, 약 1만 쪽에 달하는 문서를 공개한 바 있다. 이때 공개된 외교자료 목차에 〈특설 운송함 우키시마호 조난사건〉이라는 문서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으나 오직 이 문서만이 공개 대상 제외문서로 공표되었다. 조선인강제련행진상조사단은 그 목차에 주목해 일본 정보공개법에 의거, 공개를 끊임없이 요구한 결과 보고서들을 입수하게 되었고, 그것을 평양토론회에서 처음으로 공개한 것이다. 이 보고서들의 핵심은 홍상진 단장에 따르면, 작성 시점인 “1950년 당시 일본 정부가 진상 규명도 피해자의 유골수집도 못하면서 이미 GHQ에 ‘조선측’이 ‘배상요구를 제기해도 이를 용인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보고서는 몇 가지 사항으로 구성돼 있다. 하나는 〈우키시마호의 조난 및 이후의 처리에 대하여〉라는 통지문이다. 이것은 관련 부처에 보고서를 보낼 때 첨부한 설명서로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보고서는 바로 GHQ에 제출한 〈우키시마호의 조난 및 이후 처리에 관한 보고〉라는 문건이다. 보고의 작성자는 ‘1950년 2월 28일 인양원호청 제2복원국 잔무처리부장’으로 돼있다. 그런데 이 보고서가 외무성에서 발견된 이유는 ‘복사 송부처’가 외무성 정무국장과 해상보안청 차장으로 돼있는 것으로 보아 외무성에 보내진 사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보고서가 제출된 곳은 GHQ 가운데에서도 ‘참모부 G-2와 극동 미해군 사령부’이다. G-2 즉, 제2부란 참모부 내에 첩보, 보안, 검열 등을 담당하는 부서를 의미한다. GHQ 참모부 안에서 정책결정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중요한 부서이다.
보고서에 따른 ‘별지’ 형식으로 된 〈우키시마호에 편승한 조난사건에 관한 설명자료〉(설명자료)를 살펴보자. 홍 단장은 제목부터 왜곡이라고 지적한다. “‘편승’이 뭡니까. 귀국 수송이 목적인데 조선사람들이 편승했다니요? 또 ‘조난’이란게 말이 됩니까? 우연히 사고가 났다는 얘기인데, 제목부터가 잘못됐습니다.” 설명자료에 드러나는 일본 정부의 입장은 명확하다. 앞에서 밝힌대로 ‘배상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의 책임회피 근거는 무엇일까. 홍 단장의 설명이다. “조선인의 수송은 해군의 의무가 아니라 ‘완전한 호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이것은 명확히 잘못된 것입니다. 이미 GHQ로부터 조선인들을 수송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의무인 것이죠. 자기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왜곡한 것입니다. 또 사건의 원인이 ‘완전히 불가항력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책임질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이것도 왜곡이죠. 우키시마호사건은 명백한 폭침(일 해군에 의한 자폭)입니다.” 이같은 일본 정부의 입장은 보고서에 명백히 기재돼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있다. 보고서가 작성된 1950년 시점까지 일 정부의 교섭대상은 당시 재일동포 조직인 재일조선인련맹(조련)이었다. 조련은 현재의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총련)의 전신으로서 북측을 지지하는 단체였다. 그런데 이 시점부터 일본은 교섭대상이 한국 대표부의 추천을 받은 민단(한국 지지단체)의 책임자가 아니면 안된다고 보고서에서 명확히 적시하고 있다. 일본은 남북 분단상황의 약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북측 지지단체를 따돌리고 남측 지지단체와 이 사안을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도 ‘배상요구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 홍 단장은 이 자료를 통해 1950년부터 이미 배상요구 불가 방침을 확고히 정하고 이후 대처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누차 강조했다. 지난 5월 오사카고등법원이 내린 일 정부 배상불가 판정도 결국 이런 내적인 흐름에 기초한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우키시마호사건 관련 일본 정부측 자료가 과연 이것만인가 하는 점이다. 홍 단장의 얘기다. “오사카 재판에서 일 정부는 우키시마호 피해자와 유족들의 자료 공개 요청에 ‘자료가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법정에서 말이죠. 그런데 이 보고서로 인해 그것이 완전한 거짓말이라는 게 입증된 셈입니다. 이 보고서는 일 정부가 가지고 있는 자료의 극히 일부입니다. 수천 수만 페이지의 자료를 후생성이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자료가 공개되면 일본이 불리하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9월 29일 평양토론회에서 남측 전재진 단장에 의해 처음으로 공개된 또 하나의 자료인 ‘경력서’는 우키시마호사건 생존자의 구술을 엮은(정헌조 기록) 수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기록을 보면 우키시마호사건 상황이 다음과 같이 묘사돼 있다. “(…) 깨어보니 일본 해병이 막대를 잡고 빨리 아래층(배의)으로 내려가라고 채질하더니 군함(우키시마호)에 달린 소함들이 일제히 수면에 떠서 육지로 나간 후 벼락같은 소리가 진동하고 군함이 공중으로 올라가 반쯤 부서지니 사람들은 다 피가 흐르고 재차 쾅하는 소리가 나더니 군함은 전부가 물속에 들어가 버리고 남은 것은 돛대 뿐이라.” 사건 당시 우키시마호에 탔던 채길영의 묘사 속에는 사건의 진상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이 내포돼 있다. 우선 사건 발생 직전 같이 배에 탔던 일본 해군들이 작은 함정을 이용해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사고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불가항력적인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는 강한 시사점이다. 또 하나는 그 직후 두 차례에 걸친 폭발로 인해 배가 침몰했다는 것이다. 폭침(자폭)을 의미하는 것이다.
게다가 사건이 발생한 이듬해 증언했다는 점에서 그 생생함과 신빙성이 다른 증언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고 볼 수 있다. 채길영 씨의 기록 가운데는 새로운 사실도 담겨 있다. 우키시마호에 승선하기 전날 보인 일본인들의 태도이다. “소생만이 일본인의 동정을 살펴본 즉 전일로부터 밤에 땅 속에 감춘 물건을 다 파내어 바다에 버리니 사람들이 욕심을 부려 의복과 물건을 서로 가지려고 다투어 난리를 이루니 일본인이 조용히 하는 말이 ‘너희 무리들이 만약 무사히 3일을 지나면 주는 것이 어찌 아까우리요’라는 말을 생각할진대 (…)” ‘3일을 무사히 지나면’이라는 말을 한 일본인이 일본군인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얘기를 의미심장하게 구술한 채길영 씨의 판단이 일본군의 의도성 여부를 짐작케 하는 대목으로도 읽힌다. 또 하나, 우키시마호 승선자 수에 대한 새로운 증언이 쓰여 있다. 지금까지 6천에서 8천 명 정도가 승선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채 씨는 1만 2천여 명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일만 이천여명이 모여 배(우키시마호)에 타거늘 소생은 최후로 입(入)한고로 하층에 좋은 자리를 얻지 못하고 (…)” 채 씨가 가장 늦게 승선했기 때문에 1만 2000여 명이라는 숫자의 기억은 간과하기 어렵다. 이 기록을 공개한 전재진 남측 단장의 말이다. “일본 정부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의도대로 우키시마호 관련자료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많이 드러날 겁니다. 채길영 씨의 기록이 그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키시마호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평양토론회는 이 두 가지 자료의 공개로 한층 빛을 발했다. 가해자측인 일본 정부의 문서와 피해자측의 기록물이 우연찮게도 동시에 공개된 점도 이채롭다. 특히 관련자료가 없다던 일본 정부의 기존 입장이 남북해외 그리고 일본측의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모인 첫 토론회에서 일본 정부의 문서가 공개됐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이번 평양토론회는 우키시마호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본격적인 시작’임에 틀림없다. [2003년 11월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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