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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소설가 |
「관촌 수필」과 나의 문학 역정 /고 명천 이문구(소설가) | ||
등록자명 : 김동민 | 조회 (0), 댓글 (0), 추천(0) | 등록일자 : 2005-03-17 08:55 |
홈페이지 : 없음, 참조 : 없음, 첨부파일 : 없음 |
저희 집안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유가(儒家)였지만, 부친이 일제 때부터 해방 공간에 걸쳐 군내에서 사법대서를 하시면서 농민이나 어민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접하셨습니다. 군에 하나밖에 없는 대서사였기 때문에 일제 때부터 지주와 소작인간의 분쟁이라든지 선주와 뱃사공들간의 분쟁같은 소송사건이나 양도 건 따위는 부친의 손을 거치기 마련이었지요. 대서를 해주시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다 보니, 군민들의 청에 의해서 농민운동에 뛰어들게 되셨고, 농민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으로까지 발전이 되었지요. 해방 후 남로당에 가담한 부친은 군 총책뿐 아니라 서해안 일대 여러 군의 비밀조직 혹은 지하조직을 관리하다가 그만 6·25 나던 해에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죠. 남자라고는 내 위에 있는 사람 모두 하루아침에 학살되어 버렸기 때문에, 저는 전형적인 빨갱이 아들이라는 멍에를 안은 채 열 살 때부터 대단히 외롭게 자랐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열 살 때 6·25가 났고, 휴전 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한 3년 동안 하는 일이라곤 환송회 따위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군대에 뽑혀 가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총알받이가 되더라도 할 수 없이 한 달에 한 번씩 닥치는 대로 차출되어 갔는데, 훈련도 제대로 못 받고 실전에 배치되곤 했지요. 예를 들어 백마고지의 주인이 하루에 스무 번 바뀌었다고 한다면, 스무 번 바뀔 때마다 총알받이를 충당해야 했지요. 젊은 청년들이 군대에 갈 때마다 역전에서 열리는 환송회에 나가서 노래부르고 구호를 외쳐야 했습니다. 장날마다 멸공통일 북진통일을 부르짖으며 휴전협정을 반대하는 군민대회, 궐기대회가 열리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청중이 없기 때문에 학생들이 동원되곤 했지요. 귀에 들어오는 건 하나 도 없었지만, 그 연설을 들은 다음에는 군청 앞까지 늘 시가행진이 벌어지곤 했지요. '공산당의 씨를 말리자!'라고 모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치곤 할 때, 나도 따라 하지 않으면 빨갱이라서 안 한다고 야단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참으로 참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열두세 살짜리 소년이 '공산당의 씨를 말리자!' 하고 악을 쓸 때는 '내가 나를 죽이자' 하고 악쓰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명분 없이 우왕좌왕하다가 개죽음 당하고 나만 남다 보니, 열 살 때부터 나는 언제 죽지 하는 생각만 머리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어떻게 하면 안 죽을 수 있나 하는 생각만 머리 속에 가득 했습니다. 요즘 열 살에서 중학교 1, 2학년 아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지만, 50년 전의 내게는 언제 죽을 것인지, 저들이 언제 죽일 것인지, 그 다음은 어떻게 하면 안 죽을 수 있나 하는 것들만 머리 속에 꽉 차 있었습니다. 문학을 하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다 궁벽한 면 소재지라서 서점다운 서점도 없지만 그 당시에도 동아수련장 같은 것을 파는 책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곳에선 난리통에 왔다갔다하던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온 헌 책들을 팔았습니다. 책 사볼 돈은 없고 서점이라고는 그곳밖에 없으니까, 하루에 한 번씩 들락거렸지요. 몇 페이지씩만 읽고 제자리에 꽂아놓았다가 다음날 다시 가서 나머지를 읽는 식으로 책을 많이 읽었어요. 전쟁이 남긴 상처도 상처였지만 한 반 70명 가운데 겨우 한두 명밖에 도시락을 싸올 수 없을 만큼 굶주림, 헐벗음이 휩쓸던 시절이었지요. 나도 열 살부터 스무 살까지 점심을 제대로 챙겨 먹었더라면 키가 지금보다 10센티는 더 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시대였던지라 헐벗고 배고픈 사고무친(四顧無親)에, 빨갱이 아들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면서 살아가는 방법은 달리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도 있고 비디오, 영화도 있지만 그 당시에 그걸 견디는 길은 책을 읽는 수밖에 없었지요. 책을 읽으면서 그걸 잊어버리고 살 때인데, 중학교 2학년 때까지도 '나는 어떻게 개죽음 안 당하고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서점에 가서 보니 얄팍한 책이 한 권 눈에 띄었는데, 전쟁 후에 20여 명이 한 편씩 수필을 써서 모은 수필집이었습니다. 그걸 하루에 한 편씩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 편 읽고 나면 주인 눈치가 보여서 꽂아놓고 그 다음 날 읽고는 했습니다. 중간쯤 읽어 나갈 땐데, 어떤 수필 앞에서 눈이 크게 떠졌습니다. 그것은 경북 대구에 사는 유명 문인 L씨가 좌익 혐의로 검거되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가 풀려난 이야기였습니다. L씨가 좌익 혐의로 검거되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대구 문인, 서울에서 피난 가서 대구에 머무르던 문인, 경상북도 문인들의 연서명으로 '이 사람은 본래 좌익이 아니다. 지금 어떤 오해를 받아 중대한 혐의로 투옥되어 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탄원서를 냈는데 그게 받아들여져서 그 다음날로 풀려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풀어 주라고 했다는 거죠. 지금은 청와대라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경무대라고 했지요. 당시 경무대 공보비서관이 시인 김광섭 선생이었는데, 그분이 탄원서를 받아 대통령에게 진언해서 그 다음날 풀려났다는 것입니다. 그 때 저는 무릎을 탁 치며 생각했습니다. 나도 문학가가 되면 살겠구나! 문학가만 되면 개죽음은 면하겠구나! 죽을 것인데도 몇 사람이 탄원하니까 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풀어 주었다면, 문학가만 되면 아무도 나를 해칠 수 없겠구나.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어 이름이 알려지면 나도 살 수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기분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L씨가 누굴까 궁금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우리 나라 시조 문학 개척자의 한 분이신 이호우 선생이었습니다. 그분의 여동생은 시조시인 이영도 선생이지요. 전라북도에서도 그런 일이 있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분은 시인 신석정 선생님이었지요. 그때부터 정말 문학가가 되기 위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문학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17, 8세쯤 되어서는 신춘문예라는 것도 있고 문학 잡지의 추천제도라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대문학」이나 「자유문학」을 사 볼 능력은 없어서 헌 책을 빌려 보거나 얻어 보곤 했는데, 그러던 중에 김동리라는 소설가가 우리 나라 최고의 극우파 문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프로 문학에 대항해서 청년문학가협회를 조직해서 해방 전부터 피나는 투쟁을 해서 이겨낸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평론이나 문학사를 읽다 보니까 김동리 이상 우리 나라에 우익 문인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문학가가 되어서 오래 살려면 김동리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김동리의 우산 속에 들어가야 된다. 김동리의 제자가 되어 그분이 나를 보호하고 신분을 보장해 준다면 함부로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 중학교 3학년 때인가 처음으로 깨달았어요. 그 뒤로 진짜 김동리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고, 그분께서 30여 년 동안 저의 신원보증인이 되어 주셨습니다. 최근 라스포산가에서 여성들에게 비가 올 땐 우산을 펴라 했는데, 저는 50년 전에 우산을 편 사람인 셈입니다. 선견지명이 있었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렇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낭만적으로 문학 공부를 한 사람들, 쉽게 말하면 문학적인 동기나 예술적인 동기에 의해서 좋은 작품을 읽고 감동이 되어서 문학가가 되었다거나, 국어 선생님께서 글재주가 있으니 문학가가 되라고 격려해 주었다든지, 선배들이나 주위에서 권해서 됐다든지… 한 이들에 비하면 고상하지 못하고 동기 자체가 불순하고 살벌(?)해요. 솔직히 말해 저는 생존 전략의 하나로 문학을 택했습니다. 기왕이면 김동리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불순한 거지요. 그 뒤 1970년에 김지하 씨가 담시(譚詩) 「오적(五賊)」을 써서 독재정권을 풍자한 것을 계기로 문인들이 민주화의 선봉에 서게 되었습니다. 감시 대상이 되면서도 뜻 있는 문인들이 모여 74년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함에 즈음하여 저는 발기인 다섯 명 중의 하나로 참여하였습니다. 6·29 후에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만, 지금은 제가 이사장으로 있습니다. 회원이 900명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101명으로 출범하였고, 저 자신 74년 이후에 1987년 6·29 시민혁명 때까지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같은 데를 열 번 이상 들락거렸습니다. 잡혀갔다는 얘기지요. 김동리 선생의 큰 그늘에서 그 때마다 권력의 하수인들은 저를 함부로 잡아넣지를 못했지요. 그래서 전과 조회를 하면 깨끗합니다. 15년 동안 반정부 민주화 투쟁을 했다면 한 것이고 김대중 정부와 그 전의 김영삼 문민정부의 출범에도 문인들의 민주화 투쟁이 상당한 일익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용히 있습니다. 그러나 신원조회를 해 보면 투옥되었다는지 하는 경력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 이후에는 나도 세 번 정도는 감옥살이를 했어야 했는데도, 항상 다른 사람은 가고 나는 왜 빠졌을까 궁금해 하곤 했습니다. 단지 믿음직하게 이것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은 세상 사람들은 '친여 문인이다. 어용 문인이다'라는 좋지 않은 말로 표현하지만, 김동리 선생의 존재입니다. 권력기관에서 볼 때 이문구는 김동리 선생님의 오른팔 같은 제자였을 것입니다. 이문구를 잡아넣었다가는 맨발로 뛰어다닐 분이고 잘못하면 그분은 반체제 할 분이었겠죠. 나는 김동리 선생님의 그늘 때문에 감옥에 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열 몇 살 때 기왕이면 김동리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마음먹은 것이 100% 효과(?)를 보았다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말 못할 복잡한 사정을 안고 문학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 뒤에 글 쓸 때에도 굉장히 생소한 것이 머릿속에 남아 있고, 의식하게 되고, 제 스스로 신경이 곤두서곤 했습니다. 노동판에서 월간문학 편집장으로 제가 관촌수필을 쓰게 된 동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968년은 우리 나라 신문학 60년인 해였습니다. 육당(六堂) 최남선 선생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란 시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시라고 한다면, 그것이 발표된 1908년을 기점으로 해서 1968년은 우리 나라 현대 문학이 환갑이 되는 해죠. 그 기념으로 문인협회에서 「월간문학」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게 되었습니다. 문학 전문지라고는 '현대문학' 하나밖에 없을 때였는데, 그걸 하면서 김동리 선생께서 저를 불러 주셨어요. 저는 그때까지 막노동판에서 6년째 일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친구인 소설가 박상륭(朴常隆)을 시켜서 김동리 선생이 저를 찾았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보자마자 잡지를 하게 되어서 인원이 필요하니까 여기서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생전 처음 풍찬노숙을 밥먹듯이 하던 노동판을 졸업하고 한국 문인협회 기관지인 '월간문학' 편집부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1966년에 동리 선생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하고, 1968년에 문인협회의 기관지 편집에 관여를 하게 되었으니 바로 문단 중앙에 뛰어든 셈이죠. 1970년에 김지하의 「오적」 사건이 장안의 화제를 몰고 왔습니다. 정보기관이라든지 하는 데 의식을 않고 살아오던 문인들이었지만, 그 때부터 문인들이 시 한 편만 써도 외부에까지 널리 파장이 있고 국민들한테도 화제가 되곤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문인들을 감시할 뿐 아니라, 글을 써서 발표를 하면 그 작품을 누군가 분석을 하고, 문인들 성향을 조사하고 성분 분류 작업을 늘 하는 것 같았어요. 문인협회에서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오적 사건이 기소유예가 되어서 풀려난 뒤에 김지하를 사귀어 보니까, 그의 집안은 좌익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더군요. 김지하씨 할아버지가 동학에 관련되어 갑오농민군이었다는 점 외에는 사상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을 관제 공산당을 만들려고 했었지요. 그 때 판사가 당연히 그걸 거부했습니다. 김지하를 무혐의로 풀어준 사람은 목요상 판사(현 국회의원)입니다. 그분이 무죄 판결을 내렸죠. 그런 일이 있은 뒤에도 계속해서 신경이 곤두설 만큼 문단의 움직임 같은 걸 첩보로 낱낱이 수집해 가는 낌새를 느꼈습니다. 저렇게 집안에 아무런 하자가 없는 사람도 관제 공산당을 만드는 판인데,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이야 한 번 밉보였다가 가족사를 들먹여서 뒤집어 씌운다면 꼼짝 못하겠구나 하는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편집장을 하다 보니까 김지하 오적 사건 다음부터는 내가 스스로 검열을 하게 됩니다. 다른 문인의 글을 내가 검열을 하게 돼요. 나도 모르게 말썽 나지 않도록 하게 되는 거에요. 마음은 자꾸 좁혀들고 위축되어 글을 못 쓸 것 같았습니다. 스물 아홉, 서른 살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어렵게 해서 거기까지 왔는데 중도에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 개죽음도 면해야겠고, 감옥에도 안 가야 되겠고, 글을 쓸 건 써야 되겠고…. 그래서 하나의 묘수를 생각해낸 게,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 경찰서에 가서 자수해 버리면 낫지 않을까 마음먹듯이, 차라리 내가 우리집 얘기를 먼저 써 버리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선수를 쳐 버리면 뒤탈이 없을 것 아닌가.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 「관촌수필」이지요. 처음 우리 집안 얘기 나온 김에, '나 이런 사람인데 어쩔래.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이렇다, 배 째라' 하는 게 당시의 상황이었어요. 그 때도 '시기 상조다. 너무 빠르다'라는 충고가 적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 현 씨가 제일 먼저 견해를 전해 왔습니다. 너무 이르지 않느냐는 거였지요. 하지만 아직 그분은 남의 속도 모르고 한 소리고, 나는 그때 급박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쓴 거지요. 그 뒤로 번번이 첩보 수집하는 분들이 여러 군데서 찾아 와서 자주 만났는데, 가끔 우회적으로 공갈 협박을 하려 들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들과 술도 많이 먹고 싸움도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은근히 뭐라고 할 때마다 '나는 다 썼다. 니가 괜히 그러지 말라'라고 응수하곤 했지요. 그 때는 「관촌수필」이 아직 안 나왔을 땐데 내가 복사를 해다 주랴. 한 번 읽어 봐라. 네가 읽어 봤으면 그 말 못할 텐데…. 열 번 이상을 조사를 받고 어떤 때는 얻어맞은 때도 있지만 가족사로 시비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관촌수필」을 쓴 것은 잘한 거죠. 선수를 기막히게 잘 친 거에요. 펜을 굽히지 않은 결실로, 오늘 우리는 1974년 11월 18일에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시위를 벌였고, 그를 계기로 자유실천 문인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주화 운동의 일선에 서왔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펜을 굽히지 않아 온 결실의 하나로 여러분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겁니다. 지금도 군사 문화가 계속된다면 연사로 초청될 리도 없고 이런 사랑방을 마음대로 열 수도 없었을 겁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에는 피부로 느끼실 분도 계시겠고, 못 느끼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새내기 대학생으로서는 민주화 운동이니 반독재 운동이 별로 실감이 안 나겠지만, 김지하 오적이 발표된 1970년부터 문민정부까지 수많은 사람이 옥고를 마다 않으며 부단히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관촌수필」을 읽은 분들 가운데에는 이 소설이 도대체 왜 이렇게 안 읽히느냐, 왜 이렇게 까다로우냐라는 의문을 가질 겁니다. 이건 변명이 아니라 너무 쉽게 좔좔 쓰면 누가 읽어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것 같아서, 골머리 아픈 소리로 덮어야만 되지 않느냐 생각한 거죠.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쓴 소설이 저의 장편 「장한몽(長恨夢)」입니다. 쉽게 썼다면 발표도 하지 못했고 빛도 못 봤을 것입니다. 잘 안 읽히게 까다롭게 써야 통과가 됩디다. 거기에 재미 들려 가지고 어렵게 쓰기로 한 거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세계명작을 읽어보면 쉬운 소설이 어디 있습니까. 「관촌수필」이 명작이라는 얘기는 아니고, 세계명작은 다 안 읽히게 되어 있어요. 잘 읽히면 명작이 아니죠. 그냥 재미있는 소설이지요. 「관촌수필」이 왜 연작이냐라는 말이 있는데, 농사를 지을 때 해마다 같은 땅에 똑같은 종자를 심는 걸 연작(連作)이라고 하는 거에요. 벼 같은 것은 연작 피해라는 게 없지만 고추니 마늘이니 하는 것들은 똑같은 밭에다 똑같은 작물을 계속 심으면 그 다음부터는 병충해가 심해지고 소출도 적어지고 그렇지요. 이와는 다른 뜻으로 관련된 련(連)자로 읽히는 연작(連作)은 배경이 같거나 주인공이 같거나 사건의 통일성이 있거나 하지요. 그렇게 이어지는 소설을 연작 소설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써나간 데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 때만 해도 제가 무명작가라서 긴 소설을 쓸 지면을 제공하는 사람도 없고 해서, 혹시 누가 쓰라고 하면 띄엄띄엄 여기저기 쓴 거죠. 말이 연작이 된 거지, 일부러 의도적으로 한 거는 아닙니다. 그 때는 참 지면이 궁했어요. 「현대문학」과 제가 편집하던 「월간문학」밖에 없었어요. 「창작과 비평」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남들이 볼 땐 동인지 비슷하게 취급하고 문예지 취급도 안 하던 시대라서, 여기저기 띄엄띄엄 쓰다 보니까 단편이라면 하나 하나 독립된 단편일 수도 있고, 좍 이어 놓으면 장편으로 읽힐 수도 있도록 쓰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통일성이 별로 없는 것도 그렇지만, 엄혹한 시대, 살벌하고 삼엄한 시대에 감옥 안 가고 전과자 안 되고 쓸 것 쓰면서 먹고 사는 방법을 취하다 보니까, 글은 글대로 까다롭게 써지고 재미있게 쓸 것도 덜 재미있게 되고 일관성이 없어지곤 했지요. 변명이 아니라 사실 그 시대에는 그렇게 밖에 쓸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읽어 보시면 '참 안 읽히는데, 이 사람 밥먹고 살기는 틀렸구나' 하시겠지만 저도 「관촌수필」로 지금까지 밥 먹고 산 적은 없습니다. 글써서 밥먹고 살면서도 무슨 글을 써서 밥 먹고 살았느냐고 하면 무엇이라고 내놓을 것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형편없는 작가지요. 그런데 「관촌수필」은 문학과 지성사에서 처음에 출판이 된 이래 지금까지 유일하게 내 판권이 죽지 않고 돌아가는 책 중의 하나입니다. 재작년에 문학과 지성사에서 최인훈 선생의 「광장」하고 조세희 씨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100쇄 기념식을 했습니다. 백 번 찍었다는 얘기죠. 그런데 「관촌 수필」은 1977년에 처음 찍어서 지금까지 3판 30쇄를 거듭했습니다. 2년 전에 100쇄 기념을 한 난쟁이에 비해서는 진짜 난쟁이지요. 그러나 나 같은 사람 입장에서는 그것도 참 기적 같아요. 옛날에 제가 신춘문예에 떨어지고, 떨어졌다는 말도 못하고 창피해서 전전긍긍할 때 김동리선생께 세배를 갔더니, 자네는 신춘문예 응모 같은 것도 안 하는 거야 합디다. 그런데 노상 떨어진다고 했더니 '그럴 거다. 그걸 누가 읽어내겠느냐. 네 글은 나밖에 못 읽는다. 다시 써오너라. 내가 추천해 주마' 하셨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신춘문예에 응모한 적도 없고, 그래서 나를 길러서 작가를 만들어준 스승이 인정하면 됐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은 읽든 말든 저는 안중에 없게 되었습니다. 난 김동리 선생님한테 인정받으면 됐다고 생각해요. 심지어는 어떤 식이냐면 김동리 선생님은 술은 약주는 좋아하시지만 담배는 전혀 입에 대시지 않는 분이신데, 선생님과 얘기하다가 잠깐 나갔다 들어오고 담배 피우러 들락날락 하니까 동리 선생님이 그냥 피우라고 해서 80 노인 앞에서 담배를 피웠어요. 그 다음부터는 무서운 사람이 없었어요. 김동리 선생님 앞에서 담배를 피웠는데 무서운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나는 오로지 제일 무섭고 제일 어려운 건 그 한 분 외에는 없기 때문에, 스승인 동리 선생께서 인정하면 됐다 생각합니다. 흠 없기보다 신선하고 패기 있는 글을 선생께서는 소설에 무슨 '수필'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글 쓴 사람은 저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라고도 말씀하셨지요. 남에게는 신기하게 생각될지 몰라도 적잖은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서점에 가서 「관촌수필」을 달라고 하면, 서점 주인이 수필 코너를 한참 찾다가 그런 책 없다고 해요. 간혹 수필 분야에 있는 수도 있고요. 사러 왔다가 신경질 나서 안 사고 간 사람이 수두룩해요. 굉장히 불이익을 당한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해명을 할 필요가 있어요. 수필이라는 건 왜 붙였느냐는 거에요. 저는 그동안 신춘문예 심사를 여러 번 한 적이 있는데, 심사를 하다 보면 신춘문예용이라는 게 있습니다. 신춘문예용이란 게 뭐냐 하면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앞뒤 구성이나 짜임새가 꽉 짜여 있고, 참 예쁜 작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심사하는 사람들은 별로 예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사하는 사람들은 대담하게 새롭고 신인다운 신선한 것을 좋아합니다. 기성작가나 노련한 작가처럼 꽉 짜여 있는 작품을 보면 '신춘문예용으로 썼다. 이런 걸 가지고는 이 사람의 장래를 짐작하고 점치기가 쉽지 않다'라고 보는 게 통념화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때 신춘문예 심사한 것도 아니지만 저도 초기 작품들은 동리 선생한테 배웠기 때문에 그분 가르쳐주신 대로 앞뒤 꽉 맞춰 쓴 글이 많지요. 자로 재듯이. 그런데 그걸 몇 번 하다 보니 지겨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문예지 편집을 하다 보면, 노상 원고로 읽고, 교정 보느라 두세 번은 읽게 되죠. 도식적으로 기계적으로 꽉 짜여진 소설을 보면 싫증나기 시작해요. '나는 이걸 파괴할 필요가 있다. 벗어나서 규정이 안 맞더라도 마음대로 쓰고 싶다. 소설 작법에 의한 소설 창작은 나는 졸업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1972년에 이미 했어요. '그런 방법이 뭐냐. 내 멋대로 쓰려면 제목을 수필이라고 붙이자. 붓 가는 대로 쓴다고 해서 수필이라고 붙이면, 왜 구성이 이러냐 시비 걸지 않을 것이다. 누가 이렇게 소설의 규정에 안 맞는다고 하면 수필을 썼다'고 하자. '수필'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이렇습니다. 「관촌수필」 일화 중의 하나를 말씀드리죠. 김지하 씨를 자꾸 들먹거려서 본의 아니게 미안하기는 한데, 그가 「오적」이라는 시를 가지고 고통을 당할 때부터 친구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친구 될 이유는 없습니다. 출신지도 다르고 학교도 다르고 분야도 다르지요. 다 다른데 나이 30이 넘어서 만났고 동갑내기라는 공통점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런지 둘 다 술을 많이 마셨다든지, 줄담배를 피웠고, 동갑내기라는 세 가지 이유로 친구가 되었는데, 그 뒤로 이분이 굉장히 고통을 많이 겪었지요. 「비어(蜚語)」라는 작품이 나왔을 때 또 한 번 그런 일을 당했고,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주동자로 8년인지 9년인지 옥살이를 했구요. 10·26 날 때까지 계속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창살 있는 감옥 생활을 하고 우리는 밖에서 창살 없는 감옥살이를 한다고도 했지요. 쉽게 말하면 친구가 옥살이를 하고 있고, 시인이 단지 권력자의 눈밖에 나는 글을 썼다는 이유 하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감형되어서 무기 징역을 살고 있는 이 사회 자체가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거지요. 그 친구는 창살 있는 감옥에 살고 우리는 창살 없는 감옥살이를 하느라, 늘 피를 말리는 옥살이를 하는 사람만은 못하겠지만 고통을 겪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늘 기회만 있으면 김지하 문학의 밤도 열고, 장소가 없으면 성당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김지하 구출위원회도 만들고 하였지요. 또 김지하 무료 변론하는 분들에게 드릴 최소한의 사례비를 갹출하느라 동분서주하기도 했지요. 민권 변호사 효시 하면 돌아가신 황인철 변호사와 홍성우 두 분입니다. 이분들은 꾸준히 한 달에 한 번씩 김지하씨의 면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변호사가 면회를 갈 때마다 김지하씨가 하는 얘기가 있어요. '이문구한테 전해라. 제발 반정부 활동이니 반체제 활동이니 민주화 이런 것 좀 하지 말아라. 이문구는 「관촌수필」만 쓰라고 해라. 투쟁은 내가 할 테니 이 문구는 글만 쓰라고 해라. 나는 「관촌수필」 보고 여러 번 울었다.' 변호사가 갔다 오면 나를 불러서 김지하가 한 말을 전해주곤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더하지요. 아주 뜨거운 우정 같은 거지요. 김지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사상이 불손한 건 아닌가, 근본적으로 삐딱한 건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할 수 있는데, 저는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고 삭신이 푹 떨려요. 그 감동의 이유는 딱 한 가지,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예술가로구나 하는 것이지요. 시인이 시를 이해하기는 쉽고 소설가가 소설을 이해하기는 쉬운데, 시인이 소설을 읽고 저렇게 할 정도면, 시인 김지하란 그야말로 예술의 화신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김지하에 대한 우정이라든지 애정이라든지 신뢰가 굉장히 깊어졌습니다. 분단의 상처를 안고 죽은 이들을 복권시켜 소설이나 문학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무엇이다라고 말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소설이건 시건, 희곡이건, 수필이건 읽은 사람에게 일부라도 위로가 된다면, 쓸쓸한 사람, 외로운 사람, 고통스러운 사람, 아픈 사람,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무엇인가 불편한 사람에게 직접 간접적으로 정서적으로 따뜻하게 위로가 되는 글이라면 그건 문학이고 예술이다. 그렇지 않으면 문학이라고 하기에 이상하다. 예술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글 쓴 지가 35년째 됩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당신 대표작이 뭐냐고 묻는 말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짐작이 가겠지요. 여러 번 들었으리라고. 그때마다 내 대표작은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남들은 계속 「관촌수필」을 지목을 해요. 저는 그렇다고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김지하라는 한 친구가 혼자 독방에서 정말로 의지할 데도 없고 믿을 데도 없을 때 그나마 제 졸작을 읽고, 눈물 지으면서 그 사연을 작가에게 전하라,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글만 쓰라고 해라 해주었던 걸 생각하면, 혹시 내 대표작이 아닌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흔히 묻는 분들이 모델이 있느냐 물어오곤 하는데, 모델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습니다. 모델이 있다 하더라도 한 사람이 있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사람이 합쳐져서 한 사람이 되기도 하지요. 그러나 옹점이와 석공이 등 서너 주인공의 모델은 확실히 있습니다. 대개 행방불명이 되었거나 죽었고, 그러나 모델이 있다 하더라도 얘기는 한 10%만 채용하고 나머지는 상상력으로 메꾼 것이지요. 제 소설의 무대는 수천명이 사는 시내 한복판입니다. 이 책을 읽고 제 작품의 무대를 찾은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30명 이상이 찾을 때는 제가 동행하여 안내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반은 혈려서 25층짜리 아파트가 열대여섯 동 들어서 있고, 동네가 거의 없어져 버렸습니다. 찾는 사람들에게 시달리던 시(市)에서 문학비 비숫하게 오석을 세워 놓았습니다. 명칭은 마을비지만 제 문학적 행적과 「관촌수필」의 무대라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제가 따라가지 않더라도 알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든 그것이 SBS 창사 1주년 기념작으로 선정되어 36부작으로 편성 방영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보령 땅에서는 SBS가 안 나오던 시절이라, 주말극으로 6개월 이상 방영되는 동안 테이프를 사다가 다방마다 돌리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5공 때만 해도 신문에 글 한 줄, 방송에 얼굴 한번 내밀 수 없던 저였는데, 가친의 성함이 실명으로 텔레비전에 나오고 제 이름이 나오고 하는 걸 보며, 사람들은 세상 참 많이 변했다고 하더군요. 말도 적지 않아서 극우파에서 전쟁이 얼마나 되었다고, 저런 내용이 방송을 탈 수 있느냐고도 했지요. 그런데 공론은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다. 언제 적 이야긴데 막을 수 있느냐'는 쪽으로 기울어지더군요. 김지하에게 저는 말했습니다. 내가 글을 써서 별로 보람은 없었지만, 이것이 드라마화됨으로써 우리 아버지나 우리 아버지와 함께 죽은 사람들을 복권시켰다고 생각한다고요. 정신적으로는. 그래서 나는 효자라고 생각한다라고.◈ 略 歷 1941년 4월12일, 충청남도 보령군 대천면 대천리 387번지 관촌마을(지금의 보령시 대관동)에서 출생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 김동리·서정주·박목월·조연현·김구용 등을 은사로 모심. 1965년 단편 「다갈라 불망비(不忘碑)」로 『현대문학』9월호에 초회 추천. 1966년 단편 「백결(百結)」로 『현대문학』7월호에 추천 완료. 1968년 김동리 선생을 도와서 『월간문학』지 창간에 참여. 1970년 『월간문학』편집장이 됨. 장편 『장한몽(長恨夢)』 연재(『창작과 비평』70년 겨울호~71년 가을호). 1972년 첫 단편집 『이 풍진 세상을』을 정음사에서, 장편 『장한몽』을 문고판 한국문학전집의 하나로 삼성출판사에서 간행.『장한몽』으로 제5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1973년 김동리 선생을 도와서 월간 『한국문학』지 창간, 편집장이 됨. 1974년 후일 민족문학작가회의 모체가 된 자유실천문인협회를 발족, 실무간사를 맡음. 중·단편집『해벽』(창작과비평) 간행. 1975년 『한국문학』 편집장직 사임. 한국소설가협회 창립 발기인. 장편 『吳子龍』1부 연재(『월간중앙』1월호~12월호). 단편선집『몽금포타령』을 삼중당에서 문고판으로 간행. 1976년 임경애(任景愛)씨와 결혼. 1977년 2월 한진출판사 편집장으로 취업. 5월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행정리, 이른바 발안 쇠면마을로 이거. 7월 한진출판사 편집고문으로 직책을 옮기고,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감사에 피선(이후 95년까지 이사 연임). 『우리동네』연작 시작. 연작소설『관촌수필』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중·단편집『엉겅퀴 잎새』를 열화당에서, 산문집『아픈 사랑 이야기』를 진문출판에서 간행 1978년 단편집『으악새 우는 사연』을 한진출판사에서 간행. 『우리동네 李氏』로 제5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79년 무크지『실천문학』편집위원. 산문집『지금은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를 전예원에서 간행. 1980년 서울로 이사. 콩트집『누구는 누구만 못해서 못허나』를 시인사에서 간행하고 판금되고, 국보위에서 문인으로는 유일하게 정치쇄신특별법 해당자인 정치활동규제자로 발표. 1981년 연작소설『우리 동네』민음사에서 간행. 1982년 제1회 신동엽창작기금 수혜. 1983년 정치규제로부터 해금됨. 1984년 한진출판사 편집고문을 사임하고 실천문학사 발행인으로 취임(88년까지 4년간 역임). 장편『산 넘어 남촌』연재(『농민신문』84년 1월~85년 12월). 1985년 계간 『실천문학』을 창간했으나 언론기본법 제1호에 적용, 문공부청문회 제1호를 거쳐 강제 폐간당함. 콩트집『그리고 기타 여러분』을 최일남, 송기숙과 공저로 사회발전연구소에서 간행. 1987년 단편집『다가오는 소리』를 삼중당에서, 콩트집『몸으로 살러 온 사내』를 산하에서 간행. 1989년 가족을 서울에 남겨두고 요양을 목적으로 충남 보령군 청라면 장산리로 내려감. 제2회 춘강문예창작기금 수혜. 1990년 여름에 김동리 선생이 쓰러지자 상경하여 석 달간 간병. 장편『산 너머 남촌』을 창작과비평사에서, 『(소설)역사인물열전 』을 스포츠서울에서 간행. 제7회 요산문학상 수상. 1991년 제9회 흙의 문예상 수상. 제15회 펜문학상 수상. 1992년 장편『매월당 김시습』을 문이당에서 간행. 제2회 서라벌문학상 수상. 1993년 단편집『유자소전』을 벽호에서, 산문집『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보다』를 열린세상사에서 간행. 「유자소전」으로 제8회 만해문학상 수상. 제4회 농민문화상 수상. 1994년 산문집 『글밭을 일구는 사람들』을 열린세상사에서 간행. 1996년 '문학의 해' 집행위원회 홍보·출판분과위원장으로 활동. '이문구 전집'을 솔출판사에서 간행하기 시작함. 1997년 한국소설가협회 상임이사 겸 계간 『한국소설』편집위원장. 산문집『나는 남에게 누구인가』를 도서출판 엔터에서 간행. 2000년 (사)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에 취임. 2000년 창작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문학동네)간행. 동인문학상 수상. 2001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 2003년 2월 25일 밤 10시 40분 영면. 대한민국문화훈장 은장관 추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