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총의 묘
설총(薛聰)의 아버지는 원효대사, 할아버지는 담날(談捺)다.
어머니는 태종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로, 원효가 파계하여 요석궁에서 지낸 뒤 낳은 아이로, 어릴 때 궁궐에서 자라났는데 천성이 명랑하고 총명하여
본 이름 외에 총지(聰智)라고도 불렀다.
철이 들어서 아버지가 훌륭한 원효대사임을 알고, 총도 승려가 되어 불경 공부를 깊이
하다가 중 옷을 벗고는 스스로 소성거사(아버지와 같이 소성거사지만 한문으로 아버지는 小姓이고 아들은 小性이다.)라 이름 짓고, 한문으로 된 많은
책을 쉬운 이두(吏讀)로 읽도록 만들어 후배들을 가르쳤다.
무열왕(29대)이 외할아버지고, 문무왕(30대)은 외삼촌이니,
신문왕(31대)은 외사촌이다. 신문왕으로서는 설총이 고종사촌이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설총의 후손이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갔을
때, 그 나라 도사 한 분이 "일찍이 원효거사가 지은 금강삼매론을 읽고서 그 분을 뵙지 못한 것을 매우 한스럽게 여겼더니 신라국 설 사신이 바로
거사의 자손이라고 하니 그를 만난 것같이 기뻐서 시를 지어 드립니다."하고는 지어준 시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설총의 부인이나
자손에 대한 기록이 다른 곳에는 전하지 않는다. 고려 현종 13년(1022)에 그 분의 학술적 공로와 업적을 기려 홍유후(弘儒候)로 추증하였고,
그후 서악서원에 위패를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라 때 사람들 대부분의 무덤을 잘 알 수 없는 것은 공통된 현상인데, 설씨
문중에서도 확실한 무덤 위치를 몰라 애를 태우고 있다가, 30여 년 전 후손 아무개의 꿈에 할아버지가 현몽하여 "내가 보문리에 묻혀 있는데, 그
마을 이 아무 댁에 가서 물어보라."하므로
다음날 보문 마을에 가서 이씨 어른을 만나 인사를 드리니 "그렇지 않아도 홍유후 설 선생
묘라고 전해오는 무덤이 있는데 관심있는 후손을 못 만나 이러고 있었는데 무덤을 찾아드리리다."하면서 찾아낸 묘가 바로 설총의
무덤이다.
무덤은 신라 진평왕릉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는데, 경주시내에서
보문 저수지로 가는 4번 국도와 경포산업우회도로가 만나는 네거리에서 동쪽으로 700m 가면 진입로임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거기서 농로를 따라
1,400m 더 가면, 단기 4317년(1984년)에 세운 비석과 상석이 있는 무덤이 있으니 곧 설총의 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