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하동군 화개면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 10리길 도로변에는 벚꽃이 봄바람에 너울너울 춤춘다. 곡우(穀雨)를 열하루 앞둔 쌍계사 근처의 야생차 밭에는 추운 겨울을 이겨낸 새순이 살짝 얼굴을 드러낸다.
박경리 선생이 26년에 걸쳐 탈고한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인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뜰에도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너른 들판에는 보리 싹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버드나무 가지에도 물이 오른다.
'토지'속의 인물인 구천이 출생에 맺힌 한을 풀기 위해 밤마다 쏘다녔던 고소성 뒷산에도 진달래와 개나리가 활짝 피어난다. 평사리 앞 악양루 근처 섬진강에는 곰보 홀애비 윤보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의 경계인 팔공산에서 발원해 곡성~구례를 거쳐 광양만으로 빠져나가는 섬진강의 하얀 모래는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인다. 강변에는 재첩을 잡는 아낙네의 손길이 분주하고 그 위로 갈매기들이 한가로이 날갯짓을 한다. 그러나 지리산 자락 해발 8백m에 자리잡은 청학동에는 아직도 봄기운이 멀게만 느껴진다.
*쌍계사 벚꽃 10리 길.......
작가 김동리는 소설 '역마(驛馬)'에서 화개장터를 두고 "지리산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쌍계사 세이암(洗耳菴)의 화개협 시오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고 경상.전라 양도 접경이 한 두 군데 일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일렀다"고 소개한다.
지리산 산자락이 주위를 두른 외진 곳에 위치한 화개는 예전부터 '장터'로 더욱 유명한 곳이다. 한창 때는 인근 12개 고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마을 전체가 북적거렸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두릅.고사리 등 산나물은 물론 참나무를 베어 만든 숯이 화갯골에서 내려왔다. 전라도 구례에서는 실.바늘.면경.피륙 등이 넘어왔고 하동에서는 김.미역.소금 같은 건어물 등이 섬진강 길을 따라 올라왔다. 교통이 발달하기 전만 해도 음력 1.6일에는 주민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국내 5대장의 하나로 손꼽혔다.
하동 화개 일대에는 장터 입구에서 쌍계사를 지나 신흥까지 장장 12㎞의 산야에 야생 차밭이 있다.
신라 흥덕왕 3년(828)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이 종자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줄기인 이곳에 처음 심었다고 한다. 그후 830년 진감선사가 차를 번식시켰으며 이때부터 차가 일반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곳의 차는 대나무의 이슬을 먹고 자란 잎을 따서 만들어 죽로(竹露)차,참새의 혓바닥과 같이 작은 잎으로 만들어 작설(雀舌)차라고도 불린다. 곡우(穀雨.4월 20일)를 전후해 차를 따기 시작하는데 수확시점에 따라 우전.세작.중작.대작으로 나누고 있으며 맨 처음 따는 우전을 최상품으로 꼽는다. 근처 도로에는 야생차를 시음할 수 있는 다원이 줄지어 있다.
*평사리 최참판댁.......
평사리 뜰을 끼고 승용차로 조금만 들어가면 '토지'속에 나오는 만석꾼 최씨의 집(최참판댁)이 복원돼 있다. 세월의 이끼가 덕지덕지 낀 마을 돌담길을 5분여 올라가면 언덕 위에 자리잡은 최참판댁에 닿는다. 이곳에서는 평사리 뜰이 훤히 내려다 보이고 지리산과 광양 백운산 사이로 흘러내리는 섬진강 백사장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잊혀져 가는 옛 농촌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곳이다.
'토지'는 박경리 선생이 1969년 처음 쓰기 시작해 95년 제5부 16권으로 탈고한 대하소설이다.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을미사변 등이 지나간 1897년 한가위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평사리)을 비롯해 지리산.서울.간도.러시아.일본.부산.진주 등에서 펼쳐지는 최씨 집안의 가족사를 그렸다.
최참판댁에는 소설에서 윤씨 부인이 사용했던 안방과 별당채.행랑채.초당.누각 등이 복원돼 있고 박경리 선생의 연보와 작품 '토지'에 대한 설명이 있어 관람객의 이해를 도와준다. 평사리 들판을 가로질러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며 작가가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를 가슴에 가득 담아올 수 있다.
*청학동 도인촌.......
통일신라 시대 최치원 선생이 은거했었다는 곳이다. 1900년부터 '유불선합일갱정유도(儒佛仙合一更正儒道)'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흰 옷을 입고 머리를 땋거나 상투를 틀며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외부와 차단된 생활을 해오던 이곳에도 80년대 이후 문명의 이기가 유입돼 지금은 관광객들을 위한 민박과 식당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 방식과 사상만큼은 옛 그대로다. 하동읍내에서 승용차로는 40여분 거리며 시내버스가 운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