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李舜臣)의 한산도가(閑山島歌)와 보성 열선루(列仙樓)
1795년 간행된 이순신(李舜臣,1545~1598)의『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1권에 한산도가(閑山島歌)가 남아있다.
1595년(을미년) 8월 중추절 무렵 한산도 제승당에서 이순신이 나라사랑의 충정으로 수루에 홀로앉아 감회에 젖어 먹을 갈아 지은 시로 알려져 있다. 원래 한시(漢詩)가 아니라 언문의 형태를 한자로 옮겼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아래의 순서대로 오늘날 알려지게 되는 것 같다.
한산도가(閑山島歌)
이순신(李舜臣,1545~1598)
한산(閑山) 셤 달 밝은 밤의 수루(戍樓, 적을 살펴보기위해 지은 성 위의 누각)에 혼자 안자
큰 칼 녑희 차고 깁흔 시름 하는 적의
어듸셔 일성호가(一聲胡笳, 한 곡조의 피리 소리)는 남의 애를 긋는이
閑山島歌 a_055_114c
閑山島月明夜。上戍樓。撫大刀深愁時。何處一聲羌笛更添愁。
按趙慶男亂中雜錄。有閑山吟咏二十韻云。而屢經兵燹。散佚不傳。只有一聯一歌傳於世。可勝惜哉。
한산도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앉아
큰칼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니
조선 수군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음력 7월 14일부터 16일 사이에 있었던 칠천량(漆川梁) 물안해역(勿安海域)에서 크게 패전(敗戰)하였다. 현재 경남 거제시 하청면 칠천도 앞바다에서 있었던 칠천량패전(漆川梁敗戰)은 원균(元均,1540~1597)의 지휘를 받은 조선 수군이 왜군과 싸워 거북선과 판옥선 등 150척 안팎의 전선이 파손되고 1만여명의 병사가 숨진 최대 패전이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7월 18일에 원균의 칠천량패전(漆川梁敗戰)을 알게 된다. 22일에는 경상우수사 배설(裵楔,1551~1599)로부터 전황을 들었으며, 8월 3일에는 선전관 양호(梁護)로부터 교유서(敎諭書)를 받고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에 복귀한다. 이어 곧바로 구례, 옥과를 거쳐 7일에는 순천에 당도한 후 낙안을 거쳐 보성에 도착하여 8월 9일 부터 16일에 걸쳐 수군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1551~1599)은 칠천량패전 때 전세가 불리해지자, 끝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듣지 않고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한산도(閑山島)를 거쳐 전라도로 피신했던 자로, 그 후 다시 통제사로 부임한 이순신 지휘 아래에 있다가 신병을 핑계로 도망치다 권율(權慄)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12척의 배가 훗날 요긴하게 쓰인다.
출처 : 1597(정유년) 난중일기
1597년 8월 9~16일 전라도 보성 땅에서 이순신의 행적을 <난중일기>를 통해 살펴보자.
8월 9일(양력 9월 19일) <정묘> 맑다.
일찍 떠나 낙안군에 이르니, 5리(里)까지나 사람들이 많이 나와 환영하였다. 백성들이 달아나고 흩어진 까닭을 물으니, 모두 하는 말이, “병마사가 적이 쳐들어온다고 퍼뜨리며 창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그 때문에 이와같이 백성들도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관청에 들어가니 적막하여 사람의 소리가 없었다.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 김제군수 고봉상(高鳳翔) 등이 와서, 산골에서 내려와서, 병마사의 처사가 뒤죽박죽 이었다고 말하면서 하는 짓을 짐작했다고 하니, 패망한 것을 알만하다. 관청과 창고가 모두 다 타버리고 관리와 마을 사람들이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서 말하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10리쯤 오니, 길가에 동네 어른들이 늘어서서 술병을 다투어 바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저녁에 보성군 조양창(현재 보성군 조성면 조성리 고내마을)에 이르니, 사람은 하나도 없고, 창고에는 곡식이 묶어진 채 그대로였다. 그래서, 군관 4명을 시켜 지키게 하고, 나는 김안도(金安道)의 집에서 잤다. 그 집 주인은 벌써 피난 나가 버렸다.
8월 10일(양력 9월 20일) <무진> 맑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그대로 김안도(金安道)의 집에 머물렀다. 동지 배홍립(裵興立,1546∼1608)도 같이 머물렀다.
8월 11일(양력 9월 21일) <기사> 맑다.
아침에 박곡(朴谷) 양산원(梁山沅 - 족보에는 沆)의 집[현재 보성군 득량면 송곡리 박실마을]으로 옮겼다. 이 집 주인도 벌써 바다로 피란갔고 곡식은 가득 쌓여있었다. 저녁 나절에 송희립(宋希立,1553~1623), 최대성(崔大晟,1553~1597)이 와서 봤다.
8월 12일(양력 9월 22일) <경오> 맑다.
아침에 장계를 초잡고 그대로 머물렀다. 저녁 나절에 거제현령(안위), 발포만호(소계남)가 들어와 명령을 들었다. 그들 편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 감당해내지도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 나랏일을 크게 그릇 치건마는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랴. 보성군수가 왔다.
8월 13일(양력 9월 23일) <신미> 맑다.
거제현령 안위(安衛) 및 발포만호 소계남(蘇系男)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갔다. 수사(배설)와 여러 장수 및 피해나온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들었다. 우후 이몽구(李夢龜,1554~?)가 전령을 받고 들어왔는데, 본영의 군기를 하나도 옮겨 실어오지 않은 죄로 곤장 80대를 쳐서 보냈다. 하동현감 신진(申秦)이 와서, “초3일에 내가 떠난 뒤에 진주 정개산성과 벽견산성도 풀어 흩어지니 병마사가 바깥진(外陣)을 제 손으로 불질렀다.”고 전하였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8월 14일(양력 9월 24일) <임신>
아침에 각각으로 장계 7통을 봉하여 윤선각(尹先覺,1543~1611)으로 하여금 지니고 가게 했다. 저녁에 어사 임몽정(任夢正, 광해군 후궁 소용임씨의 부친)을 만나러 보성에 갔다가 열선루(列仙樓)[보성군 보성 관아의 누락으로 성종 17년(1486)에 취음정(翠蔭亭)을 중건하여 열선루(列仙樓)로 개칭한 후 17세기 중반에 없어진 유래가 오랜 누정으로 보성군청과 보성 초등학교(보성북교) 뒤편의 보성중앙교회 자리.]에서 잤다. 밤에 큰비가 쏟아지듯 내렸다.
8월 15일(양력 9월 25일) <계유> 비 오다가 저녁나절에 맑게 개었다.
식사를 하고 난 뒤에 열선루(列仙樓)에 앉아있으니, 선전관 박천봉(朴天鳳)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8월 7일에 만들어진 공문이었다. 영의정(유성룡)은 경기 비장으로 나가 순시 중이라고 했다. 곧 잘 받들어 받았다는 장계를 썻다. 보성의 군기를 검열하여 네 말에 나누어 실었다. 저녁에 밝은 달이 수루 위를 비추니 심회가 편치 않았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잠을 자지 못했다.
8월 16일(양력 9월 26일) <갑술> 맑다.
아침에 보성군수와 군관 등을 굴암으로 보내어 도피한 관리들을 찾아오게 했다. 선전관 박천봉(朴天鳳)이 돌아갔다. 그래서 나주목사와 어사 임몽정에게 답장을 부쳤다. 박사명(朴士明)의 집에 심부름꾼을 보냈더니, 박사명의 집은 이미 비어있었다고 한다. 오후에 활장이(弓匠) 지이(智伊)와 태귀생(太貴生), 선의(先衣), 대남(大男) 등이 들어왔다. 김희방(金希方), 김붕만(金鵬萬)이 뒤따라 왔다.
8월 17일(양력 9월 27일) <을해> 맑다.
아침 식사를 하고나서, 장흥땅 백사정(현 보성군 회천면)에 이르러 말을 먹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군영구미(현 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어버렸다. 수사 배설(裵楔)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장흥의 군량감관과 색리가 군량을 맘대로 모조리 훔쳐 나누어 갈 적에 마침 그 때 이르러 잡아다가 호되게 곤장을 쳤다. 거기서 잤다. 배설(裵楔)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 괘씸하다.
그러나 초대 독도박물관장을 지낸 서지학자 故 이종학(李鍾學)씨는 한산도가(寒山島歌)의 한시 원본을 공개했다. 지금 껏 알려진 1595년(을미년) 8월 중추절 무렵 한산도 제승당에서 쓴 한산도가(閑山島歌)가 아니라 1597년 8월 15일 보성(寶城) 열선루(列仙樓)에서 지은 한산도가(寒山島歌)라는 것이다.
1597년 8월 15일 보성(寶城) 열선루(列仙樓)에서 적은 병력으로 적을 대항하기 어려우니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편입해 싸우라는 선조 임금이 내린 밀지를 선전관 박천봉(朴天鳳)을 통해 받아보고 조정에 올린 장계가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9권 부록 1에 조카 이분(李芬)이 쓴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행록(行錄)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今臣戰船尙有十二。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戰船雖寡。微臣不死。則賊不敢侮我矣。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戰船)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방책이 있습니다. 전선이 비록 적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아니했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가벼이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이 날 이순신(李舜臣)은 이런 착찹한 마음을 시로 표현한 것이 한산도가(寒山島歌)라는 주장이다. 그 날의 난중일기를 다시 보자.
난중일기 1597년 8월 15일(양력 9월 25일) <계유> 비 오다가 저녁나절에 맑게 개었다.
식사를 하고 난 뒤에 열선루(列仙樓)에 앉아있으니, 선전관 박천봉(朴天鳳)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8월 7일에 만들어진 공문이었다. 영의정(유성룡)은 경기 비장으로 나가 순시 중이라고 했다. 곧 잘 받들어 받았다는 장계를 썻다. 보성의 군기를 검열하여 네 말에 나누어 실었다. 저녁에 밝은 달이 수루 위를 비추니 심회가 편치 않았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잠을 자지 못했다.
그 후 한산도가(寒山島歌)를 작성했다는 주장이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싸늘한 산과 바닷섬 달만이 밤을 밝히는데(寒山島月明夜)
홀로 수루에 올라 큰칼 쓰다듬으려니 근심이 깊어지네(上戍樓 撫大刀 深愁時)
어디서 들려오는가 가녀린 피리소리(何處 一聲羌笛)
근심만 더하여라(更添愁)
이 시는 1597년 8월 15일 보성(寶城) 열선루(列仙樓)에서 지은 것으로, 이순신이 순국 하루 전날(1598년 11월 18일)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1543~1607)에게 보내진 것이라고 하는 증거는 ‘진도독합하’(陳都督閤下)라는 서신의 제목이 붙어있고 말미에 ‘정유 중추 이순신음’(丁酉仲秋李舜信吟)이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충무공 친필의 한산도가(寒山島歌)를 이종학(李鍾學)씨가 1998년 국립 현충사에 기증했다고 한다.
이순신과 보성은 또 다른 인연이 있다. 이순신(李舜臣,1545~1598)은 상주방씨(尙州方氏)와 1565년 혼인했는데, 상주방씨는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 1514~?)의 외동딸이었다. 방진(方震)은 무과에 합격한 후 1530년대에 보성군수를 지냈다고 한다. 추정하건데 1535~1537년 제주현감(濟州縣監)을 지냈으므로, 그 후 보성군수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제주읍지(濟州邑誌) 제주읍지(濟州邑誌) 선생안(先生案)에 방진(方震)의 기록을 보면
乙未(1535)正月到任 ~ 丁酉(1537)十一月 遞歸 체귀(遞歸) : 벼슬을 내놓고 돌아옴
참고 : 조선시대 역대 보성군수 인명록
출처 : 일본 장수, 명나라 사신이 본 이순신
32권으로 된『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에 수록된 내용이라고 합니다. 혹자는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한 글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 중에 일부를 발췌해 옮깁니다.
1. 일본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1554~1626)가 본 이순신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 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 장수 정도였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써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갔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2. 명나라 사신 운덕이 본 이순신
하루는 어두운 밤 눈이 몹시 내리고 그 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듯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 속을 통제사 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 까닭으로 이 어둡고 추운 바람 속으로 거닐고 있는 것일까?
궁금하던 차에 한번 따라 가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던 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으로 가는 것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영감 손에는 한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 중 효행 편을 읽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 날 알아보니 그 왜군의 나이는 15세이더라. 10살의 어린 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이 아이가 포로가 된 후 이를 딱히 여긴 통제사영감이 별도로 감싸주었던 것이다.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되었고 그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간간히 통제사 영감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저 두 사람을 보면 누가 어찌 서로를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 본 저 두 사람은 조선장수 대 왜군이 아닌 한 아버지와 그의 아들로 보였으니, 통제사 염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은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3. 명나라 도독 진린(陳璘,1543~1607)이 본 이순신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뛰어 날 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루 지닌바 만일 조선 수군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 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캐(훗날 청나라)를 견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 오랑캐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 이옵니다.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 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 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 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 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휘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 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 척만이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 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 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 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 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 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 이순신은 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 폐하게 충(忠)을 다할 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캐(훗날의 청국)를 견제케 하소서.
자료출처-죽산안씨(신)종친회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