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함양오씨 대종중
 
 
 
카페 게시글
●- 오대댁 손자 글방 스크랩 치악산(雉岳山) 산행기
오대댁(병연) 추천 0 조회 86 09.06.24 10:1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2009년 6월 21일 일요일

 

학교 동창들과 치악산을 가기로 한 날이다.

 

전날 토요일 종일 퍼붓던 비는 그치고

하늘은 맑게 개어 뭉게구름이 피어 오른다.

 

아침 7시 30분 복정역 앞에서 모여 관광버스를 타니

바로 외곽순환도로로 빠져 중부고속도로로 들어선다.

 

8시 반쯤 여주 휴게소에 들러 미처 못 먹은 아침들을 든 뒤

원주 행구동 산행 입구에 다다른 것이 9시 30분경이다.

 

이날 우리가 간 길이 요즈음 서울에서 원주 가는 일반적 코스 일 것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 관동대로(關東大路)의 노정은 이와는 달랐다.

 

 

관동대로(關東大路)

 

관동대로 중 서울-원주간 노정을 송강 정철의 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살펴 본다.

 

江湖(강호)애 病(병)이 깁퍼             竹林(죽림)의 누엇더니

關東(관동) 八百里(팔백니)에          方面(방면)을 맛디시니

어와 聖恩(셩은)이야 가디록 罔極(망극)하다

 

좀 쌍스럽게 옮기면 백수로 할 일 없이 집 (전남 창평)에서 엎드려 있는데

강원도 관찰사(감사)를 제수해 주시니 참 고맙다-성은이 망극하다는 정도로

관동별곡을 짓게 되는 경위 설명-도입부분이 되겠다.

 

延秋門(연츄문) 드리다라             慶會南門(경회남문) 바라보며

下直(하직)고 믈너나니             玉節(옥절)이 알패셧다

 

경복궁 서문-연추문(=영추문)으로 들어가

옥절(玉節-임금의 신표) 곧 임명장을 받아 가지고 나오다.

 

 

平丘驛(평구역) 말을 가라             黑水(흑슈)로 도라드니

蟾江(셤강)은 어듸메오             雉岳(티악)이 여긔로다

 

평구역(平邱驛) : 옛 역참제도의 역으로 현 위치는 남양주시 삼패동이다.

흑수(黑水) : 여주 북쪽의 한강 곧 여강(麗江)의 또 다른 이름이다.

섬강(蟾江) : 횡성을 지나 원주 서쪽에서 남한강으로 흘러 드는 지류

 

이상 도성(都城)-평구역-흑슈(수)-셤(섬)강-티(치)악으로

이어지는 노정을 대동여지전도에 표시해 본다.

 

 

 

 

원주(原州)

 

몇 년 전 집안 조카가 연세대 원주분교에 들어갔다.

아이는 되게 좋아하면서도 다른 대학 분교가 많은 천안이나

고대 분교가 있는 조치원보다 원주가 후진 도시 아니냐고 찜찜해 한다.

이에 필자는,

 

“얘 거 무슨 소리 하는 거니?

신라가 통일 후 전국에 구주(九州) 오소경(五小京)을 세웠다는 것은 배웠지?

그 다섯 작은 서울 곧 경주를 대신해 지방을 다스릴 도시란

북원경-원주, 중원경-충주, 서원경-청주, 남원경-남원, 금관경-김해야.

 

그러니까 아득한 옛날부터 원주는 아주 중요한 고을이었고

강원도 란 이름도 강릉과 원주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들었을 정도야.

조치원이나 천안을 어디 원주에다 감히 견주냐! “ 라고 해 주었다.

 

뭐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아주 행복하게 잘 다니고 있다.

 

 

치악산(雉岳山)

 

백두대간이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다가 오대산에서 한 줄기가 서쪽으로 벋어

치악산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 오대산-치악산 줄기는 산경표에 나오지 않는다.

 

 

사진: 산경표. 오대산-치악산 산 줄기 이름이 없다.

 

치악산이 산은 좋지만 오대산-치악산 줄기는 중요하게 여겨졌던 건 아닌 모양이다.

 

 

 

사진: 대동여지도 중 오대산-치악산

 

 

치악산 산행지도

 

이날 산행은 원주 행구동 국형사에서 시작하여 보문사를 거쳐

향로봉에 올랐다가 곧은치골-부곡으로 내려가는 코스였다.

 

 

 

국형사에서 향로봉까지 약 두 시간, 그것도 절 두 군데 돌아보는 시간

40분 빼면 한 시간 20분 남짓 치고 올라갈 때 숨이 약간 가쁠 뿐이었다.

 

절 보는 시간, 점심 시간 합하여 다섯 시간 남짓 산행은 대체적으로 편했다.

또 전 구간이 흙길이라 무르팍 아픈 사람들에게도 별 무리가 없었다.

 

 

국형사(國亨寺)

 

위 등산지도에서 보다시피 원주 행구동 쪽 치악산 등산로 입구에 있다.

 

 

사진: 절 앞 바위에 국형사(國亨寺)라고 쓰여 있다.

 

국형사(國亨寺)를 더러 국향사(國享寺) 라고도 한다.

그 까닭을 정확히는 모르겠으되, 형(亨) 글자의 아래 부분은 료(了)고,

(享)의 아래 부분은 자(子)인데 빨리 보다 보면 거의 같이 보여

한자에 약한 사람들이 혼동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 국형사 전경

 

절의 유래를 읽어 보니

 

신라 경순왕 때 무착(無着)대사가 창건하여 고문암(古文庵)이라고 하였고

고문절·웃고문절(보문사) 아랫쪽이므로 '아랫고문절'이라고도 한다…

 

….조선 정종의 둘째 공주인 희희공주가 병이 들어 이 절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완치되었으므로 정종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는 전설..

 

위 무착대사는 다른 역사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아무튼 절 창건한 분이 누군가 있었을 것 아닌가?

 

그런데 그 행적이 유식학(唯識學)으로 이름난 중국 법상종의 ‘무착’과 닮았다고 한다.

어느 때 인지 몰라도 중국 무착대사의 이미지가 이 절 창건한 스님 위에

덧붙여 진 것은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해 본다. 아님 말고…

 

역사가 신라까지 올라 간다지만 현재 가람은 대부분 근년에 지은 것이다.

 

 

동악단(東岳壇)

 

국형사에서 원주 시내가 보이는 쪽으로 동악단(東岳壇)이 있다.

 

 

사진: 동악단(東岳壇) 전경

 

안내판을 보니 조선 태조가 이 단을 쌓아 동악신(東岳神)을 봉안하고

해마다 봄 가을에 원주 인근 수령들이 모여 제사를 지냈다고 하면서

지금도 원주 치악제 때 원주시장 등 유지들이 제를 올린다고 한다.

 

또 써 있기를 오악(五岳)이란 중악(中岳)으로 계룡산,

서악(西岳) 황해도 구월산, 북악(北惡) 황해도 묘향산, 남악(南岳) 지리산

그리고 동악(東岳)으로 여기 치악산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오악은 대략 북악-백두산, 중악-서울의 북악, 남악-지리산

서악-묘향산에 동악으로는 금강산을 꼽는다.

그런데 여기 안내판은 백두산, 북악, 금강산을 빼고

구월산, 계룡산, 치악을 집어 넣었다.

 

참고로 중국에서 오악(五嶽) 은 동악(東嶽) 태산(泰山), 서악(西嶽) 화산(華山),

남악(南嶽) 형산(衡山),북악(北嶽) 항산(恒山), 중악(中嶽) 숭산(崇山)을 말한다.

 

또한 조선 태조가 이 단을 쌓아 동악신(東岳神)을 봉안하고” 부분은

사실(史實)이 아닌 듯 하다. 세종 실록 지리지 강원도 원주목 조를 보면

“명산(名山)은 치악(雉岳으로 주() 동쪽에 있는데,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 지내기를 소사(小祀)로 한다” 라고 만 되어 있지,

동악신을 봉(封)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단 원주 지방에서 치악에 제사 지내며 동악 이라고 했을 수는 있겠다.

로칼에서 그렇게 하는 거야 누가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전국적으로 인정-조정에서 동악신으로 정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쓸데 없는 그것도 이 근처 사람들 들으면 별로 기분 좋아하지 않을

시비를 속으로 걸어 보다가 국형사를 빠져 나와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국형사에서 보문사까지 약 1.2 km 는 급경사지만 아스팔트가 깔려 있다.

포장했으니 걷기는 편하지만 이렇게 좋은 길을 나는 왜 차를 못 타고

헐떡거리며 걸어야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방해가 된다.

 

 

 

보문사(普門寺)

 

우리나라에는 보문사라고 이름 붙은 절이 참 많다.

잠시 인터넷 검색해도 보문사 중 제일 유명한 강화 보문사, 

서울 신설동에서 성북동 쪽으로 가면서 있는 보문사,

경북 예천 보문사, 또 제주 보문사, 여기 치악산 보문사까지 5개나 나온다.

이외로도 더 있을 것이다.

 

 

사진: 보문사 전경

 

안내판을 보니 여기도 신라 경순왕 때 그 무착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 뒤 연혁은 알 수 없지만 절에 고려 중기로 추정되는 탑이 있으니

그 때 이미 절이 있었을 것이다.

 

 

사진: 보문사 청석탑,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103호.

 

우리나라 탑은 보통 화강암-쑥돌인데 여기 탑은 특이하게 점판암이다.

이 때문에 청석탑 이라고 부른다. 점판암 아닌 부분은 새로 끼운 것이다.

 

점판암 (粘板岩, slate)  퇴적암.

납작한 박판으로 쪼개지는 성질을 이용하여 기와나 석반(石盤) 등에 쓰인다.

 

절 오른 편에 돌부처 입상이 있다.

 

 

현대 기법으로 세공도 했고 인체비례도 잘 맞았다.

그러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진은 관촉사 미륵불 보통 ‘은진미륵’ 이라고 부르는 부처님이다.

비례가 전혀 맞지 않고 표정도 웃긴다. 그러나 에너지가 넘치지 않는가?

 

 청석탑 보수하며 새로 세웠을 기단이 군데군데 금이 가고 틈이 벌어졌다.

 

 

 

사진: 청석탑의 깨어진 기단.

누가 누구 돈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되  보기에 참 좋지가 않다.

 

 

 

보문사에서 원주 시내를 볼 수 있다.

 

 

사진 : 보문사에서 바라 본 원주 시내

 

 

보문사를 나와 산을 본격적으로 오른다.

 

날은 무더운데 비탈이 심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4-50분 뒤에는 능선에 오를 수 있었다.

 

 

 

능선을 따라 향로봉에 오르니 원주 시내가 훤히 보인다.

 

 

 

 

사진: 향로봉에서 본 원주 시내.

전망대에 세워져 있는 사진 설명대로 원주 시내 주요 건물을 적어 보았다.

 

필자는 군대 생활 할 때 원주에서 약 두 달간 교육을 받은 적 있다.

야전병기교육대(야병교) 라는 곳인데 지금 어디쯤인지 모르겠다.

다만 원주역에서 그리 멀지 않을 것이라는 것 밖에는.

 

향로봉에서 곧은치 쪽으로 가다가 길 옆에 제법 평평한 곳이 있어

자리를 펼치고 점심을 먹었다. 부인들까지 일행 30명에 남자만 20명인데

꺼내 놓는 술이라고는 복분자 막걸리 한 병, 더덕주 2병, 달랑 세 병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일인당 한 병씩 준비해도 모자란다고 투덜대기 일쑤였거늘

참 성질들 많이 죽었다. 담배도 20명 중 둘만 피운다.

나이 먹으며 양기가 모두 입으로 올라 왔는지 말들은 현란하다.

 

 

점심 먹은 후 능선을 잠시 걸으니 곧은치에 이르고

부곡으로 이어지는 하산길로 접어 들었다.

 

 

사진: 곧은치 갈림길

 

곧은치의 치()란 고개니 재, 령()과 같은 말이다.

 

‘령, 현, 재, 고개, 치, 티’ 에 대하여는 필자가 글을 한 편 쓴 바 있다.

http://blog.daum.net/robustus/13230005

 

 

택리지(擇里志)에 보면 령() 곧 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 …영이란 것은 등마루 산줄기가 조금 나지막하고 평평한 곳을 말한다.

(謂之嶺者 仍嶺脊梢低平處) 이런 곳에다 길을 내어 영 동쪽과 통한다.

나머지는 모두 산이라 부른다.”

 

산에서 교통로로 쓸 수 있는 낮은 곳이 바로 치, 령, 재 또는 고개다.

 

곧은치를 잠시 내려 오면 계곡이 시작된다.

경사는 완만한데 길은 모두 흙이라 트레킹하기 그만이다.

우거진 숲은 햇살을 막아주고 전날 비가 많이 와 개울엔 물이 넘친다.

 

 

 

사진: 곧은골

 

 

이른바 ‘알탕’을 한답시고 (이거 불법 아닌지 모르겠다)

사람 눈을 피해 좀 깊숙이 들어가는 축이 몇 있었다.

그러나 발만 담그어도 몇 초를 못 견딜 정도로 물이 시리니,

뜻은 원대했지만 이룬 바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계곡을 약 한 시간 걸으면 산길이 끝난다.

주차장으로 와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타고 약 5분 가니 태종대가 나온다.

 

 

태종대(太宗臺)

 

태종대 하면 부산이 유명하지만 원주 치악산에도 태종대가 있다.

 

눈 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턴고,

굽을 절()이면 눈 속에 푸를소냐,

아마도 세한고절(歲寒高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위는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이 지었다는 시조다.

 

운곡(耘谷)은 한때 이방원을 가르치기도 했다는 데, 고려가 망하자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 한다는 성리학 이념에 따라

조정을 버리고 고향인 치악산 이쪽 골짜기로 내려 왔다.

 

방원(태종)이 왕위에 올라 운곡을 불러 보지만 응하지 않았다.

이에 태종이 직접 치악산으로 찾아갔지만 더 깊은 산골짜기로 숨어 버린다.

태종이 7일을 더 기다렸건만 운곡(耘谷)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뭐 실화(實話)라기 보다는 전설(傳說)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여튼 이 때 태종이 머물렀던 곳이 주필대(駐?臺) 인데

후에 태종대(太宗臺)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사진: 주필대 비석

 

 

 

사진: 태종대 비각

 (비각 현판은 태종대지만 속에 새겨진 비석 글씨는 주필대다)

 

건물이나 비석은 별로지만 여기서 보는 경관이 좋다.

 

 

사진: 태종대에서 본 계곡

 

태종은 빨래하던 할머니에게 운곡(耘谷)이 간 곳을 물엇다.

운곡은 이걸 또 예견하고 할머니에게 반대로 말하라고 미리 당부했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운곡 말대로 하긴 했지만 임금을 속인 죄책감에 물에 몸을 던졌다나…..

 

뭐 전혀 말이 안 되지만 전설(傳說)이란 것이 원래 다 그런 것 아닌 가.

이 할머니가 빠진 곳이 노고소(老姑沼) 라는데 아마 저런 곳 아닐까?

 

태종대 사진은 사실 이 계곡을 넣어 같이 찍어야 의미가 있다.

그러자면 좋은 포인트 찾아 한참을 헤매야 하기에,

편하게 현장 입간판에 있는 사진을 다시 사진 찍어 붙이는 것으로 대신한다.

 

 

 

 
다음검색
댓글
  • 09.06.24 18:36

    첫댓글 한권의 책이군요 감사합니다 소대장 시절 원주 치악산 밑에서 신고식 했는데요 ㅎㅎ

  • 09.07.01 22:05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좋은공부 할수있어 행복하구요 므흣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