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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갑자기 세상을 떠난 60회 박관식 군은 지나간 몇 년간 충출하고 수려한 수필을 남겼습니다. 일부는 본 재카나다경기중고등학교 Cafe 에 실렸었던 글도 있고, 타계하기 전인 작년 2020년에 쓴 수필도 몇 개가 있습니다. 고인이 남긴 수필을 하나씩 본 Cafe 에 올려드리면서 함께 고인을 추모합니다)
God Bless You - 2014.11,08
아주 오래전 10년도 더 지난 어느 해였던가 초가을 금요일 오후 내가 근무하는 여관의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 쓴 붉은색 Dodge Caravan 이 주차장으로 들어와서 멈추면서 키가 크고 얼굴이 온통 수염으로 뒤덮인 덩치 큰 사내가 내렸다. 언뜻 보아서 직업을 찾는 기술자 같아 보였다.
북극권에 속하는 이곳에는 큰 금광들이 있어서 기술만 있다면 높은 보수의 직업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곧이어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쁘장한 남자아이가 뛰어내리고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약간은 큰 키의 여인이 내리는데 그 여인의 주위가 갑자기 환해지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아름답다고만 말하기에는 품위 있어 보였고, 품위가 있다고 하기에는 이미 중년을 시작하는 나이였음에도 젊음의 흔적들이 너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젊다고 하기에는 얼굴의 표정이 지나칠 정도로 고요했다. 더구나 몸매의 요철 부분은 흠잡을 때가 없이 완벽해 보였다.
카나다에도 저런 미인이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과거 은막 속에 나타나던 2차원의 여인들에 비해 별로 손색이 없어 보였다. 좌우간 무료했던 주말 한 순간의 동영상 감상이었지만 반백 년을 넘게 살아 뛰고 있는 내 심장이 아직도 작게 흔들릴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북극의 겨울은 여름의 꼬리를 밟으며 다가 온다. 가을은 오직 여름의 끝에 아지랑이 같은 느낌만을 뿌리고 달아나 버린다. 지금부터 겨울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오늘은 카- 펫 스팀청소나 할까 하고 일어서려는데 전화가 울린다. 데스크에서 손님이 면회 신청이란다. 이런 경우에는 좋은 일이란 거의 없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손님은 다름 아닌 바로 그녀, 창 밖의 언니였다.
용건이란 1,000불짜리 수표를 현찰로 바꿔 달라는 것인데, 남편이 이곳 자동차 정비소에 취직되어 에드몬튼에서 이곳까지 1,600킬로를 세 식구가 오는 동안 현찰은 물론 카드 한도까지 몽땅 써버리고 남은 것은 새 직장에서 선수금으로 받은 1,000불 수표 한 장. 내일 아침은 커녕 오늘 저녁 아이에게 빵 한 덩어리 사줄 동전 한 잎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은 이 동네에서는 흔히 생기는 일 중 하나다. 주말에는 은행에 수표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음을 기회로 뻥 수표를 들고 나타나는 손님들이 흔히 있었고 나도 한차례 쓴맛을 본 일이 있었다. 내 맘 속에는 작은 분노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얼른 표정을 마무리하고 정중하게 회사 규정상 그러한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미안했다고 입 속으로 중얼거리는 듯 말하면서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는 뒷 모습이 슬퍼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 내 자신이 무슨 배반이나 당한 기분이 들면서 슬퍼지는 것 같아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숙박료 지불 여부를 점검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아 컴퓨터를 두드렸더니 자동차 정비소 카드로 이미 지불되어 있었다. 이거 진짜 일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이제 끝난 일이잖아, 청소나 하자 그렇지만 맘 속은 뭔지 모르게 찜찜했다.
스팀 청소기를 챙겨 들고 후론트를 지나는데 레베카가 말을 건넨다.
"헤이 – 박, 그 여자가 뭐래?”
“응, 저 수표를 현찰로 바꿔 달래, 안된다고 했어”
“잘했어, 저런 것들은 다 사기꾼들이야, 조심해야 돼”
“알았어”
레베카는 우리 여관의 후론트 데스크 대장이다. 키가 180에 몸무게는 120 정도 되어 보인다. 의자는 반년이 지나지 않아 부서져서 새 것으로 갈아줘야 한다. 6살짜리 딸과 함께 산다.
약품 냄새 때문에 객실 문을 열고 스팀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가로막는 것 같아서 돌아보니 레베카 딸이 그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다.
“아저씨, 뭐해”
“청소하는데, 아저씨 바쁘니까 나중에 놀자”
“알았어, 얘, 우리 가자”
아이들은 마치 새들이 날아가듯 뛰어가버렸다.
나는 저 나이에는 어디에 있었던가? 나는 굳세어라 금순이의 동생 금식이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무개화차에 그때의 나는 있었다. 그때에 꽁꽁 얼은 김밥 덩어리들의 딱딱하고 차가운 입속에서의 느낌이 내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더욱이 카나다라는 이 잘 사는 나라에서 한 아이가 배고픔을 배우려 하고 있는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있었다.
“야, 박 집사. 너 뭐하니, 저 아이 때문에 왜 그래...
너 저 애 엄마한테 아주 뿅 갔구나.... 야, 냉수 먹고 정신 차려...
이거 순 곰바우구나, 집사가 아니라, 순 잡사로구나....”
그냥 몇 푼 빵값 쥐어주면 되는 걸 뭘 그래....
에이 이게 뭐야, 괜한 일로 해골만 우왕좌왕하잖아....
청소기를 챙겨 들고 객실을 나서는데 그 창 밖의 언니와 아저씨가 산책에서 돌아오는 게 눈에 띄었다. 당당한 체구의 남자와 이름다운 여인이 팔을 끼고 걸어오는 그림이 참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나도 한때는 그런 그림 속에 있었던 때가 있었던가 하고 생각하는데 내 의식의 배경으로 소외감과 부러움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무엇인가 나의 눈을 파고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언니의 한 손에 들린 검은 표지에 붉은색 두께의 책은 성경이 틀림없었다. 산책 도중 무언가 기도하고 있었겠지.... 아~ 주께서 나를 들어쓰시려 하시는 것은 아닌지....
사무실에 내 전화를 받고 들어서는 그녀에게 나는 말했다.
“내일까지 식사하는데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50불 이면 될 것 같은데요..."
“그러면 방은 Kitchenette 로 바꾸어 드리기로 하고 여기 40불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신다면 정말로 고맙겠습니다. 월요일 오후까지 꼭 갚아드리겠어요. 그리고 이것은 그때까지 보관하세요”
그리고는 그녀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40여 년 전에 낯설지 않은 나의 동작이었다. 당구장에서, 중국집에서, 그리고 대폿집에서... 그렇지만 Canada 에서도 그러한 Custom 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지요..." 그러나 속으로는 “내가 어찌 언니를 믿을 수 있겠소이까? 이것은 주님께서 시키시는
일이라오” 라고 의기양양해 하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반지를 뽑아내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아니 의식적으로 손을 잡았다는 것이 사실이었을 거다.
그녀는 다시 한번 더 고맙다고 말하고 곧 사무실을 나갔지만 아직도 방안에 남아있는 그녀의 향기는 정확히 말해서 화장품 냄새가 나의 후각을 간질이고 있었다.
아니 내가 무슨 일을 한 것이지..... 주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감히 10불을 깎고 하다니... 이것은 내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사탄이 준동한 것 임에 틀림이 없구나, 명령받은 일의 80%만 하고 20%는 꿔먹었으니 이 일을 어쩐담, 어쩐담....
아니 그런데 주님 어찌하시어 이제야 이런 일에 저를 쓰시는 겁니까. 좀 더 일찍 저를 좀 폼나는 일에 택해주셨다면 제가 출세를....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본인의 그릇 됨됨이는 간장 종지에 지나지 못한다는 것을....
오늘은 수요일이다. 창 밖의 언니한테서는 아직도 소식이 감감이다. 늦기 전에 벼르고 벼르던 보일러 버너를 손보려고 공구를 챙겨 들고 후론트 앞을 지나는데 레베카 바로 그 북극 백곰이 중얼거려대는 소리가 내 귓등을 두드린다.
“아니, 그 사기 치는 년한테 돈이나 갖다 바치고.... 바보야 정말... 그 돈으로 우리한테 피자나 사주면 얼마나 좋아..”
이것들이 피자 중독인가, 망할 것 같으니라고.... 나는 속으로 말하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쩨쩨한 인간임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돈 40불에 가슴을 달구는 존재는 아니라고 맹세한다. 남자라는 동물의 속성은 아무리 자기가 졸렬하게 생겨 먹었어도 늘 미남들의 언저리에 속한다는 신념에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머릿속이 텅 비어있어도 제갈공명의 막냇동생 정도의 인품과 학식은 능가하고 있으나 단지 세상이 자기를 몰라보고 있다는 망상 속에서 늘 자신의 고귀함에 만족하려 하고 있는 그런 존재이다.
이러한 망상을 단 한방으로 산산조각 내버리는 잔인한 사건은 자신이 예측하여 예언하고 실행한 사건들이 이번 창 밖의 언니처럼 영 엉뚱하게 삼천포행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의 깊은 상처를 줄 뿐 아니라 그로 인한 부끄러움은 가슴속 깊이 있어 만에 하나 칠거지악을 시들은 풀잎처럼 여기는 마누라에게 이런 것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자존심에 피 흘리는 상처를 입히곤 한다. 사실이 발각된다면 귀머거리에, 장님에, 벙어리의 인고의 세월을 살아갈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왜 그녀는 돈을 갚겠다고 했지? “
그냥 단순하게 “오빠, 고마워 잘 쓸게.” 그랬다면 내가 어찌 감히 “안 된다, 돈 갚아라” 할 수가 있었겠냐는 말이다.
보일라실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Burner Chamber 의 뚜껑을 조심스러이 뜯어냈는데도 검댕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서 내 얼굴 주위를 감싸고 날아들었다. 조심스레 Burner 의 이모저모를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자동차가 거칠게 들이닥치며 브레이크를 밟아대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며 보일러실 안으로 흙먼지가 왈칵 밀려들었다.
“뭐야, 가뜩이나 심란한데... 누가 이 따위로 차를 몰지....” 한마디 해주려고 몸을 일으키어 밖으로 나서는데 바로 그 붉은색 Caravan 의 문이 왈칵 열리며 창 밖의 언니가 뛰어나와 내 목을 안고 매달렸다.
으~음~ 그러면 그렇지.... 이때 확 자빠져버리는 것은 어떨꼬? 하는 생각이 미쳐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입에서 한마디의 외침이 유성처럼 튀어나와 나의 전신을 감싸며 폭발했다.
“God Bless You”
그때 나의 온몸이 향기에 휩싸이는 것을 느끼면서 뒤통수에서 등뼈를 타고 향기가 천천히 몸속으로 배어 들어왔다. 그러나 가슴은 오히려 잠잠하고 머릿속은 차갑게 맑아, 희열이 밀물처럼 끊이지 아니하고 밀려오고 있었고 온 몸으로 차오르는 감동을 느끼며, 나를 감싸는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내 육체의 모든 감각들이 지극히 평온하고, 심장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조용한 상태에 있었고, 나의 두뇌는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나의 몸의 어떤 부분이 이 희열을 인지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의 두뇌가 관장할 수 없는 육체 부분이 어느 곳이 있단 말인가? 아니면 내 속에서 잠자던 또 하나의 내가 언니의 외침에 이토록 격렬하게 반응하는 걸까. 헬로야 언니가 나를 안고 저쩌고 하는 말소리는 귀를 간지럽히고는 있었지마는 이때에 반드시 있어야 할 육체적인 본능의 반응은 나의 몸 어느 한 구석에서도 태동할 기미가 전혀 없었고, 나의 감각은 현재의 차원을 비상하며 훨훨 날고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 Thanks 카드를 주고선 급발진으로 떠나는 언니의 뺨에는 숯검덩이가 묻어있었다. 사무실로 거만한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후론트에 앉아있는 레베카를 가재미 눈으로 흘끔 보면서 언니가 주고 간 카드를 펼쳐서 40불을 꺼내 후론트 위에 올려놓으면서 “피자나 사 먹지들 그래” 하고 돌아서려는데 카드 안에는 아직도 10불짜리가 하나 남아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거 횡재했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400불을 주었으면 얼마를....”
아니 이건 무슨 사탄 마귀의 발작인고....
굉장한 마음의 감동이 있을 때 무덤덤하던 호르몬의 유전자가 크게 활성화되어 엔도르핀보다 4000(?) 배나 강력한 다이올핀이라는 물질을 생성하여 우리 몸의 면역체계에 강력한 긍정적 충격을 일으켜 암을 공격하고, 불치의 질병을 치료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동무들, 아니 친구들...
우리가 이제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이런 말씀을 쓸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섰다는 것을 인식하시기 바란다.
이제 우리에게 “먼 훗날” 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에 서로의 인사말을 바꾸어 보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God Bless You”
그리구 말이에요, 혹시나 아름다운 언니와 금전 거래가 있을 땐 말이죠.
절대로 공짜로 주시지 말고 빌려주시구려. 혹시 당신이 나이 칠십에 가을을 타는 남자라면 말입니다...
박관식 60회 - 2014년 11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