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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정치이론가. 마키아벨리 [Niccolò Machiavelli]
▲ 마키아벨리 (1469. 5. 3 이탈리아 피렌체~ 1527. 6. 21 피렌체 )
개요
역저 〈군주론 Il principe〉은 목적만 정당하다면 수단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비윤리적 견유주의(犬儒主義)를 제창한 것으로 인식되어 오랫동안 비난을 받아왔으나 정·교 분리의 주장과 함께 권력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 행해지고 있는 점에서 근대 정치학의 초석으로 평가되고 있다.(→ 〈군주론〉)
초년기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3세기 이래 다수의 고위행정관들을 배출해낸 피렌체의 명망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법률가였던 아버지는 매우 어려운 삶을 꾸려나갔는데 파산으로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난 뒤 근교의 소규모 부동산 수입에 의존하며 극히 제한된 소송사건을 처리하고 있었다. 훗날 마키아벨리는 "나는 즐거움 이전에 인고(忍苦)를 먼저 배워야 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가난은 재능에 합당한 교육을 어렵게 했고 폴리치아노 의 교습소가 피렌체의 뭇 청년들로 붐비고 있을 때도 그리스어 학습에 착수할 수 없었다. 그의 라틴어 수업은 아버지의 회고록이 니콜로의 라틴어 교사들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학교보다 가정에서 이루어졌음이 확실하다. 독학은 인문주의 교육의 무절제와 오류로부터 니콜로를 보호했고 이로부터 사고의 독창성과 기품뿐만 아니라 설득력을 갖춘 문체의 힘이 보전될 수 있었다.
극단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했던 도미니쿠스회 수사 사보나롤라 가 처형된 후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29세의 나이로 제2서기관직에 올랐다. 1494년 이후 제2서기청에서 공무원 견습을 받아왔다는 주장도 있으나 문헌기록상 증거가 확실치 않으며 그의 진술 역시 이를 부정하는 쪽으로 해석된다. 제2서기청은 제1서기청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국내정치 담당기관으로서 뒤에 '10인 위원회'에 흡수되었다. 마키아벨리는 또 시뇨리아(통치자)의 권위 아래 외교와 국방을 책임지는 최고행정관의 비서이기도 했다. 서기관은 대사의 파견이 적합하지 않을 경우 외교사절의 임무도 수행했는데, 1500년 5개월 동안의 프랑스 체류는 하나의 군주 아래 통합된 강대국의 열망을 그의 가슴속에 심어놓았다.
마키아벨리가 프랑스로부터 귀환할 무렵 피렌체 공화국은 중부 이탈리아에 공국을 세우려는 체사레 보르자 (발렌티노 대공,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사생아)의 야심으로 말미암아 백척간두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말에 앞서 행동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서기청에서 편지를 구술하는 일 외에도 필요할 때마다 외교사절의 임무를 수행했고 언제든지 위험과 고난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발디치아나 반도(叛徒)들의 처우문제에 관하여 Del modo di trattare i sudditi della Val di Chiana ribellati〉(1503)가 씌어진 것은 바로 이 시기이며 "인간의 욕망이란 언제나 변함이 없다"라는 근본명제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선언되었다.
2차례 보르자를 대변한 마키아벨리는 시니가글리아에서(1502. 12. 31) 보르자에 저항한 휘하 지휘관들의 참변을 목도했고 유명한 〈발렌티노 대공의 비텔로초 처형에 관하여 Descrizione del modo tenuto dal Duca Valentino nello ammazzare Vitellozzo……〉를 남겼다. 천성적으로 이론과 추상화에 능했던 그는 이 단호하고 흉포하기까지 한 참주를 지켜보면서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냉혹하고 교활한 보르자는 수개월 내에 자신의 공국을 수립했다. 마키아벨리는 조국 이탈리아를 절망적인 재난으로부터 구제할 치유책으로 보르자의 방법론을 받아들이게 되지만 그가 이상화하고 갈망했던 새 군주가 바로 보르자를 의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1503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서거한 뒤 피우스 3세마저 급사하자 니콜로는 교황선거의 참석을 위해 로마로 떠났고 오랜 회기 끝에 보르자의 숙적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이 율리우스 2세 로 추대되었다(→ 율리우스 2세).
니콜로는 냉소에 찬 관조로써 영웅의 몰락을 지켜보았고 마침내 그가 투옥되었을 때는 "그리스도를 능멸한 죄인의 당연한 최후"라며 이를 환영했다. 그 사이 피렌체에서는 피에로 디 톰마소 소데리니가 종신 최고행정관에 선출되었다. 신임을 얻은 마키아벨리는 곧 그의 오른팔이 되었고 마키아벨리는 이와 같은 영향력 확대를 군제개혁을 위한 호기로서 받아들였다.
이탈리아의 자치도시들은 수세기 동안 용병제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마키아벨리는 그 규율 및 충성심의 부재에 대하여 상당히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고대 로마와 프랑스(1504년초 그는 2번째 외교임무를 수행했음), 특히 지역별로 차출된 징병군이 용병을 대신하는 보르자 군대편제의 영향을 받아 마키아벨리는 징병에 의한 독자적인 민병대의 설치를 추진했다. 향촌지구로부터 징집대상자를 선별하여 이들을 무장화시키는 데는 주민들의 의구심과 해묵은 편견들이 극복되어야만 했다. 로마에서의 임무를 마치는 대로 그는 곧 민병대의 조직에 착수했고 소데리니의 설득에 이어 1505년 법안의 채택에 성공했다. 이듬해에는 민병대의 규제·감독을 위한 '9인 위원회'가 설치되었으며 니콜로는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서기관과 징병감찰의 직무를 동시에 수행했고 율리우스 2세를 도와 볼로냐를 공격·굴복시킴으로써 교황령(교회국가)을 보호했다.
1507년 12월 신성 로마 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 는 독일로부터 이탈리아의 침공을 획책하고 있었다. 중대 사안에 접하여 대사의 능력을 믿을 수 없었던 소데리니는 마키아벨리를 알프스 너머로 파견했다. 독일로 가는 도중의 3일을 스위스에서 보낸 마키아벨리는 스위스의 정황을 예의 주시할 수 있었고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그 정치현실을 면밀히 분석해 〈독일에 관한 보고서 Rapporto delle cose della Magna〉(1508)를 집필했다. 집적된 경험과 자료들을 토대로 한 〈독일에 관한 보고서〉와 4년 후에 편찬된 문예물 〈독일 소묘 Ritratto delle cose della Magna〉를 통해 마키아벨리는 독일 민족의 저력과 이와 모순되는 정치적 취약성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다. 불완전한 자료를 바탕으로 지나친 이론화를 시도했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뛰어난 직관에 의한 종합력이 돋보이는 작업이었다.
그가 독일에서 돌아왔을 때 피렌체는 피사의 탈환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선두에서 민병대를 독려하며 그는 언제나처럼 모든 정열을 쏟아부었다. 10인 위원회는 본부에 남아 있기를 간청했지만 니콜로는 후방에 남게 되면 근심만 더할 뿐이라고 대답했다. 회의적이고 소극적인 인물로만 인식되어왔던 그의 애국심과 열정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1509년 6월 8일의 피사 수복은 마키아벨리와 민병대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침공위협에 직면하여 만투아에서 일련의 교섭을 벌였던 마키아벨리는 이번에는 동맹관계에 있던 프랑스로 떠나야만 했다(1510. 7). 그는 루이 12세 에게 교황 율리우스 2세와 강화하거나 혹 그것이 어렵다면 프랑스의 국익에도 배치되지 않는 피렌체의 중립을 인정하여 양측의 대결 속에 끌어들이지 않기를 간청했지만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루이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0월에 마키아벨리는 전쟁을 예감하며 피렌체로 돌아왔고 〈프랑스 소묘 Ritratto di cose di Francia〉를 완성했다. 이제 남은 일이란 군비강화뿐이었다. 이듬해 여름이 다 지날 무렵 그는 다시 루이를 만나 교황을 분노케 하고 있는 피사 공의회 를 산회시켜주도록 탄원했다. 귀국한 니콜로는 별 어려움 없이 종교회의를 해산시킬 수 있었으나 율리우스 2세의 신성동맹군은 징벌을 내세우며 이미 피렌체 공화국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1512년 최고행정관 소데리니는 축출되고 다시금 메디치가 (家)가 피렌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직위를 잃었고 베키오 팔라초(시뇨리아의 궁전)에의 출입도 금지되었다. 1513년초 반역음모가 발각되자 이미 의심을 받고 있었던 마키아벨리는 공모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무고한 사람들을 거짓자백으로 이끌었던 모진 고문 속에서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으나 결국 공모자들의 명부에 이름이 올랐고 출감 후에도 숱한 제약들에 시달려야 했다. 그즈음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사망하고 조반니 데 메디치가 교황 레오 10세 로 즉위했다(→ 레오 10세). 마키아벨리는 〈축복받은 정령들의 노래 Canto degli spiriti beati〉를 작곡·헌정함으로써 메디치가의 자비를 구해보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시 가난이 찾아왔고 니콜로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교외의 사유지에 은둔했다. 1513년의 봄부터 가을 사이 바로 이곳에서 〈군주론〉과 〈티투스 리비우스의 첫번째 10권에 관한 논문 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보통 〈로마사론〉이라고 함)의 집필이 이루어졌다.
피렌체는 언제나 마키아벨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의 모든 연구는 공화국의 발전을 지향한 것이었다. 혼탁한 시대상과 군소국가들로 분열된 이탈리아의 무력함, 끊임없는 외세의 위협 등의 악조건 속에서 이탈리아의 구원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새로운 군주가 절실했다. 비록 당장에 이 구원자를 찾을 길은 없지만 그는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난관들을 극복해내야 했다. 사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다른 방도란 별로 없는 것이다. 〈군주론〉은 군주가 채택하는 정치기술이 시대상황과 인간 본성에 부합되는 것이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굳이 경건함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나름으로 종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그는 종교 또한 국가의 요구에 부응하는 권력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국가이성'(raison d'Etat)이라는 용어가 나타난 것은 그가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뒤의 일이지만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가히 국가이성의 발견자라고 할 만하다.
〈로마사론〉과 본질적으로 별 차이가 없는 〈군주론〉이 월등한 평판을 누리게 된 데에는 문체의 간결성과 생기 넘치는 수사법 그리고 거침없는 그의 언명들이 큰 힘을 발휘했으며 후세에 이르기까지 인구에 널리 회자되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인류가 타락하지만 않았어도 이 모든 기술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염세적인 경구를 남기고 있는데 당시의 연대기에서는 이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발견할 수 없다. 마키아벨리가 갈망했던 것은 선하고 순수한 인간사회였다. 그는 고대와 자신의 시대에서 그것을 찾아다녔고 덜 개화된 사회 속에서 보다 순수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군주론은 로렌초 데 메디치 에게 헌정된 것으로서 생계를 해결하고 정치참여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소망이 담겨져 있었으나 기대했던 결실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이무렵은 인간, 특히 성직자들의 사악함과 타락을 주제로 한 희극작품 〈맨드레이크 La Mandragola〉가 씌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고소는 그칠 줄을 모른다. 로렌초 공이 서거하고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클레멘스 7세 )가 피렌체를 다스리게 되자 니콜로에게도 새로운 희망이 생겨났다. 세력가 로렌초 스트로치는 니콜로를 추기경에게 소개했고 니콜로는 감사의 뜻으로 그에게 〈전술론 Dellarte della guerra〉(1521)을 헌정했다. 〈전술론〉은 그의 유명한 두 논저를 보완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니콜로가 맡은 최초의 임무는 루카에 가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1520년 11월 피렌체대학교는 마키아벨리를 공화국의 사료편찬관으로 임명했으며 추기경은 곧 이에 대한 동의를 표명했다. 처음에 57플로린(1252년부터 유통된 금화) 정도였던 그의 연봉은 나중에 100플로린 정도로 인상되었고 점차 여러 가지 일들을 맡아보게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로렌초 공 사후의 체제문제를 다룬 〈논문 Discorso〉의 집필에 착수했으며 그 속에서 고대의 자유를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는 대담한 권고를 하고 있다. 1521년 5월 니콜로는 카르피의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파견되었다.
1521년 12월 레오 10세가 사망하자 줄리오 추기경은 본격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마키아벨리는 〈논문〉을 재검토했으며 추기경은 그의 조언을 존중했다. 1523년 9월 레오 10세의 후계자인 아드리안 6세가 요절하자 줄리오 데 메디치는 클레멘스 7세라는 이름으로 바티칸의 주인이 되었고 마키아벨리는 보다 큰 열의를 가지고 〈피렌체사 Istorie fiorentine〉의 집필에 몰두할 수 있었다. 1526년 6월 우선 8권의 완성본이 헌정되었으며 새 교황은 120플로린의 사례금과 함께 그의 작업을 격려해주었다. 이전의 저작들이 그러했듯이 〈피렌체사〉에는 강인하고 독창적인 그의 정신이 각인되어 있다. 조금씩밖에 진척을 보지 못한 〈피렌체사〉의 집필은 이후로도 많은 시간을 소요하게 되었지만 마키아벨리는 인문주의 역사기술의 관례에서 벗어난 새로운 방법론에 근접하고 있었다. 진리추구를 이상으로 삼았던 마키아벨리는 후원자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보신의 필요성으로 인해 갈등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는 역사가이기 이전에 정치가로서 피렌체의 역사를 다루었고 무비판적으로 자료들을 취택해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하기도 했다. 〈피렌체사〉의 가치는 정보의 정확한 전달보다는 사실을 배열·조직해내는 종합 능력의 탁월함에 있었다.
1526년 4월 마키아벨리는 요새방비를 목적으로 뒤늦게 설립된 '5인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다. 클레멘스 7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에 대항하기 위해 '코냐크 동맹'을 결성했고 마키아벨리는 군대를 이끌고 교황의 보좌관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 와 합류했지만 1527년 5월 카를 5세의 스페인군은 로마를 점령했다(로마의 약탈). 메디치가가 쫓겨난 피렌체에는 자유가 찾아왔고 귀환길의 니콜로는 옛 관직을 되찾을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그러나 공화국과 자유를 향한 그의 열정은 메디치가와의 미미하기 짝이 없는 인연으로 말미암아 희석되어버렸다. 니콜로는 마지막이자 가장 큰 좌절을 맛보아야 했고 이로부터 1개월이 채 지나기도 전에 병사하고 말았다.
마키아벨리는 선량하고 고결한 시민이자 좋은 아버지였다. 그는 1501년 후반 마리에타 코르시니와 결혼했고 5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가 남편으로서 충실했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가정에는 늘 다사로움이 넘쳐흘렀다. 자신의 영혼보다도 피렌체를 사랑했던 그는 너그럽고 정열적이며 기본적으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마키아벨리가 필요 이상으로 사악하게 비쳐진 이유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충격을 주고자 했던 그의 의도 때문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거침없는 경구들과 더불어 가톨릭 반동세력의 표적이 되었고 사탄의 화신 정도의 평판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인들은 이탈리아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부정하려는 경향으로부터 '마키아벨리즘'이라는 경멸적인 표현을 창출해냈다. 위대한 재능을 갖추고 있었던 그는 불행한 삶을 살았음으로 해서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키아벨리는 역사철학의 창시자로서 그때까지 누구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부터 역사순환론을 이끌어낸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인간에 대한 인식을 정치학의 토대로 정립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다.
마키아벨리는 위대한 사상가였고 따라서 위대한 작가일 수 있었다. 그의 시는 운문보다도 산문의 형식을 취한 것이 많지만 이탈리아 문학사상 비견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들이다. 마키아벨리의 재능은 역사기술·정치논문·단편소설·희극 등 시도한 모든 장르로부터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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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한국 정치의 해독제
▲ 스트라파도(strappado) 고문. 공중에 매단 뒤 갑자기 떨어뜨렸다가 땅에 닿기 전에 멈춘다. 이렇게 두번 정도 하면 어깨가 부서지고 정신이 무너지는데 마키아벨리는 여섯번을 견뎠다고 한다. 그러고도 <군주론>을 썼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만큼 논쟁적인 책도 드물다’는 문장은 진부하다. ‘살인적인 마키아벨리’(셰익스피어), ‘악의 교사’(리오 스트라우스)라는 저주에서 ‘공화주의의 대변자’(스피노자·루소)라는 찬양까지, 양극단의 평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만큼 <군주론>은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많다. 더구나 2013년에는 <군주론> 집필 500주년을 기념한 행사(마키아벨리 탄생 500주년이 아니다!)가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열려, 마키아벨리의 진면목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아직 <군주론>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그동안 무비판적으로 사용해온 ‘마키아벨리스트’(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이라는 의미)라는 표현를 쓰는 데 머뭇거리게 된 상황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여기저기서 마키아벨리를 들먹이는지 알고 싶은 독자라면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이 훌륭한 길잡이가 될 법하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액자소설 구조를 띠고 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80쪽이 넘는 서문을 썼고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가 번역한 마키아벨리의 원문에 박 대표의 족집게 해설이 곳곳에 배치됐다. 군주론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해설을 곁들인 원문을 먼저 읽고 최 교수의 서문을 읽는 게 순서일 것 같다. 군주론을 이미 읽은 독자들은 마키아벨리의 현재적·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는 최 교수의 서문에서 시작해도 좋겠다.
정치에 대한 도덕적 접근은
급진주의와 냉소주의 흘러
갈등의 현실에서 출발해야 해법
박상훈 대표의 해설은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다. 이를테면 군주론의 주요 개념인 비르투(주체적 의지·힘)와 포르투나(운명의 힘), 네체시타(불가피성), 그리고 프루덴차(실천적 이성)에 대한 설명이 그렇다. 박 대표는 이들 개념이 원문에서 출현할 때마다 각각의 개념이 사용된 마키아벨리의 문장들을 여럿 보여주며 개념의 속뜻을 거의 완벽히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그리고 마지막 개념인 프루덴차가 등장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정리한다. “제대로 된 신생 군주란, 국가를 장악하고 개혁하며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불가피성(네체시타)이 요구하는 과업을 실천적 이성(프루덴차)을 통해 이해하고, 운명의 힘(포르투나)에 수동적으로 굴복하는 대신 비르투를 가지고 그 과업을 완수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제후국이 난립하고 ‘제자백가’들이 ‘백가쟁명’하던 시기였다. 특히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을 몰아내고 세운 피렌체 공화국의 고위공직자였다가 메디치 가문의 복귀 뒤 반메디치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스트라파도’라는 모진 고문을 받고 나서 농장에 은둔하며 장작을 만들고 새를 잡아 파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군주론을 집필한, 가혹한 운명의 주인공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오해와 논쟁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 마키아벨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최장집 교수의 서문에서 찾을 수 있다. 최 교수는 마키아벨리가 한국 정치를 바꾸는 해독제 같은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최 교수는 서문에서 “이상주의·도덕주의의 전통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법과 그 실천의 내용 속으로 깊숙이 침윤되면서 정서적 급진주의를 창출하고, 쉽게 교조주의를 만들어 민주주의를 급진화하는 원천으로 작용해 왔다”고 진단한다. 정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이상주의·도덕주의적 접근이 현실을 도외시하는 정서적 급진주의와 교조주의를 낳았다는 해석이다. 마키아벨리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 갈등을 조절하는 현실적 수단으로 정치를 바라본다. 이에 반해 (이상주의·도덕주의에 침윤된) 한국의 정치는 (존재하는) 갈등을 부인하고 (존재하지 않는) 통합을 강조하면서 결과적으로 갈등 조절에 실패하고, 국민들을 냉소주의나 급진주의로 빠뜨린다. 이상주의·도덕주의의 역설인 셈이다. 마키아벨리는 정치가 ‘있어야 할 것’의 당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바로 이런 현실주의적 접근이야말로 정서적 급진주의와 교조주의에 빠진 한국의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다는 게 최 교수의 주장이다.
이런 해석은 케임브리지학파의 공화주의적 관점(“마키아벨리는 정치를 권력 게임이나 자기 이익의 추구로 본 것이 아니라, 시민적 덕을 중심 가치로 삼아 정치 공동체를 건설하려 했다”)을 거부하는 것이다. 최 교수는 특히 케임브리지학파가 마키아벨리를 귀족주의적 공화주의자로 잘못 해석했다고 통렬히 비판한 존 매코믹을 인용하면서 “민주주의자로서의 마키아벨리”를 강조한다.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귀족보다 민중을 중시한 민주주의자였다.
최 교수는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임브리지학파의 공화주의적 해석이든, 매코믹으로 대표되는 민주주의적 해석이든 마키아벨리의 전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마키아벨리 이론의 전모는 민주주의적 통치 체제를 구성하는 두 측면, 그러나 두 측면이 정태적으로 병립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인 상호 관계를 통해 하나로 통합되는 것, 그러나 그 통합은 어디까지나 동태적으로 결합·재결합되는 실천의 영역, 정치적 행위의 영역에 위치할 때 일시적으로 포착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이 점이 바로 마키아벨리의 위대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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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와 최장집 교수,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군주론』의 키워드는 독존(獨存)이 아니라 공존(共存)이다!
『군주론』이 주는 메시지는 정치인이나 지도자가 진정한 리더가 아니라,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 가족, 친구, 이웃 그리고 동료 시민들에 대해 배려와 공감의 자세를 가진 이들 중에 진정한 리더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리더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공감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과 주변의 삶이 더욱 고양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평범한 이들 가운데서 나올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군주론』이 주는 메시지일 것 같습니다.
올해는
『군주론(Il Principe)』이 쓰여진 지 500년이 되는 해다. 1513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마키아벨리가 정치 유배시절에 쓴 이
책이 2013년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널리 언급되고 회자되는 풍경을, 마키아벨리는 어떻게 볼까? 실제로 2013년 정치권의 빅 이슈로 떠오른
안철수 의원(51, 무소속)은 정책 네트워크 ‘내일’을 만들고, ‘내일’ 이사장으로 최장집 교수를 임명해 언론과 국민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최장집 교수가 바로 마키아벨리를 제대로 알아야한다고 얘기해 온 정치학자. 3년 전 “우리 정치에서 카를 마르크스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최교수는 최근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마키아벨리를 “솔직하고 대담무쌍한 정치철학자다. 도덕ㆍ종교적 담론은 인간의 권력의지를 베일에 덮어씌운다. 마키아벨리는 그 위선적
가면을 벗겨 보인 위에서 정치현상을 설명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4.27 중앙일보)
사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정치 철학을 확립한 학자로 이미지가 구축 되어 마키아벨리를 좋아한다는 것은 대단히 이기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최근 마키아벨리와 『군주론』에 대한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그간 알려진 『군주론』은 『군주론』에서 얘기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군주론』에는 우리나라의 정치가들과 리더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진정한 리더쉽상이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군주론 담론’의 중심에는 김경희 성신여대 교수가 있다. 김경희 교수는 올 2월 출간한 『공존의 정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주론』은 이기기 위한 처세술과 혼란을 극복하고 강한 나라를 만드는 리더십을 제시하는 저서로 인식되어왔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고전(古典)은 하나의 답만을 제시하지 않고, 읽고자 하는 사람이 보고자 하는 것을 제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군주론』은 군주 개인의 승리와 권력 강화를 위한 이기적인 저술로 읽혀왔다. 하지만 필자는 지금까지 읽혀온 것과는 다르게 『군주론』을 독해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혼자 이기는 것이 아니라 같이 이길 수 있는, 그리고 그것이 진정 강한 나라를 만드는 리더십이라는 것을 『군주론』이 담고 있다는 것이다. 『군주론』의 키워드는 독존(獨存)이 아니라 공존(共存)이라는 것이다. | ||
다음은 김경희 교수와 진행한 서면인터뷰이다. 우리나라 최초
『군주론』 이탈리아 원전 연구자이자 번역자인 김경희
교수와의 인터뷰가 마키아벨리를 이해하는데 좋은 발판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마키아벨리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다루는 사람
마키아벨리를 연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요. 마키아벨리의 어떤 점이 교수님을 사로잡으셨나요?
대학 다닐 때부터
정치사상을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석사를 마치고 사상은 본고장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독일에 가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고즈넉한
대학 도서관에 틀어박혀 저의 관심사를 천착하다가 마키아벨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선 마키아벨리는 근대정치사상의 시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세와
고대 그리고 근대가 혼합되어 있는 마키아벨리의 사고는 서양정치사상의 보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르네상스 시기의 인문, 사회, 그리고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이 통합되어 있는 보편적인 지식인이라는 것이 굉장한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러한 학문적인 관심 이외에도 그의 저서를
접할수록 마키아벨리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다루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학문도 비슷하겠지만 정치학, 특히 정치사상은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에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그 속에서 지혜를 찾고자 하는 마키아벨리의 자세에 굉장히 끌렸던 것
같습니다.
사변적보다는
구체적으로
시오노 나나미는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라는 책을 통해, 마키아벨리를
생생하게 살아있는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냈습니다. 『군주론』을 오랫동안 연구하셨으니,
마키아벨리라는 인물에 대한 상을 교수님께서는 누구보다 구체적으로 잡으셨을 것 같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어떤 사람인가요?
마키아벨리는 격변기에 태어나 국가의 존망을 걱정하며, 고전에 대한 공부와
자신의 경험에 기반 해 시대의 문제를 풀고자 고심한 지식인이자 정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사태를 굉장히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사고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의 간결한 문체를 보더라도 사변적이기보다는 구체적이고 현실의 문제를 단순 명료하게 이해하려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일례로 『군주론』 1장을 보면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사항의 단점과 장점을 논리적으로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5장에서 그가 명시한대로 사물의 실제적인 진실에 대해 이득과 손실의
측면에서 명증하게 밝히고자 하였습니다. 군주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사람이기에, 현실의 복잡한 측면을 크게 두 가지로 명료하게 설명하고 그 이득을
따져 결정해야 함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 『군주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설득은 그 특수한 예만 가지고는
불가능하기에 일반론을 펼치고 그 성공의 예를 적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철저히 공인의 자세를 유지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계산하는 이성은 철저히 국가라는 정치공동체의 유지와 보존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사적 이해관계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서 그러한 점이 잘 나타납니다. 『군주론』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귀족, 용병대장, 그리고 카톨릭 추기경 등등은
모두 사적인 이해관계의 추구로 인해 비판 받은 이들입니다.
마키아벨리 정치의 기술은
인민들의 변화를 읽고 그들과 같이 할 수 있는 능력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권모술수와 정치기술만이 정치의
전부라고 잘못 독해되고 있다고 보십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군주론』이 이렇게 이해된 것은, 내용적인
면에서 권모술수와 정치기술이 탁월하게 설명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지는데요. 『군주론』에서 얘기되고 있는 정치 기술에
대하여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군주론』에서 그려지는 권모술수와 정치기술의 대표적인 예로는 아마도 7장에서
나오는 체자레 보르지아의 행적인 것 같습니다. 그는 사이가 나빠진 용병대장들을 시니갈리아라는 도시로 불러 화해를 청하는 척하다가 마음을 놓은
그들을 죽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의 부하를 자신의 군대로 흡수합니다. 또한 로마냐 지역의 평정을 위해 잔인하고 결단력 있는 자신의 심복인
레미로 데 오르코를 파견하여 일거에 귀족들을 제어한 후 그를 토사구팽에 처합니다. 이를 통해 인민의 두려움과 더불어 지지를 획득합니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체자레 보르지아의 행위를 높게 평가합니다.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두 가지 점을 언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가를 유지해야 하는 이가 자신의 힘이 미약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신의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불가피한 폭력이나 불의한 수단의 사용은 ‘잘’ 행사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적기에 단번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목적은 자신의 사익의 추구가 아니라, 국가의 보존에 있습니다.
아울러 정치기술은 인민의 지지를 얻는 것 같은 인간의 마음을 얻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체자레 보르지아는 로마냐 지역이 오랫동안 귀족들의 발호로 인민들이 피폐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지역의 평정은 온건한
인물로는 수행될 수 없기에 자신의 심복 중 잔인하고 결단력 있는 레미로 데 오르코를 보냅니다. 하지만 인민은 자신들을 도와주러 온 레미로 데
오르코의 잔인한 행동에는 두려움과 더불어 미움까지 느끼게 됩니다. 이를 본 체자레 보르지아는 레미로 데 오르코를 효수하여 인민들의 지지를
획득하게 됩니다. 체자레 보르지아는 인민들이 귀족들을 제어해 주기를 바라지만 그것에 필요한 강압적인 수단에는 곧 두려움과 미움을 느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맡겼던 것입니다. 이는 정치의 근본인 인민들의 마음의 변화를 읽어낼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며 그것을 통해 인민들의 호의와 지지를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키아벨리에게 정치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관계는 관계맺음의 쌍방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쌍방에 대한 고려와 배려, 나아가 정확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마키아벨리에게
정치의 기술은 정치의 주요 구성요소인 인민들의 변화를 읽어내고 그들과 같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군주 혹은 지도자는
인민들과 같이 가야 하지만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옳은 방향으로 인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마키아벨리적 의미에서 옳은
정치기술일 것입니다.
마키아벨리즘은 권모술수를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
지금까지 『군주론』이 권모술수를 정당화하는 고전으로
읽혀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질문 3번의 답변에서 말씀드렸듯이 체자레 보르지아의 방법 등을
마키아벨리가 옹호한 것이 그 주요 원인인 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역사적으로 격변기에는 비슷한 사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독재자나 전제군주가
비슷한 사건을 일으킨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사건들을 비난하는 반대파의 사람들이 그들을 비난하기 위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이용하였던 것입니다. 현실의 권력쟁탈을 위한 권모술수를 비난하기 위해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용어가 탄생한 것이고, 마키아벨리가 아니라 현실의 마키아벨리즘을 대표하는 것이 『군주론』이 된 것입니다.
공존의 정치를
위하여
교수님께서 이번에 내신 책이
『공존의
정치』입니다. 공존이라는 가치가
중요하다고 주장하기 보다는, 공존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안내가 더 절실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군주론』에서는 공존의 정치를 실현하는
방법들로 어떤 것들을 얘기하고 있는지요.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현실의 구체적인 경우는 다 다르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 한마디로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공존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에는 충분히 동의합니다. 하지만 공존이 아니라
독존의 가치가 더 평가 받는 시기에 공존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그 출발점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 개인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책을 시작하는 헌정사에서부터 인민의 중요성을 설파합니다. 군주는 혼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아가 군주 혹은 국가
권력의 토대는 인민에게 있고, 이는 자신을 인민들의 눈으로 채워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신념이나 의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민의 그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자신을 비우고 인민의 것들로 자신을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군주의 능력과 그를 둘러싼 권력은 다릅니다. 권력은 주위의 사람들에 기반
하는데, 우리는 종종 재능은 뛰어나지만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경우와 재능은 별로지만 주위에 사람을 많이 몰고 다니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권력의 관점은 공동체의 활성화와 연결됩니다. 군주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재능을 계발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때,
자신의 권력뿐만 아니라 그 국가의 힘은 배가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공동체의 힘과 권력이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군주가 본인의
역량을 과신하고 본인의 힘만을 배가시키려 할 때, 구성원들의 재능과 역량은 고사되고 나아가 공동체의 힘은 반감될 것입니다. 유아독존의 정치는 그
공동체의 힘을 반감시키고 정치의 유연성을 떨어트려 조그만 역경에도 쉽게 무너지게 합니다. 반면 활성화된 공동체는 어떠한 역경에 처하더라도
지도자와 시민들이 힘을 합쳐 그것을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 공동체의 보존과 발전 그리고 활성화를 위해 공존의 정치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공동체에 닥친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인물이 진정한 지도자
작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바람직한 지도자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아마 많은 사람들이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군주론』에서 얘기하는 바람직한 지도자상은
무엇인지요.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설파하는 지도자상은 한마디로 공동체에 닥치는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인물입니다. 이 역량은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됩니다. 하나는 유연성이며, 다른 하나는 권력의 활성화에 대한 이해입니다. 권력의
활성화에 대해서는 5번의 후반부 답변에서 어느 정도 언급되었기에 여기서는 유연성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연성은 급변하는 세계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흔히 인간은 어느 한 가지
행동방식만을 고수합니다. 여기에 자수성가한 이들은 자신의 성공으로 인하여 본인의 행동방식이 입증되었다고 생각하기에 더 완고해 집니다. 이는
가변적인 세계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게 만듭니다. 따라서 변화하는 세계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은 리더가 갖추어야 할 기본 자질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지식이 늘수록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편견이 깊어지고 외골수가 되어 갑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몸이 굳어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를
위해 마키아벨리는 연구와 훈련의 결합을 제안합니다. 헌정사에서 『군주론』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고대사에 대한 연구와 자신의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14장에서는 군주가 군무에 충실하기 위해 연구와 훈련에 임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연구는 과거의 모범적인 사례에 대한 공부이며, 훈련은
그 모범을 현재에 끊임없이 적용해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상형을 현실에 적용해봄으로써 그 다양한 변형을 몸에 익혀 나가는 것입니다. 이상형의
단일성을 현실의 다양성으로 체화시켜내는 것이 유연성의 핵심인 것입니다.
『군주론』이 얘기하는
지도자상과 가장 가까운 인물은 누구?
지금까지 많은 지도자들(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까지 합쳐서) 중에서 『군주론』에서 얘기하고 있는 지도자상에
가장 가까운 인물은 누구이며,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아직 공부가 짧은
저는 이 질문에 대해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한 지도자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 대한 평가와 그 속에서 드러났던 그 지도자의
능력과 공과(功過) 등을 온전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직 마키아벨리에 대한 이해만으로도 벅찬 저에게는 앞으로 천착하고픈 주제중의
하나입니다. 고전은 시대에 따라 다른 의미와 암시를 주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키아벨리도 이야기하고 있듯이 나라와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상황에 맞는 지도자는 서로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유지와 보존을 위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도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대에 대한 정확한 통찰과 그 속에서 나타나는 문제와 해결방법을 이해하고 있는 지도자가 필요할 것입니다.
마키아벨리와의
대화
『군주론』은 어려운 책일 것 같습니다.
일반인들도 도전해 봄직한 텍스트인가요? 『군주론』을 읽어보라고 가장 권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모든 책은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모두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서양고전은 특히 그 인명과 지명 등이 낯설기 때문에 읽는데 어렵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군주론』 헌정사 첫줄에 나오는 “니꼴로 마키아벨리가 로렌초 데 메디치 전하께
올리는 글”에서 ‘로렌초 데 메디치’를 지우고 본인의 이름을 적어 넣으라고 합니다. 마키아벨리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생각하면 일단
첫걸음은 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명과 지명 같은 낯선 단어하나하나에 집중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보다는 마키아벨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 메시지에 집중하도록 인도합니다. 단어가 아니라 이미지에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고전과의 대면을 읽기가 아니라 대화의 상황으로 바꾸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간의 대화는 단어라는 수단을 통한 이미지의 교환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할 때 단순 지식의 함양보다는 지혜의 수양으로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군주론』을 읽는 시도를 한다면 그 어느 누구도 도전해 봄직한 텍스트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장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사람들은 대학에 들어와 교양을 높이고 싶은 학생, 나아가 미래의 리더가 되고 싶은
사람, 좋은 리더를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싶은 사람,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좀 더 ‘잘’ 살아보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군주론』은 같이 살아남기
위한 그리고 다 같이 잘 살기 위한 책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때보다
『군주론』에 대한 붐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왜 생겨나고 있다고 보십니까?
제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저의 소견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신자유주의의 도래 이후 우리사회는 경쟁과 성공의 담론에 더 많이 노출된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경쟁에서 이겨 성공할 수 있을까? 이는 학생이건 기업의 경영자건 경쟁사회에서 사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질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기는 처세술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 『군주론』이 좋은 지침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마키아벨리에 관한
책이 주로 서점의 ‘처세’에 관한 책들과 함께 놓여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약육강식의 기술을 전수해
주는 책으로 인식되는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군주론』은 권모술수 등 냉혹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정치술을 옹호한 저서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책에서도 주장했듯이 『군주론』은 혼자만이 살아남기 위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살아남기 위한
그리고 다 같이 잘 살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존의 접근과는 다른 식으로 『군주론』을 읽어야 오늘날 더 유익한 책으로 재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도자는 스스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만들어 주는 것
꼭 정치인이나 지도자가
아닐지라도, 평범한 개인이 자신의 삶을 더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 맥락 하에서 『군주론』이 주는 메시지가
있을까요?
평범한 개인도 사회 속에서 사는 한 다수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잘 사는 것은 물질적 풍요뿐만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원활히 맺고 현명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군주론』은 여러 가지 시사점을 줄 수 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는 행운이 아니라 자신의 역량에 의존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군주의 권력은 인민의 지지와 그들의 힘에 있습니다. 인민의 지지와 그들의 힘을 계발할 수 있도록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지도자의
능력입니다. 즉, 지도자는 자신의 능력만이 아니라 타인의 능력도 볼 줄 아는 혜안이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나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것으로 관점을 확장시킵니다. 사회 속의 평범한 개인이 자신의 삶을 더 잘 살아간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배려와 공감의 관계 속에서 자기계발을 해 나가는 것일 것입니다.
지도자는 스스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만들어 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리더는 배려와 공감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 나올
것입니다. 『군주론』이 주는 메시지는 정치인이나 지도자가 진정한 리더가 아니라,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 가족, 친구, 이웃 그리고 동료 시민들에 대해 배려와 공감의 자세를 가진 이들 중에 진정한 리더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리더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공감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과 주변의 삶이 더욱 고양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평범한 이들 가운데서 나올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군주론』이 주는 메시지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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