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리지 아래서
구름카페(농원 이름)에 수박 모종을 심었다. 영농교육 받은 대로 원줄기 두 개만 남기고 순을 잘랐다. 줄기가 쭉쭉 뻗어가더니 여기저기서 꽃이 피어난다. 노지가 아니라서 화분의 자연 매개가 어렵다. 비닐하우스 안에 꿀벌 한 통을 들일까 하다가 붓을 들었다. 보름 가까이 붓질을 해댔으나 헛수고다. 참새 알만한 열매가 맺히는듯하다가 시커멓게 되어서 떨어지고 만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마치 과년한 자식을 결혼시키지 못한 부모처럼 애잔하게 지켜보았다.
문득 지난날 노총각 기억이 머리를 헤집고 나온다. 그는 가끔 출장길에 동행하면 자신의 처지를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곤 했다. 그가 끌고 다니는 차는 어머니가 사준 차란다. 그를 장가보내려고 뽑아준 최신형이다. 아가씨를 태워 오라고 사준 차인데 일 년이 넘도록 한 번도 태워 가지 못했다고 푸념이다. 그는, 그 어머니의 성화에 못 견디겠다고 하소연이다. 연애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홀아비처럼 늙어가는 모습이 딱해 보였다.
그 어머닌 들 심정이 오죽했으랴. 나이 사십 되도록 아들이 결혼하지 못하니 전 재산을 팔아서 차를 사준 게다. 어떻게 하면 도와줄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던 중이었다. 적연하게도 신규 여직원이 발령을 받아 왔다. 그녀는 외국 유학을 마치고 늦게 입사한 노처녀다. 달포 정도 지나자, 그녀의 어머니가 뵙자는 연락이다. 사무실로 찾아온다기에 업무적인 이야기를 하리라 짐작했는데 상상이 빗나갔다. 과년한 딸 자랑을 푸짐하게 늘어놓더니 사윗감을 소개해달라는 당부다. 같은 부서에 멋진 총각이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켜 보냈다.
일거리가 하나 늘었다. 사무실에 출근하면 그들을 눈여겨보는 일이다. 남녀가 눈에 콩깍지가 씌면 만나자마자 연애한다는데 서로 소 닭 보듯 이다. 지켜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이 궁리 저 궁리하다가 섬에 있는 동백나무 연리지 아래서, 인연을 만났다는 지인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연리지는 두 그루의 나무가 서로 엉켜 마치 하나의 나무처럼 자라는 신비로운 모습이다. 직원화합행사를 연리지가 있는 섬으로 가자고 담당자에게 부탁했다. 비좁은 사무실에서 복작대다가 섬에 놀러 가자고 하니 신이 난듯하다. 날짜와 여행코스를 잡고 배와 버스를 예약하고 난리다.
배는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바다를 헤집는다. 직원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우그렁쭈그렁하던 표정이 다림질한 듯 판판하다. 해무 사이로 섬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여객터미널을 떠나 두 시간 만에 섬에 닿았다. 섬은 바다 안개 속에서도 위풍당당한 위용을 뽐내고 있다. 오벨리스크처럼 하늘로 치솟은 봉우리가 불쑥 나타나서 신비로운 기운을 건넨다. 조용하던 포구가 배가 도착하자 갑자기 북적인다. 배에서 내린 이들이 삼삼오오 동백숲을 향해 걷는다.
동백나무 숲에 이르자 신기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동백나무 가지가 사랑하는 연인처럼, 아니 부부처럼 서로 다정하게 붙잡고 서 있다. 일행들은 모두 넋을 놓고 연리지를 쳐다본다. 바로 옆에 팻말이 있다. ‘젊은 남녀가 연리지 나무 사이를 통과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예쁘게 써놓았다. 노총각·노처녀에게 잔뜩 기대했으나 팻말이 무색하다. 그들은 나무만 만지작거릴 뿐 무덤덤한 반응이다. 나이 먹으면 연애가 쉬운 일 아니다. 이십 대처럼 감성이 풍부하지 않아서다. 하나 남녀의 사랑은 불타도 연기가 없다. 아무도 모를 일이다. 기다려 보기로 했다.
연말이 되어서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났다. 관리자는 한 부서에 오래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부서로 옮기려고 짐을 싸고 있는데 그 노총각이 문을 두드리며 불쑥 나타났다.
“국장님, 하루에 서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죠?”
그는 뜬금없는 질문이다. 커피를 한 잔 타 주며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녀와 있었던 이야기를 주섬주섬 늘어놓는다. 처음에는 자주 만나서 차를 마시고 데이트를 했는데, 요즘은 만나자고 해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만나주지 않는다고 상심한 표정이다. 그녀는 그에게 키가 작아서 싫다고 했단다. 하루에 서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며 내게 따진다. 인간의 힘으로 수박의 화분을 매개하는 것도 힘든 일이나 남녀의 인연을 맺는 게 하는 일도 쉬운 게 아니다. 모든 걸 운명에 맡기고 내려놓는다.
어느 날 구름카페를 찾았다. 무료한 마음을 달래려고 라디오를 틀었다.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 노래 가사가 의미심장하게 와닿는다. 비닐하우스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수박 넝쿨에 아이 머리통만 한 수박이 여러 개 매달렸다. 비닐 창으로 바람이 들어와서 화분을 매개한 게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하나 자연이 만들어준 선물이다. 연리지 아래서 인연을 꿈꾸던 그들이 궁금하다. 그들의 인연도 자연스럽게 맺어졌으리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