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삼학도 이난영 배롱나무
오래전 호남선의 종착지인 목포역에 내리면 이난영(1916~1965)의 노래 ‘목포의 눈물’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목포의 눈물 노래와 유달산은 목포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또 유달산 중턱쯤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있다. 가까이에 이순신 장군의 노적봉과 삼학도, 멀리는 푸른 다도해의 절경이 있으니, 목포의 눈물이 그냥 눈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난영은 1916년 6월 6일 목포 죽교동에서 날품을 파는 아버지 이남순의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옥례이고 학교 기록은 이옥순이다.
1923년 목포 공립여자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아버지는 술을 좋아했고 어머니는 10살 때 가출하였다. 그 때문에 4학년 때 중퇴하여 오빠와 함께 솜공장에서 일도 하였다. 여섯 살 위 오빠인 이봉룡이 열두 살의 이난영을 엄마가 있는 제주도로 보냈다. 이때의 자퇴서가 학교에 남아있는데, 보호자란에 아버지 이름이 적혀있고 도장은 오빠의 것이다. 자퇴 사유는 거주지 이전으로 되어있다.
제주도로 간 이난영은 극장을 경영하는 일본인 집의 허드렛일을 도와주면서 생활했다. 그러던 중 애를 보면서 부르는 이난영의 노래 솜씨가 예사롭지 않음을 안 일본인이 제주도로 순회공연을 온 태양극단에 추천해서 이난영은 막간 가수로 출연을 하게 되었다.
그 뒤 오케이 레코드사의 이철 사장과 만남으로 성공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전속 가수가 되었고 1933년 ‘향수’, ‘불사조’, 1934년에는 ‘봄맞이’를 불러 대중의 눈길을 끌었다.
1935년이다. 이난영은 조선일보 애향가 가사모집에서 1등에 뽑힌 목포 출신 문일석의 ‘목포의 눈물’을 불러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가요계의 새별로 등장하였다. 목포와 관련된 노래를 목포의 작사가가 노랫말을 짓고, 목포 출신 가수가 불러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1937년 11월 21살의 이난영은 평양 숭실전문을 나온 김해송(1911~?)과 결혼했다. 그리고 김해송이 작곡한 ‘다방의 푸른 꿈’을 불러 큰 인기를 얻었다.
1940년 이난영은 단순히 노래하는 가수로서뿐만 아니라 극단에서 연기와 노래를 함께 하는 탤런트로서의 재능을 발휘하였다. 1946년 12월 이난영은 남편 김해송과 함께 뮤지컬 전문 쇼단 KPK악극단을 창단하였다. 하지만 1950년 6·25가 발발하고 불행하게도 김해송은 납북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김해송의 이름은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 그렇게 이난영을 이별의 여인으로 만든 전쟁이 지나가고 이난영은 KPK악단을 혼자 운영하였다.
1959년 이난영과 김해송의 7남매는 미국으로 건너가 김시스터스와 김보이스라는 이름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1962년 이난영은 자녀들의 초청으로 미국에서 8개월여 생활하였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1965년 4월 11일 이난영은 서울 회현동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 107에 외로운 몸을 뉘었다가, 2006년에 고향인 목포 삼학도 자락 난영공원으로 왔다.
한여름 햇살이 쏟아지는 날, 이곳 그녀가 잠든 곳을 찾으니 그녀를 지키는 한 그루 배롱나무꽃이 수줍은 듯 화사한 듯 무심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포의 눈물 노랫가락이 바람도 없는 가슴을 지나간다.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삶이었을지 모르지만, 노래를 통해 시대와 개인의 아픔을 희망으로 승화시킨 이난영의 노래는 뜨거운 눈물이요, 불타는 사랑으로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