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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에서는 상대적(相對的)인 개념을 여러가지 예를 들어 철저하게 부정하고,
상대성(相對性)이 있는 곳에는 고통(苦痛)이 따르게 되어 있지만
그 상대성이 소멸된 곳에 지도(至道)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신심명」에서 그 상대성(相對性)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01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지극한 도(道)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직 간택하는 것만 싫어하면 된다.
도(道)란 진리를 탐구하는 길이니,
지도(至道)라 하면 더 이상 높을 수도 없고, 더 깊을 수도 없으며, 더 넓을 수도 없는
가장 지극한 진리로 가는 길이다.
이것은 위없이 높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고,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이기도 하며, 극락세계로 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심층(心層) 중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진아(眞我)로 가는 길이다.
간택(揀擇)이라 함은 가려내고 택하는 마음이다.
가려내는 것은 몹쓸 것을 가려내는 것이고, 택하는 것은 쓸모 있는 것을 택하는 행위이다.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택하고 버리는 작용을 한다.
한 남자가 여자를 장난삼아 만날 때와 결혼 대상으로 만날 때
그 선택의 기준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 우리들의 간택심이다.
먹는 음식을 앞에 놓고도 간택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종교를 택하거나 자기가 다닐 절을 택하고,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도 간택심이 작용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마음이다.
어쩔 수 없이 간택을 해야 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으니
지도(至道)가 무난(無難)한 것이 아니라
지도를 방해하는 간택이 극심하므로 도를 이루기에 더 어려움이 많은 것이다.
02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
다만, 미워하고 좋아하지 않으면 (도는) 화통해져 명백히 드러난다.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도 우리 마음의 일반적인 작용이므로
미워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마음을 얻어
지도(至道)가 통연명백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가려내는 것은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적인 마음의 작용이고,
택하는 것은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감정적인 마음의 작용이다.
이러하니 ‘간택하는 마음의 작용을 꺼려한다.’는 것은
사물이나 사람을 대할 때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야
가려내거나 택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니,
이를 분별심이 없는 마음이라 하여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하는데,
무분별지에 이르면
지도(至道)가 환하게 보인다는 말씀이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이다.
03 호리유차(毫釐有差) 천지현격(天地懸隔)
(간택을 싫어하고 증애가 없는 마음에서)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
간택(揀擇)함이 없는 마음이나 증애(憎愛)함이 없는 마음바탕에
털끝만큼이라도 가리고 택하는 차별심이나 미워하고 좋아하는 차별심이 남아 있으면
이 차별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고 했다.
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져 있는 상태가 우리들의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앞 세 구절을 종합해보면, 택하고 버리는 마음이나,
미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은 모두 자기 욕심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며,
욕심은 구하는 마음이 심해지면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구하는 마음이 없으면 불만스러운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구하는 것이 있으면 반대로 구하지 않는 것도 있게 되니
자연히 좋고 나쁜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구하던 것이 구해지면, 더 좋은 것을 구하려 하게 되고,
또 점점 더 좋은 것을 구하려는 것이 우리의 욕심이니 언젠가는 불만이 생기게 된다.
또 이렇게 구하고 모아서 쌓아놓은 자기 것을 잃게 되었을 때도
역시 불만스럽게 되고, 그 불만이 커지면 원한으로 변하게 되어 있다
원한(怨恨)은 복수(復讐)로 이어질 수 있으니,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가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호리유차(毫釐有差) 천지현격(天地懸隔)
(간택을 싫어하고 증애가 없는 마음에서)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고 했다.
이러한 악순환의 발단은
간택하는 분별심과 증애(憎愛)의 분별심에서 일어나는 법이니
오직 간택(揀擇)하는 마음을 싫어하면 지도(至道)에 무난히 이를 수 있고,
증애(憎愛) 하는 마음이 없으면 지도하는 길이 통연(洞然)하고 명백(明白)해진다고 한 것이다.
간택하는 마음과 증애하는 마음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간택하는 마음이나 증애하는 마음은
이기심(利己心)의 근본인 오온심(五蘊心)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오온심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물질, 느낌, 생각, 행동, 의식인데,
물질은 몸이고 느낌, 생각, 행동, 의식은 통틀어서 마음이라고 하는데
우리들의 감각작용은 몸을 통해 일어나는 느낌이나 생각, 말이나 행동,
즉 간택 및 증애하는 느낌, 생각, 언행의 근본이 되는데 식(識)에서 일어난다.
이 의식은 전생에 있었던 나의 경험이나 금생에 있었던 나의 경험이 지배하는 나의 생각이다.
미워하거나 좋아하거나, 택하거나 버리는 생각의 요인은
나의 과거의 경험에 의해서 그렇게 판단되고 행하는 것이지
그 사물이나 사람 자체에 미운 털이 박혀있어서 미운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미운 털이 박혀있는 사람이나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나와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그 물건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 된다.
절에 오면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 중에는 자기 비위에 맞는 사람도 있지만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 자체가 좋아서 내 비위에 맞고,
그 사람 자체의 성격이 나빠서 내 비위에 거슬린다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자신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자신의 오온심에서 비롯된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온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자기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지
상대방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깨달음으로 자기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만 있으면
그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나에게 접근해 온다 하더라도
그를 간택하거나 증애하는 마음 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형형색색의 사람과 물건이 서로 어우러질 때
생(生)함이나 성장함이 일어나는 법이고 창조가 가능해 질 수 있지만,
서로 대립하거나 배척할 때는 서로 쇠퇴해지고 멸하게 되는 법이다.
그렇다고 남을 상대하지 않으면 연기하는 대열에서 소외되고
자기 성격의 개선(改善)이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 더욱 외골수로 빠지게 된다.
이것도 역시 자기가 간택하고 증애하는 결과로 일어나는 현상이지
남에게 허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말씀한
‘상대방에게 허물이 있기도 하겠지만 많은 경우 상대방에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고(思考)의 허물에 의해 상대방에 허물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말씀은
불교의 인과응보설을 바르게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관점(觀點)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간택하는 마음을 싫어하고 증애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오온심에 기록되어 있는
과거의 경험을 소멸하기 위해 참회하고, 복을 짓고, 도를 닦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참회는 복(福)을 짓는 뿌리이고,
복을 짓는 행위는 수행을 위한 뿌리이다.
즉 수행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복 짓는 일부터 해야 하고,
복 짓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 동안 남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거나 해(害)가 되는 일을 한
성품, 말, 행동 등에 대한 참회가 있어야 한다.
참회를 통해서 복(福) 짓는 일에 역행하였던 일을
다시는 하지 않음으로서 복 짓는 일에 가속이 붙게 된다.
복을 짓고 수행하는 일에 근본이 되는 것이 내 마음을 믿는 신심(信心)이다.
인과응보를 믿고 제행이 무상함을 믿으며,
제법이 무아하다는 가르침을 내려주신 불법승 삼보를 믿는 마음이다.
복 짓는 마음이란 나를 위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다.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했으면 그 과보로 금생에 복된 일이 많이 일어나게 된다.
건강 복, 부모 복, 형제 복, 친구 복, 스승 복, 관록 복, 명예 복, 재복, 사업 복, 부인 복, 남편 복, 자식 복,
불교를 만나는 복, 노래를 잘 부르는 복, 그림을 잘 그리는 복, 총명한 복 등등 수 없이 많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생활 자체가 복을 짓는 업이 되기도 하고,
무기(無記)이기도 하고, 또 악업을 짓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소에 어느 쪽으로 복 짓는 일을 많이 하느냐에 따라
금생이나 내생에 그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항상 남과 잘 사귀고 남에게 필요한 일, 좋은 일을 해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좋은 연을 많이 짓다보면
선한 도반을 많이 만나고 훌륭한 스승이나 선배 또는 귀인을 만나 하는 일마다
잘 풀려가 더욱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이다.
남이 하는 언행이 나의 비위를 상하게 했을 때,
저 사람의 언행이 기분 나쁘다고 생각되는
즉시,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저 사람이 저런 언행을 하지 않았을까? 고 생각하는 마음이
간택(揀擇)이 없고 증애(憎愛)가 없는 마음이다.
상대방의 언행으로 말미암아 화가 났을 때,
자기가 낸 화를 정당화하려 하거나 변명하려하는 것은
간택심과 증애심을 오히려 깊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그러므로 화가 난 것을 인지하는 즉시
마음 속 깊이 참회하고 복 짓는 일을 찾아 하면
화도 다스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간택심과 증애심도 점차 해소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복 짓는다는 말씀이 우리들의 일상생활 밖에 있는 일이 아니다.
절에 와서 신도님들이나 불사(佛事)를 위해 하는 여러 가지 봉사활동은 훌륭한 복 짓는 업이며,
예불에 참여하여 부처님께 공양올리고 법문을 듣는 것 또한 좋은 복을 짓는 일이다.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자 하는 마음이
곧 자기 마음을 가장 잘 다스리는 법이 되기 때문이다.
복을 잘 지어 부처님 법에 수순할 수 있을 때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아
탐욕심을 비워
선정(禪定)을 이루고 무명을 밝히는 도를 닦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04 욕득현전(欲得現前) 막존순역(莫存順逆)
(지극한 도가) 앞에 나타나기를 바라거든 순(順)과 역(逆)이 있게 하지 말라.
이 구절을 바꾸어 보면,
순(順)과 역(逆)이 없을 때 도(道)가 나타난다. 라는 뜻이 된다.
즉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순조(順調)롭다고 기뻐하고,
어렵다고 실망하는 사람에게는 도(道)가 멀어진다.
즉 순조롭다 어렵다하는 상대적인 개념이 없어야 한다.
이러한 상대적인 개념이 없으려면
일이나 수행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속히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여기에서 지극한 도라고 하면 부족함이 없고 불만도 없어 근심 걱정이 없는 극락세계인데
조급(早急)한 마음이 남아 있는 사람은 근심 걱정 불만을 떠날 수 없으니 극락세계에 이를 수 없다.
그러하므로 극락세계가 눈앞에 나타나기를 원하면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내 마음에 드는 것도 없고
내 마음을 거슬리게 하는 것도 없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게 필요한 일체가
이미 지금 이 자리에 주어져 있음을 보는 눈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생활에서는
마음에 드는것도 있고 거슬리는것도 있는것이 사실인데
어떻게 순역(順逆)이 없는 생활을 할수 있을까?
순역(順逆)이 있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순역자체가 있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리로 되간다고 기뻐하는 감정을 일으키지 말고,
역행(逆行)한다고 짜증내는 감정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씀이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감정을 일으키게 되면
현재의 상황(狀況)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눈을 감정으로 가려지게 하지 말고
현재의 사정을 자세히 바라보면
잘되는 사업은 더욱 잘되게 할 수 있는 법이 보이고,
안 되는 사업은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이 눈앞에 나타난다는 말씀이다.
요즈음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어려울 때일수록 어렵다는 감정이 쌓이게 되면
현재의 사정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그 감정에 의해 가려지게 되므로
현재의 상황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리지 않는다.
감정은 현재의 상황 판단에 장애만 일으키므로 감정만 일으키지 않으면
우리들에게 원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불성(佛性)이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신다는 말씀이다.
불성이 우리들에게 좋은 길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순역(順逆)에 당하여 일으키는 감정이 불성을 가리기 때문에 지도(至道),
즉 극락세계를 볼 수 없는 법이니,
가장 바른 길을 보고자 하면 순역이 있어도 그에 대한 좋고 나쁜 감정을 일으키지 말라.
감정을 일으키지 않으면 순풍(順風)에는 순풍을 잘 이용하는 법을,
역풍(逆風)에는 역풍을 잘 이겨내고
또 그를 잘 이용해서 득을 볼 수 있는 길이 보인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또 순(順)이나 역(逆)이 사람들의 착각에서 오는 수도 있다.
실제로는 자기를 거역하는 일인데 순(順)으로 보이거나 그 반대의 경우이다.
이러한 착각은 과거에서부터 쌓아온 경험에 의해 형성된 성격의 표출이다.
이러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고생하게 되는 경우도 흔히 있는 일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그 성격 형성과정을 잘 살펴서 고침으로서만이 착각에 의한 순역을 막을 수 있다.
이 말씀은 순역을 객관적으로 보라는 말씀도 아니다.
사물이나 사람을 대할 때 내 마음 속에서 순역(順逆)이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으면 좋지만,
혹 일어나면 그 순역을 자각(自覺)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그에 흔들리지 않고 물들지도 않으며 깨끗한 마음으로
그 대상을 바로보고 바로 대할 수 있는 마음이 열린다.
이것이 도를 구하는 사람의 청정한 마음이기 때문에
‘지도(至道)가 눈앞에 나타나기를 원하면 순(順)과 역(逆)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하셨다.
05 위순상쟁(違順相爭) 시위심병(是爲心病)
따르고자 하는 것과 따르지 않고자 하는 것이 서로 다투는 것이 마음의 병이 된다.
비위(脾胃)에 거슬리는 것이 어길 위(違)이고, 비위에 맞는 것이 순할 순(順)이다.
비위에 거슬리는 일과 맞는 일이 서로 싸우게 되면 그것이 마음의 병(病)이 된다고 했다.
위(違)와 순(順)을 예로 설명하면,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고자 하는 마음을 순(順)이라고 하면,
먹으면 안 된다는 마음은 비위를 그슬리게 하는 것이니 위(違)가 된다.
당뇨가 있는 사람이 단 음식이나 음료수를 좋아하는 것은
자기 비위에 맞는 것이니 순이고, 먹으면 안 된다는 마음은 위이다.
이 두 가지가 마음의 갈등으로 작용하게 되면 마음의 병이 된다는 말씀이다.
비만증(肥滿症)이 있는 사람이 먹기를 좋아하는 것을 순이라 한다면,
먹으면 안 된다는 마음은 위(違)이다.
이 사람의 갈등이 위순상쟁(違順相爭)이고,
이 마음의 갈등이 곧 마음의 병이 된다는 말씀인데 요즈음은 이런 것을 스트레스라고 표현한다.
학생이 공부를 안하고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비위에 맞으니 순이라 한다면
게임을 안 해야지 하는 마음은 위이다. 이 두 마음의 갈등이 곧 마음의 병이 된다는 말씀이다.
우리들의 생활상에서 술을 좋아하는 사람,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 혼외정사를 좋아하는 사람,
남을 속여 이익을 챙기고자 하는 사람 등등 수많은 모순에서 일어나는 갈등들이 있는데
이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여 위순상쟁(違順相爭)이라하고
이들을 마음의 병, 심병(心病), 화병이라고 했다.
06 불식현지(不識玄旨) 도로염정(徒勞念靜)
현묘한 뜻을 알지 못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고 애만 쓰는 구나.
순역(順逆)에 집착하는 사람이나 위순상쟁(違順相爭)하여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들이
지도(至道)의 현묘한 뜻을 알지 못하고 수고로이 마음을 고요히 하려고 애만 쓴다고 했다.
‘현묘한 뜻을 알지 못한다.’는 ‘현묘한 뜻’이 곧 지도(至道)의 뜻이고,
극락(極樂) 그리고 열반(涅槃)의 뜻이고,
이러한 경계는 세속적 욕망을 깨끗이 씻은 곳인데
그 욕망을 그대로 두고 참선한다고 앉아 있는 것은 공연한 헛수고를 하는 것이란 말씀이다.
예를 들면, 콜라(coke)를 좋아하는 사람이
마시고자 하는 마음과 마시면 안 된다는 마음이 서로 갈등을 일으켜
마음병에 걸려 있는 사람이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앉아 있어봐야
마음은 고요해지지 않고 공연히 수고만 한다는 말씀이고, 담배 술 등등도 그와 같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마음을 고요히 하고자 앉아 있어도
생각나는 것은 마음의 갈등 뿐이니, 그것을 도로(徒勞), 즉 공연히 수고만 하는 것이라 했다.
즉 마음이 고요히 될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지극한 도의 현묘한 뜻’을 알고자하면
마음에서 서로 다투는 위와 순(違順), 순(順)한 것과 거슬리는 것부터 먼저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이다.
세속적인 욕망이 있는 한 위순(違順)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다스릴 수 없는 법이니
세속적인 욕망을 우선 제어해야만 위순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
위순(違順)도 위에서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물이나 사람이 본래부터 나에게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성격이 그 대상을 대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이 감정은 나의 과거의 경험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위순(違順)이 반드시 좋다 나쁘다 혹은 옳다 그르다. 라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으니
위(違)도 순(順)도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아야 상쟁(相爭),
즉 서로 다투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말하자면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있으니까
담배를 보면 좋아하고 담배가 없으면 마음이 불안해져서 갈등을 일으키게 되니
마음을 고요히 하는데 장애를 주는 요소가 된다.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있는 한 이 위순상쟁(違順相爭)의 갈등을 면할 수 없다.
오직 담배를 철저하게 끊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수많은 종류의 위순상쟁의 갈등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들을 오로지 행(行)으로 끊음으로서 어떠한 것이 눈앞에 나타났다고 해도
위순상쟁(違順相爭)의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때,
비로소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수행에 임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습관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의 병(病)은
그 습관을 그대로 두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거나 고요하게 할 수 있는 법은 없으니
나쁜 습관을 끊겠다는 원(願)을 세워
끊임없이 그 습관을 끊는 수행에 정진(精進)함으로서만이 가능하다.
수행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잘못된 습관을 바로잡는 일에 원을 세우고 정진하는 것이다.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잘못된 습관은 화냄이다. 탐진치(貪瞋癡) 중 진애(瞋埃)이다.
07 원동태허(圓同太虛) 무흠무여(無欠無餘)
(지도는) 태허와 원만하게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지극한 도는 텅 빈 허공과 원만하게 같아서(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서),
欠-모자랄 흠, 무흠(無欠) - 모자람도 없고, 무여(無餘) - 남음도 없다.
허공은 형체가 없어 완전히 통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
걸림이 없고 수용하는데 한계가 없음에 비유된다.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으므로 걸림이 있을 수 없고,
어떠한 사유에서도 수용 못할 이유가 없다.
이 우주 법계에 불성(佛性) 충만(充滿)함을 표현한 말씀이고,
근심 걱정이 없고, 항상 하는 일에 만족하고 평화로운 극락세계이고
좀 더 나아가 이 우주 법계와 하나가 된 열반를 표현한 말이다.
이 지구상에 아무리 많은 중생이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함에 모자람이 있을 수 없고,
태허(太虛)가 아무리 넓고 깊다고 하여도
내 마음을 덮고 남는 것이 없고,
내 마음이 아무리 넓고 깊어도 태허는 그를 싸고 남음이 없는 법이니
마음과 태허는 일여(一如)하다는 말씀이다.
우리 인간사(人間事)에서는
우리들의 착각으로 가려내고 택하는 간택(揀擇),
미워하고 좋아하는 증애(憎愛),
따르고 거역하는 순역(順逆),
하고자 하거나 하지 않고자 하는 위순(違順)이 있다.
이는 우리들의 업식(業識)에 의한 착각이니,
이 업식이 없으면,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그로 인해 하고자 하는 일에 부족함이나 남음이 없게 되니 늘 근심 걱정이 없는 세계가 열린다.
이 극락세계가
우리들이 소망하는 세계인데,
우리는 이 세계에 들기 위해 착각(錯覺)을 일으키게 하는
우리들의 업식을 소멸하고자 발심하고 정진하는 수행을 하는 것이다.
원동태허(圓同太虛)는
반야심경의 “제법공상(諸法空相)”,
법성게의 “법성원융(法性圓融)”에 해당하고
무흠무여(無欠無餘)는
반야심경의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에,
법성게의 “무이상(無二相)”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이는 모두 원초적 실상과 그 모양, 말로써 표현될 수 없는 말로
그 모양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데,
흔히 ‘참 그대로’라는 뜻을 가진
진여(眞如), 불성(佛性), 법성(法性)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승찬대사께서 이 법성의 수많은 표현 가운데
원동태허(圓同太虛), 무흠무여(無欠無餘)라고 하신 것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법성의 태허(太虛)함에서 가애(罣礙), 걸림이 없음을,
그리고 걸림이 없으므로 부족함도 없고 남음도 없이 필요에 딱 맞고,
필요에 딱 맞으니 항상 기쁜 마음으로 무슨 일에도 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너무 많이 먹지도, 적게 먹지도 않아 딱 맞게 먹으니 건강을 유지하게 되고,
건강에 신경 쓸 일이 없으니 먹는 것을 즐기게 된다.
돈도 많지도 적지도 않게 알맞게 있어 돈 때문에 근심 걱정할 일이 없으니,
하루 하루가 즐거운 생활일 수 있으며, 혈압이 높지도 낮지도 않아 딱 맞아서
혈압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조차 모르는 상태가 무흠무여이다.
이것이 진정한 편안(便安)이고 평화(平和)이며 극락(極樂)의 요건이다.
이러한 까닭에
반야심경에서는 보리살타(菩提薩埵) 의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蜜多)
고심무가애(故心無罣礙) 무가애고(無罣礙故) 무유공포(無有恐怖)라고 했다.
여기에서 반야바라밀다가 태허(太虛)이고 진여(眞如)이며 원초적 진실상이니,
보리살타가 이 태허에 의지함으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졌다는 뜻이 된다.
이와 같이 태허(太虛)는 반야심경의 공(空)과 반야바라밀다와 같은 의미가 된다.
그리고 이 ‘태허와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 이치’를
법성게에서는 ‘깨닫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라고 하여
태허(太虛)의 무흠무여(無欠無餘)의 경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반야심경의 ‘제법공상(諸法空相)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경지도 이와 같다.
모두 다 진여의 법성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법성원융무이상이라 한 것은 위에
간택(揀擇), 증애(憎愛), 순역(順逆), 위순(違順) 등이
모두 상대적이고 대립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이들의 원초적 성품에서 보면
서로 원만하게 융화할 수 있는 성품이지,
하나를 택하기 위해 다른 쪽을 버리거나 없애야 할 것이 아니므로
사실상 이들은 모두 두 모양이 아니라고 하고,
이들의 원초적 진리 면에서 보면 본래부터 조금도 움직인 적이 없이 고요한 것이니,
이름도 모양도 없어 현상세계와는 완전히 끊어져 있는 경지이니
오직 깨달은 자만이 알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없이 큰 허공이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고 하신
태허(太虛), 무흠무여(無欠無餘)이고,
이 마음이 바로 태허(太虛)가 되고 무흠무여(無欠無餘)가 되었다는 것은
또 내 마음이 열반의 세계에 들었다는 뜻이 된다.
08 양유취사(良由取捨) 소이불여(所以不如)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지극한 도와) 같지 않는 바이다.
앞에서 간택(揀擇), 증애(憎愛), 순역(順逆), 위순(違順)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고 하고,
여기에서는 또 취하고 버리는 마음을 갖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데 취하고 버리는 마음을 갖지 않고는 살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그리고 사람마다 무엇을 취하고 버리는지는 다 다르지 않을까?
다름이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취하고 버리는 일을 잘하여 잘살고,
취하고 버리는 일을 잘못하는 사람은 못사는 것이 아닐까?
즉 취사심을 바르게 작용하는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잘되고,
하는 일마다 잘되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취사심이 바르게 작용되지 못하는 사람이 하는 일은
잘 풀려가지 못하고 불행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하여 어떤 사람의 취사심은 바르고
또 어떤 사람의 취사심은 바르지 못할까?
이익을 볼 수 있는 일인지 손해를 볼 일인지
사실을 사실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의 취사심은 바르게 되어있는 취사심이고,
사실을 왜곡되게 보고 취하고 버리는 사람은 하는 일이 바르게 될 수가 없다.
즉 일이 이익이 될 일인지 손해를 볼 일인지
사실을 왜곡되게 보니까, 이익이 될 일을 손해 볼 것이라고 착각해서 버리고,
손해를 볼 일을 이익이 될 것이라고 취하니,
취할 것은 버리고, 버릴 것은 취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지 않을까.
이러한 사람은 하는 일들이 잘 풀리지 못하고, 불행할 수밖에 없다.
사실을 사실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이익이 될 일은 이익이 될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손해가 될 일은 손해가 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눈이 있다.
이러한 사람은 이미 탐욕이나 애욕을 멀리한 사람이기에
사리(事理)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있게 된다.
이들은 긴 것은 길다고,
단단한 것은 단단하다고 보고
긴 것은 긴대로 쓸 수 있는 곳이 보이고,
짧은 것은 짧은 대로 쓰일 곳이 보이게 됨으로
버릴 것도 없고, 특별히 취할 것도 없게 된다.
있으면 있어서 좋고, 없으면 없는 대로 편안하게 살아 갈 수 있는 마음이
취사심이 없는 마음이다.
이치가 이러하니, 취하고 버림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탐욕에 물들든지, 애욕에 눈이 어두워 취할 것을 취하려 하지 못하고,
버릴 것을 버리려 하지 못하는 어두움이 있는 것이 문제이다.
어두움이 없는 사람에게는 탐욕이나 애욕이 침투해 들어오지 못하므로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있는 그대로 할 일들이 있으며,
있는 그대로가 즐거운 것인 줄 알기 때문에
특별히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게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지극한 도와 같으니, 그렇지 않은 것은 지극한 도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사람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특별히 원하는 것을 가지고 사람을 보면
그 조건에 가려 취할 것과 버릴 것에 착각을 일으키게 되지만
특별히 원하는 선입견을 갖지 않고 사람을 보면
그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09 막축유연(莫逐有緣) 물주공인(勿住空忍)
유연(有緣)에 쫓지도 말고 공인(空忍)에 머물지도 말라.
그러나 우리들이 살아감에 있어서는
연(緣)이 있어야 현상을 유지하기도 하고, 어려움을 극복하기도 하며,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연이 있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인데
연을 쫓지 말라고 한 것은, 연이 사리에 어긋남에도
그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도덕 불감증이 있는 사람이
연을 쫓는 것을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예를 들면 돈은 필요하고 대단히 중요하기는 하지만
사리에 어긋나거나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돈버는 연을 추구하지도 말고,
명예에 집착해서 연을 추구하지도 말며,
무엇에나 집착해서 연을 구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자본주의 혹은 실용(實用)주의를 주장하며 사리에 어긋나도 상관하지 아니하고,
도덕률에 어긋나도 상관하지 아니하고,
다만 돈을 벌고 명예를 얻는대만 혈안이 되면, 돈을 버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하여
그런 연(緣)을 쫓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돈이든 명예든 무리하게 욕심을 내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부작용(副作用)이 따르게 마련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바르게 사는 것일까?
이기적으로 부(富)를 축적하는 것을 사람들이 자본주의라 했는데
요즈음에는 실용주의라고 말을 바꾸어 부르지만
이렇게 발전되어 가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해 보자.
인류 역사상 16, 17, 18세기의 사상적인 배경,
그리고 1차,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원인은
모두 ‘인간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권리’라고 하고,
이 권리는 사리(事理)나 도덕률에 앞서는 것이라는 서양사상에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이익을 추구하는 양대 세력을 형성하게 되고,
이 세력들은 1, 2차 세계대전을 유발시키지 않을 수 없는 흐름을 낳았고,
동시에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의 시대적인 흐름으로 빈부의 양극화를 초래하고,
산업발전을 위한 자연 파괴, 강물과 바닷물 그리고 공기의 오염이 극심해지는 등
다양한 사회적인 문제와 자연훼손 등의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특히 부익부(富益富)와 빈익빈(貧益貧)의 사회문제는
기존의 사리(事理), 도덕 그리고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를 싹트게 하고,
가난한 일반대중이 이 사상운동에 참여하게 된 세계적인 사상 전쟁으로 발전하게된 것이다.
한국의 6•25 동란이 바로 이 사상 전쟁의 비참한 산물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로 말미암아 국가적으로 사회보장제도가 정착하게 되고,
환경오염에 대한 정화운동이 함께 일어나게 된 것이다.
우리가 현재 미국에서 누리고 있는 노인복지 및 의료해택이
전 국민의 공생(共生)을 원칙으로 하는 사상에 근본을 두고 있다.
이러한 사회보장제도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세금을 부담함으로서 가능한 것이니,
불교적인 시야에서는 세금을 부담하는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보시하는 공덕,
즉 복을 짓는 행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직업 그 자체도 현대판 사회봉사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직업 활동에 의해 상품이나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직업 활동은 지속될 수 없으며,
지속되는 것은 그 직업 활동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지표(指標)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유연(有緣)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신심명에서 연(緣)을 쫓지 말라는 말씀은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 연을 쫓는 마음은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악업을 지을까 두려워
연(緣)을 추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되도록이면 모든 사람들이 같이 즐길 수 있는 연을 추구하라는 말씀으로 해석된다.
공인(空忍)에 머물지 말라는 말씀은
공(空)에 의지하거나 공에서 무엇을 바라지도 말라는 말씀이다.
앞 구(句)에서 막축유연(莫逐有緣),
즉 있는 연을 쫓지 말라고 했으니 연을 쫓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또 어차피 모든 것은 항상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연(緣)이 다하면 없어지는 것인데 무엇에 연연할 것이 있고 할 일이 있는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은가? 또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참아서 공에 빠지게 하는 것,
즉 단공(斷空)에 빠지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반야심경에서도 오온(五蘊)이 공하였다고 하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도 없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도 없다고 했으니,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 라고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마음을 먹는 것이 공에 머무는 것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일어나는 생각조차 꾹 참아 공(空)에 머물게 하는 것이 공인(空忍)이다.
이러한 공인에 빠지게 되면
허무주의(虛無主義)에 빠져서 살 의욕마저 잃게 되는 현상이 있을 수 있으므로
공인에 머물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공사상과 제법무아(諸法無我) 법문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류를 막기 위한 말씀이다.
앞에서 유연(有緣)을 쫓지 말라고 한 것은 사람이
어떤 물건이나 사람에 의지하거나 바라는 것이 있게 되면
그들의 변역(變易)에 무지해지고
또 자신의 변이(變異)에도 무지해지기 쉬우므로
자기 발전에 장애가 된다.
예를 들면 자기 부모에게 의지하는 사람은
부모가 변해가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또 자기가 변해가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의지만 하려고 한다.
이들에게 의지하거나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자신이 살기 위해 찰나 찰나에 자신과 자신의 주변 변화에 스스로 상응(相應)하여
자기 변화를 가져와 그들에 맞게 하려고 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함으로 부모에게 의지하는 마음을 비우게 하고
자신의 발전을 도모하게 하기 위해
부모도 공(空)하였다는 뜻으로
반야심경에서 무색성향미촉법이라 하고,
자신도 공(空)하였다는 뜻으로 무안이비설신의라 하였으니
오온(五蘊)이 공하였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부모를 의지하지도 말고, 자신의 욕망을 의지하지도 말고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라고 했다.
이 때, 반야바라밀다는 유식에서 말하는 아뢰야식의 체(體)이고
불생불멸하는 본래의 모습이다.
연을 따르되 때 묻은 마음으로 대하지 말고
깨끗한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이 공 도리이다.
즉 공(空)하게 하라는 말은 자신을 공(空)하게 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때(垢)를 공(空)하게 하라,
즉 없애버리라는 말로 해석하면
공인(空忍)에도 머물지 말라는 말씀이 이해될 것이다.
10 일종평회(一種平懷) 민연자진(泯然自盡)
일종(一種)으로 바로 지니면 없어짐이 저절로 다하리라.
일종(一種)은 제9절의 유연(有緣)과 공인(空忍)이 양극(兩極) 같이 보이지만
실은 같은 하나의 종자라는 말이고 평회(平懷)는 이와 같이 바르게 품는다는 말인데,
품는다는 말은 활용한다는 의미이다.
유(有)와 공(空), 즉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바르게 생각하며 활용하면 유(有)와 공(空)이 양극(兩極)이고
별개라고 인식한 마음이 민연(泯然), 즉 힘을 잃고 저절로 다 없어져 버린다는 말씀이다.
반야심경에서도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한 것도
여기에서 일종(一種)이라고 표현된 것과 같은 뜻이다.
이해를 하고 마음에 새기면 유와 공,
즉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대립관계가 한 성품에서 나온 것이니
저절로 다 없어진다는 말이다.
이 뜻을 이렇게 바꾸어 볼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유(有)와 공(空)을 상대적으로 보는 우리의 습성(習性)을 고쳐서
유(有)와 공(空)의 중도(中道)를 보고
중도에 처할 수 있는 성품으로 바뀌어져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있다고 생각하여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 점점 욕심을 내다보면
생각 밖에 재앙이 기다리고 있고,
부모가 계신다고 의지만 하고자하면
생각 밖에 자신의 무능이 대기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을 위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없애주기 위해
색(色)이 공하였다고 하고,
부모를 의지하는 마음을 없애주기 위해, 법이 공하였다고 하는 것이지,
그 사물이 없다거나 부모가 안 계신다는 말이 아니다.
또 내가 공(空)하였다는 것도 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때 묻은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구하는 마음을 가진 내가 없다는 말이고,
부모를 의지하기만 하려는 마음을 가진 내가 없다는 말이다.
유연(有緣)에 집착하여
남에게 해를 끼치는 업을 짓는 사람에게 유연이 공하였다고 하고,
유연이 공하였다고 허무주의에 빠져 체념하는 사람에게
삶에 의욕을 갖게 하기 위해 공(空) 또한 공하였다,
혹은 공에 머물지 말라고 했다.
반야심경에서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하여
공과 색이 일종(一種)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있으면서 공하고, 공하면서도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물과 얼음은 일종(一種)이다. 이것이 불교의 또 하나의 존재론이다.
나는 부모 복이 없다, 공부를 못한다, 돈이 없다, 여자 복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 나는 부모 복이 있다, 공부를 잘 할 수 있다,
돈 복도 있다, 여자 복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러하기에 양극은 양극이 아니요 일종(一種)이라 했다.
기분이 나쁜 것은 좋을 수 있는 기분이요,
기분이 좋은 것도 또한 나쁠 수 있는 기분이다.
좋고 나쁜 것은 양극이지만 하나에서 나오는 마음이니 일종이다.
우리의 마음, 감정, 육신, 명예, 재산, 사람 등 일체가 그렇게 존재한다.
명예도 인연에 의해 있는 것인데 있다고 생각하면 오만에 빠져 액운이 기다리니,
없다고 생각하면 액운을 피하게 된다.
명예는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보면
나에게는 명예가 없는 것이다.
명예란 없는 것이나 공복(公僕)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하므로
명예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러하므로 만사가 없다고 보면 있는 것이요,
있다고 보면 없는 것이니, 있고 없음을 바르게 새기고 활용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므로
색과 공이 일종(一種)이라 했다.
이 구절에서 지향하는 바는
있는 것이 좋다고 그에 집착하지도 말고,
없는 것이 나쁘다고 짜증내지도 말라.
양변이 다 재앙의 원인이 되니
없는 것 속에서 있는 것을 보려고 하고,
있는 것 속에서 없는 것을 보려고 하는 사람이 될 때,
있고 없는 것이 하나로 마음속에 바르게 새겨져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일종평회(一種平懷)라고 했다.
어느 것에도 의지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면
모든 것이 화평하여 저절로 형통(亨通)하게 되는 지극한 도가 있다는 말씀으로 해석한다.
즉 있고 없는 것은 서로 반대되고, 대립적이고, 또 양극이 될 수도 있지만
이들을 자세히 보면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니
이를 바르게 새겨 지니고 활용하면
양극이고 대립적인 관계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여 결국 하나가 된다고 했다.
이 예로서 빈부(貧富)의 차가 극심하여 양극상태가 되었더라도,
이를 완화하면 양극에서 대립적인 관계로,
더 완화하면 가난한 사람과 부자는 서로 다른 상반(相反) 관계가 성립하지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가난한 사람과 부자는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된다는 말씀이다.
없을 때 없음으로 인해서 생길 수 있는 좋은 점을 볼 줄 알고,
있을 때 있음으로서 생길 수 있는 나쁜 점을 찾아 볼 수 있으면
있고 없음이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니 이 둘을 하나로 새길 수 있는 마음이 된다고 했다.
이러하니,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는 성질을,
공부 못하는 학생이 잘 할 수 있는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알라는 뜻도 숨어있다.
11 지동귀지(止動歸止) 지갱미동(止更彌動)
움직임을 그쳐 그침으로 돌아가니 그침이 다시 두루 움직이더라.
우리가 욕망이나 망상을 쉬게 하기위해 참선수행을 한다.
한 생각을 쉬게 하면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나
번뇌나 망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본 게송 11에서 이렇게 움직였다
사라지고 다시 움직이는 수행과정을 가지고
‘움직임을 그쳐 그침으로 돌아가니 그침이 다시 움직이더라.’ 라고 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앞 구절에서 일종평회(一種平懷)하면 민연자진(泯然自盡)한다.
즉 일종(一種)으로 바로 지니면 없어짐이 저절로 다하리라고 한 것이
곧 지동(止動)의 의미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들이 수행하는 방법부터 살펴보자.
움직이는 생각을 멈추기 위한 방법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1) 염불 - ‘옴마니반매훔’, ‘관세음보살’, ‘신묘장구대다라니’, ‘반야심경’ 등을 반복해서 외우는데,
한 구절 한 구절을 외울 때마다 마음을 집중하여 외우면 딴 생각이 들어오지 않게 된다.
이렇게 염불하는 동안 마음집중이 잘되면,
집중력이 길러진다는 의미이고,
염불하는 동안 다른 생각이 침투하는 것을 경험하면,
좀 더 빠른 속도로 외우면 다른 생각이 들어오는 것이 차단되며 집중력이 길러진다.
2) 간화선 - 화두를 잡고 그 화두에 대한 의심을 냄으로서,
그 의심이 다른 생각을 차단하게 하는 방법이다.
화두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분심(忿心)을 냄으로서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않게 된다
화두는 자기가 간절하게 원하는 의문이 있을 때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분심이 일어난다.
예 : 중생제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즉 화두는 다른 생각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는 방패막이가 될 때,
화두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집중력을 길러주는 방편이다.
3) 생각을 관하는 법 - 단전을 마음의 중심으로 삼고 고요히 앉아 있노라면,
어떤 생각이 저절로 떠오른다.
그 때, 그 생각을 막으려고 하지도 말고, 왜 오는가, 어디에서 오는가? 등
어떠한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그 일어나는 생각을 바라만보고 있는 법이다.
바라만보고 있으면 그 생각이 꼬리를 내리고 사라지는 경우도 있고,
장난을 걸어오는 경우도 있다.
보는 나는 생각을 일으키면 안 되고 다만 바라만 보는 ‘나’가 되어야 한다.
번뇌와 망상이 많이 일어나는 사람은
그것들이 일어나는 것을 제어하는 작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니,
제어작용을 하는 마음을 길러주는 방법이다.
스님은 이를 자각식(自覺識)이라고 이름붙이고 싶다.
내 마음속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 마음,
자각하는 마음이란 뜻이다. 능
동적으로 그리고 의지적(意志的)으로
스스로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자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되면
번뇌나 망상이 일어날 때 바로 인식하여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불교 용어로는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바라만 보는 수행이다.
마음속에 저장되었던 모든 번뇌가 스스로 솟아나게 하여 털어버려
더 이상 솟아나는 번뇌도 없고 털어버릴 것도 없는 자리에 이르면
그 곳이 바로 불생불멸의 본래의 자리이다.
이 관법(觀法)이 지관(止觀) 중 관(觀)에 해당하는 것으로
요즈음 위빠사나로 알려진 선(禪)이다.
반대로 지관(止觀) 중 지(止)는 간화선(看話禪)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마타선으로 알려진 선이다.
묵조선(黙照禪)은 위빠사나선의 변형이고
간화선은 사마타선의 변형이라고 생각된다.
묵조선과 간화선은 중국 송대(宋代)에 시작된 것이고,
사마타선과 위빠사나선은 부처님 당시에 이미 있었던 수행법이다.
현대 미국사회에 맞는 선풍(禪風)이 불었으면!!!
수행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위 세 가지 방법을 겸수(兼修)할 것을 권한다.
우리들의 수준에서는
지동(止動), 번뇌의 움직임을 멈추면 또 번뇌가 일어나고,
그 움직임을 멈추면 또 다른 움직임이 일어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되는데
이것을 지갱미동(止更彌動),
즉 그침이 다시 움직이게 된다. 라고 해설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말하는
지동귀지(止動歸止)의 귀지(歸止)는
적정(寂靜)한 자리로 돌아간다는 말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지동귀지(止動歸止)는
번뇌의 움직임을 멈추어서 적정한 곳으로 돌아가면,
즉 ‘모든 번뇌를 쉬어서 본래부터 평온한 고요한 자리로 돌아가면’ 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지갱미동(止更彌動)은 그 고요한 곳에서 다시 두루한(큰) 움직임이 일어난다.
즉 세속적인 번뇌 망상에서 벗어나
출세간적(出世間的) 지혜의 움직임이 두루 일어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즉 금강경에서 말씀하신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즉 ‘응당 머무는 바 없으니 그 마음이 일어난다.’ ‘그 마음’은
이 구절의 앞 구절에서 나오는 ‘청정한 보살의 마음’이다.
보살이 응당 머무는 바가 없으니 청정한 지혜로운 마음이 일어난다. 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머무는 바가 없다는 것은 구하는 바가 없다는 말이고,
구하는 바가 없는 마음이 지동귀지(止動歸止)의 고요한 마음으로 해석한다.
구하는 마음이 없는 고요함에 들어가 보니
내 안에 모든 것이 이미 구족하여 있음을 깨달았으니
편안함을 얻은 자리가 귀지(歸止)의 지(止)라고 해석된다.
다시, 움직임이 멈추어져 멈춤으로 돌아가니
멈춤에서 다시 큰 움직임이 일어난다는 뜻을 살펴보고자 한다.
움직임은 바라는 마음,
구하는 마음,
의지하는 마음이고,
이 마음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일어나는
불만스런 마음, 화내는 마음, 원망스런 마음 등의 움직임이다.
이러한 마음은 우리들의 마음에 저장되어 있는
업(業)에 따라 증폭될 수도 있고, 감소될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수행을 통해서 ‘일종평회(一種平懷)하여 민연자진(泯然自盡)하라’ 한대로 하여
편견(偏見)을 떠나 중도(中道)에 안주(安住)하면 마음이 고요하게 될 것이니
지동(止動), 움직임이 멈추어진다.
움직임을 멈추었다고 해도 또 다른 움직임이 솟아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지나,
만법(萬法)이 이미 나에게 구족하여 있음을 깨달았으니
전혀 구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평온하고 고요한 경지에 들게 되는데,
이 자리를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하여 귀지(歸止)라 한다고 했다.
즉 해탈(解脫)하여 능소(能所)가 없는 세계에 든 것이다.
일종평회(一種平懷)가 되어 중도(中道)에 들면 능소(能所)가 없는 세계에 들게 된다.
지갱미동(止更彌動)은 능소(能所)가 없는 본래의 고요한 자리에서
‘다시 크게 움직임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이 움직임은 베풀고자 하는 자비심이다.
앞의 마음의 움직임은 분별심이 있는 구하는 마음의 움직임이고,
미동(彌動)의 두루한 움직임은 무분별지(無分別智)로
천지만물에게 베풀고자 하는 마음의 움직임이므로 그 차원이 다른 움직임이라고 해석된다.
12 유체양변(唯滯兩邊) 영지일종(寧知一種)
오직 양변에 빠지기만 하면 어찌 일종임을 알리요.
유체양변(唯滯兩邊)이란 ‘오직 양변에 빠지기만 하면’ 인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있는 것만 알고 없는 것은 모르는 것, 없는 것만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
움직일 줄만 알고 멈출 줄 모르는 것, 멈추어 있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
줄줄만 알고 받을 줄 모르는 것, 받기만 하고 줄 줄 모르는 것;
일만하고 쉴 줄 모르는 것, 쉬기만 하고 일하지 않는 것; 모으기만 하고 쓸 줄 모르는 것,
쓸 줄만 알고 모을 줄 모르는 것; 누워 있기만 하고 일어날 줄 모르는 것,
서 있기만 하고 누울 줄 모르는 것; 옳은 일만 할 줄 알고 그른 일은 할 줄 모르는 것,
그른 일만 할 줄 알고 옳은 일은 할 줄 모르는 것; 착한 일만 할 줄 알고 나쁜 일은 할 줄 모르는 것,
나쁜 일만 할 줄 알고 착한 일은 할 줄 모르는 것,
사람을 만날 때 나쁜 점만 보이는 것 등이 ‘오직 양변에 빠지는’ 예이다.
유체양변(唯滯兩邊) 영지일종(寧知一種)이란
위와 같이 두 변 중에 한 쪽에만 빠져 있으면
어찌 두 변이 한 종자인 것을 알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 종자라고 한 것은 같은 뿌리, 혹은 성질에서 나온 것을 알겠는가라는 뜻이다.
있고 없는 것은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요,
예쁘고 추한 것도 같은 종자요, 옳고 그른 것도 한 성질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바르고 굽은 것도 한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말이다.
즉 있는 사람은 없을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있는 성질이 있으며,
착한 일과 나쁜 일도 같은 성질에서 나오는 것이니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인색하고 후한 성질도 같은 성질에서 나오는 것이니,
인색한 사람이 후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후한 사람이 인색한 사람이 될 수도 있으며,
실패한 사람이 성공할 수 있는 성질도 가지고 있고,
성공한 사람이 실패할 수 있는 성질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이 일종(一種)의 원리인데,
한 쪽으로 치우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것이 같은 종자라는 것을 알 수 없다는 말씀이다.
양변에 치우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한 쪽에 치우치지 말고 중도(中道)를 찾아
침착하게 대치하라는 성품을 기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13 일종불통(一種不通) 양처실공(兩處失功)
일종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의 공덕을 다 잃으리라.
상대적인 일들이 한 종자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양쪽에서 다 그 공덕을 잃으리라.
즉 주는 것만 알고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은
조만간 어느 쪽에서든 원망을 듣게 되어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다 같이 손해를 본다는 말이고,
손님에게 외상만 주다가는 손님도 잃고 돈도 잃어 양쪽 다 잃는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일종불통(一種不通)이라 함은
앞에서 공부한 간택(揀擇)-가려내고 택하는 것,
증애(憎愛)-미워하고 사랑하는 것,
순역(順逆)-순리대로 가는 것과 역으로 가는 것 등이 상반(相反)되기는 하지만
그들이 같은 성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한 쪽에만 치우치면 반드시 양쪽에서 얻을 덕을 다 놓친다는 말씀이다.
돈이 좋다고 돈만 쫓다보면 돈도 못 벌고 몸만 망치니 양 쪽 다 잃은 것이고,
자꾸 밉다고 하다보면 미움도 사랑도 다 잃어버린다는 말이며,
사랑만 한다고 해도 사랑도 잃고 미움도 잃는다는 뜻이 된다.
미운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아는 것이 일종유통(一種有通)이요,
미워할 줄만 알거나, 사랑할 줄만 아는 것은 일종불통(一種不通)이다.
그리고 일종불통이면 미움과 사랑 양쪽 다 잃는다고 했다.
사랑한다고만 하다보면 권태가 올 수도 있고, 또 그러한 때에 그 해결 방법을 알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착한 일만 하겠다고 착한 일만 하다보면
착한 일과 나쁜 일 양쪽 모두 잃는다고 했는데 혹 결벽증에 걸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 쪽에 지나치게 치우치면 반드시 치우친 쪽과 그 반대쪽,
양쪽에서 다 손해를 본다는 교훈이고,
수행도 한 수행법에 너무 치우치면 양쪽에서 수행공덕을 잃게 된다는 말씀으로도 생각된다.
일종(一種)의 반대가 양변(兩邊)인데,
양변(兩邊)에 치우지 않는 것을 일종(一種)에 통(通)한다고 하고,
치우치는 것을 일종에 불통(不通)한다고 했다.
이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면
매사(每事)에 중심(中心)이 되는 곳을 바르게 찾아,
그 중심에서 흔들림이 없어야
양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공덕(功德)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14 견유몰유(遺有沒有) 종공배공(從空背空)
있음을 버리려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려면 공함을 등지느니라
여기에서도 유(有)와 공(空)을 상대로 말씀하고 있는데 현상적으로 보이는
일체 문제는 모두 있음과 없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를 논함으로서 사람 심리(心理)의 깊은 곳을 다루려는 말씀으로 해석된다.
이 견유몰유(遺有沒有) 종공배공(從空背空)을 다른 말로 표현해 보고자 한다.
견유몰유(遣有沒有) : 있음을 보내려고 하면 오히려 있음에 빠진다.
있음을 버리려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탐진치 삼독을 떼어내 보내다, 혹은 버리다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자 염불을 하면 할수록
돈에 대한 집착심이 더 강해져 돈 없이는 못살 것 같은 생각에 빠져버리는 예이다.
또 사정이 생겨 친구와 헤어져야 하는데 헤어져야 한다고 마음먹으면
먹을수록 그 친구가 가슴깊이 파고들어 고민이 더 심해지는 것과 같은 예이다.
이러한 예는 다양하다.
술을 끊으려고 하면 오히려 술독에 빠진다.
담배를 끊으려고 하면 오히려 담배를 더 피우게 된다. 노름이나 마약을 끊으려고 하면
오히려 거기에 더 빠지게 되는 등등이다.
이는 사람이 어떤 일에 중독되었을 때 무조건 끊으려고 하면
오히려 몸에서 그것을 요구하는 욕구가 더 강해진다는 말씀으로 해석된다.
부부지간에 살다가 한 쪽에서 바람이 났을 때,
그 바람을 막으려고 강력한 경고를 하게 되면 뜻밖에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말씀도 된다.
종공배공(從空背空) : 공(空)을 쫓는다고 할 때, 내 마음에는 공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
이 마음이 무슨 마음일까?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마음,
‘나는 없다.’ 를 추구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없다.’는 색공(色空)을 의미하는 것인데
‘나’라는 존재는 지수화풍(地水火風)과 수상행식(受想行識)이
연(緣)을 맺어 이루어 진 것이니 그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하여
모든 법은 본래 없는 것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수많은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므로 이 번뇌를 끊음으로서 얻어지는 것인데, 생각으로서
‘제법무아’를 추구해가면
‘내가 없는데’ 내가 원할 것이 무엇이며, 진리를 탐구할 내가 어디 있겠는가? 등
다양한 생각의 고리가 이어지게 되는데 공을 추구하는 것이 이러한 생각으로 이어지면
오히려 공의 참뜻을 등지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한 경우, 유(有)의 마음이 공(空)의 마음을 쫓아가는 것이 되는데
공의 마음을 쫓아가다보면 그 공의 상대되는 만큼의 유(有)가 같이 따라오게 된다.
그것은 공하고자 하는 마음도 사실은 유(有)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공(空)을 쫓아가면 결국 공이 되어야 하는데 공이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공하고자 하는 마음은 연에 따라 일어난 마음이니
생멸이 없는 공의 마음이 아니라 생멸이 있는 유의 마음이다.
그리고 공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공하고자 하는
유의 마음이 더욱 더 강해지는 것이니 불생불멸하는 공의 입장에서는 배신(背信) 당했다,
혹은 공을 오히려 등지게 되었다는 말이 될 수 있다.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공(空)을 추구하려하면
결국 공을 구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공에 들어가는 길을
가로막게 되어 끝내 공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이 된다.
같은 게송에서 공(空)을 유(有)로 바꾸어 놓으면 종유(從有) 배유(背有)가 된다.
있는 것을 쫓다보면 있음에 배신당한다가 된다.
이도 역시 지나치게 돈을 벌려고 하면 돈이 오히려 등을 돌린다는 말씀이 된다.
돈을 벌겠다는 마음이 사물을 보고 좋고 나쁘다는
판단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리고 돈을 벌자고 하는 일이 돈을 오히려 낭비하게 되는 사례도 있다.
공(空)한 것이 좋다고 있는 것을 다 버리려고 하다보면
오히려 그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더 있는 것을 쫓게 되니 공을 배신하는 격이 되기도 한다.
우리들의 마음의 구성은
제8, 7, 6식, 세 가지 능변식으로 되어 있는데
제8 아뢰야식은 그 자체는 불생불멸하지만
우리들이 숙세에서 지은 모든 업을 소장하고 있지만 그 업에 의해 오염되지는 않는다.
이 마음이 있기에 우리들의 본성은 불생불멸하고 때가 없는 청정한 마음으로
불교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마음자리이다.
제7 말나식은 제8식에 저장된 과거에 지은 업들 중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에 집착하여 그 나란 존재를 보존하고 유지시키고 번영하게 하고자
온갖 생각을 다하고,
그 생각들을 제6 의식으로 하여금 집행하게 한다.
제6 의식은 제7 말나식의 지시를 받으면서도
현재 자기로서 해야할 일을 분석하고 판단하고 행하는 능력이 있어
본래부터 청정한 제8 아뢰야식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도 있다.
이 욕구를 원력이라 하는데,
이 원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제7 말나식과
접전(接戰)을 벌리게 되면 말나식도 그 동안의 업력에 의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있는 것을 없애려고 하던 것이 오히려 있음에 빠지게 되고,
공(空)해 지려하다가 오히려 공을 등지는 사례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없애고자 하는 업의 종자를 하나하나 찾아 소멸시켜가는 방법을 택해
서서히 진행하든지 아니면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
즉 한 발자국 더 나가면 백척이나 되는 벼랑에서 떨어져 죽더라도
한발 앞으로 나가는 정신으로 대담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이것은 제6 의식의 결단이다
15 다언다려(多言多慮) 전부상응(轉不相應)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상응(相應)치 못하느니라.
말이 많고 생각이 많이 움직이면 대도(大道)와 상응치 못한다.
대도는 말에 있는 것도 아니요 생각에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도(大道)는 불생불멸하는 마음이라 고요히 있는 것인데 말이나 생각을 많이 하게 되면
그 생각과 말에 가려져 대도가 눈앞에 나타나지지 않기 때문에 상응(相應)하지 않는다고 했다.
앞 게송 종공배공(從空背空)에서 설명했듯이
공을 생각으로 만들어가려고 하면 오히려 공을 등지게 된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말을 많이 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대개 가상(假相)하여 생각하고 말을 하는데,
그 가상은 어디까지나 가상이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과 잘 맞지 않는 생각을 많이 하고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들의 말과 생각이 현실과 잘 맞는다면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본질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은
말이나 생각으로 열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16 절언절려(絶言絶慮) 무처불통(無處不通)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못할 곳이 없느니라.
말이 끊어진 절언(絶言)이란 말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말이 끊어졌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다음 순간에 또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지(心地)의 자리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심지(心地)의 자리가 있다고 해도 틀리고 없다고 해도 틀리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해도 틀리고 무엇이라 입만 열면 틀리니
무엇이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깨닫고 묵언(黙言)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절언이다.
그리고 생각이 끊어진 곳, 절려(絶慮)된 곳은 곧 무념(無念)에 든 곳이다.
무념에 든 곳은 곧 무상삼매(無相三昧)에 든 것이고,
무상삼매에서는 ‘나’는 사라지고 법계와 하나가 된 것이니 시간과 공간 개념이 사라진다.
시공(時空)과 하나가 되었으니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법성게에서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異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라고 했다.
법성(法性)인 대도는 원융하여 두 모양이 없고,
모든 법은 부동(不動)하여 본래부터 고요하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가 끊어지니,
깨달으면 알 수 있는 바이나 다른 경계가 아니라고 했으니,
대도(大道)는 부동(不動)하여 본래부터 고요하다고 한 것은
본래부터 시(時)와 공(空)이 갈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라는 뜻이니,
생멸하는 말이나 생각과 상응할 수 없다.
법성게의 법성은 신심명의 대도(大道)요 지도(至道)이다.
그리고 법성은 원융하다고 했으니 이도 통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들의 수행목적이 무처불통(無處不通)을 얻는데 있고,
무처불통(無處不通)은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데 있다고 했다.
생각할 수 있고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있다 없다 등으로 표현되는데
이러한 표현은 나름대로 개념화된 것이다.
개념화된 것은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법칙에 따라 기복(起伏)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절언절려(絶言絶慮)는
말과 생각이 끊어진 자리이니,
무슨 생각이나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말씀이니
적정(寂靜)한 자리 혹은 해탈한 자리이다.
적정한 자리에서는 아무리 작은 생각이 일어나도 움직이는 것이므로
고요함에 위배된다.
고요함 속에 있으려면 절언절려(絶言絶慮)가 되어야만 한다.
절언절려할 수 있는 것은 무념(無念) 무상(無相)에 들은 것이고,
무념무상에 들게 되면 해탈하여 적정(寂靜)에 든 것을 의미함으로
불생불멸속에 있는 것이다. 이를 무상삼매(無相三昧)라 한다.
일체(一切),
즉 시공(時空)이 하나가 된 자리이니
불생불멸하는 본래의 자리이고 무처불통(無處不通),
즉 통할 수 없는 곳이 없는 대도에 든 것이다.
이를 또 법성게에서는
‘일중일체(一中一切) 다중일(多中一),
일즉일체(一卽一切) 다즉일(多卽一),
일미진중(一微塵中) 함시방(含十方),
일체진중(一切塵中) 역여시(亦如是),
무량원겁(無量遠劫) 즉일념(卽一念),
일념즉시(一念卽是) 무량겁(無量劫)이라 했다.
즉 하나 속에 모두 있고,
여럿 속에 하나 있어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이니
한 티끌 가운데에 시방(十方) 세계 머금었고,
낱낱의 티끌마다 시방세계 들어있네.
한량없는 긴시간이 한 생각 순간이고,
한 생각 순간 속에 무량세월 들어있네.’라고 했으니
이를 간단히 표현하면 무처불통(無處不通)이 된다
17 귀근득지(歸根得旨) 수조실종(隨照失宗)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다 보면 종취(宗趣)를 잃으리라.
귀근(歸根)의 근(根)은 뿌리 ‘근’으로
원점(原點)을 의미하는 것이니 마음속 근본이 되고,
득지(得旨)의 지(旨)는 맛있을 ‘지’이니,
합하면 뿌리의 맛, 혹은 원점의 맛을 알게 된다는 말씀이니,
즉 ‘마음속 근본에 돌아가면 대도의 뜻을 얻게 되지만’이 되고,
수조(隨照)의 수(隨)는 따를 ‘수’이고,
조(照)는 비출 ‘조’인데
앞의 근(根)의 상대는 마음 밖의 경(境)이 되니,
수조(隨照)는 밝게 비치는 외경(外境)을 따르면 실종(失宗),
즉 종취(宗趣)를 잃어버린다고 했다.
종취(宗趣)는 원칙(原則)이니 원칙을 잃는다는 의미이다.
먼저 귀근(歸根)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위 게송 16 절언절려(絶言絶慮) 무처불통(無處不通),
즉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한 곳에 근본이 있다고 볼 수 있고,
게송 11 지동귀지(止動歸止) 지갱미동(止更彌動),
즉 움직임을 그쳐 그침으로 돌아가니 그침이 다시 움직이게 되더라의
‘지동귀지(止動歸止)’의 귀지(歸止)가 귀근(歸根)과 같은 뜻으로 해석된다.
귀지(歸止)는 지동(止動)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절언(絶言) 절려(絶慮)가 곧 움직임을 멈추는 지동(止動)이 된다고 본다.
몸과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고, 그 한 곳마저 사라지게 할 때 지동귀지(止動歸止)가 되고,
또 귀근(歸根)이 된다고 생각한다. 동(動)하는 것은 생멸하는 것이고,
지동(止動)은 생멸을 멈춘 것이니
귀지(歸止)는 생멸이 완전히 멈추어져 본래 고요한 자리,
불생불멸하는 자리로 돌아간 것이니,
바로 이 자리가 근본(根本)이 되는 것이다.
그러하니 귀근(歸根)은 근본이 되는 본래의 자리인 원점(原點),
즉 불생불멸의 자리로 돌아오다. 이다.
본래의 근본자리로 돌아오면 그 근본자리의 맛, 혹은 뜻을 얻을 수 있지만
눈 밖의 어떤 대상이 비추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망상에 걸려들어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적정열반(寂靜涅槃)의
종취를 잃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화두를 잘못잡거나 그릇된 심상(心相)을 참된 것으로 알고
그를 비춰보고 따라가는 것이나,
지식을 쌓기 위한 노력, 명예(名譽), 재(財), 욕(欲)을 쫓는 것 등은 종취와 멀어지는 행위들이다.
18 수유반조(須臾返照) 승각전공(勝脚前空)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 봐도 [눈]앞의 공함보다 수승하리라
수유(須臾)의 수(須)는 모름지기 ‘수’이고, 유(臾)는 잠깐 ‘유’이니,
수유(須臾)는 ‘모름지기 잠깐이라도’가 된다. 반조(返照)의 반(返)은 돌아올 ‘반’이고
조(照)는 비출 ‘조’인데, 반(返) 자나 귀(歸) 자는 주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본래의 자리, 즉 원점(原點)을 돌이켜 비추어 본다가 되니
수유반조(須臾返照)는 모름지기 잠깐사이라도
마음의 자성(自性)을 돌이켜 비추어 보면이 된다.
승각전공(勝脚前空)의 승각(勝脚)은 보다 수승하다는 뜻이고,
전공(前空)은 ‘앞의 공(空)이니’ 눈앞의 공이고,
눈앞의 공은 경계(境界)를 공(空)으로 관(觀)하는 수행법이다.
경계(境界)를 관(觀)하는 수행법에는
화관(火觀), 수관(水觀), 백골관(白骨觀), 수식관(數息觀), 공관(空觀) 등과 같이
수행하는 대상을 불(火)이라고 바라보거나,
물 혹은 백골(白骨)이라고 바라보는 것이 익숙하게 되면,
생각하고 바라보는 대로 그 대상이 바뀌어 나타나게 된다.
공관(空觀)이란 앞에 있는 경계,
즉 수행의 대상을 바라보면서 생각으로 공(空)하다고 보는 것이다.
계속해 보다보면 그 경계가 공하게 보이는데 공해진 경계를 앞에 나타난 공이라 해서
이 게송에서 전공(前空)이라 했다.
자기 내면에 있는 마음의 근본자리를 반조(返照),
즉 돌이켜 보는 것이 자기 밖에 있는 경계를 공(空)하게 한 것보다
수승하다는 말씀으로 해석된다.
왜 반조(返照)가 전공(前空)보다 수승(殊勝)한가?
전공(前空)은 눈앞에 있는 대상이 공(空)한 것을 보았지만
그 법(法)이 공한 이치를 보지는 못하였다.
법이 공한 이치란 몸과 마음 등 일체 경계가
제행무상(諸行無常), 즉 제법은 인연(因緣)따라 이루어진 것이고,
인과 연은 시간과 장소가 변함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공한 것인데
이 이치를 알지 못하고 공한 것만 보았으니
반조(返照)보다 못하고, 또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이치도 모르니
불생불멸하는 적정열반(寂靜涅槃)에도 들 수 없으니
반조(返照)가 전공(前空)보다 수승하다고 했다.
그러나 혹 어떤 수행자가 전공(前空)을 이루었다고 하면
적어도 거친 번뇌는 소멸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미세한 번뇌까지 소멸하여
일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불생불멸의 적정열반에 까지는 이를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비록 전공(前空) 수행법으로 전공(前空)을 얻었다고 하여도
마음 속 번뇌를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무념(無念)에 들 수는 없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조(返照)하는 수행이 더 수승하다고 할 수 있다.
반조(返照)는 수행의 포인트를
자기의 마음자리로 잡고 한 순간도 끊어짐이 없이
그 마음자리를 되돌려 보는 것을 관조(觀照),
즉 비추어 보는 것이므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번뇌의 생멸을 바라봄으로서 이들이 일어나는 이치를 찾아
그 원인을 소멸하는 작업을 계속 반복함으로서
구경에 일체번뇌를 제거하고 적정에 들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본 게송에서는
자기 내면을 반조(返照)하는 수행법이
자기 외면에 있는 것을 전공(前空)하는 수행법보다 수승함을 말씀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19 전공전변(前空轉變) 개유망견(皆由妄見)
앞의 공함이 움직여 변해(轉變)가는 것은 모두 망령된 견해(妄見)이다.
18송에서 공관(空觀)이란
눈앞에 한 대상을 택하여 그 대상이 공(空)하다고 보는 수행법이다.
눈앞에 있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공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그 나무가 가벼워져 공중에 둥둥 떠다닐 수도 있고, 점점 작아지면서
나중에는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사수관에서 시신을 바라보다보면 그 시신이 공해진다.
이렇게 수행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가지고
여러 가지 생각이 일어나 전변(轉變)할 수 있는데 이를 모두 망견(妄見)이라 했다.
이러한 공관의 단계에 가려면 자신의 업장을 많이 정리해야 한다.
스님은 공함을 체험하는데 까지는 사람에 따라 좋은 수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자리에 머물면 수행에 진전을 이룰 수 없으니,
이런 각도에서 보면 수행에 장애가 될 수 있으므로 망견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공관(空觀)을 성취할 수 있는 단계까지도 대단한 수행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 단계에 갈 수 있는 수행자는 불생불멸로 가는 길도 알게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망견(妄見)은 반조(返照)수행에서도 일어나는 법이다
20 불용구진(不用求眞) 유수식견(唯須息見)
참됨을 구함에는 쓸모가 없으니 오직 그런 견해를 반드시 쉴지니라.
공관(空觀)을 하는 수행은
진리를 구함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공관을 하겠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해석된다.
여기에서
소승(小乘)이라고 알려진 상좌부(上座部) 수행법과
대승(大乘) 수행법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상좌부에서는 공관(空觀) 수행을 많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신도님들이 수행 체험을 하게하는 대는 도움이 되는 수행법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전공(前空)에 머물면 오히려 퇴보할 수 있다.
그리고 반조(返照)를 포함해 어떠한 수행법도 한 경지에서 법열(法悅)을 느낀다고 머물게 되면
수행이 더 이상 진전되지 않고 오히려 퇴보할 수 있는 법이다.
21 이견부주(二見不住) 신막추심(愼莫追尋)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찾으려고 하거나 쫓지를 말라.
이견(二見)은 두 가지 견해인데,
진과 망(眞妄), 선과 악(善惡), 공과 유(空有),
근과 조(根照), 적과 조(寂照), 근과 경(根境),
남과 녀(男女), 등 상대적인 두 가지 견해 혹은 개념 중에
한 쪽에 치우쳐 머물지도 말고,
삼가 치우친 견해를 쫓아 자세히 알려고 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이러한 상대적인 개념에 대해 분별심을 갖지 말라는 말씀이고,
한 쪽에 치우친 일에 대해서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혹은 자기 의견을 내세우기 위해 근거를 찾고자 시간 낭비를 하지 말라.
모두가 부질없는 일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들 마음에는 과거에 자기가 경험한 일들이 새겨져 있다.
이 경험에서 자기 마음이 쏠리는 쪽으로 자기의 견해가 성립된다.
이 견해가 선악(善惡)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면 이치에 어긋난다는 말씀이다.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은 선(善)을 택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어떤 것을 선(善) 혹은 악(惡)이라고 규정해 버리면
그 규정에 의해 자기중심을 잃게 되고, 사실에 근거하기보다 개념
혹은 선입견(先入見)을 따르게 되어 상황판단이 흐려지게 된다는 말씀이다.
진(眞)과 망(妄) 두 가지 견해 중
어느 한 쪽에도 머물지 말라는 말씀은 참된 진리에도 머물지 말고,
그를 탐구하려고 하지도 말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이는 진(眞)을 탐구하는 것을 만류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진(眞)이고 저것은 망(妄)이라는 고정된 분별심을 갖지 말고
현재 이 자리에서 중도를 지킬 줄 알라는 말씀이다.
게송 14에서 공(空)을 추구하다보면 공에 배신당하고,
유(有)를 추구하다보면 유에 빠진다고 하여
한 쪽에 치우치면 반드시 그 치우친 대가를 받게 되어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남녀 사이에서도 너무 남자를 세워도,
혹은 여자를 세워도 오히려 부작용이 심하게 일어날 수 있다.
22 재유시비(纔有是非) 분연실심(紛然失心)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럽게 얽혀 마음의 중심을 잃으리라.
재유시비(纔有是非)의 재유(纔有)는 잠깐이라도 이고,
시비(是非)는 옳고 그른 것을 서로 따지는 관계를 말한다.
분연실심(紛然失心)의
분연(紛然)은 실같이 나누어져서 서로 얽혀 어지럽다는 뜻이고
실심(失心)은 마음을 잃는다고 했으나 마음의 중심을 잃는다고 해석했다.
남과 잠시라도 시비(是非)를 일으키면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중심을 잃게 된다고 했다.
남과 아주 하찮은 시비(是非)라도 있게 되면
우리들의 마음은 그로 인해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고,
솟아오르는 화를 참기 어려워지기도 하고,
전화를 걸거나 만나서 따지고 언쟁하다보면 화가 하늘 끝까지 오르고,
두 사람사이는 다시 만나기 어려운 사이까지 가는 경우들이 있다.
우리는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잘 알지 못하면서
자기 생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라고 하는 자아(自我) 의식이 대단히 강하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는 잘못하는 일이 전혀 없고,
모르는 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자기가 하는
말과 행동은 틀림없다는 식으로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곤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상대방을 상당히 피곤하게 하고 자칫 잘못하면
시비(是非)에 말리게 되기 쉬운 성품을 가지고 있다.
일단 시비에 말리면 마음이 어지러워져 마음의 중심을 잃게 되어,
착한 일을 하려고 하더라도 정신이 어지러워지고 편중되어져서
항상 평온한 마음을 잃게 된다.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 시비가
자신의 중심을 흔들고 큰 화를 일으키는 시비로 발전되는 것을
우리들의 생활주변에서 흔히 본다.
이러한 분쟁은 나를 몰라보느냐고 하는
자아(自我) 의식이 강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일어난다.
그리고 자아(自我) 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남과 다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화합에 큰 장애가 되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러하니 사소한 시비에 걸리지 않고 마음의 평정(平靜)을 항상 유지하려면
‘나’라고 자만하는 의식이 표면에 들어날 때 그를 즉시 잡아 다스리는 노력을 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되도록 좋게 받아드릴 수 있는
겸손과 말씨를 보다 유순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순발력 있는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계발해야 한다.
자기 마음의 중심을 평정(平靜)하게 함으로서
상대방의 마음도 편안하게 할 수 있다.
이도 역시 중도(中道)를 지키는 문제이다.
23 이유일유(二由一有) 일역막수(一亦莫守)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둘로 나누어져 선악(善惡) 시비(是非)의 상대적인 개념이 되고,
이 시비(是非)에서 수많은 생각으로 갈라지게 된다는 말씀이다.
이는 선(禪) 수행으로 다스려야하는 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마음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역동적인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참선을 통해서 많은 생각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다 보면
한 생각으로 말미암아 두 생각이 일어나는 이치가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자신을 섬세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 생각이 일어나고 그 생각이 둘이 되고,
둘이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하게 갈라지는 현상을 체험하게 된다.
이 때, 처음에 일어나는 한 생각을 잡고
이리저리 생각하다보면 얽히고설켜 풀지 못할 실타래같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 때 일어나는 한 생각을 조용히 보고만 있으면 사라진다.
처음에 일어나는 한 생각이
다음 생각으로 파생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처음 생각이 떠오를 때 아무런 감정을 일으키지 말고
다만 그 생각을 보고만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생각이 지나가고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떠오른 생각들을 내가 감지하지 못하고 있으면
생각이 고리를 물고 복잡하게 전개되어 나간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생각에 잠겨 있었구나 하고 알게 되었을 때,
알고 바라보고 있으면 생각이 이어가지 못하고 사라지고,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 과정이 반복되다가
점점 그 떠오르는 생각과 생각사이의 간격이 멀어진다.
떠오르는 생각과 생각 사이가 멀어질 때,
그 사이가 텅 비어 있었다는 것을 깨어난 후에 알게 된다.
이 때 시간이 얼마나 지나갔는지도 전혀 모르게 빨리 지나갔다고 느끼게 되는데,
이런 것을 공(空)이라고 한다
24 일심불생(一心不生) 만법무구(萬法無咎)
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느니라.
무구(無咎)의 구(咎) 자는 허물 ‘구’이다,
일심불생(一心不生)이란
‘한 마음이 생(生)하지 않는다.’ 이다.
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곧 한 마음에서 표출되는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다.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경계를 대할 때
자신을 위해 바라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한 생각이 바로 한 마음의 표출이니 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은 것이 일심불생이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경계를 대함에 바라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수자(修者)는
모든 자아상(自我相)을 여읜 것이 된다.
자아상(自我相)을 여의었다는 것은
아만(我慢), 아애(我愛) 등 자기 주장을 하는 마음을 여읜 것이 되니,
탐욕(貪慾)과 진심(瞋心)이 제어되었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수자는 만법을 대하되
자기 욕심을 내지 않으므로
만법(萬法)에 허물(咎)이 없어 청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하니 이 세상에 모든 법(法)이 부정(不淨)한 것이 아니라
법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이 부정하면 법이 부정해지는 법이요,
법을 대하는 사람이 무구(無咎), 허물이 없으면 법 또한 허물이 없는 것이다.
한 마음이 일어나면
시비(是非)가 생기고
시비가 생기면 만법에 허물이 생기지만
한 마음이 법에 대해 욕심내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고 했다.
25 무구무법(無咎無法) 불생불심(不生不心)
허물(咎)이 없으면 법이 없고, 생(生)이 아니면 마음도 아니다.
무구무법(無咎無法) 중
허물(咎)이 없다는 말은 번뇌가 없다는 말이고,
법이 없다는 뜻은 허물이 없어 부정(不淨)한 마음이 없다는 말이지만
여기에서는 텅 비어있는 마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텅 비어 있는 마음은 그 대상이 없으니 법이 있을 수 없다.
불생불심(不生不心)은 무슨 생각이나,
구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
마음이 있어도 구하는 반연(攀緣)이 없으니 나타나는 마음이 없다.
수행상에서
공(空), 무심(無心), 무념(無念)
즉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에 든 것을 의미한다.
일체 번뇌가 소멸되고
일체 구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선정(禪定)에 든 마음이다.
이는 곧 불생불멸(不生不滅)과 같다.
불생불멸하다는 말씀은
마음에 어두움이 있다가 사라져 밝음이 오고,
밝음이 또 사라져 어두움이 오거나,
있는 것이 없어지고, 없는 곳에서 새로운 것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밝음이 항상 있어 어두움이 없고,
필요한 것이 항상 있어 부족함이 없는 세계이고,
나고 죽음이 없어 무량한 수명을 항상 즐기는 경지이다.
26 능수경멸(能隨境滅) 경축능침(境逐能沈)
능(能)은 경(境)을 따라 소멸되고 경(境)은 능(能)을 따라 침몰한다.
능(能)은 주체이고,
경(境)은 객체이다.
능이 ‘나’라면 경은 ‘너’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너와 나의 사이가 좋지 않을 때 적용되는 말씀이다.
내가 너의 괴팍한 감정을 따르다보니 내가 미치게 되고,
네가 나를 몰아치다보니 너도 제 정신이 아니게 된다는 말씀이다.
고용주가 노조에게 잘해주고자 그들이 원하는 데로 따르다보면 결국 망하게 되고,
노조가 고용주를 몰아치거나 바짝 붙어 쫓아가려하면 결국 노조가 침몰한다는 뜻도 된다.
불륜관계에 있는 두 남녀의 사이에서도 이러한 관계로 발전하기 쉽다.
부부지간에도 사정이 어려울 때,
나는 너 때문에 기분 나쁘고 너는 나 때문에 기분 나쁜 사정이 반복될 수 있고,
특히 두 사람 사이에 의심이 생길 때
믿지 못하는 감정이 점점 깊게 쌓여 골이 깊어진 모습을 표현한 말씀이다.
Partnership으로 동업하던 두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기 시작하면 능은 경을 따라 멸하고,
경은 능을 쫓아 침몰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당파싸움이나 전쟁도 이와 같이 양쪽을 다 같이 해치게 되기 마련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생기는 일이 아니라,
나와 나의 감정이나 생각,
즉 나와 나의 번뇌와의 관계에서도 이러할 수 있다.
이 때 생각하는 나는 능이고,
번뇌나 생각 혹은 감정은 생각하는 나의 대상이니 경이다.
번뇌가 원하는 대로 내가 따르다보면 나는 나의 번뇌에 의해 멸하고,
번뇌는 나를 부추겨 점점 번뇌가 커지는 경우이다.
이러한 악순환은 우울증의 발단 또는 자살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마약이나 술, 담배 등도 이에 해당된다.
처음에는 내가 담배를 피우지만 습관이 들면 담배가 나를 피운다는 것이다.
처음은 내가 술을 마시지만 나중에는 술이 나를 마시고,
처음에는 마약이나 노름을 내가 하지만 나중에는 마약이나 노름이 나를 조정하는 것과 같다.
명예나 돈이 좋아 쫓아다니다 보면 어느덧 나는 명예나 돈의 사슬에 묶여 구속되어 있는 것이다.
능수경멸(能隨境滅) -
능이 경을 따르다보니 멸하고,
경축능침(境逐能沈) - 경이 능을 쫓다보니 침몰한다.
능이 경을 따르다보니 멸한다는 것은
내가 노름이나 마약을 좋아하다보면 결국 나는 멸해버린다는 말씀이고,
경이 능을 쫓다보니 침몰한다는 말은
노름이나 술이 나를 가지고 놀다가 결국은 노름이나 술독에 빠지게 된다는 말씀이다.
요즈음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
그 스트레스는 상대가 나에게 준다고만 생각하지만
실은 나도 그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서로 스트레스를 주고받다가
참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면 서로 폭발하게 된다.
그리고 또 요즈음에는 비만증(肥滿症)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 경우 그 사람은 능이 되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은 경이 된다.
능인 사람이 경인 음식이 맛있다고 먹다 보면 살이 찌게 된다.
경인 음식이 능인 사람을 쫓다보면 비만증에 걸리게 된다.
처음에는 어떤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지만
나중에는 그 음식(햄버거, 콜라 등)이 사람을 조정하여 비만증에 걸리게 한다는 말씀이다
27 경유능경(境由能境) 능유경능(能由境能)
경(境)은 능(能)으로 말미암아 경(境)이 되고
능(能)은 경(境)을 말미암아 능(能)이 된다.
경인 너는 능인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고,
능인 나는 경인 네가 있기 때문에 능인 내가 있는 것이다.
부인은 남편이 있기 때문에 부인이 있는 것이고,
남편은 부인이 있기 때문에 남편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스님은 신도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고,
신도는 스님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연기한다는 말씀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로 스트레스를 주고받는 사이에서,
나는 당신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요,
당신은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굳이 서로 스트레스를 주고 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고,
또 서로 긍정적인 관계로 개선할 수 있는 동기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부부사이에서 당신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 때문에 당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서로 사랑하고 공경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직장에서도 주인과 종업원 사이에서 이와 같이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면,
서로 간에 평등한 마음으로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 화목하게
사업에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사업이 번창하게 된다.
절에서도 신도는 스님이 있기 때문에 신도가 있다고 생각하면
스님이 좀 부족한 점이 있어도 용서하고 융화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스님도 신도가 있기 때문에 스님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신도가 좀 부족하더라도 이해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노력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28 욕지양단(欲知兩段) 원시일공(元是一空)
양단을 알고자 할진대 원래 하나의 공(空)이니라(공임을 알라).
앞 게송 26에서
나는 저 사람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다고 하고,
저 사람은 내가 스트레스를 주었다고 한다면
양단(兩段) 중에 어느 쪽이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따져서
승부(勝負)를 가리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양쪽에서 서로 저 사람이 잘못하고,
저 사람은 나의 적(敵)이니 끝까지 싸워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립하는 이원론(二元論)적 사고와 사상이다.
어떤 특정한 종교를 믿어라.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즉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식이 양단(兩段)을 주장하는 것도 이분법(二分法)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양단(兩段)은 원래 하나의 공(空)에서 나온 것임을 알라고 했다.
원래 스트레스를 주고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것임을 알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개념도,
천국이 아니면 지옥이라는 개념도
원래 공(空)에서 나온 것임을 알라는 뜻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도
내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고,
상대방이 주는 스트레스를 내가 받는 것도 내 마음이 만들어서 받는 것이니,
상대방을 나무랄 것은 조금도 없고,
오로지 스트레스를 만들고 주고받고 하는
내 마음이 본래 공(空)하였음을 알아서 그 마음을 공(空)해 버리라는 말씀이다.
내 편 아니면 적(敵)이라는 개념도,
천국 아니면 지옥이란 개념도
모두 상대방이 나에게 말해
내 마음이 듣고 만든 허무한 장난이니
그로 인해 동요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그 개념들을 지움으로서 본래 공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이다.
게송 27에서는 너는 나 때문에 있는 것이요,
나는 너 때문에 있는 것임을 인식시킴으로서
서로 사이가 나쁘게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없음을 설하시고,
본 28송에서는
내 생각에는 상대방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다고 느끼지만
상대방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준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방의 말을 듣고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내가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고,
스트레스를 느끼고 안 느끼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다는 말로,
원래 내 마음은 스트레스가 없는 공(空)한 것이란 뜻이다.
남이 나를 적(敵)이라고 대하고,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내가 공(空)하게 받아들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이 된다.
많은 경우 내가 공(空)하게 받아들일 줄 모르는데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사이가 더 악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즈음 시대는
스트레스 병에 걸려 있는 사람이 많은데
원래부터 스트레스가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아서
마음 다스리는 법을 배워 익혀야 할 것이며,
비만증도 원래 비만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
마음 다스리는 법을 배워 비만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을 것이다.
29 일공동양(一空同兩) 제함만상(齊含萬象)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가지런히 모두 다 포함한다.
이와 같이 상대방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트레스를 만들어서 내가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스트레스를 공(空)해 버리면,
스트레스를 받는 자가 공하였으니
주는 자도 공하게 된다.
주는 자도 공하고 받는 자도 공하였으니
이들 양쪽은 하나의 공(空)으로, 일공동량(一空同兩)이 되는 것이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을 때 양단(兩段)이 있는 것이나,
양단이 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어떠한 사물을 대해도 싫어하는 마음을 지울 수만 있다면,
싫어하는 마음이 없으니 좋아하는 마음도 저절로 있지 않게 된다.
싫어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 일공동양(一空同兩)이 된 것이고,
만물을 가지런히 포함하는 제함만상(齊含萬象)이 된 것이다.
즉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부처님께서 살아 계실 때 경전을 공부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는 공부를 마친 후 강사가 되어 새로 들어오는 스님들에게 강의를 하는 강백이 되었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그 강원에 오시어 그 강백에게 한 가지 물어봐도 좋으냐고 말씀하셨다.
금강경에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란 말이 있는데
아상이란 무엇인가?
강백이 대답하기를,
‘나’라는 상이 있는 것으로 남이 ‘나’를 알아주고 위해주기를 바라는 상입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묻기를,
그러면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주자상 중 무아상은 무엇이냐?
강백이 대답하기를,
‘나’라는 상이 없는 것으로 남이 ‘나’를 알아주고 위해주기를 바라는 상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맞는 말이다. 그러면 아상과 무아상이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강백이 대답하기를, 다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대답이 다 맞다.
그런데 좀 더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라고 하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30 불견정추(不見精麤) 영유편당(寧有偏黨)
정(精)과 추(麤)를 보지 않는데 어찌 편당(偏黨)이 있을 것인가!
28송에서
‘욕지양단(欲知兩段) 원시일공(元是一空)
양단을 알고자 할진대 원래 하나의 공(空)이니라.’ 라고 하여 양쪽에 대해 설명하였고,
29송에서도
‘일공동량(一空同兩) 제함만상(齊含萬象)
하나의 공(空)은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함께 다 포함하여,’ 라고 하여 거듭 양쪽에 대해 설명했다.
이 30송에서도 정(精)한 것과 추(麤)한 것이란 단어로 역시 양단(兩段)을 거듭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음식을 대함에 정교(精巧)하게 차린 음식과 거칠게 차린 음식이 눈앞에 있을 때,
정교하다거나 거칠다거나 하는 분별심으로 보지 않고,
음식에는 각기 특유하게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분이 들어있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정교하게 차린 음식이 좋다거나 거칠게 차린 음식이 싫다거나하는 편견이 있겠는가.
정교하게 차린 음식을 보고 정교하게 차렸다고 점수를 주고,
추하게 차렸다고 점수를 빼면 정교하게 차린 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그러다보면 육체적인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정(精)하고 추(麤)한 것들이 끼리끼리 모이다보면
상대방을 비방하는 무리가 생기게 되니 편당(偏黨)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싫어하고 좋아하는 견해가 없는 사람에게
어찌 편파적인 무리가 성립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사람도 깨끗하게 생긴 사람도 있고 거칠게 생긴 사람도 있다.
사람을 택할 때 일반적으로 깨끗하게 생긴 사람을 선호하지만,
그것이 바른 선택인가고 묻는 것이다.
흰 쌀밥은 현미밥에 비교해서 정(精)하고, 현미밥은 거칠다.
사람들이 현미밥보다 흰 쌀밥을 선호하지만, 그것이 옳으냐고 묻는 것이다.
나물도 나름대로 거친 나물도 있고 보드라운 나물이 있는데
보드라운 나물을 사람들이 선호하지만 그것이 옳은가?
예쁜 여자와 제멋대로 생긴 여자를 비교할 때
사람들이 예쁜 여자를 선호하지만 그것이 바른 생각인가?
정(精)과 추(麤)라는 단어에 수없이 많은 예를 대입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명구이다.
이 구절(句節)에서는
정(精)과 추(麤) 어느 쪽으로든 치우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이다.
즉 정(精)은 정해서 좋고, 추(麤)는 추한대로 좋다는 말씀이다.
정한 것은 정한 대로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으며,
추한 것은 추한 대로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으니,
편견(偏見)을 가지면 오히려 해(害)를 보게 된다는 말씀이다.
사업(事業)을 하는 사람은 흔히 큰 기업체를 작은 기업체보다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편견이 실효성이 있을까?
명문대학과 지방대학과 비교할 때도
명문대학이 지방대학보다 좋다고만 할 수 있을까?
등등 편견이 옳지 않다는 말씀이니,
어떤 학생에게는 지방대학이 명문대학보다 나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31 대도체관(大道體寬) 무이무난(無易無難)
대도(大道)의 체는 너그러워 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
대도(大道)란 제1송에서 지도(至道)라고 한 말과 같은 말인데
가장 지극한 도(道)이고, 가장 높은 진리이다.
가장 높은 것은 상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 뜻이니
진아(眞我)이다.
진아(眞我)의 체(體)는 관대하고 걸림이 없어
그것을 체험하는 것은 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고 했다.
관대하고 걸림이 없다는 말씀은
더러운 것은 더러운 대로 받아들이고 또 가겠다면 보내주고,
깨끗한 것이 오면 깨끗한 대로 받아주고 가겠다면 보내주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관대하고 걸림이 없다고 한 것이다.
진아(眞我)의 체(體)는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 일공(一空)이 된 것이다.
너와 내가 하나 되어 능소(能所)가 사라졌을 때
하나인 체(體)가 되는 것이고 또 일공(一空)이 된 것이다.
너와 내가 하나 되어 일공(一空)이 되었을 때는
만법(萬法)과도 하나 되고 일공(一空)이 되는 것이니
이를 체험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대도의 체가 관대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쉬운 것이 아니다.
도(道)란 진리를 탐구하는 길이니,
지도(至道)라 하면 더 이상 높을 수도 없고,
더 깊을 수도 없으며, 더 넓을 수도 없는 가장 지극한 진리로 가는 길이다.
이것은 위없이 높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고,
가장 창의적이고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이기도 하며,
극락세계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든 길 중에서도
심층(心層) 중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진아(眞我)로 가는 길이다.
32 소견호의(小見狐疑) 전급전지(轉急轉遲)
좁은 견해로 의심하고 또 의심해서
급하게 서둘수록 일은 더디어진다.
좁은 견해(見解)로 의심하고 의심하거나
또는 여우 같이 의심한다는 것은 믿지 않는 마음을 말한 것이다.
믿지 않는 마음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호의(狐疑)는 남을 믿지 못해서 남보다 먼저 취하고자 하는 마음,
급하게 서둘러 남이 차지하기 전에 내 것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다.
일을 함에 있어서도 경쟁자들보다 빨리 해서 득을 보겠다는
성취욕도 이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급하게 서둘면
오히려 일이 더뎌진다는 말이다.
일체 경쟁적인 의식을 가지면 일이 오히려 지연되기 쉬우니
경쟁적인 의식을 하지 말고 일에 열중하라는 의미도 되고,
어떤 일을 하는데 시한(時限)을 정해 놓고 일을 진행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잘못하면 그 시한 때문에 일이 오히려 지연될 수도 있고 부실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다.
과도하게 무리수를 택하면 오히려 해(害)를 본다는 교훈이다.
소견(小見)이란 작은 혹은 좁은 견해인데 이러한 소견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한 사람의 세계는 자기가 보는 것과 같은 세계,
그리고 크기도 깊이도 그가 보는 것 만큼의 세계밖에 모르니,
그가 생각하는 세계 밖의 세계는 그에게는 없는 것이므로
그가 보는 세계가 작고 좁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폭 넓은 세계는
그에게는 혼란스러울 뿐이고 잘 이해되지 않는다.
도둑질, 살인, 강도, 노름 등 중독성 환자들은
대개 이런 좁은 견해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라
다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즐길 줄 모르고
대체로 이러한 사람들은 대단히 이기주의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서는
남을 해치는 것을 예사로 아는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3 집지실도(執之失度) 필입사로(必入邪路)
집착이 심하여 법도(法度)를 잃으면 반드시 삿된 길로 빠지리라
집착으로 말미암아 법도(法度)를 잃으면 반드시 삿된 길로 빠진다는 말씀은
항간에 신문지상이나 방송 뉴스에서 흔히 보는 일이다.
학위에 집착해서 남의 논문을 표절한다거나, 이력서 학력 란에 허위로 기입하는 등
학력 위조로 삿된 길로 빠지는 것,
부(富)를 쌓기 위해서나 국회의원에 당선되기 위해 불법적인 행위를 하는 것,
혼외(婚外) 정사(情事), 노름, 마약 등으로 인해 패가망신하는 경우 등이
집지실도(執之失度) 필입사로(必入邪路)에 해당된다.
항간에 흔히 쓰는 두 가지 용어가 있다.
하나는 실용(實用)이고 다른 하나는 원칙(原則)이다.
실용을 세우다보면 원칙이 무너질 수도 있고, 원칙을 고집하다보면 실리(實利)가 없는 경우이다.
여기에서는 실리(實利)에 집착하다보면 원칙이 무너지고, 원칙이 무너지면 삿된 길로 빠진다.
즉 도덕성이 무너져 오히려 더 막대한 손실을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즉 눈에 보이는 이익에 집착해서 법도(法度)를 잃지 말라는 말씀이다.
실리(實利)가 눈앞에 보이거나 상대의 잘못이 눈앞에 보이더라도
공(空)의 원점(原點)에서 그리고 중도(中道)의 입장에서 잘 살펴서 행하는 것이
법도(法度)에 맞는 실행(實行)이 되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법답고 가장 빠른 길이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34 방지자연(放之自然) 체무거주(體無去住)
놓아 버리면 저절로 그러하여 본체(本體)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다
집착을 놓아도, 하고자 하는 일이나 해야 할 일들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근본인 체(體)는 가지 않아야 할 때 가는 법이 없고,
머물지 않아야 할 때 머무는 법이 없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본체인 우리들의 본심(本心)은 집착이 있는 곳에서는 현현(顯現)하지 않으니
머물음이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요,
집착을 여의었을 때는 그 자리에 현현하니, 간 것이 아니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집착을 놓은 자리에서는
저절로 그러하여 우리의 본심이 현현(顯現)하여
항상 우리와 더불어 있으니 본심이 사역(使役)하는 대로 하면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이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집착은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니 욕심을 버려야 하고,
욕심은 성격에서 성격은 습관에서 나오는 법이니,
욕심을 내는 습관을 버림으로서 집착을 지울 수 있다
이 말씀을 진심으로 믿고
추호의 의심도 없이
각자의 악습(惡習)을 고침으로서
본심에 일체 근심 걱정을 맡기고 본심이 사역하는 대로 열심히 정진하면
이루어 지지 못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씀이니
이렇게 하는 마음을 원력(願力)이라 한다.
체무거주(體無去住) : ‘본체(本體)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다.’는 것은
우리들의 본심은 마치 해가 짙은 구름에 가려졌을 때 보이지 않듯이
본심이 어리석은 집착으로 가려져 있을 때는 머물러 있어도 머물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구름이 개었을 때 해가 나타나는 것은
해가 본래부터 어디 간 데가 없기 때문인 것과 같이
우리의 본심도 어리석은 집착이 사라지면 나타나는 것이니
본심이 본래부터 어디 간 데가 있는 것이 아닌 것에 비유된다.
‘체무거주(體無去住) 체(體)가 감도 없고 머물음도 없다.’ 는 뜻은
또 어리석음이 사라진 본심은 모든 사정을 다 알고 있어
머물러야 할 때 가는 법이 없고, 가야할 때 머무는 법이 없다는 말도 된다.
또 바꾸어 말하면
가야할 때 가고, 머물러야 할 때 머물 줄 아는 것이니,
가고 오고 머묾이 사리에 맞게 자유롭게 된다는 말씀이다.
이 명구는 다양하게 쓰일 수 있다.
어리석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앉을 자리 설자리를 안다.
밥 먹을 때와 쉴 때를 안다.
공부할 때와 쉬는 때를 안다 등등의 의미를 갖는다.
집착을 여의면 이익이 있는 일에 이익이 있을 것을 알고,
이익이 없는 일에 이익이 없을 것을 자연스럽게 아는 것이다.
즉 집착이 있을 때는 현상(現像)을 보는 눈에 착각이 있어
하는 일이 순조롭지 못해 괴로움이 깊어지지만,
어리석음이 없을 때는 체(體)의 본성(本性)이 현현(顯現)하여
그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眼目)이 있어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된다는 말씀이다
35 임성합도(任性合道) 소요절뇌(逍遙絶惱)
자성에 맡기면 도와 합해져 소요(逍遙)자재하여 일체번뇌가 끊어진다.
임성합도(任性合道)의 성(性)은 본성(本性)을 뜻하는 것으로 본체(本體)의 다른 이름이다.
임성(任性)은 모든 일에 임해 근심 걱정 하지 말고 본성에 맡기는 것이고,
합도(合道)는 도(道)와 하나로 합해지는 길이고,
소요(逍遙)는 근심걱정하지 않으니 마음에 여유가 생겨 하루를 즐겁게 소일(消日),
즉 날을 보낼 수 있고, 절뇌(絶惱)는 일체번뇌를 단절(斷絶)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이다.
즉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때문에 근심걱정하지 말고
자성(自性)에 맡기는 것이 대도(大道)와 합해지는 일이고,
마음에 안정을 찾고 일상생활을 여유롭게 영위하며, 일체 번뇌를 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위 ‘34) 방지자연(放之自然) 체무거주(體無去住) 놓아 버리면
저절로 그러하여 본체(本體)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다.’
즉 본체가 다 알아서 한다는 말씀의 다른 표현이다.
또 양단(兩段)이 없는 것이 공(空)이고,
이 공에 만상(萬象)이 가지런히 함유(含有)되어 있다고 한
일공동량(一空同兩) 제함만상(齊含萬象), 방지자연(放之自然)과 임성합도(任性合道)는
같은 뜻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일공동량(一空同兩) 제함만상(齊含萬象)의 제함만상(齊含萬象),
즉 일체 만상을 가지런히 함유하는 주체가 곧 본체이고, 본성이며, 곧 진리인 도(道)이고,
이는 집착을 방지자연(放之自然)함으로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임성합도(任性合道)의 임성(任性)은 본성(本性)에 맡긴다는 뜻이니,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집착을 놓고 일체의 근심 걱정과 의심을 본성에 맡기고
열심히 하는 일에 정진하다 보면 그 원이 성취되는 것을
직접 경험하여 자신을 얻었을 때 도(道)와 합해졌다고 할 수 있다.
임성합도(任性合道) 중 임성(任性),
즉 모든 일을 자기의 성품에 맡기기 위해서는 우선 머리를 굴리는 생각을 끊어야 한다.
그것이 소요절뇌(逍遙絶惱) 중 절뇌(絶惱),
즉 번뇌를 끊는다는 말이고, 일체 번뇌 없이 소요(逍遙), 즉 거닌다고 했다.
그러므로 ‘임성합도(任性合道) 소요절뇌(逍遙絶惱) 자성에 맡기면 도와 합해져
소요(逍遙)자재하여 일체번뇌가 끊어진다’는 것은
크게 깨달음을 얻은 선지식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들을
우리들의 의식으로 분석(分析)하고 사량(思量)하며 이해(利害)관계를 따져보는 습관(習慣)이
단단히 배어 있어 이 과정을 모두 놓아버리고 일체를 본성에 맡긴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앞 ‘34) 방지자연(放之自然) 체무거주(體無去住)
놓아 버리면 저절로 그러하여 본체(本體)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다.’ 라는 말씀,
즉 체(體)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 머물러야 할 때 가는 바가 없고,
가야할 때 머무는 바가 없는 행위를 끊임없이 반복 실천해
스스로 이 말씀의 참뜻을 깨달았을 때 방지자연(放之自然)하고,
게송 35) 임성합도(任性合道) 소요절뇌(逍遙絶惱) 자성에 맡기면 도와 합해져
소요(逍遙)자재하여 일체번뇌가 끊어지는 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많은 세월을 두고 꾸준하게 자기의 허물을 찾아 참회하고 복 짓는 일을 즐거이 하는 습성이
점증(漸增)되어 가면
마침내 임성합도(任性合道) 소요절뇌(逍遙絶惱)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수행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 ‘35) 임성합도(任性合道) 소요절뇌(逍遙絶惱) 자성에 맡기면 도와 합해져
소요(逍遙)자재하여 일체번뇌가 끊어지다.’가 신심명의 73게송 중 최상의 법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36 계념괴진(繫念乖眞) 혼침불호(昏沈不好)
생각에 얽매이면 참됨에 어긋나고 혼침은 좋지 않느니라.
계념괴진(繫念乖眞) 혼침불호(昏沈不好) 중
계념(繫念)의 계(繫)는 맬 계, 매달다이고,
염(念)은 생각할 염이니 생각을 매단다 혹은 생각에 얽매인다는 뜻이고,
생각에 얽매인다는 것은 자기 생각에 자기가 구속되어 버린다는 의미로
망상(妄想)이나 망념(妄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사람이 어떤 생각이 나면 꼼꼼히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생각이 다음 생각으로 이어지기 시작하면
생각이 마치 실타래처럼 엉키게 되어 종잡을 수 없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런 현상을 계념(繫念)이라 했다.
그러한 생각들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실생활이나 정신생활에
오히려 해(害)가 되는 의미를 가지므로 괴진(乖眞)이라 하여
진리에 위배(違背)된다 혹은 진리에 어긋나니,
자기 이익에 집착하여 일어나는 생각들을 단념(斷念)하라는 의미이다.
계념(繫念), 즉 생각에 얽매이는 것과 조금 다른
혼침(昏沈)이란 것이 있는데, 이도 불호(不好), 즉 좋지 않다고 했다.
혼침(昏沈)의 혼(昏)은 어두울 혼이고 침(沈)은 가라앉을 침이니,
혼침은 어두움에 잠기다 혹은 몽롱(朦朧)한 상태에서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참선 중에 자기의 화두를 놓치고 멍하게 앉아 있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도 전혀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기에 좋지 않다고 했다. 혼침은 수면(睡眠)과 다르다.
수면은 잠을 자는 것이고, 혼침은 졸리는 것과도 다르다.
혼침의 반대말은 성성(惺惺) 역역(歷歷)한 것이다.
성성은 초롱초롱하게 정신이 맑다는 뜻이고,
역역은 분명하고 분명하다는 말이니
참선이나 주문을 외울 때
이와 같이 성성역역하게 해야 한다고 선사(禪師)들이 지도하신다.
스님은 앞 생각을 뒷 생각이 관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이 훈련을 잘 개발하면 혼침에 잠기는 것을 사전에 예방하고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항상 잘 관찰 수 있다고 한다.
앞 생각을 뒷 생각이 바라보는 마음을 스님은 자각식(自覺識)이라고 부른다.
수행을 하는 중에 계념(繫念)과 혼침(昏沈)에 빠질 때
무의식지간에 많은 시간이 흐를 수 있으므로 10분 내지 20분 단위로
계념(繫念)이나 혼침(昏沈)에 빠지지 아니하고 일념으로
성성(惺惺) 역역(歷歷)히 수행할 수 있을 때
10분 단위로 좌선시간을 늘려 가는 것이 효과적인 수행법이 되리라고 생각된다.
37 불호노신(不好勞神) 하용소친(何用疎親)
좋지 않거나 정신을 피곤하게 하는 것에 멀리 해야 하거나 가까이 해야 할 것이 있겠느냐.
좋지 않은 불호(不好)는 혼침(昏沈)이고
정신을 피로하게 하는 노신(勞神)은 생각에 얽히는 계념(繫念)이다.
계념은 괴진(乖眞),
즉 진리에 어긋나고, 혼침은 멍한 생각에 잠기는 것이니 불호(不好)이다.
이들 둘 중 어느 것이 낫다거나 못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둘 다 멀리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38 욕취일승(欲趣一乘) 물오육진(勿惡六塵)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하려거든 육진을 미워하지 말라.
‘일승(一乘)으로 나가고자 한다면,
육진(六塵)을 싫어하지 말라.’고 한
일승(一乘)은 하나의 수레를 타고 성불(成佛)한
부처라는 뜻으로 일불승(一佛乘)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이루신 후 제자들의 근기에 따라 지도하셨는데
제자들 중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들을 후에 성문승(聲聞乘)이라 부르고,
참선수행을 통해 깨달은 사람들을 연각승(緣覺乘),
보살행을 통해 깨달은 사람들을 보살승(菩薩乘)이라 부르게 되었다.
수행승들 중에 보살승이
성문승이나 연각승보다 상위(上位)에 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자
삼승(三乘)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현상이 생겼다.
이 때 부처님께서
수행 방법에 따라 다른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로를 통해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깨달음을 얻은 부처는 한 가지 밖에 없다고 하신 법문이 일불승(一佛乘)이다.
산정(山頂)에 오르는 데는 여러 가지 경로가 있으나,
어떠한 경로를 통해 산정에 올라갔어도,
산정에 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시야(視野)에는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여
삼승(三乘)의 평등성을 말씀하신 동시에
어느 승(乘)이 어느 승(乘)보다 상위(上位)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그 자체가
산정(山頂)에 오르기는 요원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라고 하신 것으로 이해된다.
말하자면 삼승(三乘)론을 세워 편을 가르는 것은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행위라고 보는 것이고,
깨달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그런 말이 나올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육진(六塵)이라함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인데,
이를 싫어하지 말라고 했다.
싫어하지 말라는 말씀은
첫째, 육진의 경계에 대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심을 갖지 말라는 말씀이고
둘째, 내 마음과 육진 경계와의 관계를 별개로 두지 말라는 말씀이다.
즉 내 마음과 경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경계와 더불어 있고, 경계가 내 마음과 더불어 있으니
경계가 곧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곧 경계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볼 수 있는 사람은
색성향미촉법이
곧 부처님의 몸이고, 소리고, 맛이라고 볼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대상을
부처님의 몸이요, 말씀이요, 맛이라고 볼 수 있을 때
그 대상이 곧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고, 법신(法身)이며,
향과 꽃으로 장엄된 화장세계(華藏世界)라고 보는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곧 유심정토(唯心淨土)라고 하는데,
이 세계, 이 우주가 정토(淨土)인 것은 오직 내 마음에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람은
특별히 싫어하는 사람, 싫어하는 물건, 싫어하는 음식이 없다.
오직 일체에 있는 그대로 감사하고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에는 항상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고,
옳고 그른 것이 있으며,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어하는 일이 있게 마련이니
과연 어떠한 수행이 육진(六塵),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등 어떠한 것도 싫어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을까?
위 게송 ‘29) 일공동량(一空同兩) 제함만상(齊含萬象)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똑같이 다 포함한다.’고 하였는데
양단이 공한 깨달음의 지혜와 자비심(慈悲心)으로 만상을 볼 때
물오육진(勿惡六塵)과 제함만상(齊含萬象)이 가능하게 된다고 본다.
39 육진불오(六塵不惡) 환동정각(還同正覺)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정각(正覺)에 돌아간 것과 동일(同一)하다.
‘육진불오(六塵不惡) 환동정각(還同正覺)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정각(正覺)으로 돌아간 것과 같다.’
중 육진불오(六塵不惡)-육진을 싫어하지 않으면은
위38송에서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을 미워하지 말라.’라고 한
대목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이 39송에서는 그렇게 하면
그것이 곧 부처님이 깨달으신
정각(正覺)과 같은 곳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육진(六塵)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뜻은
나와 나의 대상을 분별하지 않는다는 말로,
능소(能所)를 여읜
무아상(無我相) 무인상(無人相) 무중생상(無衆生相) 무수자상(無壽者相),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을
성취한 경지이니 이를 부처님이 깨달으신 정각(正覺)과 같은 것이라 했다.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면
곧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가 되고,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가 되면 무의식(無意識)이 된다.
무의식이 되면, 의식,
즉 머리를 굴리는 것이 아니므로
‘34) 방지자연(放之自然) 체무거주(體無去住)
놓아 버리면 저절로 그러하여 본체(本體)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다.’가 되는 것이고,
또 ‘35) 임성합도(任性合道) 소요절뇌(逍遙絶惱) 자성에 맡기면
도와 합해져 소요(逍遙)자재하여 일체번뇌가 끊어진다.’가 되는 것이며,
‘39) 육진불오(六塵不惡) 환동정각(還同正覺)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정각(正覺)에 돌아와 정각과 서로 같아진다.’도 되는 것이다.
40 지자무위(智者無爲) 우인자박(愚人自縛)
지혜로운 이는 조작함이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동여맨다.
무위(無爲)의 반대는 유위(有爲)인데
어떻게 하는 것이 조작함이 없는 무위(無爲)이냐 하는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이다.
어떤 사람이 발심해서 수행하여 정각을 이루겠다고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이 있다.
글자 뜻대로 하면 이 사람이 하고자 하는 것이
인위적(人爲的)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유위(有爲)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러면 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자기 끈으로 자기를 묶는 자승자박(自繩自縛)하는 사람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사람의 발심이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고 욕심을 내서 세워진 것인가?
순리에 따라 욕심 없이 세워진 것인가가 문제될 수 있다.
욕심으로 세워진 발심이면 유위가 되고
욕심 없이 순리로 세워진 발심이면 무위가 된다.
수행과정에서도 수행 방법을 남들과 다른 방법을 찾으려하는 것은 유위가 되고,
자기 의견을 세우려는 생각 없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수행하는 것은 무위가 된다.
수행도중 어떤 경지를 맛보았을 때 기뻐하거나
남들은 다 어떤 경지를 체험했다고 하는데
자기에게는 아무런 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기뻐하거나 실망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유위이기 때문이고,
그에 대한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무위이기 때문이다.
수행을 유위적으로 하는 사람은 수행상에서
그의 감정의 기복(起伏)이 심하게 일어나지만
무위적으로 하는 사람은 꾸준하게
지속적(持續的)으로 평상심(平常心)으로 수행해 가게 된다.
똑같은 행위가 행위자가 가지고 있는 마음에 따라
무위가 될 수도 있고, 유위가 될 수 있다.
결과에 가서 보면 분명히 드러나지만 수행 초기와 중간에서는 분간하기 쉽지 않다.
이런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이 다 자는 한 밤중에 수행이 잘 되기 때문에
한 밤중에 수행한다고 하면 무위인가? 유위인가?
간화선 수행이 최고라고 한다. 무위인가 유위인가?
김치 맛이 최고라고 한다. 무위인가 유위인가?
이와 같이 유위와 무위는 분간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히 다르다.
지자무위(智者無爲) 우인자박(愚人自縛)이란
지혜로운 사람은 무위를 택하여 자연스럽게 일이 풀려가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의사로 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결과
스스로 자기가 택한 일에 얽매여
그에 구속되게 되어 일이 꼬여지고 근심 걱정이 심해지게 된다.
41 법무이법(法無異法) 망자애착(妄自愛着)
법에는 특별히 다른 법이 없는데
망령되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에 집착한다.
집이나 자동차나,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 모두 다르게 생겼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특별히 다른 것은 아니나
사람이 각자의 생각에서 좋고 나쁜 것을 만들어내서 그에 집착하게 되는데
이것은 망령된 짓이라고 했다.
일체 사물,
즉 감나무나 밤나무, 노동자와 고용주,
며느리와 시어머니 등에는 모두 장단점이 있고,
그 자체가 하고 있는 가치가 있는 법이니
그 가치를 바르게 보고 자기의 필요에 응해 택할 일이지,
자기가 만든 애정이나 이익에 끄달려 집착하는 것은
삿된 길로 빠지게 되는 것이고 불행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술, 담배, 약물에 중독되는 것은
자기가 좋아해서 집착하여 생기는 병이지
술, 담배, 약물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부인 몰래 딴 여자를 만나기 시작하여,
결국 자기 본 부인과 이혼하고 그 여자와 결혼했다.
새 결혼 한지 1년도 못되어
이번에는 그 여자가 못살겠다고 하여 이혼 당했다.
이혼당한 이 남자는 4년 후 죽었다.
두 여자에게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이 남자가 이 여자보다 저 여자가 더 좋다고
스스로 보고 집착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귀중한 인생을 망치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과거에 지은 경험과 습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니,
집착함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즉시 그를 인식하고 꾸준하게 그 성품을 고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집착이 심해지고,
집착이 심해지면
불만이 쌓이고 감정에 휩싸여
화를 자주 내게 되며, 화가 쌓이면 고질병에 걸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애착(愛着)은 유위(有爲)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분별심에서 좋다 나쁘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좁은 소견에서 나오는 유위이다.
좋고 나쁘고 분별을 떠나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하는 것이 무위가 되고
법에 대한 분별심이 없게 된다.
법에 대한 분별심이 없을 때
애착심(愛着心)이 일어나지 않게 되고
항상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가 하는 일에 열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42 장심용심(將心用心) 기비대착(豈非大錯)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릇됨이 아니랴.
우리는 누구나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쓴다.
말을 하는 것도 행동을 하는 것도 모두 자기 마음이 하는 것이지만,
일이 잘못되었을 때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발뺌을 할 때,
이것은 자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행위이다.
어떠한 일에서도 자기 잘못을 보고 인정하고 사과하고,
그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자기 잘못을 고치려는 사람은
자기 개선(改善)이 있고 발전이 있을 수 있는 길로 가는 것이지만,
자기 마음으로 자기 잘못을 변명하고 묻어버리려는 사람은
성질이 급해지기 시작하여 짜증이나 화내는 것을
서슴지 않는 성품으로 발전되어간다.
이러한 사람은 개악(改惡)되어 가는 길로 가는 것이니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 했다.
또 한 생각에서 다음 생각으로,
또 다음 생각으로 이어져가는 마음 씀도 이 장심용심(將心用心)에 해당한다.
그리고 또 현실을 보고
현실감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사람은
그 현실을 해결해 낼 수 있는 능력이 향상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현실을 보고 자기 마음에 편리한대로 해석하고,
그 해석한 마음에 의지해 마음을 쓰는 사람은
우선 자기 마음에 편리한대로 해석한 착각이 있기 때문에
그 착각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것은
더 큰 착각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어찌 큰 착각이 아니리오.’라고 한 것이다.
많은 경우 이와 같은 착각을 하고도 착각인줄 모르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에 마음에 새겨진 습관에 의해
사물을 보고 해석하기 때문에
그 해석이 실제 사물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없기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끊임없이 자기의 사고방식을 점검하여
사물이나 사건을 잘못 보는 경우들을 찾아 고치는 작업을 하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하게 되면 언제나 보는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 씀이 옳아 좋은 결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43 미생적란(迷生寂亂) 오무호오(悟無好惡)
미혹하여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깨치면 좋음과 미움이 없느니라.
요하다거나 산란스럽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미혹하기 때문이고,
좋은 것도 없고 미운 것도 없는 것은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좋다는 생각이나 나쁘다는 생각들이
하루에도 몇 번 씩 일어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나 이는 우리들이 미혹하기 때문이고,
이치를 깨닫고 보면 좋아할 것도 미워할 것도 없다는 말씀이다.
미혹할 미(迷)와 깨달을 오(悟)는 어떻게 다를까?
우리들의 감정이 외부조건에 의해 기뻐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며,
고요해지기도 하고 산란해지기도 하는 것이
미혹함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누구로부터 선물을 받아서 기쁘고,
누가 갚을 돈을 갚지 않아서
감정이 상하고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것,
자녀가 공부를 잘하여 학교에서 우등생이 되었을 때
부모로서 기쁜 일이고, 공부를 못하면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오면 기쁜 일이고, 못 벌어오면 답답한 일이다.
이 구절에서는 이러한 모든 감정적인 일들은
미혹함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고,
깨닫고 보면 좋아할 것도 없고 싫어할 것도 없다는 말씀이다.
고요할 적(寂)에는 편안하다는 의미가 있고,
어지러울 란(亂)에는 불안하다는 의미가 있다.
편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는
기복(起伏)이 심할수록 더 미혹한 것이고,
불안함이 없는 편안함은 깨달음이 있는 모습이다. 왜
냐하면 감정의 기복이 심할수록
양변(兩邊)에 치우치게 되는 것이고,
기복이 없을수록 양변이 공(空)해지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심한 것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이 날카로운 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어떠한 경우가 생겨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이 별로 없을 때는
어지러운 감정이나 불안한 감정을 별로 경험할 수 없게 된다.
우리의 감정이 이와 같이 작용하므로
게송 29)에서 ‘일공동량(一空同兩) 제함만상(齊含萬象)
즉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똑같이 다 포함한다.’고 했다.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양쪽이 공해버리면
‘오무호오(悟無好惡) 깨치면 좋음과 미움이 없다.’가 되는 것이니
일체만상을 가지런히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저절로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는
너무나 이기심이 강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
이러한 도인(道人)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과거에 심어진 원인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고,
현재의 일들은 또 어떠한 형태로도 변해가는 것이니,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에 관심을 가질 때,
잘 되어간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고, 잘못 되어간다고 슬퍼할 일이 아니다.
더욱이, 깨달은 사람은
일체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깨달은 것이니
외부 조건에 의해 감정이 좌우되지 않으니
어떠한 형상(形象)에도 고요함이나 산란함을 느낄 리가 없다.
형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44 일체이변(一切二邊) 양유짐작(良由斟酌)
일체 두 변(邊)은 짐작에서 일어난다.
지금까지 설한 간택(揀擇), 증애(憎愛), 순역(順逆), 위순(違順), 취사(取捨), 미오(迷悟) 등
일체 상대적이거나 대립적인 두 변(邊)은
모두 짐작(斟酌) - 마치 술 마시는 사람들이
주고받은 술을 헤아리듯이 어림처서 헤아린다는 뜻 - 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는 실질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니
실질적인 근거를 찾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실질적인 근거는 앞에서 설명한 일종(一種)이다.
즉 두 변(邊)은 일종(一種)에서 나온 것이니
자기중심을 바로 갖도록 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중도(中道)를 잘 지키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중도는 상황을 정확하게 알아
정확한 중심을 잡는 마음이니
짐작하는 마음이 아니고 또 치우침이 있는 마음도 아닌 마음이다.
45 몽환공화(夢幻空華) 하노파착(何勞把捉)
꿈, 허깨비와 공중의 꽃을 어찌 수고로이 잡으려 하는가.
환공화(夢幻空華)의 몽(夢)은 꿈 몽자로 꿈을,
환(幻)은 변할 환자로 허깨비를,
공화(空華)는 공중의 꽃으로 헛꽃을 하노파착(何勞把捉)의
하노(何勞)는 어찌 수고로이,
파착(把捉)의 파(把)는 잡을 파, 착(捉)도 잡을 착으로,
파착(把捉)은 아주 꼭 잡으려는 부동한 마음이나,
목숨을 걸고 잡으려는 모습을 수식하는 단어이다.
게송 44)에서 일체이변(一切二邊) 양유짐작(良由斟酌)
일체 상대적으로 대립되는 두 개념 중 한 변에 치우치는 것은
짐작(斟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나,
사람들이 이러한 짐작은 사실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고
한 변에 치우치는 것이니 이는
몽환공화(夢幻空華)인데
어찌 목숨을 걸고 짐작으로 착각한 것을 잡으려 수고하는가? 라고 했다.
실에 근거하지 않고 짐작해서 만든 여러 가지 생각들은
모두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공중에 핀 꽃과 같은데
사람들은 어리석어 이들을 잡으려고 온갖 짓을 다한다고 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무엇을 보고 좋다는 것, 갖고 싶어 하는 것, 가지려고 애쓰는 것은
모두 마음이 조작해서 그렇게 느끼고 또 갖고 싶은 것이지,
무엇 그 자체에는 좋아할 것도 없고, 갖고 싶을 것도 없으며
가지려고 애쓸 필요도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내 마음이 그렇게 조작해서 있는 것이지
실제 그러한 성질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갖고 싶어 하는 것,
그 자체가 꿈이고, 꼭두각시이며, 공중에 핀 꽃과 같다는 것이다.
공중에 핀 꽃이란, 내 눈에 눈병이 나서 공중에 핀 꽃이 보이는 것이지,
내 눈이 건강하여 병이 없으면 자연히 꽃이 보일 리가 없다는 말씀이다.
결국 우리들의 마음에 허물이 있거나 때(垢)가 있을 때,
갖고 싶은 것이 있고, 그것을 가지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 것이지,
실제 그렇게 좋은 물건이나 명예나 재물이 있어서
그것들을 취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욕망은 허망한 줄 알아서 부질없는 수고를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고 하는
두 변은 모두 가설(假設)이고 실제 있는 것이 아니니,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공중에 핀 꽃과 같다.
어찌 두 변에 매달려 내 주장이 옳다고 극한적인 투쟁을 일삼겠는가. 라고 하셨다.
우리들의 생활 자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무엇을 하는지도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하고 싶은 것이 많고 갖고 싶은 것이 많다보니,
그것들을 다 해보려고,
그것들을 다 가지려고 물샐틈없이 생각하고 뛰어다니곤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다음에 돌이켜보면
허무하게 귀한 시간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다 보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잡으려고 한 것이 모두 몽환공화(夢幻空華)이기 때문이다.
46 득실시비(得失是非) 일시방각(一時放却)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즉각 놓아 버려라.
위 게송 44)에서 일체이변(一切二邊) 양유짐작(良由斟酌),
좋다 나쁘다고 하는 상대적인 대립관계인 이변(二邊) 중
한 변에 치우치는 것은 짐작에서 비롯된 것이고,
게송 45) 몽환공화(夢幻空華) 하노파착(何勞把捉),
즉 이렇게 짐작에서 비롯된 것은 모두 몽환공화(夢幻空華)인데
어찌 목숨 걸고 그들을 잡으려고, 주장하고 쟁취하기 위해 수고할 것이냐고 했다.
이 게송 46)에서는 이렇게 짐작에서 비롯된 일에서 득이 된다거나 손해라거나,
옳으니 그르니 따지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일이니 일시에 놓아버리라고 했다.
어떻게 이해(利害)를 따지는 것을 놓으라고 했을까?
상업(商業) 경제하에서는 반드시 득이 될 수도 있고
해가 될 수도 있는 일이 수없이 많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사회에는 폭리(暴利)를 챙기려는 무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선량한 사람들이라면 득실(得失)을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지만.
이러한 득실(得失)의 문제는
상업적이 아니라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도 매사에서 득실을 시비(是非)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득실의 시비가 심하게 되면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번뇌가 일어나게 되고,
번뇌가 심하게 되면 불면증(不眠症)에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득실 시비의 시작은
모두 가정(假定)에서 혹은 짐작에서 비롯된 것이니
즉시 놓아버리라는 말씀이다.
이 신심명에서는 일시방각(一時放却)이라 했지만
한국불교에서는 주로 방하착(放下着)하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일주문을 들어설 때 방하착하라는 편액이 있는 절이 많다.
이 뜻은 이 문을 들어설 때는 일체 근심걱정을 놓아버리라는 뜻이다.
중국 당나라 시대에
어떤 수자가 조주(趙州)스님(778-897)을 찾아뵙고
스님께 선물을 준비하지 못하고 온 것을 미안하게 생각해,
‘스님께 오면서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조주스님이 대답하기를, ‘그럼 거기에 놓아라.’ 라고 하셨다.
조주스님의 이 말을 들은 수자는 당황하여,
‘아니 스님,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조주스님이 대답하기를,
‘놓기 싫거든 가지고 가거라.’ 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수자는
너무나 말이 통하지 않는 조주스님 앞에서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한다.
조주스님의 말씀은
스님께 올 때는 무슨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은
수자의 짐작이고, 꿈이고, 환이며 헛꽃과 같은 망상이니
그런 생각을 즉시 내려놓으라는 말씀이었으나 수자가 알아듣지 못하니,
수자에게 선물에 대한 그의 짐작을
내려놓기 싫으면 가지고 다니라고 하신 것이다.
즉 고민을 계속해 봐라. 라고 하신 것이다.
47 안약불수(眼若不睡) 제몽자제(諸夢自除)
눈이 만약 졸지 않으면 모든 꿈은 저절로 제거된다.
여기에서의 꿈은 앞 게송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어떤 일을 보고 짐작하고,
한 변에 치우쳐 이해득실(利害得失)을 따지고, 대립하고
불목(不睦)하는 일들을 비유한 말이다.
이러한 일들은
마치 눈이 잠이 들어 꿈을 꾸는 것과 같이
마음이 탐욕으로 눈병난 사람이
공화(空華)를 보듯이 하니까 망념에 들게 되는 것이니,
눈이 졸리지 않으면
꿈을 꿀 수 없듯이 마음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면 짐작하여
한 변에 치우치는 생각, 말,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는 말씀이다.
마음에 쌓여진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무위(無爲)에 들게 되면
눈에 병이 없는 것이니,
사리를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며 행하는 도리를 터득하게 될 것이다.
눈에 졸음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눈이 밝다는 뜻이고,
눈이 밝다는 뜻은
사실을 사실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는 말이다.
48 심약불이(心若不異) 만법일여(萬法一如)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 같으니라.
만약 마음이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은 검정색과 흰색을 보고,
검정은 검정이고 흰 것은 흰 것이겠지만
흰 것이 검정보다 우월하다는 차별의식을 갖지 않으니,
흰색을 검정보다 더 좋아하게 되는 차별의식을 갖게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남녀 간에 있어서나, 민족 간에 있어서나,
국가 간에 있어서나 혹은 종교 간에 있어서 우월주의 관념이 있는 것은
모두 마음이 그들을 다르게 보기 때문이다.
또 이 다르게 보는 마음은
그의 의식이 짐작하고 꿈을 꾸는 것이지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의 의식이 만법을 대하되
만법 각각의 다른 모습을 인지하면서도 차별적인 의식이 없다면
만법을 한결같이 취급하고 포용하고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위 게송 ‘29) 일공동량(一空同兩) 제함만상(齊含萬象) 하나의 공은 양
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똑같이 다 포함한다.’ 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이라고 여겨진다.
만법평등의 원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또 마음이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은
이변(二邊)에 떨어지지 않은 것이니
마음을 일종(一種)에 머물게 한다.
일종에 내 마음이 있게 되면
마음의 안과 밖 모든 법이 동시에 일종에 있게 되니
일여(一如)가 되는 것이라 했다.
49 일여체현(一如體玄) 올이망연(兀爾忘緣)
한결 같음은 본체가 현묘하여 우뚝이 연(緣)을 잊는다.
앞 게송 ‘48) 심약불이(心若不異) 만법일여(萬法一如)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 같느니라.’고 한 것은
마음이 만약 있고 없거나, 높고 낮거나, 움직이고 멈추거나,
좋고 나쁘거나 하는
상대적으로 다른 한 쪽에 치우쳐 다르게 보지 않으면,
즉 ‘심약불이(心若不異)하면 만법일여(萬法一如)하리라,’
곧 만 가지 법이 한결 같으리라고 했다.
이 게송 49에서는
마음이 모든 법의 다른 모습을 보되
차별하는 의식으로 보지 않고
만법일여(萬法一如)하게 보려면
일여(一如)(한결같이 변함이 없는)한
체(體)를 체험하고
현묘(玄妙)한 그 체의 용(用)을 체험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올이망연(兀爾妄緣)의 올
이(兀爾)는 체가 우뚝이 솟아 조금도 움직임이 없어
일체 연(緣)을 잊었다고 했다.
즉 연이 있으면 생사번뇌가 있는 것인데
연을 잊었으니 생사번뇌없이
홀로 오뚝하여 저절로 현묘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마음이 상대적인 개념에 치우치지 않으려면
한결같은 본심에 머물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한결같이 현묘(玄妙)한 본체(本體)에 머물기 위해서는
우뚝이 변함없이 일체 연(緣)을 잊었을 때만이 이루어지게 된다.
올이(兀爾)는
우뚝이 변함없이 항상 있다는 의미이고
망연(忘緣)은 연(緣)을 잊어버린다는 뜻인데
여기에서는 연(緣)에 끄달리지 않는다,
연연(戀戀)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는다, 자유스러워진다 로 해석해도
일여체현(一如體玄) 즉 한결같이 본체가 현묘하게 저절로 작용(作用) 한다.
체(本體) 현묘(玄妙) 중
본체는 진공(眞空)에 해당하고,
현묘(玄妙)는 묘용(妙用)에 해당하는 것으로
흔히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알려진 묘유(妙有)이다.
진공의 용이 한 없이 깊고 묘하다는 의미이다.
이는 깨달아서 알 수 있는 것이니 망연(妄緣)이 되면 곧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50 만법제관(萬法齊觀) 귀복자연(歸復自然)
만법을 가지런히 바라볼 수 있을 때
저절로 되는 이치(自然)에 돌아가고 또 돌아간다.
송 49)에서 일여체현(一如體玄)할 때 만법제관(萬法齊觀)
즉 한결같은 근본인 체(體)가 현묘하게 나타날 때
만 가지 법을 가지런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만법을 가지런히 볼 수 있는 것은
한결같은 근본으로 돌아왔을 때 가능하다.
‘만 가지 법을 가지런히 본다.’는 뜻은
이 세상의 현상은
형형(形形) 색색(色色)의 모양과 질이 다른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식물계, 동물계, 미생물(微生物), 인종(人種)도
수없이 많고, 모양과 질이
개체(個體)마다 차별(差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다양성(多樣性)을 차별화해서
그들의 개성(個性)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선양(宣揚)하게 하면서도
전체로서의 통합성(統合性)을 유지하는 지혜로 바라보는 것이 만법제관이다.
통합성(統合性)은 한 변에 치우치는 편견에 의해서는 이룰 수 없다.
오로지 일종(一種)의 신념(信念)에서만이 다변성(多邊性)을 인정하면서도
통합성(統合性)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는 어린이로,
성인은 성인으로,
노인은 노인으로서의
인격, 개성, 가치, 취미 등이 서로 다른 다변성(多邊性)을 지니고 있지만
모두 일종(一種)에서 비롯된 것이니 그 다변성을 인정하고
육성(育成)하면서도 전체적인 통합성(統合性)을 유지하므로서
원융하게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이치이다.
현대와 같은 다양한 문화, 사상, 취미생활을
서로 대립되어가는 방향에서 통합으로
인도하기 위해 반드시 존중되어야 할 사상이다.
이것이 곧
귀복자연(歸復自然) 중
귀(歸)도 돌아갈 귀이고, 복(復)도 돌아올 복이니
자연(自然)으로 돌아올 것을 강조하는 구절이라 생각된다. 우
리말에서는 복귀(復歸)인데 여기에서는 귀복이라 했다.
이 때, 자연(自然)은 현상세계로서의 자연이라기보다
마치 자연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있는 이치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나와 모양이나 취미가 다른 것을 보고
나를 그들과 차별화하려는 의도가 생기는 것은
분별심(分別心)이 있기 때문이며, 분별심은 경쟁심을 고취시킨다.
경쟁심은 분쟁(分爭)을, 분쟁은 파쟁(派爭)을 초래하게 되어
화목과 통합을 방해하는 요인이 된다.
이는 자연의 순리(順理)에 어긋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또 만법제관(萬法齊觀)이라는 뜻에는
개인의 생활상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포함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른 것이다.
속상할만한 일이 있어도 속상할 일이라고 보지 않고
생각해 볼만한 일이라고 보는 것.
어려움이 있을 때,
이 어려움을 지나면 좋은 일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 속에서
즐거움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있는 것이고, 자녀들이 공부 잘 한다고 오만하지 않고,
못사는 사람들을 보고 우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돕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 등이
만법을 가지런히 보는 것이고, 또 자연스러운 것이다.
51 민기소이(泯其所以) 불가방비(不可方比)
그 까닭을 없애면 가히 비교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민기소이(泯其所以)의 민(泯)은 망(亡)할 민으로 멸망하다는 의미가 있고,
기소이(其所以)는 그 이유 혹은 근거이니,
그러한 이유나 근거를 없애버리면 불가방비(不可方比), 즉 가히 비교할 것이 없다.
‘그 이유 혹은 그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42) 장심용심(將心用心),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것,
43) 미생적란(迷生寂亂), 미혹하여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일어나는 것,
44) 일체이변(一切二邊) 양유짐작(良由斟酌) 짐작으로 두 변(邊)을 일으키는 것,
45) 몽환공화(夢幻空華), 실제가 아닌 꿈, 허깨비와 헛꽃 속에서 사는 것,
46) 득실시비(得失是非),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에 몰두하는 것
47) 안약불수(眼若不睡), 눈이 흐린 것
48) 심약불이(心若不異), 모든 일을 좋고 나쁘다고 차별적으로 보는 것 등이다.
이러한 마음은
번뇌의 원인이고 불화(不和)의 원인이 되고
투쟁(鬪爭)의 원인이 되며,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원인들이 제거되면
불가방비(不可方比),
가히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고 비교할 일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이는 밀가루와 쌀을 비교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밀가루를 쓸 때는 밀가루를 쓰고,
쌀을 써야할 때는 쌀을 쓴다는 말이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 감자나 밀가루는 가난한 사람이 먹는 음식이고 쌀
은 부잣집에서 먹는 음식이라고 했던 시대의 차별적 사유(思惟)를 없애야 한다는 말이다.
한 때 흑인은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시대가 있었는데, 이런 의식을 말한다.
흑인과 백인이 같다는 말이 아니라
흑인은 흑인대로 백인은 백인대로
그 가치가 있음을 존중해야 하지만
우월주의나 열등의식은 없애야(泯)한다는 말씀이다.
우리들의 생활상에서 흔히 있는 예를 들어 보겠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기분이 좋아
엄마에게 학교에서 시험을 봤는데 90점을 받았다고 했다.
엄마는 아들에게 칭찬해 주기도 전에,
‘다른 애들은?’ 하고 다른 애들은 얼마나 잘했는지 못했는지에 관심이 있었다.
학교 친구 집에 가서 놀다온 아들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명철이 집은 아주 크고 수영장도 있더라.
우리 집은 왜 이렇게 작아?’ 이런 것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입력된 비교하는 마음이고 불만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차별적인 분별심은
화합과 통합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는데 이러한 분별심이 없으면
가히 비교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에서 비교하는 것이란 편견을 가지고 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화합과 통합을 방해하는 심적(心的) 원인은
잘못된 정보로 생긴 편견을 가지고
이것이 저것보다 좋다고 하는 분별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편견 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개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그대로 살려 나가야 하고,
하나를 세우기 위해 다른 것을 폄하(貶下)하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분명한 이유 없이
높이 평가하거나 폄하하는
우리들의 습관은 오류(誤謬)를 범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통합을 방해할 수 있다.
52 지동무동(止動無動) 동지무지(動止無止)
그침 중에서 움직이는 것은 움직임이 아니요,
움직임 중에 그침은 그침이 없는 것이다.
지동무동(止動無動)의 지동(止動)은 ‘움직이는 것을 그치면’ 이니,
지동(止動)의 동(動)은 일체 편견이나 분별심의 작용이나 근심걱정 망상 등의 작용이다.
그러하니 지동(止動)은
이러한 편견, 분별심, 근심걱정, 망상 등의 작용이
완전히 소멸되여 적정(寂靜)에 든 경지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무동(無動)의 동(動)은
역시 일체 편견이나 분별심의 작용이나 근심걱정 망상 등의 작용이니,
무동(無動)은 이러한 일체 편견, 분별심, 근심걱정, 망상 등의 작용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지동(止動)에서 일체 생노병사의 번뇌에서
해탈한 경지에서 불쌍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비행과 보살행 등을 하는 움직임은 있지만
그 움직임은 편견이나 망상으로 인해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지동(止動)에서도 움직임은 있지만
그 움직임은 탐욕이나 어리석음으로 인한 움직임은 아니기 때문에
무동(無動)이라고 했다고 생각된다.
동지무지(動止無止)의
동지(動止)는 ‘고요한 것을 움직인다.’ 는 의미이니
일시적으로 마음이 고요하였다가
편견, 분별심, 근심걱정, 망상 등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니,
게송 43) 미생적란(迷生寂亂),
미혹하여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일어난다고 한 것과 같다.
조건의 변화에 따라
좋고 나쁜 감정의 기복(起伏)이 심할수록 더 미혹한 것이고
적을수록 덜 미혹한 것이며
완전히 조용해지면 적란(寂亂)이 없는 것이니
미(迷)함이 사라진 것이니,
깨달아서 좋고 나쁜 것이 없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동지(動止)이므로
조건에 따라 탐욕심이 움직이는 것이므로
일시적으로 그 움직임이 멈추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멈춘 것이 아니라고 하여 무지(無止)라고 했다.
그러므로 동지무지(動止無止)는
우리들의 일상생활상에서 일어나는 번뇌가
수행을 통해 멈추었다가도 잠시 후 그 번뇌가 다시 반복되므로
이는 멈추었다고 해도 멈춘 것이 아니니 동지무지(動止無止)라고 했다.
첫 구(句) 지동무동(止動無動)은
수행이 완전하게 이루어진 경지이고,
동지무지(動止無止)는 수행이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모든 번뇌가 멈추어진 가운데 움직이 있는 것은
번뇌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므로 움직임이 없다고 하여
지동무동(止動無動)이라 하고,
번뇌가 움직이는 가운데 잠시 멈춤이 있는 것은
번뇌가 완전히 멈추어진 것은 아니라 하여
동지무지(動止無止)라고 했다고 할 수 있다.
53 양기불성(兩旣不成) 일하유이(一何有爾)
양(兩)쪽이 이미 성립되지 않는데 하나가 어찌 있겠는가.
양기불성(兩旣不成)의 양(兩)은 양쪽을 의미하는 것이니,
간택(揀擇), 증애(憎愛) 등 상대적인 개념이 성립되지 않으면,
일하유이(一何有爾)
즉 어찌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것 중 하나만이 있을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양쪽 마음이 성립되지 않는데
어찌 사랑만 혹은 미움만의 한쪽 마음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한 쪽 마음만은 있을 수 없으니,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랑도 없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미워함도 없다는 말씀이다.
작은 것은 큰 것이 있으니까 작은 것이니,
큰 것이 없으면 작은 것도 없다는 말이다.
부자(富者)가 있으니까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이니,
가난한 사람이 없으면 부자도 없다는 말이 된다.
꼴지가 없으면 일등도 없고, 일등이 없으면 꼴지도 없다.
편견(偏見)이란
두 쪽을 만들어 놓고 한쪽에 치우치는 것이니
두 쪽을 만들지 않았으면 치우칠 쪽이 어찌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차별심을 갖지 않으면 만법을 가지런히 볼 수 있다고 하여
만법제관(萬法齊觀)이라 하고,
게송 51)에서 민기소이(泯其所以) 불가방비(不可方比) 즉
그 까닭을 없애면 가히 비교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현 정치제도가
편당(偏黨)하지 않을 수 없는 제도이니
어찌 편당하는 근거를 없앨 수 있으며, 비교하는 마음을 지울 수 있을까?
사회제도와 정치제도 하에서는 가히 불가능한 말씀으로 이해되지만
불교적인 입장에서만 본다면 너무나 지당하신 말씀이다.
또 한편 대립관계에 있는 두 편이 서로 경쟁을 하니까
그 경쟁의 반사 이익,
즉 가격이 저렴해 진다든가, 품질이 더 좋아지는 예가 있지만,
경쟁이 없는 곳에서는
의욕을 잃기도 하고, 나태해지고, 일하기 싫어 게을러지는 사례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므로 대립적인 관계에서 경쟁을 하더라도,
그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불화(不和)를 화해(和解)시킬 수 있고,
대립적인 관계가 없는
만법제관(萬法齊觀)하는
평화로운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나태심(懶怠心)을
창조심(創造心)으로 전향(轉向)시킬 수 있는
정치와 사회제도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54 구경궁극(究竟窮極) 부존궤칙(不存軌則)
구경과 궁극에는 궤칙(軌則)이 존재하지 않는다.
경궁극(究竟窮極) 중
구경(究竟)은 ‘사리(事理)의 마지막,’
궁극(窮極)은 ‘가장 마지막’이니 같은 뜻을 반복하여
더 이상 높은 것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게송 52)에서 지동무동(止動無動)하여
일체 번뇌를 소멸하고 중생제도의 길로 나가고,
53) 양기불성(兩旣不成)에서 대립되는 양단(兩段)이 성립되지 않으니,
만법제관(萬法齊觀)하여
만법을 있는 그대로 편견(偏見) 없이 가지런히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니
사리(事理)의
가장 마지막인 구경(究竟)에 이르게 되니 궤칙(軌則),
즉 궤도(軌道)도 없고 법칙도 없다고 했다.
구경에는 결국 공성(空性)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공성은 형체(形體)도 없고 색깔도 없는 것이나
바람과 같이 움직이기도 하고 볼 수도 있는 것이라 없다고 할 수도 없고,
또 크다고 할 수도 작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며,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니
입을 열면 잘못이 된다고 할 정도이니 궤칙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일체법이
불법(佛法)인가 하면 불법(佛法)이 아니기도 하니
불법(佛法)이라 해도 틀릴 수 있고 아니라고 해도 틀릴 수 있으니
궤칙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니,
구경의 경지에서 궤칙이 있지 않다고 해도 사실 맞는 말은 아닌 것이다.
공성(空性)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하지만
불생불멸에서 생멸(生滅)이 일어나는 법이니
불생불멸이라고 규정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생멸(生滅)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세계라 하지만
불생불멸에서 나왔고,
또 불생불멸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생멸은 엄격히 현상세계만이라고 규정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다.
있고 없음의 사리를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그 이치를 깨달아야 할 것이며 사량(思量)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금강경(金剛經)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제7(第七)에서 말씀하시기를 :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須菩提言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 여래유소설법야 수보리언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何以故
여아해불소설의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역무유정법 여래가설 하이고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여래소설법 개불가취 불가설 비법 비비법 소이자하 일체현성 개이무위법 이유차별
게송 54)의 부존궤칙(不存軌則)과 금강경에서
일정(一定)한 법이 없다고 한 무유정법(無有 定法)은 같은 뜻이라고 생각된다.
55 계심평등(契心平等) 소작구식(所作俱息)
마음을 평등과 맺어서 일체 짓는 바를 쉬어라.
계심평등(契心平等)은 ‘마음을 평등하게 맺어라,’ 혹은 ‘맺으면’ 인데,
마음을 평등하게 맺는다는 뜻은 앞에서
양기불성(兩旣不成) 일하유이(一何有爾),
즉 ‘양쪽이 성립되지 않는데 어찌 하나가 있느냐,’고 한 단계에 이르면
사물을 잘못보아서 일으키는 편견(偏見)이 없으므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사물을 대할 때,
마음은 평등하여
만법(萬法)이 평등(平等)하게
마음에 와 닿아 연(緣)을 맺게 된다.
이렇게 될 때 계심평등(契心平等)이라 할 수 있다.
소작구식(所作俱息)의 소작은 조작(造作)하는 바인데,
말하자면 나와 남을 집착하여
남의 허물을 보고 그를 험담하거나 시기(猜忌) 질투(嫉妬)하여
일으키는 여러 가지 번뇌들이 모두 마음으로 조작하는 바이다.
그러하니
소작구식(所作俱息)은 이러한 편견에 의한 조작하는 바를
모두 쉬게 하라, 혹은 계심평등하면 조작하는 마음이
모두 쉬게 된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반대로 소작구식(所作俱息)하면
계심평등(契心平等)하게 된다고 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마음의 대상에 대해 조작하는 마음이 쉬어져야
일체를 평등하게
수용(受用)할 수 있는 계심평등(契心平等)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여하간
일체 사물을 평등하게 보고,
마음으로 조작하여 남을 험담하거나 시기 질투하는 행위는
모두 쉬게 하라는 말씀이고,
또 이 말씀은 남이 이것을 하던 저것을 하든
살펴보지도 말고, 잘하는가? 못하는가 알려고 하지도 말며,
자기가 해야 할 일만 열심히 하라는 말씀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56 호의정진(狐疑淨盡) 정신조직(正信調直)
심한 의심이 다 정화되면 바른 믿음이 조화(調和)롭게 하고 곧게 한다
호의(狐疑)의 호(狐)는 여우이고 의(疑)는 의심이니,
여우처럼 의심이 많다는 의미이니, 의심이 대단히 많은 것을 호의라고 한다.
이렇게 심한 의심의 예를 들어 보면,
‘내 것은 왜 저 사람 것보다 작을까?’,
‘저 사람은 어떻게 나보다 돈이 더 많을까?’,
‘저 사람은 어떻게 나보다 더 잘생겼을까?’ 등
남과 자기를 비교하여
남을 의심하는 생각을 이어가는 마음이다.
어떤 사람이 하는 사업이 잘 되었을 때,
그를 축하해 주기보다,
자기 일은 왜 이렇게 꼬이기만 하느냐고
의심하며 불만을 일으키는 마음이다.
이렇게 의심하는 마음은
항상 자기와 남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며 의심하기 때문에
그 의심은 그치지 않는다.
이렇게 의심을 일으키는 것은
소모적(消耗的)이고, 불만을 하기 위한 불만으로
마음의 갈등을 일으키고 스트레스로 심적 육체적 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정진(淨盡)은
이렇게 심한 의심을 정화(淨化)하여
그 의심이 다하면 혹은 끝나면 이니
깨끗하게 해서 더 이상 깨끗하게 할 것이 없는 것을 말함이니
의심하는 마음을 완전히 정화한 마음이다.
즉 의심하는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었을 때
바른 신심(信心)이 일어나고
그 신심은 일체를 조화롭게 보는 마음이고
왜곡(歪曲)되지 아니하고 곧은 마음이란 뜻이다.
조화(調和)로운 것은
내가 작으면 큰 것을 탓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와 조화롭게 보는 마음이고,
내가 추(麤)하면 정(精)한 것을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조화롭게 보는 마음이니,
자기가 상대보다 크든 작든
불만이 없고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직(直)은 곧다 혹은 정직하다는 뜻이니
마음에 일어나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고,
그 마음이 고르고 바르다는 의미가 된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심은
갈등을 일으키고,
갈등은 번뇌이니 그 번뇌를 정화하여
일상생활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갈등관계로 만들지 않기 위해
일체가 평등한 것임을 볼 줄 알면
상대와 조화롭게 대할 수 있고
또 모호하거나 왜곡된 표현이 아니라
곧은 마음에서 곧게 표현하라는 말씀이라고 해석된다.
이는 또 바른 신심(信心)을 가지고
항상 상대와 조화롭게 그리고 정직하게 대하려고 노력하여 가면
필경에는 모든 의심이 정화(淨化)되어 정화하려야
더 정화할 것이 없게 되어
적정(寂靜)한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호의정진(狐疑淨盡) 정신조직(正信調直)을 해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57 일체불유(一切不留) 무가기억(無可記憶)
일체에 머물지 아니하니 가히 새겨놓고 기억할 것이 없다.
일체(一切)는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모든 것’이라 생각한다.
간택(揀擇), 증애(憎愛), 순역(順逆), 위순(違順), 취사(取捨) 등
만사를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는 일체의 마음이다.
불유(不留)는
그러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머물음이 없다.
즉 일체만사를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의미이다.
무가기억(無可記憶)은
마음에 머물음이 없으니 기억될 것이 없다.
작은 것을 작다고 불만하지 않았으니
마음에 남은 것도 없고 기억할 것도 없게 되는 이치이다.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꽃과 크고 작은 꽃들이 모여
서로 상대를 차별하지 아니하고 그들과 대립하지 아니한다.
이러한
다양성이 오히려 저절로 그러한 자연이고 조화로워 아름답다.
어느 꽃이 더 좋고,
더 예쁘다는 차별심이 일어나지 않으니
생각할 것도 기억할 꽃도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전체의 꽃이 모두 평등하게 조화롭고 아름다울 뿐이다.
수많은 불법(佛法)이 그러하고,
세간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차별이 없고,
승(僧)과 속(俗)이 차별되지 아니하며,
부처와 중생이 차별되지 아니한다.
차별되지 않는다는 말이 다르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일체를 평등하게 대하므로서 조화롭고 아름다울 수 있고,
전체를 조화롭고 아름답게 볼 수 있을 때
다만 즐거울 뿐
개별적으로 특별히 차별해서 기억할 것도 마음속에 새길 것도 없게 된다는 말씀이다.
금강경(金剛經)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제4(第四)에서 말씀하시기를 :
復次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부차수보리 보살 어법 응무소주 행어보시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수보리 보살 응여시보시 부주어상 하이고 약보살 부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량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虛空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불야 세존 수보리 남서북방 사유상하허공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提 菩薩
가사량부 불야 세존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여시 불가사량 수보리 보살
但應如所敎住
단응여소교주
이 게송의 일체불유(一切不留)와 금강경의 응무소주(應無所住)는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된다.
58 허명자조(虛明自照) 불노심력(不勞心力)
텅 비어 밝게 스스로 비취니 애써 마음 쓸 일이 아니다.
일체불유(一切不留) 무가기억(無可記憶)
즉 일체에 머물지 아니하니 가히 새겨놓고 기억할 것이 없다.’ 고 한 것에서,
수많은 차별상 중에서
특별히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있고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머물음이 있는 것이고, 기억할 일이 있는 것이라,
그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수많은 차별상 중에서
어느 것에도 특별히 마음 가는 것이 없다면
머물음이 없는 것이요 기억할 것도 없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일체 머물음이 없을 때
마음은 허공(虛空)과 같이 텅 비어있게 된다.
그리고 텅 비어 있으니 장애가 없어
자성(自性)이 밝게 저절로 비춰지니
애써 마음 쓸 일이 없게 된다는 말씀이다.
모든 것은 자성이 알아서 다하니
수고스럽게 애쓸 일이 없게 된다는 뜻이고
또 노심(勞心)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의미도 있다.
위 게송 35)에서
‘임성합도(任性合道) 소요절뇌(逍遙絶惱)
자성에 맡기면 도와 합해져 소요(逍遙)자재하여 일체번뇌가 끊어진다.’ 라고 했는데
허명자조(虛明自照), 텅 비어서 밝게 저절로 비춰진다는 것은
임성합도(任性合道), 즉 성에 맡기면 도(道)에 합한다는 뜻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체를
본성에 맡김으로서
대도(大道)와 합하고, 대도에서 텅 비어
밝게 저절로 비춰보는 눈이 열리게 되기 때문이다.
59 비사량처(非思量處) 식정난측(識情難測)
생각으로 헤아릴 곳이 아니니 의식(意識)과 감정(感情)으로는 측량키 어렵다.
허명자조(虛明自照) 불노심력(不勞心力),
텅 비어 밝게 스스로 비취니 애써 마음 쓸 일이 아니다. 라고 하는 곳이
생각으로 헤아려서 알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의식이나 감정으로 측정하기도 어려운 곳이라는 뜻이다.
생각하고 재보고 저울질하는 것도 의식(意識)이 하는 것인데
이 의식이나 감정(感情)으로도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곳을 측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의식이나 감정은
우리들이 욕계(欲界)에서 살아가는 경험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욕계를 벗어난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곳을 사량(思量)하거나 측량할 수는 없는 일이다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곳은
일체 번뇌망상이 끊어진 적정(寂靜)한 곳에서
자성(自性)이 밝게 비춰지는 것이니
대각(大覺)을 이루어
지혜의 광명이 비춰지는 모습을 설명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대도(大道)가 있는 곳이 사량으로 알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의식이나 감정으로 측정할 수 있는 곳도 아니라는 말씀이니,
오직 깨달은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는 경지하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세속(世俗)에서
세속이 아닌 출세간(出世間)을,
출세간에서 출세간이 아닌 세간을,
형상(形相)에서 형상 아닌 여래를,
형상이 없는 여래가 형상이 없는 것이 아닌 형상을 보는 것이니
사량(思量)이나 감정(感情)으로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이 게송 59)에서
대각(大覺)을 성취하고 그를 묘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60 진여법계(眞如法界) 무타무자(無他無自)
진여법계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다.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곳은 자성(自性)이 밝혀진 공(空)이고,
이 자성의 자리가 바로 진여법계가 있는 자리이며,
진여법계에서는 자타(自他)가 있으면서도
자타가 없는 것을 보고 서로 함께 융화(融和)할 수 있는 자리이다.
무타무자(無他無自)라 함은
남도 없고 나도 없다는 말이나,
자(自)와 타(他)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를 고집하지 아니하니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타(自他)가
서로 자기가 자기를 고집하지 않을 때
융화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니,
자타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요,
주객(主客)이나 능소(能所)도
그와 같으니 일체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자기를 고집하지 아니하니
서로 평등하게 그리고 조화롭게, 아름답고 평화롭게 하나로 원융(圓融)하게 되는 것이다.
진여법계에서는 있음 속에서 없음을,
없음 속에서 있음을 보고 맛보는 것이며,
너에서 나를,
나에게서 너를 보고 느낄 수 있고,
열반에서 지옥중생을,
지옥중생이 열반을 보고 맛볼 수 있음이니
이를 참되고 여여한 세계라 하여 진여법계라 한다.
다만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여의면 진여법계에 임할 수 있다고 했다.
61 요급상응(要急相應) 유언불이(唯言不二)
급히 상응하고자 한다면 둘 아님을 말할 뿐이로다.
대도(大道)와 급히 상응하고자 한다면
오직 불이(不二)를 말할 뿐이다.
대도를 한 마디로 하려면 ‘불이(不二)’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 불이(不二)란 무엇인가?
불이(不二)란 ‘둘이 아니다.’이다. 둘이 아니란 무엇인가?
진망(眞妄), 선악(善惡), 장단(長短), 남녀(男女) 등
일체 상반(相反)되는 관계에 있는 양변(兩邊)은
겉으로 보기엔 다르지만
그 내면을 보면 같은 이치에 의해 존재함으로 둘이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또 둘이 아니라고 보면,
둘이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도 보이니
무엇이라 말로 형언할 수 없다는 의미도 있다.
진망(眞妄)의 진(眞)은 참된 것이고 망(妄)은 거짓된 것이니
언어 상으로만 보면 완전히 상반(相反)된 것이고 대립관계에 있다.
설사 진망은 상반(相反)된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망(妄)은 진(眞)이 있기 때문에
진이 아닌 것이 나온 것이요, 진(眞)은 망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진이 있어야 할 가치가 있음으로서
그에 미치지 못하는 망이 있는 가치가 있고,
망의 역할이 있음으로서 진의 역할도 있고,
진(眞)이 없다면 망(妄)도 없고 망(妄)이 없다면 진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진망이 평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역할은 완전히 상반(相反)적이다.
망(妄)이 다하면 진(眞)이 되고 진이 다하면 망이 되는 것이니
그 가치와 역할은 뚜렷한 대립적으로만 볼 수도 없고, 동등하다고만 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평등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는 어떤 지위에서
진망(眞妄)이 동시에 사라져서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룰 때 일체가 원융해져서
삼라만상과 하나 되는 극락의 대도(大道)에 진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선악(善惡)도 장단(長短)도 그와 같으며 남녀(男女)도 역시 그와 같다.
남녀(男女) 역시 그 형상과 성질이 달라
그 가치와 역할이 서로 상반(相反)되고 대립(對立)관계에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리고 오랜 역사 속에서 여자가 남자에 비해 열등한 대우를 받아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의 불이법문(不二法門)에 의하면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것도 아니요 우월한 것도 아니며,
남자가 여자보다 열등한 것도 우월한 것도 역시 아니다.
남녀 간에 사랑이 없으면 미움이 있을 수 없고,
또 미움이 없으면 사랑도 없는 것이며, 미움이 다하면 사랑이 되고,
사랑이 다하면 미움이 싹트는 것이다.
남녀가 하는 일의 모양은 다르지만
그 역할의 질적인 가치가 평등하게 취급되어 질 때
서로 다름 속에서
그 다름의 차별이 사라지고 조화의 극치인 원융을 이루어
자유와 평화, 그리고 극락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평화 속에서 서로의 다름을 존중할 수 있고 받아줄 수 있을 때
그 다름의 아름다움이 자라 빛을 발하게 됨으로서
서로 다름이 인식되지 아니하고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반면에
하나가 아닌 면도 있기에
둘이 아니면서도 하나도 아니어서
언어로는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불이(不二) 법문의 구경이 극락,
중도(中道) 혹은 대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대도(大道)가 무엇인가 간략히 대답하라고 하면
오직 불이(不二)라고 말할 뿐이라고 했다
62 불이개동(不二皆同) 무불포용(無不包容)
둘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다.
불이개동(不二皆同)이란
‘둘이 아니라 함은 모두 같다’는 뜻이다.
즉 곧은 것과 굽은 것이 그 모양은 상반(相反)되지만
‘둘이 아니고 모두 같다’라고 한 것이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곧은 것은 곧은 대로 굽은 것은 굽은 대로
그 가치가 있고 용도가 있으니
인격적인 면에서 보면 모두 같다는 말이다.
일체를 인격적으로 평등하다고 보게 되면
서로 상대를 존중하게 될 것이니
교류하지 못할 것이 없고,
수용하지 못할 것이 없으며,
포용(包容)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들어보면,
옛날에 흑백(黑白)의 인격에 우열(優劣)이 있다고 차별하던 시대에는
곧은 것은 인정하고 굽은 것은 인정하지 않는
이분법적(二分法的)인 사유(思惟)의 사조(思潮)가 지배적이었기에
이 불교의 불이(不二)법문의 진리는 인정될 수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인연으로
흑백의 인격에 차별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아직도 잠재해 있으니
서로 교류하기도 어렵고 수용할 수도 없으며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많은 장애가 아직 남아 있다.
양자(兩者) 간의
자유와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서로간의 인격 평등이 인식되고 생활화됨으로서
불이문(不二門)이 열리게 될 것이다.
불이문이 열림으로서
불이개동(不二皆同)이 될 수 있고,
불이개동(不二皆同)이 될 수 있을 때
무불포용(無不包容)이 될 것이다.
다양한 문화 인종 종교를 가진 사회에서
서로 다른 가운데서 다르지 않은 이치를 찾고,
그 인격을 서로 평등하다고 존중할 수 있을 때 신뢰가 성립되고,
그 신뢰 속에서 서로 교류할 수 있게 되어
신뢰는 더욱 쌓이게 될 것이다.
그 돈독한 신뢰 하에서 서로 수용하고 포용(包容)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될 것이다.
단체와 단체, 국가와 국가 간에 서로 다르지만
서로가 가진 가치 면에서 보면 둘이 다르지 않으니
그 인격을 서로 똑같이 평등하게 취급하면 불이개동(不二皆同)이 될 것이요,
서로 상대의 인격을 존중함으로서
서로 신뢰할 수 있게 되어 다방면으로 서로 교류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교류를 통해 신뢰는 더욱 쌓여져 서로 상대를 포용하지 못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무불포용(無不包容)이 될 것이다.
무불포용(無不包容)이 되면
조화(調和)의 극치를 이루어 원융무애(圓融無碍)하게 되어
양자(兩者)의 차별이 전혀 없는
하나가 되어 누구나 대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대도(大道)를 이루게 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의견을 다르게 하는 사람을 미워하기도 하고
멀리하려고 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면 서로 대립하고 투쟁하게 될 것이니
자유와 평화 그리고 대도와는 완전히 멀어지게 된다는 말씀이다.
상반(相反)된 의견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이해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종교 간에 서로 다르다고 해도,
인종 간에 서로 다르다고 해도,
현상은 비록 다를지라도
속을 보면 모두가 같은 이치에서 나온 것이고
평등한 인격체이니 서로 배척하거나 비방할 일이 아니라
그 가치를 인정하고 포용함으로서
상반(相反)된 양쪽이
상생(相生)될 수 있는 방법,
즉 함께 서로 상대를 살려내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63 시방지자(十方智者) 개입차종(皆入此宗)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은 모두 이 종지(宗旨)로 들어온다.
시방지자(十方智者) 개입차종(皆入此宗)의
시방지자(十方智者)란 이 법계에 있는 모든 깨달은 사람,
일체 번뇌와 집착을 소멸하고 공적한 가운데
자기의 이해(利害)관계를 떠난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증득한 사람,
혹은 이 법계의 모든 사리(事理)를 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모두가 이러한 종지(宗旨)에 들어온다는 말이다.
이러한 종지(宗旨)란
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불이개동(不二皆同) 무불포용(無不包容)이니,
어떠한 사람이나 물건을 만나도 못쓸 것을 가려내어
그 존재를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쓸 수 있는 것을 찾아 그 존재를 인정하여 주고
인격적으로 평등하게 봄으로서
동화(同化)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라는
불이법문(不二法門)를 종지로 삼는다는 말씀이다.
불이법문은
예로부터
시방(十方)에 모든 선지식(善知識)들께서 믿고 행하셨던 바이니
누구나 다 신봉(信奉)해야 할 보편적인 원칙이라고 주장하는 말씀이라고 이해된다.
64 종비촉연(宗非促延) 일념만년(一念萬年)
종지란 (시간적으로)짧거나 긴 것이 아니니 한 순간이 만년이니라.
촉(促)은 제촉할 ‘촉’이니 시간적으로 짧은 것을 의미하고,
연(延)은 끌 ‘연’이니 시간적으로 긴 것을 의미한다.
종비촉연(宗非促延)은
종지(宗旨)인 불이개동(不二皆同)은
시간적으로 짧고 긴 것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짧고 긴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니
일념(一念)이란 극히 짧은 한 순간이 만년(萬年)이라고 했다.
한 생각 순간에 만년의 종지를 꿰뚫어 본다는 뜻이다.
법성게에서 일념즉시(一念卽是) 무량겁(無量劫)이라 하여
한 생각 순간의 진리는
곧 무량겁의 진리이고,
무량원겁(無量遠劫) 즉일념(卽一念)이라고 하여
무량하게 먼 겁의 진리는 곧 이 한 순간의 진리라고 했다.
진리 즉 대도(大道)는
시간상으로 짧고 길다고 하는 것에도 불이문(不二門)이라는 것이다.
즉 짧고 긴 것은 분명히 다르지만
한 순간 속에 있는 대도(大道)는 무량겁에 있는 대도와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
아무리 짧은 한 순간이라도 작다고 할 수 없고,
아무리 긴 무량겁이라 할지라도 길다고 할 수 없다는 말씀이니
한 순간과 무량겁은 대도(大道)가 이어가는 것이니
동격(同格)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 순간의 대도가 쌓여서 무량겁이 될 수 있는 것이니,
무량겁에 대도와 한 순간의 대도가 다르지 않으면서도 같지 않은 것이다.
그러하니 짧고 긴 시간을 대도, 중도,
극락의 입장에서 보면 둘이 다르면서도 둘이 아니고,
둘이 아니면서 하나도 아닌 불이문(不二門)의 종지를 가진다.
중도(中道)와 극락의 대도(大道)는
시간적으로 짧고 긴 시간의 불이(不二)에 있다는 뜻이다.
65 무재부재(無在不在) 시방목전(十方目前)
(대도(大道)는)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시방이 눈앞에 있다.
게송 64) 종비촉연(宗非促延)
일념만년(一念萬年) 종지란
(시간적으로)짧거나 긴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니
한 순간이 만년이니라. 고 하여
시간의 중도성을 설하고,
본 게송 65) 무재부재(無在不在) 시방목전(十方目前)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시방이 눈앞에 있다. 라고 하여
공간의 중도성과 대도성을 설하고 있다.
무재부재(無在不在)는 ‘있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인데,
대도(大道)란 어느 곳에는 있고 어느 곳에는 없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니,
‘어디나 다 있다.’는 뜻이다. 어디에나 다 있으니 어느 시방에서든
바로 눈앞에 대도가 있다는 말이다.
한국에서 눈앞에 있는 대도와
미국이나 남미에서 눈앞에 있는 대도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의미가 된다.
대도는 어느 곳에는 있고 어느 곳에는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무재부재(無在不在)이기 때문이다.
이 원리에 의하면
내 눈앞에 있는 곳의 진리는 어느 곳에서라도 진리라는 말씀이 된다.
이것을 법성게에서는
일미진중(一微塵中) 함시방(含十方) 일체진중(一切塵中) 역여시(亦如是)라고 했다.
한 티끌 가운데에
시방세계의 진리가 포함되어 있고,
모든 티끌 각각에도
시방세계가 포함되어 있다고 했으니
‘진리는 어디에나 다 있다.’는 뜻이 된다.
내 눈앞의 감나무에서나 배나무 잎에서나
똑같은 시방세계의 진리가 함유되어 있으니,
어느 곳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에서나 잎에서
똑같은 시방법계의 진리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이다.
한 단풍잎에서 가을이 온 것을 알 수 있고,
한 새싹에서 봄소식을 들을 수 있으며,
한 모래알에서 지수화풍(地水火風)을,
한 티끌에서도 지수화풍을 볼 수 있으니,
지수화풍이 있고 없는 곳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다 있다는 대도의 원리이니,
어느 곳에서나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도
법계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니,
극락을 즐길 수 있는 대도는
어느 때 어느 곳에나 실재한다는 말씀도 된다.
66 극소동대(極小同大) 망절경계(忘絶境界)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서 그 경계가 끊어지다.
법성게에서
일미진중(一微塵中)함시방(含十方)이라 한 것을 표현된 바대로 보면
시방세계가 다 한 티끌 속에 포함된다고 하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려는 것일까?
일미진중(一微塵中),
즉 한 티끌 속에 있는 진리에는 함시방(含十方),
즉 시방법계의 진리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라고 해석하면,
한 티끌에서 볼 수 있는 진리는
시방세계에서 볼 수 있는 진리와 다를 수가 없다. 라는 말이 된다.
말하자면,
한 방울의 피가 가지고 있는 성분을 알면
몸 전체가 가지고 있는 조건과 상태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법성게의 이 말씀,
즉 일미진중(一微塵中) 함시방(含十方)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으면
극소동대(極小同大),
즉 ‘지극히 작은 것은 지극히 큰 것과 같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지극히 큰 것이 가지고 있는 진리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
오온(五蘊)과 같은 진리 면에서는 같다는 말씀이다.
외모(外貌)상으로 지극히 작다는 경계와 지극히 크다는 경계는
실질적인 의미가 없으니 작고 크다는 경계를 잊어버려라,
하지 말라, 혹은 끊으라는 말씀이 망절경계(忘絶境界)이다.
극소동대(極小同大)란 마음의 세계를 말하고 있다.
외모 상으로 아무리 크거나 작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근본적인 마음은
외모에 상관없이 누구나 같다고 하는 것이 극소동대(極小同大)의 가르침이다.
몸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지극히 작아 바늘 끝도 찌를 수 없을 정도로
막힌 사람이 있는가하면,
몸은 비록 작지만
그의 마음은 하늘을 덮고도 남을 수 있으니
그 마음의 경계를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나,
모든 업(業)의 장애를 소멸한 본심(本心)의 입장에서는
크고 작은 외모의 형체와는 전혀 상관없이
만법(萬法)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에서 모두 같다는 말씀이다.
대도(大道)는
곧 우리들의 마음에 있으니
지금의 마음과 대도의 마음은 조금도 차별이 없는 것이니
현재의 모습이나 마음에 상관하지 말고
대도와 상응(相應)하게 하라는 말씀이라고 해석한다.
67 극대동소(極大同小) 불견변표(不見邊表)
지극히 큰 것이 작은 것과 같으니 그 표면의 변두리를 보지 말라.
대도(大道)는
지극히 큰 것에 있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작은 것에 있는 것과 같다는 의미는
법성게에서 일체진중(一切塵中) 역여시(亦如是)
일체 티끌 중에 시방법계의 진리가 함유(含有)되어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먼저 지극히 크다고 하는 것은
미세한 티끌들이 모여서 큰 것이 된 것이니
티끌을 떠나 큰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하니 큰 것의 본질은 티끌의 본질과 다를 수가 없다.
그러므로 크고 작은 표면상의 둘레에 개의치 말고 보려고 하지도 말라는 말씀이다.
이 게송은 앞 게송 66)과 같은 내용을 설하고 있다.
68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다.
앞 게송 66)에서 극히 작은 것이 극히 큰 것과 같다고 하여
극소동대(極小同大)라 하고,
67)에서 극히 큰 것은 극히 작은 것과 같다고 하여
극대동소(極大同小)라고 했다.
여기에서, 지극히 작은 것은
거의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무(無)’라고 할 수 있고,
지극히 큰 것은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유(有)이다.
극소동대(極小同大)에서 극소(極小)는 곧 극대(極大)이고,
극대동소(極大同小)에서 극대(極大)는 곧 극소(極小)라고 말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극소(極小)를 무(無)로 바꾸어 놓으면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가 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라고 하여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반야심경에서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하여
같은 뜻을 색(色)과 공(空)으로 설하고 있다.
그 동안에 스님은
‘지혜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설해왔다.
우리들의 심성(心性)에는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심상(心相)이 있는데
그 심상은 사람의 습성(習性)에 의해 형성된 마음의 상이다.
이 심상은 자기의 습성에 의해 애정이나
사물을 보는 줄을 알지 못하고 하는 행위에 의해
현실과 괴리(乖離)가 생기는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되고,
또 이것이 불행과 불화의 원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려왔다.
이 논리에 의하면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봤다고는 하지만 지나 놓고 보면
오인(誤認)이었던 것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들의 심상(心相)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니
심상을 청정히 하면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혜의 문이 열린다고 했다.
늘 이 게송에서는
유(有)를 무(無)로,
무(無)를 유(有)로 볼 수 있는 지혜를
반야(般若)라고 하는데
이 지혜가 있어야 함을 설하고 있다.
즉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볼 수 있는 지혜보다 무척 높은 단수라고 할 수 있다.
유무(有無)의 이론은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는
모두 연기법(緣起法)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에서 정의(定意)된다.
어떠한 존재도
무엇과 인연(因緣)되지 아니하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이치가 무(無)의 논리이고,
인연이 시작되기 전(前)이나 인연이 다해 인연들이
모두 흩어진 상태를 무(無)라고 했다.
그리고 인연이 있으면
반드시 무엇인가 생성(生成)되는 이치가 유(有)의 논리이다.
또 유(有)에서 무(無)를
그리고 무에서 유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을
지혜라고 하는데 반야경에서는 이를 반야(般若)라고 했다.
어떠한 사물(事物)이나 애정(愛情), 고통이나 어려움도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이므로 인연을 따라 추적(追跡)해 보면
반드시 그 원인이 있음을 찾을 수 있다는 말씀이고,
그 구경(究竟)의 원인은
물질적인 요소가 아닌 공(空)한 것이고
무(無)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무(無)에서 인연들을 다시 모아 결합하면
반드시 새로운 사물이나 애정, 혹은 고통 없는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러하기에 유(有)를 보면서
그 유를 이루게 된 연을 볼 때 연들은
그 유가 아니고,
연(緣)들이 요소로 있을 때는 무이나
이들이 결집될 때는 유(有)가 되는 것이니 무가 무 아닌 이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내 앞에 한 컵이 있으니 이 컵은 유(有)이다.
이 유를 유가 아니라고 보는 것은 이 컵이
어떤 사람의 의욕과 기술에 의해서
어떠한 재료로 어떠한 공정으로 만들어졌다고 보면
그 재료는 물질이지만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루어 졌다고 보면
그도 공(空)해지고 무(無)가 되는 것이니,
이렇게 보는 것을 유(有)에서 무(無)를 보는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또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어떤 기공(技工)이
어떤 재료를 모아
일정한 공정을 거쳐
상품(商品)을 만들어 시장에 공급한다면
이 사람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니,
이 사람은 무에서 유를 볼 수 있는 지혜가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등
모든 무(無) 자 돌림은
유에서 유를 이루게 된 연을 모두 돌려보내고 나면
무만이 남는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어떠한 것도 그들의 인연이 영원한 것은 없으니
집착을 하지 말라.
집착을 하면 곧 괴로움이 따르는 법이다.
그리고 또 어떠한 것도
연의 이치를 따라 재구성할 수 없는 것은 없으니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법칙이 게송
68)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에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필요에 응해 해체할 수도 있고 생기(生起)할 수도 있다는 진리다.
그리고 대도(大道)인 극락(極樂)은
유(有)에도 무(無)에도 공히 존재하는 것이니
유무(有無)를 관철하기도 하고 가능하게 하기도 하는 것이니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힘이다.
극락의 이치가 이러하니
극락은 있고 없음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 있지만,
없다고 보는 사람에게는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즉 극빈(極貧)한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
69 약불여차(若不如此) 필불수수(必不須守)
만약 이와 같지 않으면 반드시 모름지기 지킬 것이 아니니라.
유(有)가 무(無)이고, 무(無)가 유(有)라고
볼 수 있는 지혜가 아니라면
그런 이치는 지켜서 안 된다는 말씀이니 반드시 그와 같이 지킬 것을 강조하는 게송이다.
유(有)가 무(無)이고,
무(無)가 유(有)라고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으려면,
어떠한 것에도 탐욕이나 애욕(愛慾)이 전혀 없어야하고,
사리(事理)에 밝아 무명(無明)이 없어야만
유(有)에도 집착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무(無)에도 집착이 없어 유무에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유무에 자유로울 때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가 그의 필요에 응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이는
유무(有無)의 중도를 설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즉 유에 대한 편견(偏見)도,
무에 대한 편견도 없는 마음이라야 필요에 응해
유무에 자재로울 수 있고,
자재로울 때 대도(大道)의 원리에 저절로 순응하게 된다는 뜻도 있는 것이다.
70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다.
이는
법성게의 일즉일체(一卽一切) 다즉일(多卽一)과 같은 뜻이다.
일즉(一卽)의 일(一)은 전체를 하나로 본 일(一)이고
일체(一切)는 전체를 하나로 볼 때
그 하나를 구성하는 모든 낱낱 개체의 합을 의미하니,
일체(一切)는 전체 가운데 있는 모든 개체를 의미한다.
그러하니 일즉일체(一卽一切)는
전체로서의 하나는 그를 구성하는 모든 개체의 합이라고 하는 것이고,
일체즉일(一切卽一)은
모든 개체의 합은 전체로서의 하나이다.
즉 개체의 합은 전체인 하나가 되고,
전체로서의 하나는 그 속의 개체의 합이다가 된다.
이 법계가
일즉(一卽)의 일(一)이 라면,
이 법계에 존재하는 일체 중생이 일체(一切)가 되니
‘일즉일체(一卽一切)’라는 어구가 성립될 수 있고,
모든 중생의 합이
곧 법계가 되는 것이므로 일체즉일(一切卽一)이 된다는 말씀이다.
이 게송이 시사(示唆)하고자 하는 바는
전체와 전체를 구성하는 개체와의 관계가
중도(中道)를 이룰 때 대도(大道)를 성취할 수 있으나,
독재(獨裁)정치 하에서와 같이
전체의 변(邊)에 치우쳐
개체의 자유가 훼손되거나,
개인의 인권을
전체인 국가의 이익보다 우선하는 정치체제 하에서와 같이
개체의 변(邊)에 치우쳐
전체의 자유에 훼손이 일어나게 되면
개체(個體)에 내재한 요소와 운행의 이치에 괴각(乖角)이 일어나
중도(中道)를 잃게 되고,
전체와 개체에 병(病)이 생기고 심하면 멸(滅)한다는 뜻이 된다.
또 전체와 개체와의 중도를 바르게 유지할 수 있을 때
전체와 개체는 조화(調和)를 이루고 원융하게 되어
전체와 개체를 분별할 수 없는 하나가 되어
대도인 극락를 누리게 된다는 말씀으로도 이해된다.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은 가정 사회 기업 정치 체제와 운영을 위한 지침으로
전체와 개체와의 중도를 선언하는 불이(不二)사상이다.
71 단능여시(但能如是) 하려불필(何慮不畢)
다만 능히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어찌 마치지 못하였음을 염려하랴.
단능여시(但能如是)의 여시(如是)는 이와 같이 인데,
이와 같이는 게송 68)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
즉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다. 와
70)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
즉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다. 를
능히 이해하고 이와 같이 실천하고 있다면,
하려불필(何慮不畢)의 필(畢)은 마칠 ‘필’ 자이니 진리를 깨달아
유와 무(有無)나 일(一)과 일체(一切)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불이(不二)임을 통달하지 못할까 염려할 것이 없다는 말씀이다.
즉 그와 같이 실천하면
어느 때인가는 반드시 허명자조(虛明自照)하여져
유와 무(有無)가 원융하고
일(一)과 일체(一切)도 원융하게 되어
구경의 극락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바른 궤도에 서 있으면 바른 궤도로 가게 될 것이요,
바른 궤도로 가고 있으면 어느 때인가는
그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니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미리부터 염려하면
오히려 가는 길에 장애가 된다는 말씀이다.
72 신심불이(信心不二) 불이신심(不二信心)
믿음과 마음은 둘이 아니요,
둘 아닌 것이 믿을 신(信)과 마음 심(心)이다.
믿을 신(信), 무엇이 믿는가?
마음이 믿으므로 믿는 마음이다.
믿는 대상은 무엇인가?
연기(緣起), 중도(中道),
지도(至道), 지복(至福), 불생불멸 등을 믿는다.
연기, 중도, 지도, 지복, 불생불멸은 어디에 있는가?
내 마음에 있다.
그러면 믿는 내 마음이 연기하는 내 마음을 믿는 것인가?
그렇다. 내 믿는 마음인 능(能)이
그 믿는 대상으로서의 소(所)인 연기하는 마음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마음이
그 대상으로 연기하는 마음,
중도적인 마음,
불생불멸하는 마음을 믿는 것이니,
이들은
능소(能所)의 면에서 보면 다르지만
한 마음인 일심(一心)에서 나오는 것이니
둘이면서도 다르지 않은 것이 진리이다.
이 진리를 신심불이(信心不二)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들,
즉 믿는 마음과 그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마음은
서로 다르면서도 둘이 아닌
신심(信心)으로 귀결(歸結)된다고 하여
불이신심(不二信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믿는 마음과 믿는 마음의 대상인 연기에 괴리(乖離)가 생기면
연기에 대한 믿음이 성립될 수 없으니
부처님의 근본사상에 대한 신심불이(信心不二)가 성립할 수 없다.
그러나 연기에 대한 믿음에 괴리가 일어나지도 않고
의심이 없다면 연기를 보는 마음과
연기를 대상으로 믿는 마음은
괴리(乖離)가 생기지 않으니
서로 다르지 않다고 하여 신심불이(信心不二)라고 했다.
그리고 또 연기를 보는 마음과 연기를 믿는 마음은
서로 다르지만 연기를 보는 마음이 연기를 믿는다면
연기를 보는 마음과 연기를 믿는 마음은 하나로 귀결(歸結)되어
조화를 이루고 원융해져서
한마음이 될 것이니
이 귀결된 마음은 하나라고 할 것도 없는
하나의 신심(信心)이니,
이를 불이신심(不二信心)이라 했다.
73 언어도단(言語道斷) 비거래금(非去來今)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과거 미래 현재가 아니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이란
말이나 단어의 길이 끊어졌다 인데,
이 뜻은 앞에서 설한
허명자조(虛明自照),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 등에서 설한 불이(不二) 법문은
이 자연의 이치가 둘이면서도 둘이 아니고,
둘이 아니면서도 하나도 아니므로
자연의 궁극의 진리는 언어(言語)의 길이 끊어졌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비거래금(非去來今)이란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앞에서 설한 게송
64) 종비촉연(宗非促延) 일념만년(一念萬年)
즉 종지란 (시간적으로)짧거나 긴 것이 아니니
한 순간이 만년이라고 한 뜻과 같은 맥락에 있는 말씀이다.
대도(大道)는
시간적으로 짧고 긴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니
한 생각이라는 짧은 순간의 대도의 원리는
만년(萬年)의 대도(大道)의 원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니,
이 일념(一念)과 하나 된 만년(萬年)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가 일념(一念)에 집중된 삼매(三昧)에서는
만년(萬年)이 일념 하에 있으니,
과거, 현재, 미래의 분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비거래금(非去來今)이라 했다.
즉 거(去)는 과거, 래(來)는 미래, 금(今)은
지금이니 과거 현재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니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즉 의식(意識)으로 분별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무리 긴 시간의 일이라도 과거, 현재, 미래가 분별되지 않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금강경 제18품 마지막 부분에
佛告須菩提 爾所國土中 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불고수보리 이소국토중 소유중생 약간종심 여래실지 하이고 여래설제심 개위비심
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시명위심 소이자아 수보리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에서 설하시는 ‘마음’은
우리들이 알고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하신 것에서
우리는 일념만년(一念萬年)이나 비거래금(非去來今)을
우리의 의식으로 보고 사량하는 마음의 차원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한 것이 아닐까?
이 우주에
무시이래로 이미 있었고 우리는 끊임없이
그 진리를 말과 글로 표현하려고 하지만
그 표현들이 진리자체는 될 수 없다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