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한배달 2001년 5월호 Click here 일제의 부천 지명왜곡과 쇠말뚝 Click here 문예진흥원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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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
일제의 '쇠말뚝 풍수침략'은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충남 천안군 독립기념관 제3전시실에 전시중이던 일제의 풍수침략 쇠말뚝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어떤 지식인들은 일제의 쇠말뚝을 풍수침략으로 보는 건 자기 비하요 근거없는 낭설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과연 그런가. 전국에 산재한 쇠말뚝 현장을 취재해 보았더니…. 김두규 전주 우석대 교수·풍수학 안영배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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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사회 지도층이나 학계의 원로일수록 더욱 그렇다고 한다. 이들의 발언은 일반인의 그것보다도 그 파급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8·15 광복 54주년을 맞아 요즘 입방아에 오르고 있는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씨에게도 적용되는 듯하다. 역사에 관심 많은 이들로부터 일정 부분 인정과 사랑을 받고 있는 이이화씨는 자신의 최근 저서 ‘역사풍속 기행’ 중 첫머리인 ‘풍수설’에서 일제의 쇠말뚝이 풍수 침략이었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낭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파문을 일으켰던 것.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제시기 일본사람들은 우리나라 산수의 기를 꺾어 인물의 배출을 막으려고 산마루 등 요지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말이 전해졌다. 그래서 이를 믿는 사람들이 쇠말뚝을 뽑아내는 일에 나섰다. 한데 이 말은 이여송(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의 경우처럼 근거가 없다. 일제 당국은 개항 이후 우리나라의 지도· 해도(海圖)를 작성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들은 지도작성의 과정에서 산마루에 쇠말뚝을 박아 표지로 삼았던 것이다. 이는 어느 일본인 개인의 짓이거나 풍수쟁이들이 엉뚱한 소문을 퍼뜨린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장은 각 언론보도를 통해 확산됨으로써 적잖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의 유왕기 연구위원은 이씨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위치 표시용 쇠말뚝은 바위에 20~30cm 정도면 충분하며 (풍수침략용 쇠말뚝처럼) 1m 이상 박지는 않는다. 일본은 한국침략을 위해 역사 지리 풍수 등을 열심히 연구했다. 침략 후에는 모든 관사를 명당자리에 지었다”(‘동아일보’ 99년 6월7일자 기고문)고 반박했다.
또 10여년 전부터 일제가 박은 풍수침략용 쇠말뚝을 제거하는 일을 해오던 소윤하씨 (민족정기선양사업단)는 “현장 탐사를 해보지 않은 책방 서생의 일방적 편견”이라며 이씨를 강하게 비난했다. 소씨는 “일본인들이 측량용으로 표시한 것으로 의심되는 쇠말뚝도 없지 않겠지만, 대부분 일제가 풍수침략용으로 박아놓은 쇠말뚝임이 분명함은 현장이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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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에서 사라진 쇠말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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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이화씨의 주장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시사월간지 ‘월간조선’(95년 10월호)은 ‘김영삼 정부는 風水정권인가?’라는 제목으로 쇠말뚝의 존재 의미를 부정했다.
‘월간조선’은 95년 당시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쇠말뚝 제거사업과 일제가 개악한 고유지명 찾기 등 정부 주도로 벌이는 민족정기회복사업을 비난했다. 이 기사는 “주민들이 박은 측량용 대삼각점을 일제가 혈을 지르기 위해 박은 쇠말뚝으로 오해했다”고 밝히는 이봉득씨(95년 당시 78세·일제시대 일본인 측량기사를 따라다녔다고 함)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김영삼 정부가 풍수적 매카시즘으로 국민을 선동했다”고 주장했다.
‘월간조선’은 또 독립기념관 제3전시관(일제침략관)에 전시중이던 쇠말뚝(서울 북한산 백운대에서 발견)도 일제가 풍수침략의 목적으로 박았음을 입증할 만한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 주장 때문이었던지 독립기념관에 전시되던 쇠말뚝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져버렸고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지난 7월1일 독립기념관 관계자에게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특별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더 이상 쇠말뚝을 전시할 계획 자체가 없다”고만 밝혔다.
일제의 풍수침략 상징으로 소개되던 쇠말뚝이 독립기념관에서 사라진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문제의 쇠말뚝은 서경대 서길수 교수(경제사)가 여러 사람과 힘을 합쳐 뽑은 것이다. 서교수는 “백운대 정수리 바위 위에 뚫려 있는 22개의 구멍을 관찰해보면 도저히 방향 표시나 측량용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정수리 바위에서 정동쪽인 계곡에도 쇠말뚝이 5개 박혀 있었는데 이곳은 삼각산의 명치 끝에 해당하는 곳으로 계곡 속에 감춰져 있는 쇠말뚝 역시 방향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밝혔다. 말하자면 일제의 풍수침략용 쇠말뚝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일제시절 박은 쇠말뚝의 경우 ‘월간조선’의 주장처럼 ‘합리적 근거’에 의해 풍수침략용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측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풍수학이 조선시대와 달리 학문적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현재의 풍토에서, 풍수학적 용어를 동원해 쇠말뚝에 대해 설명한다 하더라도 그 역시 ‘비과학적’인 태도라고 매도당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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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량용인가 풍수침략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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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하더라도 이이화씨나 ‘월간조선’이 단정하듯이 모든 쇠말뚝이 측량 표지용이라고 하는 근거도 역시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오히려 일본인 학자들이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대표적인 이가 현재 일본 오사카 시립대학교 문학부의 노자키 미츠히코 교수(野崎充彦, 조선문학 전공). 일본인이 박았다는 쇠말뚝에 대한 연구 및 한국의 풍수지리에 대한 연구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의 풍수사들’이라는 저서(1994년)까지 낼 정도로 한국통인 그는 쇠말뚝에 대해 이씨처럼 그렇게 단정적이지 않았다.
지난 6월28일 국제전화로 접촉(김두규:노자키)한 결과 노자키 교수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박았다는 쇠말뚝에 대한 연구는 현재 ‘중단된 상태’이다”라고 밝혔다. 연구가 중단된 이유를 물었으나 그는 매우 조심스러워하며 뚜렷이 밝히지 않았다. 아마도 일본인들이 쇠말뚝을 박지 않았다는 결론 때문이 아니라 물증이 없기 때문인 듯 싶었다.
그러나 쇠말뚝이 일제의 풍수침략용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단서는 있다. 측량용 쇠말뚝과 풍수침략용 쇠말뚝은 그 생김새나 사용 방법이 다르다는 점이다. 토지측량이 전공인 전북대학교 토목환경공학부 조기성교수의 말.
“지형 측정을 위해 삼각측량(대삼각지점)을 할 때 산 정상 근처에 조표(造表)를 만드는 과정에서 망루를 고정시키기 위해 큰 못이나 쇠말뚝을 박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쇠말뚝 끝에 고리가 있거나 표석(標石)을 중심으로 빙 둘러 말뚝을 박는다. 최근에 발견됐다고 신고되는 쇠말뚝과는 모양이 전혀 다르다.”
공무원(충북 단양군청 지적과) 신분으로 주위에는 향토사학자로 더 잘 알려진 윤수경씨(尹洙慶·51) 역시 측량용과는 거리가 먼 쇠말뚝이 너무나 많이 발견된다고 말한다. 그는 10여년 전부터 단양군 여기저기에 박혀 있다는 쇠말뚝 현장들을 찾아다녔다. 그 결과 일제 때 일본인들이 쇠말뚝을 박았다는 곳을 무려 81개소나 찾아냈다.
윤씨는 다른 지역보다 단양 지역에 유난히 쇠말뚝이 많이 박혀 있는 것은, 이곳이 예로부터 명승지로 알려진 곳이라 일본인들이 더욱더 지맥(地脈)을 차단하려 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윤씨는 혹시 쇠말뚝이 박힌 장소들이 ‘측량 삼각점’은 아닌가 하여, 군청 지적과 직원들의 도움을 구해 측량 삼각점과 대조해 보았다. 그 결과 쇠말뚝의 위치가 측량 삼각점의 위치와는 전혀 맞지 않음을 밝혀냈던 것.
게다가 윤씨는 단양군수의 결재를 받아 작년 7월4일부터 9월2일까지 무려 55일 동안 현장답사한 결과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쇠말뚝이 박힌 지점들을 정밀지도에 꼼꼼히 표시하면서 그것을 풍수학에서 중요시 하는 지세도(地勢圖)에 비교해본 결과, 쇠말뚝이 박힌 지점들이 대개 풍수상의 중요 혈처(穴處)였다. 예컨대 마을이나 어떤 지역을 인체로 비유할 때 눈, 코, 목 등과 같은 중요 부위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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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는 조선의 기층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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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단양군 영춘면 상1리에서 뽑은 세개의 쇠말뚝이다. 쇠말뚝은 ‘영구입수형(靈龜入水形:물로 들어가려는 신령스러운 거북)’이라는 뛰어난 명당터의 두 눈과 정수리에 꽂혀 있었다.
이런 사례는 쇠말뚝을 땅의 중요한 부분에 박아 지기(地氣)를 훼손함으로써 그 땅에 사는 사람 역시 힘을 못쓰게 한다는 논리가 개입돼 있다.
풍수지리학에서는 땅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며, 자연(땅)은 인간에 대해 1 대 1로 대응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땅에 있는 석맥(石脈)은 인간의 뼈에, 샘과 하천은 핏줄에, 흙은 살과 피부에, 초목은 모발에 비유하는 식이다. 이렇게 자연을 신체에 비유하는 것은 동양의학인 한의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신체의 경락(經絡)은 대지 위에 흐르는 강과 하천에 해당하고, 신체 곳곳에 있는 혈(穴:침자리)은 자연의 특정 지점을 본딴 것이다.
인간과 땅이 정확하게 1 대 1 대응한다는 관념은 동아시아의 오래된 사상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고유 사상 혹은 기층 신앙은 서구의 심리학자 융(Jung)이 말하는 ‘집단무의식’ 형태로 다음 세대로 계속 전이돼 왔다. 그리하여 땅이 병들면 인간이 병들고, 지맥을 자르면 당연히 사람의 맥도 잘리게 돼 재앙이 따른다는 논리는 한국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민족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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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풍수침략은 계획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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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조선 민중의 기층사상으로 자리잡은 풍수지리설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1931년 조선 총독부의 촉탁으로 ‘조선의 풍수’를 쓴 무라야마 지준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 문화의 이면적·근본적인 현상의 하나가 풍수라는 것이다. 표면적인 문화 현상만을 가지고 한국 문화를 운운하는 많은 사람들, 소위 새시대 사람들 가운데는 구시대의 천한 풍습, 문맹자들 사이에서만 지지된 미신이라 하여, 이것을 한국 문화의 하나로 추가하기조차 꺼리는 자가 있다.
…그렇지만 이 풍수가 적어도 십수세기란 오랜 기간 한국 민속신앙 체계에서 그 지위를 점해 왔고, 고려를 거쳐 이조에서도 반도 어디를 가나 믿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로 일반에 보급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므로 타문화에 비해 그 지지의 강함과 폭이 넓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풍수는 한반도에서 생활해온 사람들의 생활 이상, 즉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 하는 사상과 노력을 여실하게 이야기 해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서경대학교 서길수 교수는 “조선총독부는 관권을 총동원해 전국 각지의 풍수지리설에 대한 우리 국민 감정을 조사한 뒤, 제국주의 침략 형태의 하나로 풍수침략을 자행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서교수 자신이 85년부터 10여년간 전국에 걸쳐 맥을 잘랐거나 쇠말뚝을 박은 사례들을 현장 조사한 결과 얻어진 결론이라는 것. 그에 의하면 풍수침략 사례로 154건을 수집했는데, 60여건이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지맥을 잘랐다는 사례였고, 40여건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잘랐다는 사례였다. 모두 조선에 인물이 나지 못하도록 맥을 끊었다는 제보들이었다. 서교수는 자신의 최근 논문 ‘일제의 풍수침략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인들의 풍수적 정서를 역이용해 우리나라 국민에게 패배의식을 심어주려고 했던 것이 바로 전국 산천의 명당 자리에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지기(地氣)를 끊어버리는 일이었다.
풍수지리학을 이용해 우리 국민들로 하여금 ‘이제는 장수가 나지 않는다’ ‘큰 인물을 기대할 수가 없다’ ‘명산의 혈(穴)을 다 끊어버렸다’는 등 자학과 패배의 소리를 내도록 몰래 손댄 것이 풍수침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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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한 풍수침략 현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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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와 같은 풍수침략 현장은 지금도 전국에서 발견되고 있다. 다음 몇가지 사례는 직접 현장 탐사한 결과들이다.
95년 전북 완주군 고산면 소향리에서 두 개의 쇠말뚝이 발견된 적이 있다. 당시 쇠말뚝 제거작업 현장에 있었던 고산면사무소 총무계 윤재규씨는 “쇠말뚝의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그 당시 설왕설래만 했을 뿐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은연중에 일본 사람이 박은 것으로 생각했다”라고 말한다.
현장 탐사한 결과 쇠말뚝이 박힌 지점을 산 아래서 보면 용의 뒷목에 해당되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그 아래에 ‘용바우’라는 지명이 있고 보면 예부터 사람들이 이곳을 용의 형상에 비유했음직했다.
목 뒤에 침을 놓는 자리에 ‘완골(完骨)’이란 혈이 있는데, 목뒤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점에 위치한다. 그런데 완주군 고산면 동상산 능선 끝 부분에 박힌 이 쇠말뚝 자리가 인체에 비유하면 완골혈에 해당한다. 석맥(石脈)으로 이어지는 산 능선에 좌우 대칭으로 쇠말뚝을 박아 놓았던 것이다.
경상·전라·충청 3도의 지기를 끊어버리기 위한 쇠말뚝 자리도 있다. 바로 추풍령이 있는 곳이다. 차를 타고 추풍령을 지날 때 주변 산하와 찻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개 어느 지점에서 아주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서울 부산을 잇는 고속도로, 철도, 그리고 국도가 불과 수미터 간격으로 좌우로 밀착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해 이곳에서 여러 도로가 한곳으로 몰릴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전쟁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보병에 주로 의지하였던 옛날에는 이곳이 천연의 요로가 될 수 있었겠지만, 공중전이 발달된 현 시대에는 대단히 취약한 지점이 될 수도 있다. 작은 폭탄 몇 개만으로도 이곳에 밀집해 달리는 고속도로, 철로, 국도를 한번에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현재 이곳은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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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령의 쇠말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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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추풍령은 예나 지금이나 지리상 한반도의 중요한 지점이 된다. 충북 영동군 추풍령 면소재지에 거주하는 최왕호씨(68·약사)는 어린 시절 산에 놀러가서 쇠말뚝을 본 기억이 있다. 그는 그것을 말 매던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른들로부터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혈을 끊는다고 박아놓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그곳은 산 정상 아래 가파르게 암석들이 이어져 말을 매어 놓을 수 없는 곳이었고 토지 측량을 위해 박아 놓은 것으로는 더더욱 볼 수 없었다.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소재지 뒷산인 운수봉에서 최씨 일행이 발견한 쇠말뚝은 그 현장만 보면 별것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살펴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곳은 백두대간이 뻗어가면서 고개를 만드는 곳으로 표시돼 있다. 이렇게 산이 뻗어 내려가다가 살짝 고개를 만드는 곳을 풍수용어상 ‘과협(過峽)’이라고 부르는데, 땅의 지기를 살피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고무호스로 꽃밭에 물을 줄 때 물이 좀더 멀리, 세게 나가도록 고무호스를 손으로 눌러 잘록하게 만드는데 지기의 흐름에서 과협처는 바로 그와 같은 역할을 한다. 추풍령은 백두산 정기가 흘러오다가 하삼도(下三道), 즉 경상·충청·전라 3개 도에 지기를 제대로 뿜어 주기 위한 과협처다. 따라서 풍수상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쇠말뚝이 발견된 운수봉은 추풍령면 소재지의 주산이다. 주산 가운데 한줄기 능선이 강한 석맥(石脈)으로 형성되면서 추풍령중학교를 통과해 면까지 내려오다가 잦아든다. 쇠말뚝은 바로 운수봉에서 면소재지로 이어지는, 석맥으로 형성된 능선 위에 박혀 있었다.
이것을 풍수적으로 축소해 해석하면 추풍령면으로 흘러가는 지맥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백두대간의 가장 큰 과협처에 해당하는 추풍령면의 쇠말뚝은 바람이 팽팽한 풍선에 바늘을 꽂아 놓은 형상으로 비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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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의 맥에 박아놓은 쇠말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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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학상 제왕(帝王)을 낳을 만한 귀격의 산에 박아 놓은 쇠말뚝도 있다. 경북 구미의 천생산(天生山)이 바로 그 경우다. 천생산은 말 그대로 하늘이 낳은 산이라는 뜻을 가진 경북의 영산(靈山)이다.
서울에서 경부선을 타고 구미시를 지나다 보면 멀리 정면으로 특이한 산 하나가 보인다. 산정상이 일자 (一字) 모양인 장방형 산이다. 이 일자(一字) 모양의 정상이 높은 곳에 하나, 낮은 곳에 하나 해서 두 개가 이어져 마치 ㄴ(니은) 자(字)처럼 보이기도 한다.
풍수에서는 이렇게 특이한 산을 ‘일자문성(一字文星)’이라 하여 대단한 귀격(貴格)으로 여긴다. 풍수지리의 고전으로 통용되는 ‘인자수지(人子須知)’(1564년)에는 일자문성의 산을 가리켜 ‘복두(메頭: 모자)’라고 이름짓고 왕후가 나올 산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천생산은 바로 ‘인자수지’에 그려진 모델과 똑같다. 풍수학자 이몽일박사는 천생산을 이렇게 말한다.
“남쪽 모퉁이에 있는 미륵암에 올라서면 서쪽으로는 낙동강과 금오산이 한눈에 들어오며, 북쪽으로는 해동제일가람인 도리사가 있는 냉산이 보인다. 또한 남쪽으로는 6·25 전쟁 때의 격전지였던 유학산과 가산이, 그리고 동쪽으로는 팔공산 자락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그러고 보면 천생산은 동서남북으로 모두 이름난 명산들의 위호를 받는데다, 거기에 덧붙여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까지 끼고 있으니 그야말로 외기(外氣) 조원(朝元)이요, 내기(內氣) 불설(不洩)인 명산 중의 명산이라 할 수 있다.”
우연인지 몰라도 이곳 사람들과 풍수사들은 박정희 전대통령이 바로 이 천생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한다. 천생산 쌍룡사에서 수행중인 석불스님(石佛·51)은 천생산을 이렇게 묘사한다.
“천생산은 네 가지 모양, 즉 사자산, 와불산, 미인산, 임금산으로 말할 수 있다. 박 전대통령 뿐만 아니라 현존 정치가나 군인 가운데 실력자들이 바로 이 천생산을 주산으로 하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한나라당의 김윤환의원, 재향군인회 회장 장태완장군, 박세직의원 등이 바로 천태산 정기를 받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천생산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 혹은 천생산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천생산을 크나큰 어머니로 여겼다. 임진왜란 때 이곳 사람들은 천생산 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왜군들이 이곳을 함락하려 했지만 곽재우 장군의 지휘 아래 있던 천생산은 난공불락이었다. 뿐만 아니라 공격한 일본군들을 전몰시킨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본인들에게는 원한 맺힌 산이다.
300년 전 조상들의 원한이 맺힌 천생산을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그냥 둘 리 없었다. 그들은 이곳의 지맥을 끊기 위하여 쇠말뚝을 박았다. 은밀하게 박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천생산 쌍룡사 암자 뒤 석굴에 박힌 쇠말뚝 하나가 발견됐다. 지난해 8월. 쌍룡사 석불 스님이 우연히 발견하여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 쇠말뚝을 제거하였다. 길이는 115cm, 지름 1.5cm 정도로 부식 상태로 보아 70년쯤 된 쇠말뚝이었다. 이 쇠말뚝은 현재 석불스님이 갖고 있다.
특히 석불 스님은 이 쇠말뚝이 불가의 입장에서도 흉한 것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천생산 쌍룡사 대웅전 위에 있는 큰 바위는 소의 형상이다. ‘소를 찾는다(尋牛)’는 것은 불자가 견성성불(見性成佛)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쇠말뚝이 박힌 자리는 소의 등에 해당된다. 소의 등에 못이 박혔으니 이 절터가 온전할 리 없었다. 이전에 60명이 넘는 스님들이 수행을 하려고 찾아들었지만 모두 견디지 못하고 떠났다. 일본 사람이 박아 놓은 쇠말뚝은 단지 민족의 정기를 꺾을 뿐만 아니라 불도를 수행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도를 깨닫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도 있다.”
이러한 사례와 그에 얽힌 풍수 이야기는 전국에서 수없이 접할 수 있다. 물론 이 가운데 일본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박았다기보다는 다른 목적(측량, 공사, 등산 등)으로 만들어진 것들도 끼어 있다. 그러나 나머지는 명백히 지맥을 자르기 위한 쇠말뚝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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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풍수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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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풍수침략을 위해 단순히 쇠말뚝만 사용하지 않았다. 지기를 누르기 위해 목침(木針), 석침(石針)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다. 이는 토지측량용이나 기타 다른 용도로 사용됐다는 주장이 타당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로는 서울 창덕궁 인정전 뒷산(백악산 끝자락) 지하 18m에 박힌 석침 7개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1941년 일본군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 신세우씨(1988년 작고)는 영국 유학을 다녀온 경력으로 일본군 대장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통역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태평양전쟁 종전 직전에 야마시타가 이끌던 제14방면군은 필리핀 전선에서 미군에 참담한 패배를 당한다. 이때 신세우씨는 야마시타와 함께 필리핀 다바오 포로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영어가 유창했던 세우씨는 수용소에서 미군과 일본군 장성들의 의사 소통을 돕는 등 ‘대변인’ 역할을 했다. 또한 종전 뒤 벌어진 전범재판 때도 야마시타 등 일본군 장성들의 변론을 맡기도 했다. 재판 2심에서 야마시타는 세우씨의 변론 덕에 총살형에서 교수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사체나마 깨끗이 보존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
선고 며칠 뒤 야마시타는 감옥에서 죽기 직전 은인인 세우씨에게 놀라운 비밀을 고백했다고 한다. 한반도 산 곳곳에 혈침(穴針)을 박아놓았다는 것과 한국과 중국을 비롯해 동남아 일대에서 수탈한 보물들의 행방에 관한 것 등이었다. 광복 후 일본에서 귀국한 신씨는 아들 동식씨(54·동양양생원 원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부자가 전국을 돌며 혈침을 제거해 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창덕궁 인정전 뒷산에 있던 석침의 존재도 알려졌다. 야마시타가 선친에게 일러준 장소를 확인한 동식씨는 97년 5월5일 관할 구청의 허가를 받아 굴삭기로 땅을 파보기로 했다. 지하 18m를 파들어가보니 과연 석침이 있었다. 문제의 석침은 모두 7개였고,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견고한 화강암재 석침이 틀림없었다. 이곳에 인공 화강암이 들어 있어야 할 이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야마시타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신동식씨의 말.
“석침이 있는 곳은 사람으로 치면 단중혈(가슴과 가슴 사이의 혈)로 이 산의 중요한 혈이다. 내가 선친께 들은 바로는 일제는 남한에 183개, 북한에 182개 등 모두 365개의 혈침을 박았다. 혈침은 전국 산의 중요한 혈에 하나씩 박았다. 어떤 산은 사람으로 치면 얼굴의 인중혈에, 어떤 산은 가슴의 단중혈에, 또 어떤 산은 생식기의 회음혈에 박는 등 그 산의 가장 특징적인 곳을 찍어서 산의 힘을 빼버렸다. 또 이를 보조하기 위해 산마다 내침(內針) 6개와 외침(外針) 12개를 덧붙여 박았다.”
신씨는 혈침을 제거하러 다니는 동안 일제가 매우 악랄하게 풍수침략을 자행했음을 알았다고 말한다. 바위에다 5~6m 깊이로 쇠말뚝이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은 다음 끝이 화살표처럼 생긴 쇠말뚝을 박아 빠지지 않게 했고, 또 틈새에는 석회까지 발라 단단하게 굳혀 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쇠말뚝이 어떻게 토지 측량용이 될 수 있겠느냐고 주장한다.
아무튼 일제가 풍수침략을 위해 구사한 방법은 다양했다. 서길수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혈을 찌르기 위해 쇠말뚝을 박는 수법을 가장 많이 썼고, 이외에 ▲도로나 철로를 내면서 의도적으로 지맥을 끊었다 ▲쇳물을 녹여 부었다 ▲뜸을 떴다(산꼭대기에 구덩이를 파고 며칠간 불을 놓아 뜸을 뜨거나 숯을 뜨기도 함) ▲숯을 묻었다 ▲신성한 곳을 공원화했다(창경궁과 전국 사직단의 공원화) ▲파괴하거나 폭파해 버렸다(부여의 용머리를 파괴) ▲건물을 신축했다(총독부 건물이나 창경궁 장서각) 등 갖가지 수단이 동원했다.
특히 일제는 조선의 임금이 살던 경복궁의 앞과 뒤에 총독부 및 총독 관사를 지어 도성의 기운을 차단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런데 경복궁 풍수침략과 관련해 신동식씨는 현재 철거된 중앙청(구 조선총독부)에도 혈침이 24개나 박혀 있었으며, 현 서울시청의 땅 밑에도 아직 혈침이 있다는 것을 선친으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사실 이 땅에 풍수침략용 쇠말뚝을 박은 것이 일본인들만은 아니다. 서길수 교수가 현장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대표적으로 ‘한반도 풍수침략 범죄자’로 꼽히고 있다고 한다. 조선에 인물이 나는 것을 꺼리던 이여송이 맥을 잘랐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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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등장하는 단맥(斷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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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여송은 다른 중국군 장수와 달리 조선에 파견돼 불과 8개월밖에 주둔하지 않았으므로 조선과 인연이 그리 깊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조선의 명산에 뜸을 뜨거나 지맥을 잘랐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당시 그가 조선인에게 보여준 악랄한 행위와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풍수사들의 행패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명나라 장군들을 따라 수많은 중국의 지사(풍수)들이 조선에 들어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음을 조선 왕조실록도 전한다. 그 대표적인 이들로는 섭정국(葉靖國) 시문용(施文用) 이문통(李文通), 양문성 (楊文成) 등을 꼽을 수 있다.
조선의 권력층이 명당에 집착하고 있음을 간파한 이들은 자신의 풍수 실력을 과시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조선관리를 폭행하는 등 매우 무례한 짓을 저지르고 다녔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풍수 실력이 함량 미달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영의정이던 백사 이항복이 중국 풍수들이 야기하는 문제의 심각성을 선조 임금에게 완곡하게나마 간할 정도였다. 오랫동안 풍수지리를 공부해 상당한 경지의 실력을 갖추고 있던 이항복은 “중국의 풍수법과 조선의 풍수법이 다르니 중국인 풍수들의 말을 그대로 듣는 것을 재고하시라”라고 임금에게 아뢴 일까지 있었다.
따라서 조선 사람들에게는 구원병으로 파견된 명나라 군대의 행패와 중국인 풍수들의 방자한 입지 선정이 조선의 혈맥을 끊으려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중국에서는 단맥에 관련한 옛날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이러한 단맥의 역사는 멀리 2000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진(秦)나라 때 진시황제의 핵심 측근 가운데 몽염(蒙恬) 장군이 있었다. 그는 만리장성 축성의 실질적인 총책임자였다. 진시황이 죽자 그도 권력에서 축출당하고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때 그는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끝까지 거부하지만,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이렇게 탄식하며 자살한다.
“내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할 죄다. 임조에서 요동까지 만리가 넘게 성과 참호를 쌓았는데, 그중에서 어찌 지맥을 자르지 않았겠느냐? 이것이 바로 내가 죽어야 할 죄다!”
지맥을 손상시켜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였다는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한다. 이렇게 긴 역사를 갖고 있는 단맥은 단지 쇠말뚝을 박는 형태만이 아니라, 뜸을 뜨거나 산을 깎거나 소(沼)를 파는 등 그 방법이 다양하다.
조선의 권력층이 저지른 단맥 사건도 있다. 한때 TV 드라마 ‘용의 눈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태종 이방원과 그의 형 이방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조선 2대 왕 정종의 후계 자리를 놓고 형제인 방간과 방원이 서로 싸움을 벌인 끝에, 방원이 제3대 태종으로 왕위에 오르고 방간은 유배생활을 하다가 57살에 병을 얻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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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권력층이 자행한 단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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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방간의 무덤은 ‘늙은 쥐가 먹이를 찾으러 밭으로 내려오는 형상’인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의 명당이었다. 얼마 후 태종은 형님 방간이 천하의 명당에 묻혔음을 알고는, 방간의 후손 중에 큰인물이 나오면 왕권이 위협받을 것이라는 생각에 곧바로 사람을 보내 맥을 자르고 기가 뭉치는 곳에다 뜸을 뜨도록 했는데 그 자리가 자그마치 십수군데였다. 맥을 자르고 뜸을 뜬 뒤 “이제는 회안(방간) 자손들이 대대로 호미 자루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고 안심하였다 한다. 지금도 방간의 후손들은 숙부인 방원이 저지른 단맥 때문에 몇백년 동안 자신들이 호미 자루를 쥐고 살 수밖에 없었다고 믿고 있을 정도다.
방간의 무덤은 전주에서 완주군 소양면 방면으로 가다 만나게 되는 금상동에 있다. 방간의 무덤 뒤로 능선을 거슬러 정상까지 가보면 지금도 600년 전 방원에 의해 맥이 잘린 흔적을 볼 수 있다. 또 묘지 바로 뒤에 있는 능선 두툼한 부분(풍수 용어로는 ‘현무정’이라 부른다)에는 땅을 파고 불을 피워 뜸을 뜬 흔적도 남아 있다.
왕권유지를 위해 형재의 무덤 자리 맥을 잘라버린 것은 비정한 태종만의 일이 아니고, 조선 왕조사상 곳곳에 등장한다. 이렇게 조선은 권력층이 광적으로 풍수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매우 집요하게 조선 왕실의 기운을 꺾어버리려 했다. 가장 눈에 두드러진 게 왕족의 태실(胎室) 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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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과 일본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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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태봉)이 우리나라만의 풍수 현상인지 아니면 중국이나 일본 풍수에서도 나타난 현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왕족의 경우 아이가 태어나면 전국의 유명 명당을 골라 그 태를 묻었다. 이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태를 좋은 땅에 묻어 좋은 기를 받으면 그 태의 주인이 무병장수해 왕업의 무궁무진한 계승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둘째, 기존 사대부나 일반 백성들의 명당을 빼앗아 태실을 만들어 씀으로써 왕조에 위협적인 인물이 배출될 수 있는 요인을 없애자는 의도였다. 셋째, 태실을 전국 도처의 명당에 조성해 왕조의 은택을 일반 백성까지도 누리게 한다는 의도가 있었다. 즉 왕조와 백성간의 유대감을 강화시켜 보자는 일종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때문에 왕조에서는 태실 관리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태실이 어느 지방에 조성되면 태실이 소속된 현은 군으로 승격되거나 감세나 감역의 혜택을 받기도 했다. 당연히 백성들은 왕족의 태실을 자기 마을 부근에 모시는 것을 긍지로 여겼다.
그런데 일제는 관리와 보전이 어렵다는 이유로 전국의 수많은 태실들을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마구잡이로 모아놓았다.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이씨 조선의 멸망을 확인케 하자는 의도였다. 또 태실을 철거한 뒤 그 자리는 비교적 돈 많은 지방 토호세력에게 분할함으로써 왕조의 권위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렸다.
뿐만 아니라 일제 지배시기에 조선의 마지막 두 통치자였던 고종과 순종은 직접적으로 풍수적 침해를 받았다. 두 사람은 임금이 아니라 엄연히 황제였다. 따라서 그들의 무덤은 왕릉이 아니라 황제릉으로, 다른 왕릉과는 규모나 형식면에서 차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남양주시에 있는 이들 두 황제의 무덤(홍릉과 유릉)을 다른 왕릉과 비교해보면 까닭 모르게 초라한 느낌이 드는 것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망국의 황제들이라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 자체가 주는 느낌 때문이다.
고종 황제는 나무 한 그루를 스스로 지탱할 수 없는 땅에 묻혀 있다. 심지어 어떤 소나무들은 서로 몸을 지탱해 간신히 서 있는가 하면, 어떤 나무는 아예 철제 지주에 기대고 있다. 마치 외세에 기대고 있는 조선말의 실상을 보는 느낌이다.
그 아래 순종황제의 능은 더욱 심각하다. 풍수지리에서는 산이 다하는 곳에 기가 뭉친다고 보기 때문에 산이 다하는 능선 끝에 무덤을 쓴다. 그러나 순종 황제의 능은 능선이 계속 뻗어나가는 곳에 썼다. 풍수에서는 지기가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곳에 묘를 쓰는 것은 흉하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무덤 앞의 능선이 볼록 솟아 무덤을 가로막은 형상이다. 풍수에서는 이를 역룡(逆龍)이라 하는데 감옥에 갇히는 재앙을 받는다고 한다. 마치 일제에 의해 ‘연금’ 생활을 하는 순종 황제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풍수지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 두 황제의 능 선정이 대단히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잘못된 선정이라기보다는 무덤 선정 자체를 농락하고 있는 듯하다. 진정으로 독립된 대한제국의 황제였다면 감히 그런 자리에 모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면에 일제 때 조선 땅에 일본인들의 성지로 잡아놓은 신사(神社)터는 그 지방, 혹은 그 고을에서 풍수상 가장 좋은 자리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신사터를 명당에 쓰면서 조선인들의 터잡기를 은연중에 방해했다.
경남 창녕읍에 있는 가야시대의 거대한 고분(古墳)들 경우를 보자. 창녕읍 주산인 목마산성 아래 능선을 따라 조성된 고분들은 찬란했던 가야제국의 자취를 보여주는 데 손색이 없다. 그런데 일제는 이곳 고분들이 있는 능선 한 가운데로 길을 내버렸다. 이 능선 줄기는 창녕읍의 우백호에 해당된다. “고분군으로 대변하는 가야제국의 문화유산을 철저히 무시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무너뜨렸다”고 창녕읍에 거주하는 하도암(河道岩·51세·화왕산장 주인)씨는 분노한다.
이렇게 도로나 철로를 내면서 지맥을 잘라 인물이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은 전국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쇠말뚝이라는 하나의 현상만 보면 그것이 일제의 풍수침략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핀 대로 우리 민족의 기층문화인 풍수지리의 단맥사(斷脈史)와 일제의 갖가지 풍수침략 행태를 아울러 살핀다면 그것은 분명 지맥을 자르기 위한 쇠말뚝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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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교가의 풍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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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 관념, 좀더 크게는 풍수 관념은 단지 과거 한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우리 관념 속에 자리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지맥 관념에 ‘세뇌’되고 있다. 많은 초등학교 교가에는 ‘○○산의 정기를 받은 터전 위에 학교가 세워졌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서울, 대전, 경기, 전북 등 4개 지역의 80여개 초등학교 교가를 수집 분석한 결과 ‘○○산’이 들어간 교가가 전체의 절반이 넘었다. 즉 초등학교 시절부터 ‘우리는 산의 정기를 받고 자란다’는 관념이 주입된다. 그리고 그러한 주입은 한갓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돼가면서 실제로 그렇다고 믿는다. 이렇게 초등학교 교가에까지 지맥관념 혹은 풍수관념이 스며든 것은, 그것이 수천년 동안 동아시아 민족의 기층 사상으로 자리잡아 왔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일제가 저지른 다른 방법의 풍수침략을 볼 수 있다. 바로 ‘창지개명(創地改名)’이 그것이다. 한국 땅이름학회 이홍환 이사의 말.
“우리의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 ‘택리지’ 등 고전은 당시 지리지로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을 받는다. 우리 땅 이름에는 우리의 역사, 지리, 풍속, 성씨, 종교, 언어 등 모든 것이 내포돼 있다. 이런 이름을 일제는 교묘하게 바꿔치기 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곳곳에서 산이름으로 등장하는 봉황산의 경우를 보자. 봉황산은 풍수지리적으로 금계포란형(金鷄抱卵;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산세를 보인다. 그래서 봉황산이 있는 마을에서는 인재가 많이 나온다는 게 조선 사람들의 믿음이다. 당연히 봉황산은 그 마을 주민들의 중심이자 추앙의 대상이 된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하면서 봉황산에 쇠말뚝을 박을 뿐만 아니라 산 이름도 바꿔버린다. 봉황을 쫓아낸답시고 봉황산의 ‘황’자를 떼어내고 날아갈 비(飛) 자를 집어넣어 ‘비봉산’으로 바꿔친다. 이렇게 비봉산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경기도 안성 이죽면의 비봉산 등 무려 16군데나 있다.
“일제가 창지개명했다고 해서 봉황산 기슭에 나야 할 인물이 안 나고, 그 고을이 폭삭 망하는 것은 아니다. 본질은 그 당시 조선 민중의 정서와 마음에 ‘정신적 쇠말뚝‘을 박음으로써 ‘아이고, 이제 우리는 망했어’ 하는 식의 패배의식과 자포자기를 유도하자는 심리전인 것이다.”
이홍환 이사는 한민족이 성산으로 여기는 백두산도 일제의 풍수침략앞에 무사하지 못했다고 한다. 백두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를 장군봉(將軍峰)이라고 한다(‘대동여지도’와 ‘청구도’에 기재). 그런데 일제는 장군봉을 ‘병사봉(兵士峰)’으로 격하시켰고, 또 그들의 연호(年號)를 붙여 대정봉(大正峰) 이라고 병기했다. 그런데 광복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시중에 나도는 우리나라 지리부도에는 백두산 정상이 병사봉 또는 대정봉 따위로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는 아예 한반도의 척추라고 할 수 있는 백두대간을 토막내버렸다. 마천령이라는 산맥 이름이 그것이다. 물론 마천령(摩天嶺)이란 고개 이름도 있지만, ‘마’란 글자가 서로 다르다. 일제가 창지개명한 마천령(磨天嶺)은 이름 그대로 ‘백두산 천지(天池)를 갈아버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홍환씨는 산 이름 뿐만 아니라 서울을 경성으로 바꾸거나 동네 이름을 얼토당토 않게 바꾼 것도 일제의 창지개명에 의한 풍수침략으로 규정한다. 이는 고을의 중심이 되는 지역을 분산시킴으로써 주민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을 희석시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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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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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소설가 복거일씨는 대한교원신문(1999.6.23.) 칼럼에서 “풍수지리설과 창조론은 아예 과학의 반열에 오르겠다고 나선다”고 빈정거렸다. 복거일씨의 풍수관은 역사학자 이이화씨가 저서 ‘역사풍속 기행’에서 개진하고 있는 풍수관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풍수에서는 ‘보지 않은 땅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철칙이 있다. 직접 보지 않고, 직접 느끼지 않고, 직접 체험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말하는 것을 풍수에서는 금한다. 이런 것을 떠나더라도 우리나라 방방 곡곡에 존재하는 사찰, 서원, 장승, 서낭당, 당산나무, 돌탑, 남근석 등 고려와 조선조에 조성된 수많은 문화유산은, 그 밑바탕에 풍수적 지식이 없고서는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풍수학이 발달했던 한·중·일 동양 3국은 그동안 서구적 학문을 받아들여 이런 것들을 무시했다. 그러다가 ‘과학적 사회주의’와 ‘변증법’으로 무장된 중국의 경우 다시 전통의 풍수학을 복권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의 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사설을 통해 이미 1980년대 말에 풍수지리를 ‘신흥환 경지리학’으로 복권시켰다. 이렇게 풍수가 복권된 이래 수많은 연구 결과물들이 저서나 논문으로 나오고 있다.
또 일본 동경도립대 와타나베 요시오(渡邊欣雄) 교수는 “동아시아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유럽 이론에 바탕을 둘 것이 아니다. 이는 동아시아 이론에 의해서만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그는 또 “동아시아 문화에 대한 해석을 가장 잘해 줄 수 있는 동아시아 고유의 이론은 다름 아닌 풍수사상”이라고 했다. 나아가 와타나베 교수는 풍수지리의 체계는 동양사상의 우주론적 체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간단히 말해 하늘과 땅과 인간은 ‘셋이 아닌 하나’라는 것이다.
서구 합리주의에 물든 ‘현대인의 상식’을 바탕으로 너무나 쉽게 쇠말뚝을 ‘토지 측량용’으로 단정하거나 풍수를 미신이라 보는 것은 아마도 우리 문화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이순신 장군묘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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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30여년 동안 일본은 우리의 언어는 물론이고 문화, 관습, 우리의 정신까지 말살시키기 위해서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후 반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까지도 일본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있는데, 심지어 우리가 우리의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실조차도 그 근원을 따져보면 일본의 것인 경우가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일제의 풍수침략에 의해 왜곡, 변질되어 결국 우리의 의식속에 못박혀 버린 일제의 식민풍수사관에 대해 알아보자
일본이 한반도를 침범한 것은 일제 강점기 그 이전 부터이다. 신라, 고려를 이어 조선초기에 이르기까지 왜인들은 집단을 이루어 약탈과 만행을 일삼았다. |
이후, 일제 강점기때 이땅에 일본인 마을이 생기고 문화가 전해지면서 일본 세계가 되었갔고, 그러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일본의 식민풍수이다. 당시 시대상황을 본다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신사를 세워 일본의 정신까지 강요하던 그들의 풍수침략적 횡포는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
<경주에 세워진 일본신사> |
일제의 풍수침략적 횡포
백두대간과 연결된 산의 지맥을 끊어 버렸고, 서울의 맥을 끊기 위해서 진산인 북한산에 철못을 박고, 한반도를 호랑이가 아닌 토끼형상이라고 말을 했다.
주산인 백악산이 큰 대 大자 형상인 것을 이용해서 그 옆에 一자 모양의 총독부 건물을 지어 대일본이라는 상징성을 부각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우리 한민족의 정기를 없애기 위해, 우리의 풍수적 정서를 역이용하여 패배의식을 심어주려고 전국 산천의 명당(明堂) 자리에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지기(地氣)를 끊어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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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
<일제의 풍수침략용 쇠말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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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구체적인 수법을 보면, 돌맥(突脈), 기포(氣胞) 자리에 쇠말뚝 박기, 생기맥(生氣脈)에 구멍을 파서 쇳물 넣기, 기맥포(氣脈胞) 자리에 구덩이를 파고 불이나 숯으로 뜸뜨기 등이 있는데, 이러한 방법으로 길지(吉地)를 파손시켰고, 목침(木針), 석침(石針) 등의 재료를 박아 지기(地氣)를 눌렀다. 또, 흉지(凶地)를 선정해 공동묘지를 만들어 한곳에 묘지를 쓰게 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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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문화답사기 정가:10000원 | 인터넷 판매가:9000원 | 적립금: 450원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된다! 일제의 침략과 통치, 그리고 수탈을 상징하는 식민지 권력기구의 잔재들, 일제가 한반도를 영원토록 장악하고자 국토의 맥마저 끊어내기 위해 산천 곳곳에 박아놓은 쇠말뚝, 우리의 민족혼을 앗아가고 내선일체를 강요하기 위해 곳곳에 세운 황국신민서사탑과 신사, 제 동포를 팔아 넘기고 괴롭혔던 수많은 친일파를 기념하는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반동의 현장, 일제 잔재 청산을 외치면서도 오히려 일제의 파쇼 잔재가 우리 문화의 주류가 되고 친일파가 애국지사로 치장되어 대접받는, 여우 둔갑 이야기보다 더 기막힌 20세기의 신화를 이 책은 고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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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운하 할시 하늘에서 날 벼락이 떨어 질겁니다...
저도 이생각 했었는데..저만 한게 아니였군요
저들은 아주 무서운넘들이죠~ 정기부터 끊으려는 아주 흉악하고도 지능적인넘들입니다... 간교한자들 같으니라고~ 하루빨리 밝혀져서 저러한 간악한 흉계를 깨부숴야 할터인데 말입니다...
저도 이 생각 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