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르다 / 박랑숙 (2024. 6.)
빈 화분들이 구석에 쭈그리고 있다. 퇴직 선물로 받은 ‘반려 식물’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화분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팽이 떠난 달팽이 집 신세다. 아파트에서 정원을 갖는 것은 욕심인지, 나에게만 허락되지 않는 건지 기가 죽는다.
“엄마의 손맛은 너무 매워서 살짝이라도 닿으면 뼈까지 저릿해.”라는 아들의 말처럼 식물도 나의 매운 손길에 괴로웠을까. 집 안으로 짧은 시간 내리쬐는 햇볕을 따라 꽃 화분을 옮기고 있으면 남편까지 “우리 집 식물은 동물이야, 옮겨 다니잖아.”라며 한심한 듯 쳐다본다. 매사 나와 반대인 남편은 평소 신경 쓰지 않다가 한 달에 한두 번 베란다에 뭔가 찾으러 나갈 때만 질금질금 화분에 물을 주는 듯하다. 그런데도 남편의 식물들은 쑥쑥 잘 자란다. 그것들은 분리수거 쓰레기장에서 나 몰래 주운 ‘유기 식물’이다. 날벌레가 많다고 과감하게 파리 킬러 스프레이까지 뿌려준다. 애지중지 키워도 죽는 내 식물과 비교하면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멀쩡한 남편 화분을 향해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 담아 툴툴거린다. 내 맘대로 식물에 정을 준 것이 확실한 잘못이다.
식물을 사서 키우지 않았다. 두 아들을 키우면서 생활이 바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모셨던 상사의 영향이 컸다. 내 직장인 공장은 공기 질이 좋지 않은 공업단지에 속했다. 사무실의 창은 동쪽으로 나서 어둡고 바람이 정체되기 쉬웠다. 가로수도 드문 그곳에서 사장님은 난초를 푸르게 푸르게 꽃까지 틔우며 잘 살리셨다. 상사의 개인적인 축하와 창립기념일을 챙기는 인사용 화분들이었다. 동시에 그에게 고난을 주는 식물들이었다.
건물의 반지하 수돗가에 가서 양동이 그득하게 물을 받아 2층 계단까지 끙끙거리며 들고 오는 것이 고행의 시작이다. 도와줄 수도 없다. 육군 병장 출신이니 나이 들어도 힘쓰는 일에는 여자보다 낫다며 어딜 거드느냐고 자존심을 들먹이며 일축한다. 일주일 동안 수돗물 속의 염소 성분을 날리겠다면서 양동이 물을 쓰지 말라는 선언과 동시에 카운트다운에 들어간다. 드디어 결전, 아니 물 주는 날이다. 푹 묵혀 놓은 보약 같은 물에 귀하신 화분이 들어갈 차례다. 갓난아기를 목욕시킬 때처럼 조심스러운 손길로 살포시 물에 넣는 순간, 환한 기쁨이 어른의 얼굴에 번진다. 답이라도 하듯 화분은 뽀옥뽀옥 공기 빼는 소리를 낸다. 옆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덩달아 숨을 죽이게 된다.
열댓 개의 화분이라 하루로는 시간이 모자라 물주는 행사는 삼사일 계속된다. 회사업무가 있어 물주기 일정이 길어진다. 화분 높이에 딱 맞는 납작한 선풍기를 대령한다. 뿌리가 썩지 않기 위해 화분 아래로 가지런한 세 개의 구멍 방향으로 정확히 바람을 쐬어준다. 정교한 솜씨는 비비탄 총알 크기의 구멍이 과녁이라면 선풍기 바람은 총알이 되어 10점 만점을 받을 듯하다. 난초를 목욕시킨 물은 낑낑거리며 계단을 내려가 건물 앞 도로 청소용으로 촤-악 부어지는 추가 업무 후 사라진다. 눈부신 흰머리 사장님이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깨끗한 걸레가 담긴 대야를 들고 나타나면 하루의 일정은 끝이 난다.
여러 해 보아온 직원도 좀처럼 적응하기 어렵다. 보름에 한두 번씩 사장님의 출근은 평소보다 더 빠르고 퇴근은 더욱 늦다. 낮에 미뤄둔 업무도 봐야 하고 난초에 선풍기를 최대한 오래 쐬어주기 위함이다. 전원이 꺼진 것을 확인 후 퇴근하면 저녁 식사를 놓치게 된다. 그것뿐인가. 여름이 더울수록, 겨울이 추울수록 출근은 빨라지고 퇴근은 느려진다. 혹서기와 혹한기에는 일주일 연속 출근이다. 여름에는 뿌리가 썩지 않도록, 겨울에는 줄기가 얼지 않도록 세심한 손길이 닿아야만 생명들이 살 수 있단다. 화초의 생사가 주인의 책임이라 확언한다. 그가 존경하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 중 선물로 받은 난에 마음이 묶인 이야기를 모를 리가 없는데 정말 유별나다. 난초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지 개선장군처럼 펄럭이는 리본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새겨서 손수 들고 방문하는 거래처 손님들. 자신을 알리기에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확실하다. 무엇이든 아끼는 사장님에게는 실용적인 것이 더 필요한데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는 것 같다.
팔순이 가까워지니 여름에는 더위를 먹어 열병에 시달리고, 겨울에는 추위와 배고픔에 감기가 끊이지 않는다. 식물들은 살겠는데 키우는 사람이 죽을 지경이다. ‘사장님 살리기’가 절실했다. 사무실 직원들과 역모를 꾸몄다. 화분 선물은 하지 못하도록 외부 손님에게 화분은 싫어하신다고 유도할 것, 시든 잎은 잘라내거나 뿌리를 뽑을 것, 이름이 적힌 리본은 얼른 떼어 버릴 것, 양동이의 물을 채울 수 있도록 큰 생수병에 나누어 담아서 2층에 올려놓을 것 등 눈에 띄지 않는 일들을 진행했다.
열아홉 살 신입 여경리가 왔다. 손녀를 보듯 늘 안타까워하고 대견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역모의 사정을 알리고 가담하도록 설득했다. 첫 임무는 난초에 붙어있던 리본을 모두 떼어 버리는 것이었다. 사장님은 눈을 무섭게 부릅뜨더니, 누가 줬는지 헛갈리니 낭패라며, 꼬마 경리에게 다음부터 반드시 물어보고 처리하라는 한마디 경고를 했다. 다음 목표는 시들었지만 버리지 못하는 빈 화분의 처리였다. 그녀는 단단히 겁을 먹었는지 시키지 말라며 울먹였다. 역모의 주동자인 내가 대걸레로 청소하다가 넘어뜨려 깨졌다고 거짓말을 했다. 지난번과 반응이 완전히 달랐다. 대범한 일의 대가로 점심시간 화훼시장에 가서 새 화분과 보충할 흙과 거름까지 넉넉하게 사 오도록 지시했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무거운 형벌이었다. 다섯 개의 화분과 흙 세 포대 그리고 특유의 냄새가 온몸에 배어버릴 것 같은 시커먼 거름까지 옮기고 나니 땀에 흠뻑 젖었다. 아침 식사도 거르고 출근했는데 점심도 놓친 반역자는 불쌍하게 주린 배를 만지며 허탈함과 부끄러움에 소리 죽여 웃었다. 양심의 가책까지 가중처벌을 받으면서 거사는 뿌리째 뽑혔다.
사장님이 긴 감기 끝에 서울의 큰 병원에 입원했다. 갑작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직원들은 바빠서 화분에 누구의 시선도 손길도 닿지 않았다. 백여 일 혼돈의 시간이 지나 그가 겨우 부축받고 잠시 들렀을 때 낯설도록 넓어진 회색빛의 사무실에는 빈 화분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사장님의 젊음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그리고 내 어릴 적 풀빛 원피스를 기억하던 풍성한 관음죽도 사라졌다. 당신은 사무실 문 앞에 한참을 머무르며 무엇을 보았을까. 마지막 눈빛이었다.
첫댓글 박랑숙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선생님의 글을 카페와 지면을 통해 더 많이 읽고 싶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
박랑숙 선생님
등단 작품 잘읽었습니다.
비워진 빈자리를 바라봤을 사장님의 마지막 눈빛이 그려집니다. 마음이 아려지는 글. 잘읽고 갑니다.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