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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시인광장 올해의 좋은시상 수상자 김왕노 시인과의 대담
□ 김왕노 시인
경북 포항(옛 영일군 동해면 일월동)에서 출생.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꿈의 체인점〉으로 당선. 시집으로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슬픔도 진화한다』,『말달리자 아버지』(문광부 지정도서),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중독-박인환문학상 수상집』, 『그리운 파란만장』(세종도서 선정),『사진속의 바다-해양문학상 수상집』,『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게릴라』 등이 있음. 2003년 제8회 한국해양문학대상, 2006 년 제7회 박인환 문학상, 2008 년 제3회 지리산 문학상, 2016년 제2회 디카시 작품상, 2016년 수원문학대상 2017년 한성기 문학상 등 수상.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문학창작금 등 5 회 수혜. 현재 시인축구단 글발 단장, 현재 계간 『시와 경계』 주간.
■ 박현솔 시인
제주에서 출생. 국문학 박사. 1999년《한라일보》신춘문예와 2001년《현대시》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달의 영토』, 『해바라기 신화』, 시론집으로 『한국 현대시의 극적 특성』이 있음. 2005년,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수혜. 경기시인상 수상. 현재 웹진『시인광장』편집위원, 계간『시인광장』편집장.
보다 나은 세상의 출구를 마련하는 것이 시의 역할
들어가며
■ 박현솔: 대담을 앞두고 김왕노 시인의 평소 시세계를 엿볼 수 있는 시 한 구절을 읊어보려고 합니다. “시가 절망의 날에는 절망의 강물을 건너는 삿대였다. 시가 어둠의 날에는 어둠을 사르며 오는 새벽의 예감이었다. 시가 외로운 날에는 외로운 몸을 기댈 수 있는 벽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시에 중독되었다.”(「시작메모」 중에서) 이 시구를 보면 평소 시인이 “시를 가까이 하므로 나는 살아 있는 것이고 나의 시 쓰기란 내 존재의 확인 과정”이라고 말했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앞서 소개된 당선시와 심사평, 수상소감을 읽으면서 김왕노 시인이 걸어온 시의 길과 그 노정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문단의 여러 상 중에 시인광장이 선정한 ‘올해의 좋은 시’상은 좋은시 500선에 선정된 시인들이 최종적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선정하여 주는 상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2018 올해의 좋은 시’ 賞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수상작으로 김왕노 시인의 「나를 파괴하라! 장미여」가 선정되었습니다. 이번 수상이 선생님께 어떤 의미로 다가오며, 앞으로의 시작詩作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 김왕노: 사실 저는 많은 시집을 내었고 또 많은 상을 타 행복한 시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나를 파괴하라! 장미여」라는 시보다 올해 더 좋은 시들을 많이 썼으나 더 좋은 시란 나에게 좋은 시였지 타인이나 다른 시인에게는 별로였다는 느낌을 이 상을 수상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주관적 판단이 객관화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올해의 좋은 시 상을 받은 김선우, 박형준, 유지소, 이장욱, 심보선, 김명인, 김행숙, 김이듬, 송종규, 김신용, 김중일 시인들이 평소 좋은 시로 나에게 끊임없이 감동을 주었으므로 나 또한 이 상을 더 좋은 시를 쓰라는 가혹한 채찍질로 받아들여 다시 한 번 시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올해의 좋은 시> 수상자라는 긍지와 자부심으로 시에 전념하겠습니다. 이 상이 다시 한 번 나를 되돌아보게 하고 내 삶과 창작활동에 더 성실하라고 타이르는 것 같습니다.
■ 박현솔: 수상작인「나를 파괴하라! 장미여」는 기존의 한국 현대시에서 나타났던 남성성의 어조에서 보기 힘들었던 사랑에 대한 갈구, 사랑의 광인을 자처하는 화자의 목소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시에 담겨진 배경이나 창작의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 김왕노: 나는 살면서 늘 무엇엔가 굶주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허기의 근원이 무엇일까 생각할 때 눈앞에 펼쳐지지 않는 파라다이스와 이상향에 대한 갈증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여자일 수 있고 노래일 수 있고 스포츠일 수 있고 출렁이는 강물일 수 있고 흐르는 구름일 수 있고 한 차례 비일 수도 있으나 끝내 채워주지 못하는 한계를 가졌음을 알았습니다. 결국 장미가 나를 파괴한다는 것은 나의 껍질을 벗기는 것입니다. 가식이란 껍질, 가면이란 껍질, 소유를 위한 집착이란 껍질, 욕망이란 껍질, 욕심이란 껍질, 허세란 껍질, 장미가 제 아름다움으로 가시의 표독스러움으로 나를 알몸으로 만들라는 뜻입니다. 파괴된 나를 부관참시 된 나를 다시 부활의 무덤으로 인도하는 절차가 바로 파괴된 나에게서 출발합니다. 부서지므로 원형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지금껏 내가 낸 시집은 『슬픔도 진화한다』,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말 달리자 아버지』, 『그리운 파란 만장』,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게릴라』, 『이별 그 후의 날들』이듯이 항상 뭔가 그리움으로 결핍된 내 삶이 바로 시로 발화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시인, 그리움의 시인이란 말을 듣지만 끝내 잡히지 않는 어떤 관념이나 허구를 쫓는 것 같아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파괴된 내가 바로 새로운 나의 출발점입니다.
세상의 어둠을 걷어내고, 불행을 건져 올리는 그물
■ 박현솔: 선생님께 시는 어떤 의미이며, 평소 어떤 시적 지향성을 가지고 계신지요?
□ 김왕노: 시는 나의 숨통입니다. 나의 자화상입니다. 나와 가장 많이 시간과 장소를 공유합니다. 내가 시의 그림자이자 시가 바로 나의 그림자입니다. 가족들은 늘 내가 쉬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어디가 바람을 좀 쐬고 오든지 놀아라, 고 합니다. 내가 쉬는 것은 시와 함께 있을 때입니다. 내가 생동감 있을 때도 시와 함께 있을 때입니다. 시는 나의 전부이자 전부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는 현실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시란 현실에 뿌리를 두어야 힘이 있고 친근하고 공감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슬픔을 더 슬프게 기쁨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이 시이고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시라고 생각합니다. 시는 본질적으로 세상의 어둠을 걷어내는 커다란 손이어야 합니다. 시는 본질적으로 세상에서 불행을 건져 올리는 그물이어야 합니다. 울음을 웃음으로 만드는 연금술과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 박현솔: 그간 선생님의 시에 대한 언급에서 ‘현대인의 삶과 고뇌, 남녀 간의 성과 사랑, 도시라는 공간에서 생겨나는 인간들의 부조리와 욕망’이 드러나고 있다고 평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평가들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 김왕노: 공감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광학현미경처럼 영혼의 배율을 최대한 높여 현대를 살피고 때로는 직시와 직관의 눈으로 때로는 투시로 현실을 바라보고 노래하고자 하는 것이 내 시입니다. 그리고 현대인을 자청해 살아가는 내 참회의 글이 시이기도 합니다. 시가 바로 내 영혼의 순도를 나타내고 때로는 시가 죽창처럼 새파랗게 빛나야 합니다. 나는 죽창처럼 꼬나든 시로 이중섭의 그림 속 힘이 꽉 찬 소처럼 앞으로 돌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나의 나약함을 슬픈 시로 풀어내기도 합니다. 시를 날줄과 씨줄로 내 꿈의 문양을 촘촘히 짜기도 합니다. 시는 내가 든 메스이기에 곪은 곳을 확 도려내고도 싶습니다. 환부 같은 시절도 확 도려내고 싶습니다. 그러한 애통한 심정을 나타낸 것이 바로 나의 시입니다. 오아시스처럼 도시의 어둠을 흠뻑 흡수해 버리고도 싶은 것이 나의 시입니다.
■ 박현솔: 선생님이 시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철학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 김왕노: 시는 개선의 초석이라고 봅니다. 지금 보다 나은 세상의 출구를 마련하는 것이 시의 역할이라 보고 이것이 시에 대해 가진 나의 철학입니다. 시인은 세상에 대해 민감하여 잠수함에 태워진 닭과 같으며, 이 닭이 희박해진 공기를 알아차려 잠수함에 탑승한 사람들에게 울음으로 알려주듯 시인도 세상에 꿈이 희박해질 때 그 위급함을 일깨워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라는 쟁기질로 묵정밭 같은 세상을 일궈 감자 꽃을 피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시는 인간에 가장 유익한 문학적 도구여야 한다는 생각도 가져봅니다. 시가 한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이어야 하며 한 사람의 기쁨을 함께 기뻐해주는 이웃과 같아야 합니다. 시의 이완과 수축을 통해 꿈이 없는 세상에서 꿈이 있는 세상으로 데려가는 것이 시의 힘이라고도 생각합니다. 하여튼 시가 영혼의 뿌리일 때 사람은 나무처럼 푸르러진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 박현솔: 그동안 여러 권의 시집을 내면서 선생님의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변화를 갖게 했던 사건, 혹은 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것들이 있었나요?
□ 김왕노: 문학에서 나는 변화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막상 변화가 필요할 때는 그 변화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문학에서 변화란 변질이 아니고 진화라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디카시집 ‘게릴라’ ‘이별 그 후의 날들’이란 시집을 내었으면서도 나의 시 쓰는 자세나 마음은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생의 전환점이 된 것은 내가 온통 끓어오르던 열정으로 살던 대학교 2학년 공주의 어느 밤의 일 때문입니다.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군 법무관이 된 고향 친구 이현우가 찾아왔습니다. 라이벌이자 친한 친구인 그는 한 달 치 월급으로 철학서적을 산더미처럼 사들고 왔습니다. 나는 교사의 길이 정해져 있으나 그것만으론 부족하니 김홍신의 인간시장 소설이 멋있어서 소설가가 되겠다고 했고, 친구는 인권변호사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로 나는 밤마다 원고지 70매를 꼭꼭 채웠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내 글씨체는 망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내 글이 과연 소설이 되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소설가에게 찾아갔는데 발상 및 구성 모든 게 다 좋은데 문체가 거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문체를 부드럽게 하는 방법으로 시를 읽어보자 했다가 시에 빠져 버렸습니다. 당시에 저는 대학 여러 곳에 칼럼을 썼는데 한 칼럼에 「별을 밟아 오는 사람아」라는 짧은 시를 발표했습니다. 그 내용은 나는 밤이면 창을 닫지 못한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밟아 누군가 올 것 같아 오늘밤도 난 창을 닫지 못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를 읽은 누군가의 데이트 신청과 나를 찾아오는 타 대학의 문학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시의 매력을 더욱 느꼈고 내가 해야 할 문학은 바로 시라고 생각하고 시에 전념했습니다.
소통,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나아가는 길
■ 박현솔: 선생님께서는 등단 이후부터 지금까지 활발하게 문단활동을 해오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젊은 시인들과 기성 시인들의 사유나 언어의 차이를 직접 경험하셨을 텐데요. 현재 시단의 양극화된 시적 흐름과 언어의 소통부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 김왕노: 옛날부터 어느 일에든 세대 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저의 경우 젊은 세대든 기성세대든 필요하면 만나고 문제해결을 위해서 문학과 여러 가지를 공유하였습니다. 빠른 변화와 정신없이 바뀌는 유행으로 인해 오늘의 새롭다고 여겼던 것이 내일은 낡아버리는 경향이 있으나 다른 분야에 비해 문학은 나이나 층과 관계없이 변화가 적은 편이고 소통이 무엇보다 원활하다고 봅니다. 제가 젊은 시인들과 많이 어울리기에 소통의 부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나 어우러질 수 있는 장이 많이 마련된다면 별 문제가 없으리라고 봅니다. 물론 가치관과 사고는 엄연히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을 인정하면서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양극화나 소통부재는 점차적으로 없어질 거라고 봅니다.
■ 박현솔: 선생님의 시작詩作의 동력은 무엇이고 시작詩作에 특별히 영향을 미치는 예술분야가 있는지요? 음악이나 미술, 영화 등 다른 예술 분야에서 좋아하는 작품이나 작가가 있으신지요?
□ 김왕노: 제 시작의 동력은 성실성과 운동이란 생각이 듭니다. 아직 세상이 깨어나지 않는 새벽에 영일만 바닷가로 나가 아버지와 함께 조개를 잡던 기억과 공부하라고 말은 하지 않고 새벽 3시 정도면 비로 마당을 쓸어 나를 깨우시던 어머니의 사랑이 나의 성실성을 키워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실이 무기다 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성실은 모든 것을 감동시키고 모든 것을 얻게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습니다. 그리고 끝없이 나를 극한상황까지 끌어올렸다가 평정으로 되돌려주는 운동에서 내 시적 에너지가 나온다고 봅니다. 어머니의 함경도 기질, 아버지의 섬세한 성격이 버무려져서 때로는 폭풍처럼 거침없이 때로는 습자지에 스며드는 물기처럼 부드러운 시를 써낸다고 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멋스럽게 한 시를 써서 방문 바로 위에 붙여 놓았던 것이 내가 시인이 되라는 재촉이 아니었나 생각도 해 봅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고 미술에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반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좋아했는데 그것은 어릴 때 나의 밤하늘에 쏟아질 듯이 빛났던 별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화가로는 비극의 여류화가인 살로테도 있지만 프리다 칼로를 좋아합니다. 자신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처절한 예술혼이 내 영혼의 살점을 거침없이 베어내기 때문입니다.
문학의 진화와 시대에 맞는 문학
■ 박현솔: 선생님의 시들은 짧은 시보다는 장시가 더 많은데 이것은 특별히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장시를 선호하는 취향이 은연중에 반영된 것인지요?
□ 김왕노: 제가 처음 시를 접했을 때 긴 시를 좋아했습니다. 짧은 시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었으나 긴 시를 읽을 때도 시의 사실감이 더 느껴졌고 감동이 늦게 오나 오래 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가 길다는 것은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많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시를 길게 씀으로 해서 나타날 수 있는 시적 오류가 많이 노출된다는 점에서 위험한 시 쓰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시를 쓰기 시작하면 단숨에 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시를 주체하지 못하는 나의 악습으로 긴 시를 쓰게 된 것 같습니다. 짧은 시를 잘 쓰지 못하므로 긴 시를 쓰지 않나 농담으로 말을 해오지만 디카시란 시집 ‘게릴라’와 ‘이별 그 후의 날들’인 2권의 디카시집을 내었으니 이제 긴 시만 쓰는 시인이란 말은 저에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 박현솔: 선생님께선『게릴라』,『이별 그 후의 날들』이라는 디카시집을 내셨는데 앞으로 한국시의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고 생각하시는지요?
□ 김왕노: 한때 미래파의 시가 나타나서 전 기대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내구력이 약해 자진해산하듯이 종적을 감추었으나 실은 미래파 시가 우리를 많이 각성케 하고 문학도 장르나 어떤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진화해야 한다는 신호를 보낸 것 같습니다. 문학적 측면에서 각성제 역할을 하였습니다. 미래파로 인하여 우리의 시 위치가 어느 정도이고 우리의 시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방향성을 설정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 태동된 디카시는 처음에 저도 보수적인 측면이 많아 극구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문학도 시도 진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디어 시대에 미디어 시대에 맞는 문학이 나온다면 그것을 거부해야 할까 수용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문학도 진화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러 디카시를 적극 밀었습니다. 그리고 디카시가 영상에 시가 보태어져 5행 이내의 시라는 점에서 매력이 있었습니다. 5행이란 틀 안에서 자유, 하이쿠가 17언 절이고 명징성이 생명력이라면 내가 쓴 「꽃」이란 디카시는 ‘앗 뜨거워 너라는 존재’ 란 시로 디카시처럼 더 짧을 수 있음에 디카시가 영상과 글이 합쳐져 엄청난 시의 힘을 발휘함에 희열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디카시가 시의 장르 용어로 등재되고 디카시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여 시에서 디카시가 한 장르로 자리를 잡아 진화된 한국 문학판 진화된 시의 세계를 끝없이 열어나가리라 봅니다. 디카시로 인해 시 읽는 독자들이 많아지고 시를 쓰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여 한국시의 미래는 디카시와 같이 행보를 같이 하면서 시의 발전과 시의 르네상스시대를 다시 한 번 일으키리라 봅니다.
■ 박현솔: 한국 시단이 점차 동인화의 형태로 진행됨에 따라 다소 부정적인 측면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극복할 방안이나 대책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 김왕노: 동인화가 나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자연스레 인구가 증가하듯 시인들이 많아져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동인이라는 테두리를 철옹성처럼 하여 문학적 교류를 하지 않거나 타 동인에게 배타성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문학이나 모든 측면에서 역기능을 하기 때문에 동인이 가진 취지를 살리면서 동인의 궁극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선 스스로 경계를 만들지 말아야 하고 기회가 된다면 타 동인들과의 소통도 확대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끔 문학행사에 가보면 많은 시인들이 모여 북적거리나 일면식이 없는 시인들로 꽉 채워져 있어 당황할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문학 판에도 패거리가 생긴다고 말하고도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문학이 진화하는 한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동인 활동을 통해 보편적이고 깊은 감동을 주는 문학 작품들이 많이 쏟아질 거라는 기대도 해봅니다.
시의 발견, 성취감을 주는 시
■ 박현솔: 우리 시단에는 시와 삶이 밀착된 시인이 있는가 하면 시와 삶이 별개로 운용되는 시인이 있는데 이 두 유형 중에서 선생님은 어느 쪽에 해당되세요?
□ 김왕노: 저는 전자인 시와 삶이 밀착된 곳에서 내 시가 샘물처럼 솟아난다고 봅니다. 아침마다 광교호수를 5킬로씩 뛰는데 그 때 시가 나에게 찾아옵니다. 좋은 시적 이미지가 가쁜 호흡으로 또는 침묵의 수면으로 빛나기도 합니다. 아침에 아파트 화단에 와 노래하는 새의 부리에 물린 시를 살포시 내 앞으로 옮겨 놓습니다. 늘 사색하고 일상에서 스치는 사물에 감정이입을 해보고 주관적 해석을 하면서 생활합니다. 여행지에서도 신발에 생흙처럼 묻어나는 시를 발견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반드시 조깅을 하는데 그때 파초 잎처럼 파닥이면서 오는 시를 만나기도 합니다. 시는 일상과 삶 속에서 우러나야 구체성을 획득하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실감이 있는 시의 나라로 초대할 수가 있습니다.
■ 박현솔: 앞으로 어떤 시세계를 보여주실 건지 계획하는 것이 있으신지요?
□ 김왕노: 제가 긴 시를 쓰는 시인으로 알려졌으나 앞으로는 디카시에 전념하며 길이에 관계없이 좋은 시를 쓰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계간 디카시에서 내는 디카시집 1호인 『게릴라』를 내고 2호인 『이별 그 후의 날들』 이란 디카시집을 서정시학에서 내었습니다.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와 『그리운 파란 만장』의 유장한 시로 때로는 촌철살인적인 디카시로 내가 만족한 시를 지금껏 썼으나 앞으로는 남이 만족할 그런 시를 쓰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남의 비위를 맞추는 시가 아니라 시에 녹아있는 나와 시가 융합되어 폭발적인 힘을 가진 시를 선보이고자 합니다.
■ 박현솔: 시인으로서의 삶 이외에 선생님의 일상과 시인축구단 글발에 대한 추억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 김왕노: 제가 처음 신춘문예로 등대했을 때 친구들은 싸움꾼이 뭐 시인이냐며 내가 시집을 내어 그들의 눈앞에 흔들어 보일 때까지 믿지 않았습니다. 나중엔 긴가민가하다가 너도 시인이 될 수 있구나 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글짓기로 상을 타기도 했고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그림을 그려 이름을 날리기도 했으나 더 좋아했던 것은 힘겨루기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글발 초창기 때에도 공을 차면 상대편에서 나를 시인이 아니고 축구선수출신을 데려오지 않았나 의심을 받아 신춘문예 등단 시집을 가져가 상대편에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말발이란 일반인 축구팀의 단장으로, 글발이란 시인축구단의 단장으로 있으면서 라이트 윙을 맡아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배드민턴도 일주일에 몇 번이나 합니다. 사람들이 내가 교사라 하면 반드시 묻는 말이 체육선생님이시지요 라고 합니다. 등단 이후에 운동에 미쳐 10년 정도 시에 소홀히 했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내 삶에서 시가 주가 되고 운동이 부가 되었습니다. 운동이 주는 성취감도 크지만 시가 주는 성취감도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 박현솔: 대담을 진행하면서 선생님의 시가 삶을 견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가 무의식을 지배하고 생활을 지배하고 욕망과 꿈을 지배하는 이 성스러운 구조는 마치 종교를 연상케 합니다. 그 근원에 도달하기 위해서 늘 깨어서 정진하는 선생님의 시 한편을 소개하며 대담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너와 나 사이의 그 백 년, 너와 나 사이가 백 년의 거리인가./백 년이란 말은 더 싱싱하고 백 년이란 말은 힘이 있어야 한다./백 년이란 말이 나와 나의 종교/백 년이란 말은 댓돌에 하얀 코고무신 벗어 놓은 오후의 방/우린 그 안에 들어 누룩뱀처럼 엉켜 백 년 사랑에 취해야 한다. (「백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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