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2월27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청주] 무엇을 원하느냐?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예레 18, 18 - 20
† 복음 : 마태 20, 17 - 28
★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느님께 탄원한다. 자신의 예언
소명에 충실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을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없애려고 하였기
때문이다(제1독서).
★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하늘 나라에서
당신의 오른쪽과 왼쪽에 두 아들을 앉게 해 주십사고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세 종류의 신앙을 보게
됩니다. 첫 번째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엎드려 절함으로써 절대적인 순종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자기 아들들의 출세에만 심혈을
기울일 뿐 예수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큰소리칩니다. 그러나 잔을
마심으로써 이루어지는 영광만을 생각할 뿐 예수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아, 그 잔이 몸값을 지불하는 거룩한
행위임을, 죽음으로 치닫는 고난의 행위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대답
안에 담긴 권력욕을 보면서 화낸 제자들입니다. 이들
역시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화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대답에서 경쟁심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 그룹 모두를 가까이 불러서 말씀하십니다. 그들
모두에게 참으로 필요한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가족이나 자기 자신의 영광과 권력만을 탐하는 바로
그들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보잘것없는 믿음을 지닌 이들의 몸값으로 예수님께서
내어 주신 것은 단순히 돈의 액수가 아니라 당신의
목숨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그분께 그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매일 미사 -
◈ [청주] 무엇을 원하느냐?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2월27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 마태오 20,17-28
무엇을 원하느냐?
많은 사람이 으뜸으로 인정 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접을 받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하더라도 진정한
존경과 사랑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속 안에 있으면서도 세속을 떠나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정 존경을 받을 사람입니다. 세상은
높아지라고 하지만 오히려 섬기는 사람, 세상은 첫째만을
기억하지만 오히려 종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께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자기 두 아들이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을 어찌 탓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아무
정성과 노력이 없이 좋은 자리를 차지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을 지니게 되면
반드시 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낌새를 알아챈 다른 열
제자가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생각한 것에서도 바로
그러한 마음을 대변해 줍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물론 영광을 원합니다. 그러나 영광은
고통 없이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로 나아가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딴청을 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마태20,22)하고 물으시자 “할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지만 사실 그들은 의미도 모르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 잔은 모욕과 천대,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뜻했습니다.
종이 되어 남을 섬기는 낮아지는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덥석 대답해 놓고는 딴전을 피우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여전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마귀를 끊어버리겠다고 선언해 놓고서는
어려운 일이나 우환이 닥치면 하느님 보다는 ‘어디 용한 사람이
없나?’ 살피게 됩니다. 허례허식을 버리겠다고 맹세하고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행동을
합니다. 남이 나를 섬겨주기를 바라는 허영의 마음이 가득할
때도 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믿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고백하고서는 미사참례를 소홀히 할 때도
있습니다. 모처럼 손님이 오면 함께 미사 참례하자고 권유하면
좋으련만 그를 배려한다는 빌미로 주일미사까지 궐합니다.
약속된 영생에 대한 희망을 말하면서도 눈앞에 것에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아직도
아무 수고와 땀도 없이 영광을 바라느냐? 고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 대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대답에 항구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군림해서 힘으로 내리누르는
삶이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삶을 살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 청주 교구 감곡 메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지금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모습
2013년 다해 2월27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복음 : 마태오 20,17-28
KBS [강연 100도씨]에서 얼굴장애를 잘 극복하며
살아가고 있는 김희아씨의 사연을 매우 감동적으로
보았습니다. 김희아씨는 태어날 때부터 왼쪽 얼굴이
붉은 모반으로 덮여있어서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아
보육원에서 자랐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사람들이
놀라서 마스크를 쓰거나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은 김희아를 칠판 앞에 세워놓고 반 아이들보고 희아를
그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 그린 것을 들어보라고
하였을 때, 어린 희아는 50장에 달하는 자기 얼굴이 그려진
도화지를 한 거번에 바라보며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보육원에서 자기를 도와주겠다던 분들이 생겼으나 두
달 만에 희아의 얼굴을 보고는 재정적 지원을 바로
끊어버림으로써 또 한 번의 상처를 크게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는 아무 곳에서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생전 처음으로 긍정적인 차별을 받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자신을 키워주었던 보육원 원장님이
취직이 되지 않는 희아씨를 보육원 교사로 일하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자친구도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화장을
짓게 하고 1년 동안 만났지만 결국 1년째 되는 날 민낯으로
마주치게 되어 이별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자친구는 그것을 잘 받아주었습니다.
2년 째 되는 날, 오른쪽 얼굴이 붓고 코피가 쏟아져 병원에
갔더니 얼굴에 암이 퍼져서 뼈까지 다 잘라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년 동안 자신을 사랑해왔던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자는 전화를 하고 수술을 받았는데, 남자친구는
다른 쪽 얼굴까지 함몰된 자신을 끝까지 사랑해 주었고,
7년 정도 사귄 뒤에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시댁
부모님들도 김희아씨를 잘 받아주었고, 지금은 아주 예쁜
두 딸의 어머니가 되어있습니다.
어느 날 딸이 어머니에게 얼굴이 왜 그리 되었느냐고, 또
왜 보육원에 갔느냐고 물어보다가 이불속에서 어머니를
자기 작은 팔로 꼭 안아주며 이렇게 이야기하더랍니다.
“엄마는 엄마가 없어서 참 불쌍하다.”
엄마는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는 아이들로 키우기 위해
자기가 항상 그래왔듯이 ‘감사하는 마음’을 키워주자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넘어져서 피를 흘리고
있을 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예은아, 넘어졌는데 이것밖에 안 다쳤네. 이이고 참 감사하네.”
며칠 뒤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아기가 손에 피를 흘리며
어머니에게 뛰어왔습니다.
“엄마, 넘어졌는데 이것밖에 안 다쳤어요. 참 다행이지요?”
이렇게 김희아씨는 아주 작은 것들에서 감사를 찾아냈습니다.
그 감사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결국 자기를 낳고
버린 어머니께도 미안하고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예은이가 저에게 보여주는 재롱을 제가 부모님께 보여드리지
못해 저는 너무 죄송합니다. 이렇게 아픈 모습을 가지고
태어나서 어머니 모습을 아프게 해 주어서 죄송합니다. 저는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세상에서
이렇게 일찍 놓아주셨기에, 보육원의 단체생활을 통해 빨리
아프고 빨리 슬프고 빨리 눈물을 닦을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아픔이 없었다면 감사도 몰랐을 것입니다. 저에게 슬픔이
없었다면 기쁨도 몰랐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김희아씨를 보며 이런 말도 한다고 합니다.
“밥맛이야, 내가 네 모습이면 벌써 죽었다.”
저의 뒤통수를 세게 때리는 김희아씨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저니까... 감당할 수 있으니까... 저에게 주어진 것이고, 저에게
어울리니까 저에게 있는 것입니다.”
‘어울린다!’는 말, 크게 다가왔습니다.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은 지금의 나의 모습입니다.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사람도
지금 함께 살고 있는 그 사람이고,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재산도 지금 가지고 있는 그만큼의 재산입니다. 만약 그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 왜 그만큼 나에게 주지
않으시느냐고 불평하지 말고 왜 그것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먼저 노력하지 않았는지부터 생각해봐야겠습니다.
하느님은 나에게 어울리는 만큼 베풀어주십니다.
오늘 제자들의 모습은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는 자리를 바라고
있는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낮아지라고만
하십니다. 낮아지라는 말은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지금의
나의 처지가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이니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지금 나의 처지에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사람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무엇을 청할 것인가?
2013년 다해 2월27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
마태오 20장 17-28절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을 청할 것인가?>
이런 경우를 한번 가정해볼 수 있겠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몸이 시름시름 아파 진단을 받았더니, 결과는 청천벽력, 이미
병이 진행될 때까지 진행되어, 의사 왈,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아있는 가족들 생각하며 큰 충격과 근심에 사로잡혀 집에
오니, 그런 아버지의 내막도 모른 채 부인은 다른 날보다 더
바가지를 심하게 긁습니다. 큰 아들은 지난번 시작하자마자
말아먹은 사업 정리도 끝나지 않았는데, 또 다른 일 시작하게
자금을 청하고 있습니다. 철없는 둘째 아들은 지금 차도
멀쩡한데 외제차로 바꿔달라고 떼를 쓰고 있습니다.
자신은 얼마 있지 않으면 떠나가야 할 시한부 인생인데, 그게
너무 억울해 죽겠는데, 누군가에게 하소연하지도 못하고
가슴이 답답해 미치겠는데, 그런 자신의 속마음은 눈꼽만큼도
몰라주고 엉뚱한 청을 해대는 가족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제자-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의
어머니가 그랬습니다. 예수님 앞에는 이제 생각만 해도 살
떨리는 수난의 길이 남아있습니다. 너무나 끔찍한 길이기에,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예수님이셨지만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길이었기에, 그 길만이 인류 모두를 위한 길이었기에,
어금니를 꽉 깨물고 올라가는 예루살렘 길이었는데, 그 길에서
두 제자가 청하는 것을 보십시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가만히 따져보니 위 부탁은 공공연하고 명백한 인사 청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하지 말아야 할 불공정 행위이자
불법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무 개념하고 한심한 가족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그들의 모습에 또 다른 열 제자가 분개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 아직도 제대로 영적 눈을 뜨지 못한
제자들, 십자가의 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제자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생각해봅니다.
엉뚱한 것을 청하고 있는 두 제자들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청할 것인가, 한번 생각해봅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교회 공동체 생활을 통해 무엇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
묵상해봅니다.
친절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명확하게 정답을 가르쳐주시는군요.
섬김과 봉사입니다. 겸손과 예수님 십자가 길에로의 동참입니다.
이왕 청할 것이라면 지극히 작고 세세한 것이 아니라 큰 것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잠시 우리 손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갈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영속적인 것,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다른 사람은 나의 경쟁 상대가 아닙니다.
주교님 두 분과 함께 하는 교구청 MT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또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께서 기도해주시고 염려해주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진심을 감사하고요... 또 이 힘으로 열심히
살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 그럼 오늘의 묵상입니다.
옛날 사진을 보다가 재미있는 장면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글쎄 사람들이 쓰고 있는 안경이 모두 커다란 잠자리 안경이라는
것이었지요. 얼굴의 대부분을 가릴 만큼 커다란 잠자리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에 ‘참 촌스럽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어떠했을까요? 그 당시에는 단 한 번도 촌스럽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안경을 쓰지 않고
있는 다른 친구들에게 왜 이런 안경을 쓰지 않냐고 말할
정도였지요.
유행에 참으로 민감한 우리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행이 정말로 우리를 지켜주고 어떤 큰 도움을
주었을까요? 아닙니다. 단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 때문에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는 유행을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자녀들의 교육 문제 역시도 유행을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옆집 아이가 영어유치원을 다니고 있으면, 동네 유치원을 잘
다니고 있는 자기 집 아이가 뒤처지는 것 같아서 불안해한다고
하지요. 그러나 좋은 유치원을 나오지 못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저는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습니다. 사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유치원 다니는 아이도
또 학원을 다니는 아이도 별로 없었습니다. 대부분 동네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신나게 놀았습니다. 이렇게 어렸을 때
공부는 안 하고 신나게 놀았다고 지금 제가 실패자가
되었습니까?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을 우리 마음에서
사라지게 해야 합니다. 특히 남을 이기는 것을 통해서 이
불안을 없애려고 한다면 분명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나아지는 것보다 남이 퇴보하는 것에 더
집중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나의 경쟁 상대가 아닙니다. 함께 걸어가야
하는 동반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남과 다르다는 사실에
집중하면서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과 멀어지려고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마음에서 이기심과 욕심이 자리
잡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다가와 청합니다. 즉, 하늘나라에서 이 두 아들이 예수님의
양쪽에 나란히 앉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이었습니다. 자기
아들의 동료 제자들을 경쟁상대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청을 했던 것이지요. 만약 경쟁상대가 아니라, 함께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라고 생각했다면 과연 그러한 청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누가 그 옆에 있든 상관없이 언제나
주님의 뜻을 잘 실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것을 말씀하시지요. 따라서 우리 역시 주님을
따라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만나는 그 모든 사람은 나를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섬겨야 할 사람들임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더욱 더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단지 지켜보기만 해도 많은 것을 관찰할 수 있다(요기 베라).
교구청 MT를 함께 갔던 제3호차 승합차에 탄 신부들입니다.
내게서 좋은 향기를 품어내게 하려면?
책을 보다가 잘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았습니다. 모과라고
해서 항상 좋은 향기를 내는 것은 아니라고 하네요. 글쎄
모과가 좋은 향기를 그윽하게 낼 수 있으려면 서리를 맞아야
한답니다. 만약 서리를 맞지 않는다면 모과는 아무런 냄새도
풍기지 않는답니다.
이 사실에 우리 인간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사람 역시 된서리를 맞아야만 인간 고유의 향기를 나오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시련 없이 사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다 주어진 환경이 가장 큰 행복을 만들
것 같지만, 오히려 어떠한 삶의 향기를 풍기지 못하고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를 쉽게 접하게 됩니다.
결국 고통과 시련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좋은 향기를
품는 고귀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고통과 시련을
청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금 내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절대로 좌절하고 포기하지
마시고, 지금이 바로 좋은 향기를 품어낼 수 있는 순간을
만드는 것이라는 희망으로 고통과 시련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진리로 언제나 인류를 지켜가야 할 말씀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교리적으로도 창조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이지요. All men are created equal.
새 사람들이 정치를 하기로 나서는 한국에 맞는 오늘의
성구입니다. 백성 위에 군림이나 세도를 부리지 말라 하시는
성경구절이지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진리로 언제나 인류를
지켜가야 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마태오 20,15)”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의 묵상 글 -
◈ [수도회] 정제천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죽음의 행진을
하시는 도중이다. 예수님께 자신의 두 아들을 바친 어머니가
예수님 앞에 나서서 엎드려 절했다. 그리고 두 아들에게
개국공신으로서 포상을 해주십사고 간청했다. 따름의 대가를
요구한 것이다. 이는 일회적인 과거 사건만이 아닐 것이다.
지금 나에게서 그리고 주변에서 발견되는 보상심리의 흔적들을
모아보자.
예수님은 제자들의 ‘엄마’가 하는 간청을 완곡하게 거절하신다.
그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하신다. 당신을 따르는 대가 또는 보상에 대해 무관심하기를
요청하는 말씀이다. 깊이 머물고 싶은 부분이다.
이어서 권력에 대한 예수님의 철학을 전개한다.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대통령이
국민을, 국회의원이 시민을, 선생이 학생을 존경하고 섬기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예수님이 남기신 가장 강렬한 메시지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목숨을 다
바쳐서 ‘섬기는 리더’가 다스리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다.
예수님이 꿈꾸시는 그 나라다.
- 정제천 신부(예수회) -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이해욱신부
<斷想> 3.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산 속에 들어가 혼자 사는데, 누가 그렇게 거룩하게 못 살아!"
이것이 내가 요즘 도전받고 있는 말이다. 이에 대한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먼저, 누구나 다 "혼자" 산 속에 들어와 살 수
있는가를 묻고 싶다.
나를 찾아오시는 신부님과 신자 분들께 가끔 듣게 되는 말이,
"야, 이렇게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곳에서 산다니, 정말 참
부럽다. 그런데 며칠 쉬면서 있을 수는 있어도 여기서 살라고
하면 나는 못살아!"라는 말이다.
산 속에 들어가 살기로, 그것도 다른 사람과 함께가 아니라
자기 혼자서 산 속에 들어가 살기 위해서는 "어떤 큰 이유"가
있어야 하며 그에 따른 정말로 "큰 결심"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내가 잘나서 산 속에 들어와 살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너무 못나고 잘못 살아서 산 속에서 살기로 결심한
것이고 그래서 지금도 이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나 산 속으로 들어와 혼자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오직 하느님 때문에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고, 그래서 부족하지만 그 부족함마저 하느님께 온전히
내맡겨 드리고 예수님을 본받아 거룩하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삶을 아무나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지리산 산속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4년 수개월이
되었다.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놀란 것은 적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더 높은 질의 삶을 살기 위해 깊은 산 속에서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참으로 자신의 영적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또 다른 이들을
향해 열려진 마음으로 거룩하게 사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많이들 벽을 쌓고 혼자만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려 노력하는 삶은 절대로 아무나 살 수 없다.
그러한 삶은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포기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강한 열망과 그에 따른 하느님의 도우심, 즉 하느님의 은총의
합작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과거에 나는 하느님 앞에 부끄럽게 살아왔다.
지금도 참으로 많이많이 부족하다.
겸손함을 가장한 말이 아니다.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참으로 커졌고
과거에 비해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려
많이 기쁘게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부족한 나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려
나를 사용하고 계심을 "굳게 확신"한다.
나는 내 삶을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께 나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리고, 온전히 그분의 이끄심에 전적으로 따르려 노력하는
삶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뜨거운 눈물의 감사를
자주 올려 드리고 있을 뿐이다.
나는 산 속으로 들어가 거룩하게 사시는 분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참으로 간절히 바란다.
그 한 사람 한 사람들로 인하여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 땅에
얼마나 널리 세워지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내 마음이 참으로
기쁘기 한이 없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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