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 모듈성(massive modularity) 테제를 받아들이는
진화 심리학자들은 영역-특수적(domain-specific) 심리
기제들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질투에 전문화된 기제, 언어
학습에 전문화된 기제, 근친상간 회피에 전문화된 기제, 친족
인지에 전문화된 기제, 음식 선호에 전문화된 기제 등 수도 없이 많은 기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반면 전통적 인지 심리학자들은 영역-일반적(domain-general) 심리 기제들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인
기억 기제, 일반적인 추론 기제, 일반적인 학습 기제, 일반적인 보상(쾌감) 기제, 일반적인 고통(불쾌) 기제
등 그 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 어떤 이들은 영역-일반적
기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대량 모듈성 테제가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논쟁에서 양측 모두 영역-특수성과 영역-일반성이 상호배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즉 어떤 기제가 영역-특수적이라면 그 기제는 영역-일반적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뇌 속에 오직 하나의 기제만 존재한다면 그야말로 영역-일반적
기제다. 왜냐하면 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즉 모든 영역의 일을 그 기제 혼자서 다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에는 이 기제는 영역-특수적이지 않다. 하지만 뇌에 오직 하나의 기제만 있다고 주장하는 심리학자는 사실상 없다.
만약 뇌 속에 단 두 개의 기제만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두 기제는 어떤 면에서는 영역-특수적이다. 왜냐하면 두 기제가 어느 정도 분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뇌 속의 기제 또는 모듈의 수가 아주 적다고 생각하는 심리학자도 두 개 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각 기제는 영역-일반적인가, 아니면
영역-특수적인가? 한편으로 시각 기제 또는 시각 모듈은 영역-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눈으로 음식을 보기도 하고, 짝짓기 대상을 보기도 하고, 맹수를 보기도 하고, 지형을 보기도 하고, 별을 보기도 하고, 자신의 몸을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시각 기제는 온갖 영역의
정보를 처리한다. 다른 한편으로 시각 기제는 영역-특수적이다. 왜냐하면 청각도, 기억도, 논리
추론도, 음식 선호도 아닌 시각 영역이라는 특수한 영역을 다루기 때문이다.
시각 기제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영역-일반성과 영역-특수성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시각 기제는 어떤 기준으로 보면 영역-일반적이지만 다른 기준으로 보면 영역-특수적이다. 즉 영역-일반성과 영역-특수성은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온갖 영역에서 힘을 발휘하는 학습 기제가 있다는 것이 확실히 입증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즉, 피아노 학습에도 쓰이고, 타자
학습에도 쓰이고, 운전 학습에도 쓰이고, 미적분 학습에도
쓰이고, 야구 학습에도 쓰이는 매우 일반적인 학습 기제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하자. 이 학습 기제는 어떤 면에서 보면 영역-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온갖 영역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영역-특수적이다. 왜냐하면 기억도, 추론도, 시각도, 음식
선호도 아닌 학습에 전문화한 기제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학습 기제는 동시에 영역-일반적이기도 하고 영역-특수적이기도 하다. 이것은 시각 기제가 동시에 영역-일반적이기도 하고 영역-특수적이기도 한 것과 꼭 마찬가지다.
일반적인 학습 기제가 존재한다는 것이 입증된다고 대량 모듈성 테제가 타격을 받나? 전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일반적인
학습 기제의 존재가 입증된다면 모듈의 존재가 하나 더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대량 모듈성 테제에는 도움이
된다.
만약 일반적인 학습 기제도 존재하고, 일반적인 기억 기제도 존재하고, 일반적인 추론 기제도 존재하고, 일반적인 쾌감 기제도 존재하고, 일반적인 불쾌 기제도 존재한다는 것이 확실히 입증된다면 대량 모듈성 테제 지지자들은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입증된 모듈의 수가 5개나 더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매우 일반적인 시각 기제, 청각 기제, 후각 기제 등의 존재가 대량 모듈성 테제에 타격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화 심리학자들과 전통적 인지 심리학자들이 이 뻔한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된다.
이덕하
2011-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