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구름이 그렇게나 단단히 걸었던 빗장을 풀었다. 기다렸다는 듯 햇살이 축복처럼 쏟아져 내린다. 불 가마 속 같던 교실의 복사열을 식혀주며 사흘이나 지루하게 내렸던 장맛비다. 햇살이 돋자 어린이들이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며칠동안 답답한 교실에만 갇혀 지냈으니 그럴만도 하다.
마침 요즘 과학시간에 배우는 단원이 '흙을 나르는 물' 이기도 해서 어린이들을 데리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빗물을 머금은 나뭇잎이 한결 싱그럽고, 허리가 꺾여 꽃을 피우지 못했던 붉은 아카시아 묘목은 며칠 못 본 사이 가장귀 새순이 부쩍 자라올라 늦둥이 꽃송이까지 달았다. 고난이 올지라도 절망하지 않고 꿋꿋이 제 할 일을 해내고야마는 나무의 의지가 새삼 놀랍다.
물 빠짐이 나쁜 운동장 가장자리에 발자국 몇이 물에 잠겨 있다. 요즘 아이들의 발, 참 크기도 하다. 빗물이 한 가득 담긴 커다란 발자국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하늘이 말갛게 비치는 물 속에서 어린 지렁이 한 마리가 꼬물대고, 잔잔했던 수면을 실바람이 간질이자 물결이 갈갈거리며 달아난다.
구름사다리와 늘임봉이 있는 곳에도 우리보다 먼저 다녀간 꼬마가 있나 보다. 한 뼘도 안 되는 작고 앙증맞은 발자국이 앞으로 가다가 이내 뒤로 돌아서 나오고 있다. 아마도 젖니 두어 개쯤 빠진 1학년이겠지. 물이 아직 빠지지 않은 것도 모르고 체육기구에 가까이 가다가 깜짝 놀랐으리라. 작은 발자국 옆에 내 발자국을 가만히 찍었다. 눈 온 날 아침 엄마와 함께 나란히 걷던 발자국처럼.
어린이들과 이곳 저곳을 돌아보고 교실로 들어오면서 내가 찍어놓은 발자국을 다시 한번 보았다. 230밀리미터의 작은 발이지만, 더 작은 발자국 때문에 상대적으로 내 것이 아주 크게 보인다. 이런 발자국만 보아도 사람들의 걸음새가 짐작된다. 발자국이 종종종 나 있으면 급히 어딘가를 가는 것이고, 성큼성큼 나 있으면 여유롭게 걷는 사람일 것만 같다. 내 발자국은 누군가에게 어떻게 비쳐질까? 또, 이런 물리적 발자국뿐만 아니라 살아오면서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남겨 놓은 발자국은 어떤 모습일까.
며칠 전, 모임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침 동승한 사람들 사이에서 한사람의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지금 어느 학교의 관리자이다. 그런데, 두 분의 이야기 말미가 이구동성이다.
"그 사람 , 자기보다 더 똑똑한 사람은 눌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그이 가는 곳에는 불협화음이 꼭 한번씩은 있어."
나도 그 분과 함께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인물 훤하고, 경우 바르며, 무슨 일이든 완전무결하게 처리하는, 업무처리 면에서는 능력 있는 분이다. 하지만 그 분과 이야기할 때면, 명쾌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개운치가 않았었다. 허허허, 웃는 너털웃음 뒤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성정이 있고, 칭찬을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 신랄한 비판이 돌아올지 모르는 분이라 나도 모르게 경계가 되곤 했었다.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을 때, 꽤 오랜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반갑지 않던 기억이 있다. 그 날, 차 한 잔도 나누지 않고 돌아오면서 오래 생각했다. 사람 사이의 관계란 똑똑하고 입바른 소리 잘하는 사람보다는, 다소 부족해도 인간적인 체취가 풍기는 사람만이 오래 남는 것, 그리고 아무리 지식기반 사회라고는 하나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으니, 사람의 향기는 바로 후덕함에서 나오는 것임을.
몸담았던 직장 어디라도 떠난 이의 발자국에 대한 평판은 남게 된다. 그리고, 한사람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그 사람이 떠난 후에 향기처럼 남는 것이다. 내가 근무했던 곳이 어언 일곱 학교. 그 동안 수많은 동료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그들에게 내 발자국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꽃으로 피어나고 있을까, 아니면 썩은 나무등걸처럼 남아 있을까.
아무쪼록 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 괜찮은 사람이야!" 하는 말을 해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아니, 아서라.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도 좋으니 누구의 가슴에 부디 추한 발자국으로나 남아있지 않기를.
첫댓글 따끈한 글 맨 처음 읽고 갑니다. 어린이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 언제라도 그 뒷모습이 아름다울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다양하니 다양한 뒷모습도 있겠지요. 섬세하게 세상을 읽어내시는 하늘나리님은 아마도 뒷모습이 참 아름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수애님.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 제 희망사항입니다.
아, 하늘나리님이 마치 내 얘기를 하신 듯합니다. 가슴이 뜨끔합니다. 제 성격이 호불호(好不好)가 너무 분명한 탓으로 대인관계가 매끄럽지 못하여 늘 후회하곤 하지요. 열심히 산다고 하지만 부끄러운 발자국을 남기지나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호불호, 저도 그렇습니다. 예와 아니오 사이의 '글쎄'가 인정되지 않아서 마음 고생을 많이 합니다. 선생님께서야 그러실 리가....졸고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땅콩이면 다 땅콩이냐 고소해야 땅콩이지(땅콩장사)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승객)아주 오래전에 버스안에서 들은 얘기입니다
ㅎㅎ 맞는 말씀입니다. 못난 자식도 자식은 자식이니까 저같이 예쁜 발자국 못남기는 사람도 사람으로 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