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부름 / 잭 런던 / 햇살과 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The call of the wild
미국 남쪽의 농장에 살던 60kg이 넘는 개 '벅'이 뜻하지 않게 추운 북쪽으로 팔려가서 겪은 모험담이다.
저자 잭 런던의 경험담과 귀동냥했던 내용을 근간으로 쓰인 이야기이다. 골드러쉬가 있었을 무렵, 지금의 카나다와 알레스카 지역처럼 추운 지역에서 개가 우편 통신과 이동의 주요 부분을 담당했을 때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비교적 따스했던 지역, 판사의 저택에서 멋진 생활을 했던 주인공 '벅'은 주인 몰래 정원사 조수인 매뉴얼에 의해 개장수에게 팔려 북쪽 추운 지역에서 썰매를 끄는 처지가 된다. 거대한 몸집에 영리하기까지 했던 '벅'은 이내 환경에 적응하여 최고의 썰매 개가 된다. 첫 번째 주인을 잘 만나 현실에 쉽게 적응을 했지만, 두 번째 주인부터는 그렇지 못했다. 개에 대한 애정이 없고 더욱이 개 썰매에 대해서도 무지한 주인을 연거푸 만난다. 급기야 동료들이 하나둘 피로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그는 더는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로 작정한다. 화가 난 주인이 몽둥이로 쳐서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존 숀턴'이라는 사람에게 '벅'은 구원을 받는다.
'벅'의 생활은 "숀턴'을 만난 후부터 완전히 달라진다. 숀턴으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는다. 받은 사랑의 힘이었을까, 죽음에서 구해준 것에 대한 보응이었을까. 자신의 몸을 던지면서 '벅'은 주인을 따른다. 거친 사나이들 사이에서 숀턴을 지키는 경호원 역할을 잘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문턱에 이른 그를 구하기도 한다. 일약 스타의 자리에 오른 덕분에 위기에 빠지기도 하지만 엉겁결에 주인의 호주머니를 두툼하게 만들기도 했다.
돈을 쥔 손턴도 금맥이 있다는 전설의 오두막집으로 향하고, 적지 않은 시간을 방황하다가 사금이 나오는 장소를 발견하여, 채취 작업에 몰두한다. 야영지에서 특별한 일이 없는 '벅'은 숲에서부터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한 두 시간 야양지를 떠나는 것에서 하루 이틀을 넘어 수일을 야영지를 떠나기도 한다. 늑대 친구를 사귀기도 하고, 혼자의 힘으로 사냥을 즐기기도 한다. 작은 토끼에서 시작한 사냥은 일 톤이 훌쩍 넘는 사슴을 사냥하기도 하고, 곰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야기 전개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곱이라 볼리우는 자, 이스라엘의 아들인 "요셉"의 생애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지만, 형제들은 속으로 질투한다. 급기야 형이 그를 상인에게 팔아버린다. 팔려 간 곳은 이집트의 고위 공무원의 집이다. 종으로 지내면서 수려한 용모와 성실함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을 수행하지만 집의 안주인의 모함에 빠져 투옥된다. 극적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이집트를 구하고 가족을 구하는 사람이 되는 이야기이다.
'벅'의 일대기도 여기까지는 비슷한 것 같다. 그러나 '벅'은 평안한 삶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지만 자신의 뿌리를 찾는 일을 한다. '벅'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 오랜 세월 잊어온 자신을 찾아간다. 그의 몸에 감추어진 야성을 찾는 과정이다. 야성은 성급함 생각없음이나 무모함을 말하지 않는다. 길이 참는 인내, 꾸준한 관찰을 통한 결단과 승리를 담보하는 도전 정신을 찾아간다. 야성(野性)은 자연 또는 본능 그대로의 성질이다. 그는 그것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언제나 자신의 감성 앞에는 '숀턴'이 있다. 자신을 찾아 자연을 구가하다가 늘 야영지로 돌아온다.
오랜 시간 야영지를 떠났던 '벅'이 다시 손턴의 자리에 찾는다. 그러나 그 자리에 그는 없고, 동료 개들과 손턴의 친구들은 주검으로 변해있었다. 주인을 찾았으나 그의 흔적은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주인이 늘 추구하던 노란 물과 함께. 그는 주인의 죽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주인의 죽음에 대한 응징으로 손턴의 야영장에 있던 인디언 앞에 죽음의 사자로 모습을 드러낸다. '벅'은 자기 앞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숨통을 끊어 놓는다. 그 후 인디언들은 '벅'을 "유령 개"로 부르게 된다.
인간이 만든 기계가 우수하다고 하는 최근에도 개가 이끄는 썰매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한다. 단순히 이동 수단만이 아닌 네비게이션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보호자 역할을 하기도 하며 친구의 자리를 대신하기도 한다. 썰매 개의 활약을 영상으로 확인하려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에이트 빌로우, Eight Below, 2006]를 통해 충분히 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명체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의 모든 부분을 기계가 대신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리라...
영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최근에 접했던 [혹성탈출-종의 전쟁, 2017]이 떠오른다. 인간과 유인원의 전쟁이지만, 유인원을 인간으로 바꿔도 그대로 통하는 줄거리임을 부인할 수 없없다. 약자와 강자는 어느 시대 어느 환경에서나 존재하지만 그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사람이라면, 자연에 속한 생명체라면 모두 피부로 알고 있는 것인데, 그 작은 손바닥과 크지도 않은 배를 채우기 위해 관계를 무시하고 자신의 탐욕만을 쫒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가 가지고 있는 어두운 부분인 듯 하다. 내가 사는 동네의 한 PET SHOP의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진 현판이 걸려있다.
The greatness of a nation and its moral progress can be judged by the way its animals are treated. - Mahatma Gandhi
위의 글은 동물이 아닌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통해서 그 사회의 성숙도를 점검해 볼 수 있다는 것으로 바꾸어 해석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는 견공이고, 혹성탈출에서는 유인원에 해당하는 약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참고할 만하다. 또한 역으로 내가 약자의 위치에 있을때 - 상대적으로 그 위치에 처하는 경우는 많다 -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누구를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참고할 만하다.
언제 어디서나 나의 본분을 잃지 않고 또한 나를 포함한 우리를 생각 할 수 있다면 야성의 부름에 언제든지 응답할 수 있으며, 그 응답은 항상 자연스러운 것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017.10.16 평상심)
첫댓글 감동적이네요
찾아서 읽어야겠어요
https://discover.elgar.govt.nz/iii/encore/record/C__Rb3375584?lang=eng
책은 오늘 반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