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그마, 예수님의 흔적(갈6:14-18)
2022.8.7(김상수목사)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영국 런던에 조지프라는 잘생긴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조지프의 엄마는 얼굴 화상으로 인해서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조지프의 친구들은 그런 엄마를 둔 조지프를 놀리면서 왕따 시키려 했다. 그래서 어느 날 화가 난 조지프는 “엄마의 얼굴은 왜 그렇게 일그러진 거야?”라고 하면서 울분을 터뜨렸다. 그러자 엄마는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고 결심한 듯이 장롱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그 사진에는 젊고 예쁜 엄마의 모습이 있었다. 깜짝 놀란 조지프는 예뻤던 얼굴이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엄마가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돌이 막 지났을 때 너를 집에 뉘어놓고 잠깐 장 보러 마트에 갔단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데 그 사이에 집에 불이 났더구나. 불이 이미 많이 번졌지만 엄마는 너를 구하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들었단다. 엄마가 너를 품에 안고 그 불 속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네가 지금처럼 잘 생긴 아들로 자랄 수 있잖니!"
조지프는 엄마의 일그러진 얼굴은 자기를 불 속에서 구하기 위한 사랑의 흔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다. 그때부터 조지프는 엄마의 일그러진 상처를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는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이며,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의 평생의 자랑거리이다,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6장 14절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는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했다. 다 같이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면서 읽어 보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결코”라는 표현이 유난히 마음에 더 와 닿는다. 이 말은 다른 것에는 일절 관심을 두거나 자랑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겠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선언은 그의 신앙고백인 동시에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믿음의 결심이기도 하다. 이 고백과 결심이 이 시간 우리의 고백과 결심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왜 이런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본문의 내용 속에서 그 중요한 이유들 중에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흔적”이라는 말이다(갈6:17). 다함께 읽어 보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여기에 쓰인 “흔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티그마(στίγμα)”인데, 그 뜻은 낙인을 뜻한다. 고대에는 주인이 자신의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해서 포로나 노예의 이마에 바늘로 찔러서 문신을 새기거나 또는 짐승의 엉덩이에 화인(火印)을 찍었다. 바로 이 문신이나 불도장이 바로 스티그마(흔적)이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이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는 말은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며,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겠습니다. 나는 내 몸에 있는 스티그마를 볼 때마다, 죄인 중의 괴수였던 나를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몸에 지녔던 예수님의 흔적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가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로 인해 몸에 생긴 수많은 상처들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쉽게 말하면 전도하고 선교하면서 생겼던 영광의 상처들이다. 실제로 사도 바울의 팔과 손은 빌립보 감옥에서의 차꼬와 채찍 자국이 있을 것이고(행16장), 그의 온 몸 구석구석에는 루스드라 등에서 돌아 맞을 때 생긴 수많은 깊은 상처들이 있었을 것이다(행14장). 심지어 그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기도 했다(고후11:24). 오죽하면 이때를 회상하면서 살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을까?(고후1:8-9)
본 설교자도 왼쪽 눈을 1977년(초등학교6학년) 이리역 화약폭발사고 때 다쳤다. 그래서 그 영향으로 지금도 안경을 쓴다. 시력이 약하고 안경을 쓰는 한은 그때의 기억은 잊혀질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사도 바울도 매일 몸을 씻을 때마다 몸에 난 상처들을 보면서 복음 때문에 당했던 끔찍한 기억들이 생각났을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보면서 첫사랑과 사명을 늘 새롭게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 평생을 살면서 여러 흔적들을 남긴다. 어떤 여행객이 머물던 자리에는 쓰레기만 남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죽은 후에는 쓰레기 같은 것들만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살든지 죽든지 늘 예수님의(예수님을 믿는 또는 믿었던)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어떤 흔적은 마음에 남아 있을 수 있다. 과거에 큰 상처와 고통이 있었지만, 주님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회복했던 기억들은 마음에 남아있는 은혜의 흔적들이다. 사도 바울처럼 전도의 흔적들도 있을 수 있다. 내가 전도한 사람이 바로 내가 걸어왔던 신앙의 흔적이다. 기도의 흔적들도 있고, 생활의 흔적들도 있다. 부모님이 남기신 손 때 뭍은 성경책, 국내외에 건축한 교회건물이나 주님께 바친 성물들도 다 이런 범주에 속한다.
또 어떤 흔적은 사도 바울처럼 몸에 남아 있는 흔적들도 있을 수 있다. 상처나 수술의 흔적들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볼 때마다 나를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싸인으로 이해해야 한다. 때로는 아직도 여전히 남아있는 통증들까지도 더욱 나를 낮추시고 겸손하게 하시려는 은혜의 흔적에 해당할 수 있다. 어떤 흔적들이든지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볼 때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총을 기억하고,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해지고, 더욱더 사명을 새롭게 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많은 예수의 흔적을 남기는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한다. 우리 모두는 기도의 흔적, 전도-선교의 흔적, 사랑의 흔적, 전도의 흔적 그리고 더 많은 은혜의 흔적들을 많이 남기자. 이러한 삶이 곧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삶이다.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생전에 기도를 많이 해서 낙타무릎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름다운 기도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기독교 초기의 신학자였던 유세비우스(263-339)는 그의 책 “교회사”에서 야고보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홀로 성전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모든 인간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래서 야고보의 무릎은 낙타의 무릎처럼 딱딱해졌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를 의인 또는 오블리아스라고 불렀는데, 오블리아스는인간의 방파제이며 의로움이라는 뜻이다.”(유세비우스 “교회사” 2-23)
실제로 낙타는 수시로 주인을 위해 무릎을 꿇는다고 한다. 하루를 시작할 때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짊어진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루 일을 끝마칠 때면 주인이 등에 있는 짐을 다 내릴 때까지 또 무릎을 꿇는다. 볼품없이 툭 불거진 낙타의 무릎은 주인에 대한 순종과 복종의 흔적이다. 야고보는 낙타 무릎이 되기까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중보기도를 통해서 방파제와 같은 역할을 했다.
우리들도 야고보처럼 또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처럼 낙타무릎의 흔적을 남기자.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에, 이 지역 주민들과 하나님 사이에 기도의 방파제가 되자. 설령 무릎이 아파서 구부리지 못한다 해도, 매일 마음의 무릎을 꿇어야 한다. 이러한 모습들이 십자가만 자랑하기로 작정한 성도들의 귀한 모습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한 평생을 살면서 어떤 사람은 은혜롭지 못한 흔적을 남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들 보기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우리들이 어떤 흔적을 남겨야 할지는 분명하다. 십자가는 나를 위한 하나님의 처절한 사랑의 흔적이며,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의 평생의 자랑거리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처럼 내 안에 있는 주님이 새겨주신 흔적들을 보면서 그동안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명을 늘 새롭게 하자.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삶은 사도 바울처럼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결심하자. 이것이 다양한 형태의 예수님이 흔적을 가진 사람들의 마땅한 모습이며, 이 시간 나(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시다. 주님이 우리와 늘 동행하고 계심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