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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g no. 흉노
한 漢의 대승 大勝
흉노는 선우 아래 좌현왕과 우현왕을 두고 있다.
한무제 당시의 흉노는 이치 선우 아래에 좌현왕 곤야왕과 우현왕은 휴도왕이 각각 영토를 관할하고 있었다.
한무제 즉위 후 비장군 이광과는 십수 년간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한무제가 심혈을 기울여 육성시킨, 흉노의 기마병 못잖게 잘 훈련된 한군의 정예 기마병이 투입되고, 위청은 그 기마병들을 인솔하여 북쪽 고비사막으로 먼저 올라갔다가 남으로 내려와 흉노의 배후를 습격하였다.
흉노는 처음 보는 신출귀몰하는 전술을 구사하는 한나라군에 여러 차례 패배를 당했다.
위청의 한군은 전리품으로 포로 수천 명, 말과 양 100만수 이상을 노획하여 서안 西安으로 개선하였다.
한은 흉노를 상대로 하여 소규모의 국지전 局地戰에서는 몇 번 이겨 보았으나, 전면전에서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영토도 오르도스 (Ordos) 지역까지 회복시킨 후, 만리장성 너머 북쪽까지 확장되었다.
감개무량 感慨無量한 한무제,
할아버지의 아버지인 한 고조가 당한 백등산 전투의 ‘평성의 치’ 이후 60여 년간을 흉노에게 고개를 들지 못했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설욕했다는 감격에 어쩔 줄 모른다.
위청에게 대장군이란 큰 벼슬을 내리고, 황궁에서 갖가지 병법서 兵法書를 동원해 조련한 또 다른 비밀병기인 소년장수 곽거병을 전방에 투입 시킨다.
8. 휴도왕의 피살 休屠王 被殺
- 휴도.
‘사기’ 흉노전에 의하면 흉노도 조선과 같이 5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천제 天帝를 형상화한 동인(銅人: 흉노와의 전쟁에 이기고 약탈해온 금인 金人)을 ‘휴도’라고 했으니, 바로 ‘수두’의 음역이고, 휴도의 제사를 맡은자를 휴도왕 休屠王이라 했으니, 또한 단군이라는 뜻과 비슷하다. 휴도에 삼룡 三龍을 사 祠했다 하니, 용은 신 神을 지칭하는 것으로 삼룡은 바로 삼신 三神이다. 흉노족 또한 수두교를 수입했다는 것을 의심할 나위가 없다. 고대에는 종교와 정치가 구별이 없어 종교상 제사장 祭司長이 정치상 원수 元首이고 종교가 전파되는 곳이 정치상 속지 屬地이니, 대단군 이래 조선의 교화 敎化가 지나.흉노 등 각 민족에게 널리 전파되었으로 이로 인해 정치상 강역이 광대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두는 ‘신단 神壇’이라는 뜻이다)
- 휴도. - 이상, 신채호 조선상고사 인용.
한편, 이치 선우는 대노 大怒했다.
흉노 역사상 이러한 참패는 없었다.
전투는 곧 승리라는 등식 等式이 흉노인들의 생활방식이자 자부심이다.
이때까지 전쟁에서 진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전투만 일어나면 으레 뒤따라오는 전리품들- 도검 刀劍 등 무기류와 소, 양, 젊은 여자, 금은보석, 비단 등….
그리고 초원 가운데서 밤을 지새우는 축제의 마당이 며칠간 벌어진다.
그런데 이번 3년간 몇 번의 전투에서는 전리품은 고사하고, 오히려 귀중한 많은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고, 말과 양의 손실과 더불어 삶의 터전인 소중한 땅까지 빼앗겨 버렸다.
이치 선우는 패전의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좌 현왕 곤야 왕과 우현왕 휴도왕에게 10일 후, 소집한다는 전령을 각각 보냈다.
그런데, 때마침 한군에서는 한무제의 인척이라는 곽거병이라는 애송이가 대군을 이끌고 고비사막 남쪽 진입로에 진 陣을 쳤다는 첩보가 왔다.
이치 선우는 패전의 책임은 다음에 묻기로 하고, 먼저
“좌현 왕과 우현왕이 협력하여 한군 漢軍을 치라”는 지시를 다시 내린다.
좌현왕 곤야 왕은 <고비사막 북서쪽 금산(金山: Altai Mt)선우의 군영으로 소집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은 지 3일 만에 다시, 반대편 고비사막 남쪽의 한군 漢軍을 치라는 지시를 받으니 무언가 께름직한 느낌이 들었다.
선우 군영의 참모진 중에서 가깝게 지내던 심복 수하에게 넌지시 알아보았다.
선우 진영 참모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의 패전 책임을 물어 처벌하려는 참에 또다시 한의 대군이 쳐들어와 문책을 잠시 미뤘다는 얘기다.
곤야 왕은 우현왕 휴도왕에 이 사실을 알리고,
“다음 전투에서 이기면 모르지만, 만일 패한다면 그 책임이 가벼이 끝날 사안이 아니다, 지난 몇 년간의 전투력을 분석해 보면 전투 장비나 군의 사기가 한 漢보다 뒤떨어져, 승리보다는 패할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이 현실적인 분석인바, 이참에 한 漢으로 귀순 歸順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치 선우의 성정 性情이 급하고, 과격하니 차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불리한 처지에서 굳이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울 필요 없이 항복 降服하자는 권유다.
밀서 密書를 받아보고 심각해진 휴도왕은 곤야 왕의 밀사 密使에게 일단,
“알았다”라고 한 후, 밀사를 돌려보낸 뒤 고민을 한다.
인척 姻戚이자 평생을 초원의 동지로써 친밀하게 지내온 곤야 왕이 이런 제안을 해왔다는 것은 그만큼 현 상황이 어렵고 위태로운 지경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곤야 왕의 서신 書信 그대로 군사 수가 적고, 무기가 노후화되었으며, 수년간 연패로 인하여 군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현 상황에서 적과의 싸움은 무모하다.
그렇다면 곤야 왕의 밀의 密意대로 항복한다. 그러면 목숨은 부지할 것이며, 애지중지 아끼는 부하들과 처, 자식의 안전은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흉노 역사상 적에게 왕 王의 직책을 가진 자가 항복한 사례 事例는 없었다.
만약 항복한다면 모든 것이 불리한 여건이었지만, (특히, 수적 數的인 열세 劣勢는 불가항력 不可抗力이다. 어쩔수 없다.)
자신의 죽음으로서 명분을 지킨 여러 선배와 조상님들을 뵐 면목 面目이 없다.
명분 名分과 실리 實利,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고심 苦心의 갈림길에 섰다.
밤새 고민하였으나 결론이 나질 않는다.
아침 해는 어느새 중천에 걸려있다.
하는 수 없이 왕비 알지 閼氏와 두 아들을 막사로 부른다.
흉노의 왕비 王妃는 알지 閼氏로 호칭한다. 알지가 곧 왕비라는 뜻이다. 선우의 부인인 황후는 연지(색조 화장품 연지. 곤지와 연관성이 깊다)라 호칭한다.
큰아들 태자 太子 일제 日磾는 쏘던 활을 손에 든 채 들어오고, 알지는 차남 윤 允의 손을 잡고 막사로 들어온다.
큰 왕자 일제는 13세이나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초롱초롱한 눈빛과 어느 정도 벌어진 가슴이 벌써 사내로서의 풍모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휴도왕은 연지와 두 왕자를 보고, “알지께서는 두 왕자와 함께 지금 즉시 부여의 요동 遼東으로 떠나도록 하시오”
알지는 순간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흉노족은 군인이라도 평시에는 말이나 양을 기르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행동한다.
일반적인 유목민의 모습이다.
소규모 전투가 일어나도 같다. 그런데 규모가 큰 전투가 발생할 조짐이 보이면, 가까운 안전한 장소로 여인네와 노약자들을 미리 대피시킨다.
이마저도 불안하다고 여길만한 대규모 큰 전쟁이 발생할 때는 흉노족의 본향(本鄕)인 알타이산맥(Altai 山脈)의 한 보금자리로 피신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휴도왕은 이도 저도 아닌 부여국 관할 요동으로 가라니….
물론 형제국으로서 부여국과는 언어도 어느 정도 통하여 의사소통에 별문제가 없고, 풍습이나 생활방식도 대동소이(大同小異)하여 가까이 지내는 사이이긴 해도 갑자기 처자식을 보고 그곳으로 가라니.
“멀잖아. 곧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는 있지만, 넓디넓은 우리의 터전을 놔두고 우리보고 요동으로 가라니 이해가 되질 않아요” 알지가 둘째 왕자 윤의 손을 꼭 잡으며 남편을 보고 말하자,
심각한 표정의 휴도왕 어렵게 입을 연다.
“지금 상황이 너무 어려워져서 차후로 뭐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우리 흉노의 영역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이 지역에선 우리 가족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말이요” 휴도왕의 표정이 비장하게 변한다.
알지로서는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온 남편이 저렇게 지쳐 보이고 고뇌가 가득한 표정으로 변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전투를 앞두고는 늘 활기차고 자신만만하게 전투 준비를 하면서, 병사들을 다독여 주던 남편이 오늘은 사람이 변한 것처럼 행동이나 말투가 다르다.
알지는 더 말하고 싶었지만, 남편의 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처자식에게도 차마 말 못 할 큰 고민이 있겠거니 하고 참고 있었다.
그러자 휴도왕은 “요동의 대릉하로 가서 고선우달 대군을 찾아가면, 나와는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며 허물없이 지내는 분이니, 당분간 생활하기에는 별문제가 없을 것이오” 하면서 박달나무 손잡이로 된 철단검(鐵短劍)을 알지에게 내어준다.
“이 단검은 청동검이 아니라 철로 된 아주 단단한 보검이요, 예전에 젊었을 때 고선우달 대군과 사냥을 나갔다가 화살에 설 맞은 호랑이에 몰려 위기에 처했을 때 내가 구해준 정표로 이 귀한 철 보검을 내게 선물로 준 것이요, 이것을 보여드리면 우리 가족임을 알 것이오”
“철(鐵)로 가볍고도 단단한 무기를 만드는 기술은 천하에 부여국의 제조기법이 제일 우수하다고 볼 수 있다오.”
“우리 흉노도 철검을 부여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하고 있다오, 그러니 한나라도 우리 흉노와 가까이 지내는 부여국이 밉지만, 기술이 모자라니 어쩔 방도가 없어 함부로 부여를 건드리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현재는 부여가 제일 안전한 곳이니 그쪽으로 가라는 것이요”
그러자 큰 왕자 일제가 “부왕 제 나이는 아직 용사의 기준점에 미달하나 기마술, 궁술은 누구 못잖게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전투에는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하자
휴도왕은 “너의 용기는 가상하다, 그러나 아직 키도 조금 더 커야 하고, 칼 다루는 법도 더 숙달되어야 한다. 더구나 지금 중요한 것은 너는 전투보다도 어머니와 동생을 보호하고 잘 지켜야 한다. 그것이 너의 할 일이다.” 딱 부러지게 일제에게 임무를 부여하자, 일제도 더는 떼를 쓰지 못하고 모후와 동생 윤과 함께 막사를 나와 간단히 떠날 짐을 꾸렸다.
그런데 이렇게 헤어짐이 부자지간(父子之間), 내외지간(內外之間)의 마지막 대면 對面이 되었음을,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한편, 곤야왕은 휴도왕에게 다녀온 밀사의 보고를 듣고는 고민 중이다.
항복하는데 동의한다는 것인지, 안 한다는 것인지, 명백한 의사 표현이 없다.
불안해진다.
그렇지만 휴도왕의 성정(性情)상 선우에게 고자질하거나, 단독으로 한군에게 항복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사람 일이란 알 수가 없다.
곤야왕은 비밀리에 흉노의 여러 진영에 이미 자기 심복을 곳곳에 심어 놓았다.
휴도왕의 참모진 7명 중에도 2명이 자신의 심복이다.
그래서 휴도왕에게 항복 권유 밀정(密偵)을 보낼 때, 다음날 해가 질 때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으면 휴도왕을 암살하라는 밀명을 이미 내려놓은 상태다.
그리고 곽거병이 이끄는 한군(漢軍)에도 우현왕 진영(陣營)의 위치를 미리 알려주고 오늘 밤 자정에 급습할 것을 요청하였다.
알지와 두 왕자가 부여의 요동으로 떠난 그 날 저녁, 그렇게 휴도왕은 자신의 게르에서 자신의 부하에게 허무하게 암살당하였다.
우현왕 소속의 군대도 한군의 야간 기습으로 머리 없는 뱀의 형국으로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휴도왕의 알지와 두 왕자도 부여국으로 가던 도중 다음날, 호위 군사들 3명과 함께 영문도 모른 채 포로가 되어 끌려 왔다.
그렇게 흉노족 우현왕의 관할 영역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 연지 燕脂
산 아래에는 홍람 紅藍이 있는데,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북방 北方의 사람들은 그 꽂을 따서 비단을 염색한다.
그리고 꽃봉오리중 선명한 것을 골라서 연지 燕支를 만든다.
부인들이 이것으로 얼굴에 바른다.
흉노 사람들은 황후를 알지 閼智라고 불렸다.
-동진 東晉의 사학자 습착지 習鑿齒 <여연왕서 與燕王書>
알지(알씨)閼氏의 발음은 ‘Yanzhi’이다.
연지(燕支, 燕脂, 烟支, 焉支)와 같은 발음이라는 것이다.
습착지가 말하는 ‘산 아래’는 바로 언지산(焉支山-燕支山)을 가리킨다.
지금의 감숙성 산단현 동남쪽에 있다.(하서회랑 河西回廊)
이산에는 ‘홍람 紅藍’이 많이 났다. 이 곳의 풍속은 부녀자들이 홍람의 꽃 즙을 내어 붉은 색조 화장품을 만드는 것이다.
흉노족이 황후를 ‘알지’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 아름다운 화장품의 안료에 비유한 것이다.
홍람은,
국화과에 속하는 1년생 초본 식물인 풀의 이름이다.
이 풀이 다 자라면 높이는 3자에서 4자 정도이고 여름에 홍황색의 짙은 꽃을 피우고, 잎은 파랗다.
그리하여 ‘홍람紅藍’이라고 불렸고 또, 다른 가공을 하여 여인들의 화장품으로 쓰이는데 그게 ‘연지燕支’다.
결혼식에 새색시가 필히 화장하는 도화장 桃花粧 연지곤지의 연지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경북 의성군이 홍람(홍화 紅花)의 주산지 主産地로 알려져 있다.
흉노 여인중에 연지(언지)산에서 태어난 여인만이 흉노의 황후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알씨’라는 명칭이 붙은 유래다.
그런 ‘알씨’의 알(Al)은 흉노인들에게는 금金을 가리킨다.
알타이 Altay를 한자로 쓰면 ‘금 金’이 된다
즉, 알타이 산 Mt, Altay은 금산 金山이다.
흉노민족 황후의 호칭은 대대로 알씨 閼氏였다.
즉, 알씨 閼氏는 금씨 金氏인 것이다.
이를 보면 유목민족은 한족 漢族보다 더 낭만적이었던 것 같다.
한족들은 그저 무미건조하게 ‘황후’라고 권위적인 호칭으로 부를 줄밖에 모르는데, 유목민족은 아름다운 꽃으로 치장한 세상에서 제일 빛나고 보석처럼 아름답다는 의미로 ‘알지’라고 불렸으니 말이다.
흉노의 휴도왕이 암살당하고 그 왕국이 허물어져 버리니 그 지역 흉노족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도록 처절하다.
실크로드의 주 길목인 하서회랑의 장예, 주천 酒泉에 속하는 기련산과 언지산에 있던, 흉노인들이 비통하게 불렸다는 비가 悲歌가 유명하며, 지금까지도 현지에서 불리고 있다.
* 사진 - 기련산맥
비가 悲歌
망아기련산 亡我祁連山
사아육축번식 使我六畜蕃息
실아언지산 失我焉支山
사아부녀무안색 使我婦女無顔色
우리의 기련산을 잃어 버리니
우리의 가축들이 번식할 곳이 없어지고
우리의 언지산을 잃어버리니
우리의 여자들이 화장할 수가 없네.
비가 悲歌의 가사 歌詞를 보면 우리(아, 我)라는 단어가 접두사 接頭辭로 변모하여 늘 따라다닌다.
망아 亡我, 사아 使我, 실아 失我 등,
유목민 遊牧民들의 단결력 團結力과 결속력 結束力을 보여주는 한 단면 斷面이다.
- 元甫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좋은하루 휴일 잘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연재 방을 이사하다보니 10회와 20회 두 건이 누락되었네요.
재포장 이사하였으나, 제자리를 못찾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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