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용화사
용화사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찰이지만, 예로부터 있어왔던 사찰터에 근래 새롭게 중창한 관음기도 도량이다.
특히 관음전에 봉안된 석조 여래입상은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이 지방에서 보기 드문 형식을 하고 있다 용화사가 자리한 곳은 일명 미륵당(彌勒堂)이라고도 하는데, 신라시대부터의 절터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폐허 또는 일반 민가로 있다가 1927년 백연수 보살이 현재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된 석조 관음보살입상을 이운하면서 사찰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이어서 1952년 박광명화 보살이 용화전과 요사 등을 건립하여 중창하였다. 이 용화전은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그 뒤 환어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였고, 이어서 지금의 덕기(德基) 주지스님이 부임하였다. 1994년 박광명화 보살의 아들 서병조 씨의 시주를 받아 중건하였고, 1996년 대웅전·관음전
계림사
계림사의 초창은 선산(善山) 도리사(桃李寺)를 창건하였다는 아도화상(阿度和尙)이라고 하며, 연대는 서기 419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상세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초창 이후 중창 연대도 알려지지 않고 다만 조선 순조 32년 성일 대사가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구려 스님. 또는 아도(我道) · 아두(阿頭), 일명 묵호자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고도령. 240~248년(위나라 정시 연중)에 위나라 사람 아굴마가 왕명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고도령과 통정하여 아도가 태어났다. 5세에 출가했다.
신라 19대 눌지왕 때 19세의 나이로 어머니 고도령의 명에 따라 고구려로부터 신라에 불교를 전하기 위해 몰래 들어왔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이미 불교가 전파된 지 오래이나 오직 신라만은 고유의 신앙과 왜래 문물에 배타적이어서 불교 포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까닭이다.
그는 묵호자란 이름으로 지금의 선산군 도개면 도개동에 와서 앞서 말한 모례의 집에 숨어서 낮에는 우곡에서 소와 양을 기르는 목동이 되고 밤에는 많은 사람을 모아 불법의 자비로운 진리를 강론하기를 3년이나 계속하였다. 그때 중국 양나라에서 사신으로 하여금 신라에 향을 예물로 보내왔으나 그 사용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어 걱정 해오던 중 모례가 아도에게 물으니 그것을 불에 태우면 향기가 그윽하여 신성하기가 이를 데 없고 소원을 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는 법이다. 신성이란 참에 지나는 것이 없다. 삼보란 불타, 달마, 승가 즉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일러 주었다.
신흥사
신흥사는 신라 불교가 확산되던 834년(흥덕왕 9)에 도의선사가 창건했다. 그러나 그후 내력은 알려지지 않고 1901년 소실되었다가 광복 후 1959년 대웅전이 건립되면서 극락전과 산신각이 중창되었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쉰다는 신흥사(新興寺)는 김천시 농서면 봉곡1리 485번지에 자리해 있다. 망초꽃 지천으로 피는 여름 한낮, 김천역에서 농서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봉곡이라는 소박한 마을이 보인다. 마을 어귀를 지나는 율곡천과 우봉교를 건너면 과수원 입구에 서있는 커다란 굴참나무 하나가 신흥사로 들어가는 유일하게 이정표다. 굴참나무 아래 그것도 길 위에 붉은색 페인트로 신흥사라는 글이 쓰여 있어 처음 가는 사람이라면 몇 번이고 헤매게 된다.
복숭아, 살구, 자두, 참외, 유난히 과수원이 많아서인지 이곳은 일명 자두마을로 통한다. 달콤한 과즙이 풍부한 나무들이 탐스런 열매를 자랑하며 신흥사 경내까지 줄을 서있어 홀로 걷는 산길이 결코 외롭지가 않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천년이 넘는 세월을 이어온 우리의 불교 문화는 세속의 번뇌를 씻고 마음을 찾는 깨우침의 장소이다.
30년을 이곳 신흥사 부처님과 함께 해온 현 주지 지원스님 말씀에 의하면 그 옛날 신흥사는 지금보다 더 작은 전각 하나만 있었다고 한다. 대웅전 뒤 산신각을 오르는 작은 계단 옆이나 멀리서 극락전을 바라보는 야생화는 전설 속에서나 만나 볼 수 있는 화엄의 꽃을 닮아 있다.
비 오는 산사에서 비에 젖어 더 아름다운 풀꽃들이 보고 싶다면 망설이지 말고 신흥사로 가야 한다. 우산 가득 떨어지는 빗소리도 좋겠지만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긴 과수원 길을 걸어 신흥사 입구까지 가보라. 몸을 뒤척이는 숲과 처마 끝자락을 타고 내리는 비 소리는 심금을 울린다.
고방사
1698년(숙종 24)에 적은 현판문에 따르면 아도화상이 직지사와 함께 418년에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526년(신라 법흥왕 13)에 아도 스님이 창건했다고도 한다.
기문에 의하면 1636년(인조 14)에 옥청산인이 적묵당을, 현철산인이 설선당을, 그리고 1656년(효종 7)에는 학능선인이 청원루 5간을 창건하였고, 지금의 절은 1719년(숙종 45) 계현 수천대사가 중창했다.
1923년 벽암이 중창하였으며, 1981년 법전화상이 주지로 부임하고 진입로 개설, 감로당 이전에 이어 관음전, 삼성각, 향로실, 사천왕문, 범종각, 청원루 등을 신축하고 보광명전을 복원했다. 이어서 관음보살상, 석조약사여래입상, 석등, 범종, 괘불, 신중탱화를 비롯한 16점의 탱화 등을 새로 조성하여 고방사는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
원래 고방사는 지금의 자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골짜기에 있었는데 빈대가 많아서 수천대사가 중창하면서 보광전만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나머지 전각은 모두 태웠다고 한다. 옛 고방사터는 약수가 유명하여 약수터라고도 불린다. 이 약수는 100일간 기도를 올리고 부정, 육식, 다툼 등 금기사항을 엄수해야만 효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어기고 약수를 마신 사람은 피를 토하고 급사한다고 전한다.
낙숫물 소리는 그대로 부처님의 장광설이요.산빛은 그대로 청정법신이라. 절집에 하루종일 비가 내린다. 녹음이 짙푸른 산봉우리 위로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처마에서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맑은 차 한 잔을 마신다.
세속에 찌들었던 마음 풀어내고 부처님 따뜻한 품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편히 쉬었다 가는 곳. 고방사는 바로 그런 절집이다. 김천시에서 먼 거리가 아닌데도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곳. 그러나 고방사를 아는 이에게는 세상에서 마음 풀 곳 몇 군데 갖고 있는 기쁨을 안겨주는 절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