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5주일(나해) 강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원로 사목자의 삶
지난 2022년 잠비아에서 돌아와 은퇴사제관인 멜키체덱의 집에서 다른 은퇴 사제들과 기쁘게 잘 지내고 있다. 은퇴 사제는 나를 포함 5명이고 교구청이나 사회복지 시설에서 근무하는 사제와 진광고등학교에 근무하는 사제 등 5명의 현역 사제들을 포함, 모두 10명이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사제들과 매일 오전 6시 반에 성무일도를 바치며 하루를 시작하고 오전 7시에 합동으로 미사를 봉헌한다. 미사 주례는 서로 돌아가면서 하고 있고 미사 후에는 오전 7시 반부터 공동식당에서 아침을 함께 먹으며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매일 매일의 생활을 나누며 많은 주제를 갖고 서로 대화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주임 신부 시절엔 주로 사제관에서 혼자 지냈는데 공동 사제관에서 함께 지내다 보니 서로 스스럼없이 모든 걸 숨김없이 나누다 보니 사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기쁘게 살 수 있는 것 같다. 공동생활이 이래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형제들이 오순도순 모여서 함께 지내니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성서 말씀처럼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것이다. 여러 가지 얘기들을 많이 나누지만 특히 건강에 대해서 체험담도 나누고 서로 걱정해 주니 참으로 형제애를 느낀다. 우리는 여기서 살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날 주님께로 가야 할 것이다. 지나온 삶을 반추하면서 남은 생애를 잘 마무리하는 나날을 보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사목전선에서 잘 선교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신 후원자들과 은인들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본당신부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병자들이나 소외된 사람이나 공동체, 즉 장애인 시설이나 병원, 공소 등지에 가서 미사 봉헌하면서 소일하고 있다. 주님의 예언자로서 살다가 언젠가 내 삶이 다하는 날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께로 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이를 전하는 사람을 예언자라고 부른다. 혹은 주님의 제자라고도 말한다. 성서적으로 본다면 이러한 사람을 구약에서는 예언자라고 불렀고 신약에 와서는 예언자라는 말보다 주님의 사도나 제자로 불렀다.
오늘의 제1,2독서와 복음 말씀은 예언자 혹은 주님의 제자로서의 직분이 어떠한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아모스 예언자, 주님의 열 두 제자 그리고 사도 바오로 등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의 말씀을 용기 있게 전한 사람들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유다만이 이 영광스러운 직책에서 벗어나서 돈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팔아넘긴 불행한 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언자나 사도들의 공통된 특성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그들 모두가 가난한 자들이었던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 스스로 주님께 대한 사랑 곧 열정을 지닌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먼저 제1독서를 보면 이스라엘이 북부와 납부로 갈라져서 북부 사람들은 남부의 예루살렘에 비견할 예배 장소를 베델에 세운다. 이 베델에 남부 유다의 예언자인 아모스가 찾아온다. 아모스 예언자는 정의의 예언자로서 북부 왕국 이스라엘의 잘못된 저들에 대해 비난을 가한다. 북부 왕국 사람들에게는 그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북부의 아마츠야 사제는 정의를 선포하는 아모스를 빈정대며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밥을 벌어먹어라.”(아모 7,12)라고 하면서 그를 심하게 꾸짖는다. 아마츠야는 거짓 예언자로서 하느님을 팔아먹고 살던 사기꾼이었던 것이다. 아모스의 외침이 귀에 거슬리니까 오히려 자기에게 해당될 말을 아모스에게 던지면서 그가 사람들에게서 떠날 것을 요청한다. 이에 대해 아모스는 자기는 원래 양떼를 몰고 가는 목동이었는데 “주님께서 나를 붙잡으셨다.”(아모 7,15)고 하면서 자신의 임무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무임을 밝히고 있다. 인간적인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선택된 아모스 예언자는 가난한 자의 전형이 된 것이다.
하느님만을 믿으며 모든 것을 신뢰한 그야말로 참으로 가난한 자였기에 모든 정열을 다해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가난했기에, 녹을 받으면서 거짓 예언을 했던 직업적 예언자들과 구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언자의 모습은 예수의 제자 파견에서도 요구되고 있다. 그분은 열 두 제자를 불러 둘씩 짝지어 주시면서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복음을 전할 제자는 무엇보다도 가난해야 함을 강조하셨다. 소박하고 단순한 삶 즉 가난의 삶이야말로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세임을 천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입으로만 선포되고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구두선과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는 획기적 사건을 수반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최소한의 가난한 생활에 만족하며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도록 기름을 바르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이 복음 선포의 사명은 모든 열과 성의를 다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다.
그러기에 이를 위한 열정은 고통을 뒤따르게 하며 뼈아픈 체험을 요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 아래 이루어지는 것으로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되도록 묶어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넘치게 하시고 이것이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전해져서 모두가 하느님 백성으로서 기쁨 속에 살아가도록 해주신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가난의 정신으로 무장하여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그분의 은총을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예언자, 사도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