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군이 명신을 버리다-
寒食, 차가운 음식을 먹는 날로 알려진 날날입니다.우리 나라에는 한식의 유래가 고려 문종 때부터 기록이 나온다 합니다. 한식이 나온 데는 역사를 살펴보면 참으로 슬픈 날이라 할 수 있어요. 춘추오패의 진(晉) 문공과 신하 개자추(介子推)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진 문공의 이름은 중이(重耳)인데 아버지인 진 헌공(獻公)은 첫 왕비가 죽자 두번을 더 결혼을 했는데 새로 결혼한 부인(세번째) 여희는 자기 소생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공작을 했지요. 진 헌공의 첫 왕비(제강)는 제 환공의 딸로 아버지 무공의 계비였는데 너무 젊어 무공이 죽자 왕비로 삼았다 해요. 제강의 소생은 문공의 이복 형으로 유명한 신생이었어요. 이후 제강이 죽자 적狄에서 포로로 잡은 여인에게서 중이와 이오(夷吾)를 낳았어요. 여희는 해제(奚齊)를 낳았고 여희 동생은 탁탁을 낳았어요. 그런데 이 여희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신생과 重耳, 이오를 중상모략해 헌공은 장자 신생을 자살하도록 하고 말았어요. 이런 상황을 눈치챈 중이와 이오는 도망을 해 타국으로 망명생활을 하지요. 중이는 모진 고생을 하며 적狄과 제, 조, 정, 송, 초, 秦나라 등으로 외숙부 호언狐偃, 한식 유래의 주인공인 개자추(介子推) 등과 19년을 유랑하다 헌공과 이복 동생 해제奚帝, 동복동생 이오(혜공), 이오의 아들 희공(혜공의 아들) 등을 이어 진(晉)왕위에 올라 진 문공이 되었어요. 왕위에 오른 진 문공은 자신의 망명생활과 왕이 되기까지 갖은 고생을 하며 수행했던 여러 신하들을 공신으로 책봉하였으나 개자추를 그만 잊고 공신으로 책봉하지 않았다 해요. 망명생활을 할 때 밥을 못먹어 기진맥진했을 때 자신의 허벅지 살을 깎아 중이에게 먹이는 헌신을 하며 할고봉군割股奉君이라는 고사를 만들어 낸 개자추의 공은 참 컸다고 해야하지요. 개자추는 자기의 공을 다른 사람들처럼 알아달라 사정하지 않고 면산으로 노모를 모시고 들어가 숨어버렸다 해요. 그 큰 공적을 문공이 잊어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한 신하가 성벽에 개차추의 공을 잊으면 안된다고 시를 써 붙였답니다. 시를 보고서야 뒤늦게 진문공이 깨닫고 개자추를 찾았으나 아무리 부르고 찾고 또 찾아도 끝내 찾지 못하자 산의 한면을 터놓고 삼면에모두 불을 질렀다네요. 산이 다 타도 개자추가 안나타나 산을 수색해보니 산위에서 버드나무를 끌어안고 노모와 함께 타 죽었더랍니다. 진 문공은 탄식을 하며 때 늦음을 한탄하며 개자추가 끌어 안고 죽은 타다 남은 나무를 잘라 신발을 만들어 신으며 개차추를 부르고 그리워했답니다. 여기서 친한 친구를 족하足下라 하는 말이 나왔다 합니다. 문공은 개자추를 그리워 하며 개자추가 타죽도록 불 지른그날은 익은 음식을 먹지 않고 찬음식을 먹고 백성들에게도 불을 금지하여 한식날이 유래되었다 하며 불을 지른 날이 청명절 하루 전날이라서 한식은 청명절 전 날이 되었다 합니다.
춘추5패자로 이름을 드날린 진 문공과 개자추의 죽음에서 한식이 생겼는데 5패자가 될 정도의 지혜와 덕성을 갖추었다고 기록된 진 문공이었지만 정말 어렸웠던 시절의 신하를 잊은 큰 흠이 있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누구나 흠이 있다는 것을 과거의 영웅들에 얽힌 명절 한식에 대해 돌아보며 나의 흠은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면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