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마음(090620)
1963년 봄을 기다리는 늦겨울 아침이다. 날씨는 차고 일어나기는 해야 하는데 지난 밤 아침이 오는 걸 두려워하면서 두척 거리다 잠이 들었는데 새벽은 어김없이 밝아오고 있다. 대문 앞 사랑방 복궁뎅이선 소죽을 쑤시는 할아버지의 솔가지 태우는 소리가 유난이도 후다닥 후다닥 크게 들리는 걸 보니 이부자리 속에서도 으스스 추위가 느껴진다,
밤새 참은 오줌 탓에 조금만 힘을 줘도 금방 찔끔거릴 것 같아 빤스바람으로 추위도 아랑곳 않고 살금살금 창문을 열고 뒷금치를 들고 마당으로 나섰다. 인기척을 들으셨는지 안방 부엌에서 이천중학교에 갓 입학해 다니는 아들에게 따슨 밥 먹여 새벽차 태워 보내려고 새벽밥을 짓다 삐끔이 반쯤 열린 부엌문에 머리를 내미시고 내 뒷모습을 보시고 소리없이 웃으신다.
안마당을 지나 할아버지가 소죽쑤는 사랑방부엌에 달린 유난이도 삐꺽소리가 큰 대문을 나서면 길쭉한 바깥마당이 어둠속에서 나를 기다린다. 무서움이 밀려오지만 암사내라는 걸 보이지 않으려고 용감하게 뒷간을 향해 뛰었다. 이런 손자의 모습을 못 본체하며, 소죽쑤시기 바쁜 척 손자체면을 봐주시는 할아버지는 곁눈질하시다가 엄마가 밤 밝혀가며 숯다림질로 고이바랜 하얀 솜무명바지 깃에 스리슬쩍 엉겨붙는 불티를 화들짝 놀라시며 털어내신다.
-그 당시에는 자칭 사내라고 하면 안방에 딸린 뒷간에 가지 않고 사랑방 바깥채에 외따로 세워진 뒷간을 이용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남자는 사내 축에 들지 못한다고 하여 암사내라고 부르기 일쑤여서 일부러 무섭지 않은 척 하려고 애쓴 나였다. 갓 중학생이 되기도 했지만 외지에 나가 공부하는 그야말로 우리동네에선 두 서너명 밖에 되지 않는 사내였으니까... 그리고 그 담담주일에 집에 들러 엄마에게 여쭤보면 어김없이 하얀 솜바지에 불통이 튄걸 확인했었으니까.-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아침밥을 다 먹었으면서도 사랑채에서 소죽쑤시는 할아버지 헛기침을 들었으면서도 추운 날씨 탓도 있겠지만 등교시간 8시30분에 맞추려면 빨리 출발을 해야 하는데 가방을 들 생각이 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 2주일 만에 집에 즐거운 마음으로 다니러 왔는데 막상 그냥 집을 떠나기가 싫은 것이다. 외양간에서 딸랑거리며 소죽을 다 먹은 소가 이윽고 혀바닥으로 빈 구유를 핥는 소리가 나자 할아버지가 드디어 가방을 뒷짐삼아 드시고 대문을 나선다. 아침밥을 찬물에 말아 게 눈 감추듯 쏟아 넣고 밥 잘 먹는 아들시늉하고 마지못해 할아버지를 따르는 무거운 발걸음이였다.
이른 봄, 3월이지만 새벽이라 그런지 날씨는 어둑어둑하고 자못 쌀쌀하다. 앞서서 걸으시는 할아버지의 불똥튄 바지자락이 처음에는 천천히 보이더니 그 보이는 시차가 점점 빨라진다. 웃음도 잠시, 할아버지 걸음을 따라가는 난 드디어 가쁜 숨을 몰아쉰다. 내가 지체한 시간을 할아버지가 보상해 주려는 것이다. 드디어 덕밭들을 지나 소래울 잔등을 넘어설 무렵이면 뒷짐 진 할아버지 두 손 사이에 끼어 주기적으로 흔들거리던 책가방이 안정을 찾는다. 이는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와 하차 후 도보로 교문을 들어서는데 필요한 시간이 확보되었다는 신호로 받아드려진다. 난 이 때가 너무 좋았다. 할아버지 황새걸음을 따라오느라 벅찬 숨을 고르기도 해서 좋았지만, 말이 없으신 할아버지가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시곤 하셨기 때문이다.
그날은 ‘꿈 도둑놈’에 대해 얘기하셨다. 왜정시대의 보통학교(현재,초등하교)에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자기의 꿈을 국어시간에 발표하라고 하셨다. 꿈에 대한 발표가 끝나면 선생님은 하나씩 하나씩 칭찬과 충고를 해 주시면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를 지도했다. 발표가 거의 끝나갈 무렵, 가난에 찌들려 점심도시락도 잘 꾸리지 못하던 처지에 있는 선생님 꾸중을 독차지 하던 말썽구렁이 사내아이의 발표차례가 되었다. 그는 이 학교운동장의 백배나 되는 목장을 소유하는 부자가 되어 가난한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씩씩하게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선생님과 아이들은 그 아이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매료되어 박수를 보냈다.
방과 후 선생님은 그 아이를 교무실로 불러 ‘꿈은 현실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황당한 계획을 이루겠다고 하는 것은 만용에 가까우니 다음시간에 발표하면 좋은 점수를 주겠다고 충고해 주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자신은 ‘지금 당장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라면서 선생님께서 성적순위“가”를 주셔도 달게 받겠다면서 꿈을 포기치 않았다.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외지에서 많은 돈을 벌어 고향을 찾아 온 한 청년이 학교 주위에 있는 임야와 밭을 매입하고 목장을 경영케 되었다. 시골에 사는 농부들은 농사짓는 일 외에 목장에서 품을 팔아 집안살림살이가 점점 좋아졌고, 그를 존경하게 되었으며, 그 지역의 유지로 성장하였다.
어느 날, 오후 초라한 옷차림을 한 노파가 찾아왔다. 그는 이 청년에게 자기는 30여년 전 국어선생님이었으며 자기를 ‘꿈 도둑놈’으로 소개하였다. 그는 이 청년은 꿈을 도둑질하기 위해 찾아온 내게 속지 않고 그의 꿈을 이루었다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반면에 이 청년은 오히려 그 노파에게 공손히 큰 절을 올린 뒤 그 때의 말씀이 없었다면 오랫동안 꿈을 간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흐느꼈다.
이야기를 마치면서 할아버지는 내게 ‘꿈은 항상 마음속에서 간절히 소망하고 말을 던지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옛날 선인들은 언행일치(言行一致)를 중하게 여겼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불언행(不言行)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불언행(말하지 않고 행한다)엔 게으를 지언 정 남의 꿈을 앗아가는 꿈도둑놈은 되지 않아야 한다.’라고 강조하셨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엔 그렇게 무섭고 후미져서 낮에도 혼자서 넘기 꺼렸던 박산고개를 넘어 중턱을 내려서고 있었다. 저 멀리 선비차부가 보이고 출퇴근하는 학생들이 이따금씩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른다. 차부가 가까이 오자 할아버지의 무명바지 불똥구멍이 점점 흐려지더니 이젠 뭉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눈물이 뚝 떨어진다. 할아버지에게 들킬까봐 고개를 돌리고 눈에 뭔가 들어간 척 비비는 시늉을 한다.
30분마다 가로수 사이의 자갈밭 행길을 지나가는 시외버스가 어김없이 부연 먼지를 일으키며 끽하고 멈춘다. 심하게 흔들리는 차안에서 가까스로 뒤를 돌아다보니 할아버지가 저 멀리서 어이가라고 손짓한다. 다시 시야가 흐려지더니 얼굴이 간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