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양보
(예배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이다)
창세기 13: 8-18
영혼의 회복
어떤 여행자가 아프리카 오지를 여행하면서 원주민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첫 날, 원주민들은 너무 열심히 먼 길을 달려와 주었습니다. 여행가는 그는 목적지까지 빠른 시일 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매우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원주민들은 도무지 길을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통역인을 통해 이유를 묻자, "어제 육체가 너무 빨리 달려와서 아직 영혼이 따라오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영혼을 회복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내 영혼의 회복을 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의 영혼의 회복은 무엇으로 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옵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성도의영혼의 안식처와 같습니다. 날마다 예배 생활에 힘쓰시기를 원합니다.
다툼의 해결
본문은 애굽에서 벧엘로 돌아온 아브라함은 목장 문제로 다투자 롯에게 우선 선택권을 제안합니다. 롯은 이런 아브라함의 제안에 따라 요단 온 지역을 택하여 소돔까지 이르게 되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두 가지 약속을 듣고 헤브론으로 이주하여 제단을 쌓았다는 내용입니다.
애굽에서 벧엘로 돌아와 정착하며 사는 아브라함과 롯, 양과 소가 많아졌습니다. 벧엘에서 함께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비좁은 목장 문제로 자주 다투었습니다. 13:7절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다’고 나옵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다투는 것을 자주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친족끼리 다투는 것을 봄으로 원주민들은 손가락질을 하면서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왜 그래, 꼴 좋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주해 왔으면 싸우지 말고 잘 살아야지 하면서 비난의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다툼의 문제에 대한 아브라함의 선택은 분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좌우는 요단 동편과 요단 서편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분가는 평화적인 해결책이고, 미래를 위한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비좁은 생활공간 때문에 다투지 않아도 되고, 다툰다고 비난을 받지 않아도 되고, 주변의 원주민들에게도 비난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양보와 그 정신
그래서 아브라함은 원활한 분가를 위해 롯에게 우선 선택권을 제안합니다. 양보입니다. 양보의 사전적인 의미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여 자기의 주장이나 생각을 굽히고 그의 의견을 좇는다. 또는 다른 사람에게 길이나 자리, 물건 따위를 내주고 물러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양보는 롯에서 모든 선택권을 주고, 자신은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해득실에 있어서 이익보다는 무조건 손해를 감수하려 합니다. 이런 마음 없이는 결코 양보할 수 없습니다. 양보는 희생이고, 사랑이고, 헌신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양보의 정신은 어디서 온다고 생각합니까? 믿음에서 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효과적이고 깊이 유지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 믿음이 생기고 여기서 생성된 믿음으로 사랑도 하고, 양보도 하고, 용서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내리막길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 땅까지 옵니다. 12:5절에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인도한 땅이 가나한 땅임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남방으로 옮겨가다가 그 땅에 기근이 들어서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라함은 사래의 아리따움으로 인해 자기를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면서 생명을 보호받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립니다. 이 일로 바로는 재앙의 원인을 알게 되었고, 아브라함을 불러 책망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부인을 누이라고 해서 내가 아내를 삼게 했느냐며 데려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가나안 땅, 벧엘로 돌아옵니다.
왜 아브라함은 애굽까지 내려가 이런 비신앙적인 모습을 살게 되었습니까? 왜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구원을 줍니까? 이유가 있습니까? 12:9절에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여기서 ‘점점’이라는 말과 ‘옮겨 갔더라’에서 ‘옮겨’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같은 말입니다. 뜻은 뽑아내다, 잡아 뽑다, 제거하다 입니다. 똑같은 단어가 두 번 사용되었다는 것은 강조를 의미합니다.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무엇인가 뽑아지고, 제거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전체 문맥을 생각할 때에 예배생활이 뽑아지고, 제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세겜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벧엘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다가 남방으로 내려가면서 제단을 쌓았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기근을 만났고,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신앙의 내리막길입니다.
신앙의 내리막길에서 만난 기근, 고난은 쉽게 불신앙의 길로 인도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정상적으로 예배 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애굽으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렵게 고난의 제단을 쌓았다면 기근이라는 고난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길로 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인도를 받았을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도착한 땅입니다. 약속의 땅입니다. 어렵게 도착한 땅에서 기근이라는 고난 앞에서 망설임없이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것은 신앙이 약해졌다는 증거입니다.
신앙의 경험
애굽이라는 거대한 사자의 입에서 구원받은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정착한 곳은 마지막으로 떠났던 남방이 아니라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벧엘입니다. 13:3-4절에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을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감격적인 마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자신의 불신앙을 회개했을 것이다.
요한복음 4:23-24절을 보면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합니다.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이런 예배를 드리는 자를 하나님은 찾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야곱의 예배
창세기 35장을 보면 하나님이 야곱을 벧엘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야곱은 얍복강 씨름을 통해서 야곱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벧엘로 곧 바로 올라가야 했지만 그렇지 못하고 세겜에 정착합니다. 벧엘은 20년 전에 가나안 땅을 떠날 때 서원하면 기도한 장소였습니다. 자기가 훗날 가나안 땅에 돌아오면 이곳에서 십일조를 드리며 제단을 쌓겠다고 약속한 곳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잊어버렸던지 아니면 차일 파일 미루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막내 딸 디나가 세겜성 추장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이 일로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 사람들을 살해하는 일이 생깁니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야곱의 고난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에서 나타나 벧엘로 올라오라고 초청합니다. 야곱은 용기를 내서 벧엘로 올라가 예배를 드림으로 회복이 되고, 새로운 축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배생활의 회복
아브라함이 롯에게 양보할 수 있었던 것은 예배 생활이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 인격도 예배를 통해서 넓어지고,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아브라함을 구원해 주심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 줄 깨달았습니다.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인 예배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은 사람의 지혜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배웠습니다.
그래서 소돔 왕이 아브라함이 찾아온 전리품을 다 가지라고 할 때도 소돔 왕을 향해서 “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라함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에 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고 하면서 그 많은 재물을 거절합니다.
이런 믿음의 태도는 바로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된다는 믿음이고, 예배 생활의 회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자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필요성을 깨달으면 예배를 드리지 말라고 해도 드리게 됩니다. 예배와 다른 것들과 바꾸지 않습니다. 예배의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목숨을 겁니다. 예배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임을 알게 됩니다.
예배의 실패
마지막으로 아브라함과 함께 예배를 드린 것 같은 롯은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지 못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10-11절을 보면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을 예배의 성공자로 말한다면 롯은 예배의 실패자입니다. 예배에 실패한 자의 길은 눈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세속의 길입니다. 롯은 계속해서 세속의 길로 내려가게 되고, 소돔까지 내려가 살게 됩니다. 13절에는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에 망할 때에 롯은 두 딸과 함께 겨우 살아나게 됩니다. 탐욕을 선택한 인생의 결과입니다. 예배에 실패한 인생의 모습니다.
예배의 성공
롯과 분가한 아브라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나타나 축복을 약속합니다. 14-17절에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또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라.”
또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두 가지 축복은 땅과 자손입니다. 땅과 자손에 대한 축복은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롯은 자기 스스로의 눈, 탐욕의 눈을 들어보았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보게 하셔서 보는 분, 믿음의 눈으로 보게 하십니다.
18절을 보면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브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고 말합니다. 헤브론이라는 말은 연합, 동맹입니다. 이 이름에서 느끼는 것은 새로운 축복의 시작은 하나님과의 연합, 동맹이며, 그 시작은 예배를 드리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예배를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예배의 성공이 인생이 성공입니다.
(대림동 예일교회 이동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