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행위에 대해 죄책감에 시달리던 성도가 목사님을 찾아가 상담을 했습니다. 그는, 아무리 회개기도를 해도 마음에 평안이 없다고 했습니다. 성도의 근심을 조용히 듣고 있던 목사님은 그에게, “집사님, 집사님은 옷이 찢어졌다고 하여 그 옷을 버리십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성도는, “버리긴요. 옷도 옷 나름이지만, 대부분 처음 찢어졌을 때는 수선해서 입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목사님은 그에게, “집사님이 옷이 찢어졌다고 하여 버리지 않고, 수선해서 입는 데,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은 집사님이 죄를 범했다고 해서 버리시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말하길, “종교는 마음의 평안이며, 자신의 안정을 위해서 믿는다”라고 합니다. 이 말처럼, 그리고, 목사님에게 상담했던 집사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응답보다는, 우리 마음의 평안에 우선을 두고, 기도합니까? 그렇다면, 내 자신을 위한 것이 되기에, 그것은, 우상숭배가 됩니까? 얼마 전, 생활의 달인에서, 명품백의 기능이 고장났다고 하여, 명품백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고장난 기능만 제거하고 다시 리폼하여, 다른 것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본문 28절을 보시면,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자 하시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회복”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의 회복은, 잘못된 것에서 본래적인 것으로 돌이키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내 백성”이라며, 자신을 가리켜서는, “너희 하나님”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이, 단지,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가나안이라는 지리적 이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심으로, 하나님과 성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의 관계가 성립되는 “회복”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약속의 땅과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세가지 요소가 모두 나타남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임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회복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가능한 하나님 주권으로서의 회복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먼저 정결케 하시고, 새 영과 부드러운 새 마음을 주심으로, 성령을 따라 말씀대로 살게 하십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회복의 사건이지만,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성도된 우리의 영적 회복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나의 경험이 풍부하고, 나의 지식이 나를 인도한다 하여도, 우리는 성도이기에,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앞세워 살아간다면,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벗어나기에, 우리의 삶은 시간 속의 부초가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본문을 살피는 가운데, 우리의 삶이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회복과 은혜가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5절을 보시면,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성도된 우리의 정결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회복을 위해, 수많은 수고와 노력을 하지만, 모두가 헛수고로 끝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회복은 우리의 노력과 수고로 이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회복된다는 겁니다.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하실 때, 맑은 물을 우리에게 뿌린다고 합니다. 이 “맑은 물”이 무엇일까요? 어떤 이는, “성수”라고 합니다. 과연, 이 물이 성수일까요? 민 19장을 보시면, “정결케 하는 물”에 대해 언급을 합니다. 여기서는, 이 물을 위해, 흠이 없고 아직 멍에를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 한 마리를 진 밖에서 잡아 그것을 불사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취하여 암송아지를 사르는 불 가운데 던진 후, 그 송아지의 재를 취하여 흐르는 물과 섞으라고 합니다. 본문에서의 “맑은 물”이 “성수”라고 한다면, 우리는 거침없이, 민 19장에서 언급하는 정결케 하는 물을 만들어 우리에게 뿌려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에서도 이런 물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맞다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왜? 오셨을까요? 요 4: 14을 보시면,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합니다. 과연, 본문에서 언급하는 “맑은 물”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정결케 하겠습니까? 행 2: 38을 보시면,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회개함으로,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곧, 정결케 하라는 겁니다. 또, 요일 1: 7을 보시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언급하는 우리를 정결케 하는 “맑은 물”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의미합니다. 또, 이 물을 만들기 위해 희생된 붉은 암송아지를 잡는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26: 28에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회복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정결케 됨에서 시작합니다. 이렇게, 정결케 된 우리는, 이 후로, 우리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도록 성령을 영접하여,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죄에서 정결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하나님 앞에서 정결케 되어,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회복이 일어나길 원하신다면, 성령을 우리 안에 영접해야 하며, 또, 베드로의 고백처럼, “나사렛 예수께서는 나의 구세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심으로,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6 - 27절을 보시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우리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십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십니다. 곧,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마음을 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는 우리의 모습으로,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칠 때, 하나님의 나라에서 부활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그가 사울로서 살아갈 때는, 율법주의자로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자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비판하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바울”로 개명하고,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위해서 살며, 감옥에서든, 일상생활 속에서든,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삶은, 과거 사울로서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변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영적 부활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회복이 임함으로, 하나님은 그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신 겁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은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옥토의 비유가 있습니다. 마 13: 8을 보시면,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다른 씨들은, 길 가, 돌밭, 가시떨기 위에 떨어짐으로, 싹이 자라지 못했으나, 옥토에 떨어진 씨는 싹을 틔워서 잘 자랐습니다. 옥토란, 씨가 잘 자라고,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는 부드러운 토양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현대의 과학이나 논리에 맞추어서, 판별하는 교만한 우리의 완악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마 5: 18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를 떠나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것은, 그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마음, 우리의 지식에 의거하여, 변형시켜서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악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욕심을 앞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암기만 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상고하며, 그 말씀 앞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회복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8절을 보시면,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심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회복을 이루시는 겁니까? 그것은, 시작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입는 옷이 찢어졌다고 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을 수선하여 입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의 자리에 있다하여도, 또, 우리가 실수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함으로 죄책감에 시달린다 하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증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성탄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왜? 성탄절을 기쁨과 축제 속에서 보내고 있습니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성탄절의 본래 의미를 희석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쾌락과 즐거움만을 나타내며, 축제 속에서 성탄절을 보냅니다. 하지만, 성도된 우리는 성탄절을 왜? 기쁨과 축제 속에서 지내는 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탄절이 본문의 하반절에 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의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새 영과 부드러운 새 마음을 주신 것은, 그들이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징계 속에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하나님의 성민으로 회복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내며, 하나님은 변함없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했습니다. 성도된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형태의 삶을 산다하여도, 우리가 하나님을 포기하고 버릴 지언정,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의 자자손손,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맑은 물”로 우리를 씻기고, 우리에게 “새 영과 부드러운 새 마음”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에게 이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