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지워진 길』(푸른사상 시선 179).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한민족의 국경지대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활동과 그에 따른 삶의 애환이 시집에서 서사적으로 펼쳐진다. 낯선 풍경 속을 채우는 시인의 시선과 발길은 궁극적으로 분단 극복의 지향이라는 역사성을 획득하고 있다.
2023년 7월 6일 간행.
■ 시인 소개
2007년 『시평』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뒤 <변방> 동인을 통해 시 공부를 했다. 시집으로 『레닌 공원이 어둠을 껴입으면』 『서리꽃은 왜 유리창에 피는가』 『지워진 길』을 간행했다. 아직 몸속에 유목의 피가 흐르는지 북쪽에 있는 산과 강, 그 기슭에 자리한 너와집을 보러 북한과 맞닿은 중국, 러시아의 접경을 돌아다니고 있다.
■ 시인의 말
눈보라가 발목을 휘감는 엄동설한에 앞선 발자국이 사라지는 걸 바라본다. 나보다 먼저 걸어간 사람은 어디로 흘러갔는지, 나는 또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가늠치 못해 지워진 길 위에서 방황하는 사람들.
압록강 하구 단동부터 두만강 하구 방천까지 한반도 경계의 강은 그대로인데 강을 건너는 사람은 없다. 국경을 넘나들던 수많은 길은 잡초에 묻히고 철조망에 막혀 지워졌다. 불과 한 세기 전에 자유롭게 건너던 우리의 길은 무관심의 시간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 추천의 글
역사의 진보와 인간의 화평을 위한 노래를 자신의 시업으로 삼아 굳건하게 견지해왔던 임윤의 시편들은, 이제 그의 세 번째 시집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노선을 잃지 않고 현재진행형의 위도 위를 달리고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대변되는 한민족의 국경지대에서 쉼 없이 앉고 서는 애한과 비탄의 대서사가 이번 시집의 주된 서정이자 그의 부채 의식이며 미래의 의지이다. “끊어진 철교” “수풍댐” “만포 구리광산” “중강진” “악산” “남백두에서 발원한 강물” “보천” “삼지연” “송강하” “이도백하” 그리고 “천지”. 임윤의 쓰라린 시의 촉수가 마치 자음처럼 모음처럼 숨 가쁘게 일별했던 “지워진 길” 위에서의 호명들은 우리들이 어느 사이 까맣게 잊고 지냈던 신기루 너머의 명명들이기도 하다. 장년의 막바지에 이른 시인의 엄연하고 우원한 기상의 시편들이 내 나라에 임하는 통일의 밑거름이 되리라는 사실을 정녕 믿기로 하자.
― 정윤천(시인)
한반도 남북의 길은 모두 은산철벽, 막막하고 “먹먹한 이별”이 너무 길다. 참다못해 동해 푸른 울산의 임윤 시인이 중국까지 갔다. 북중 국경을 떠돌며 대성통곡을 했다. 발해와 고구려와 만주, 북방과 대륙의 정서를 되새기며 “우리는 너무 멀리 지나쳤다”는 것을 절감한다. “목 놓아 불러도 기척 없는 산자락”, “화석처럼 말라버린 오래된 얼굴”들뿐이다. “당신이 건너올 외나무다리”는 어디에 있으며, “얼음 왕국”의 외출 중인 달빛은 언제 다시 돌아올까. 제아무리 먹먹해도 “천년의 보폭으로 물은 흘러갈 것이니” 마침내 임윤은 국경의 시인이 되었다. 죽기 전에 두만강 건너 회령이나 무산에서 북쪽 동무들과 들쭉술을 마시며 “우리가 남이가, 쭉 내자우” 호탕하게 건배하고 싶다. ― 이원규(시인)
■ 작품 세계
임윤은 한국 시문학사에서 중국의 단동을 중심으로 남북교류 상황을 집중적으로 그린 시인으로 평가될 것이다. 시인은 단동이라는 또 하나의 국경에서 남한 사람들, 북한 사람들, 중국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는 모습을 살펴보면서 남북 분단으로 인한 안타까움은 물론 그 극복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시인에게 단동은 지도상에 나오는 하나의 국경이라는 의미를 넘어 역사적인 장소가 된다. (중략)
단동에서는 한국, 북한, 중국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며 삶을 이루고 있다. 그들의 삶의 터전과 수단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중국 길림성의 연변 지역이 무역 중심지였는데, 2000년대에 들어서는 단동으로 이동하였다. 무엇보다 북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식량, 생활품, 의약품 등을 남한에서, 평양에서 만든 가공품을 남한으로 보내는 데 최단거리라는 지리적인 여건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남북한 동포들은 귀국 후 문제가 될 소지를 최소화하면서 단동에서 경제협력을 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데도 한국 사람들은 단동에서 이루어지는 남북 교류를 잘 모르고 있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임윤 시인이 단동을 중심으로 심화시킨 국경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시인은 그곳에서의 체험을 통해 남북 분단에 따른 남북교류의 한계는 물론 그 극복의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결국 임윤 시인은 남북 동포들의 경제적 교류를 토대로 분단 극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 맹문재(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 작품 해설 중에서
■ 시집 속으로
지워진 길
임윤
아이가 엄마 손 놓치지 않으려
손가락 끝에 묻어난 계절이 안간힘 쓸 때
강물로 뛰어든 정강이가 시릴 즈음
단단한 각질 벗겨내는 물결처럼
잡목이 삼켜버린 길 위에 포개진 발자국은 침묵한다
강의 어깨를 물고
끝 간 데 없이 출렁거리는 국경
모래밭에 찍힌 화살표 물새 발자국이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돌렸던 편자의 깊이 같다
봉두난발 백성들 머리카락인가
반질거리던 길을 에워싼 잡초를 헤집는 바람
신의주가 손에 잡힐 듯 끊어진 철교
수풍댐 가르는 보트의 굉음
집안에서 만포 구리광산으로 연결된 교각
중강진의 악산과 사행천에 자리한 너와집들
혜산의 얼굴을 차단한 세관의 철문
남백두에서 발원한 강물을 건너던 길
보천, 삼지연, 송강하, 이도백하 그리고 천지
대홍단 감자 보따리장수와
화룡을 오가던 무산의 얼굴
용정과 회령을 건너던 독립투사들
두만강 뱃사공은 파업 중인가
남양으로 건너야 할 기찻길 장악한 중국 국경수비대
훈춘 302호 지방도로 철망 뚫고
아오지, 나진, 선봉으로 향하는 덤프트럭
동해가 손에 잡힐 듯한 녹둔도
금방이라도 연해주를 향한 증기기차가 건널 것만 같은
독립을 위해
식솔들 먹여살리기 위해
메케한 석탄 연기 속, 졸음에 겨운 눈꺼풀 부릅뜨고
가슴속에 댓 개씩 응어리진 한 품고 건넜을
방천에서 바라본 두만강 철교
정오의 태양은 정적으로 떠다니고
왁자하게 강을 건너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철망 사이 바라보는 건너편
인기척은 없고 매미 소리만 요란하다
미루나무 그늘에 위장한 초소들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에 숨소리조차 숨죽이는
아이가 엄마 손 놓쳐버린 계절
비명으로 흩어져 떠내려간 노을처럼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발자국들
장마철에 떠내려온 비닐봉지가
철조망 송곳니에 걸려
갈 곳 먹먹한 가슴들이 파르르 떤다
시야에서 사라진 엄마의 손
두려움 떨치려 고래고래 소리라도 질렀으면 좋겠다
꼬질한 손가락 사이 까만 눈동자
오늘 밤은 어느 방향으로 비틀거릴까
압록과 두만이 펼쳐놓은
창백한 푸른 점* 먼지처럼 서글픈 반도의 둘레길
* 창백한 푸른 점:보이저가 찍은 지구의 모습에서 빌려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