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26) 치프리아누스의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이루게 하소서”
[본문]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과 땅에서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시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행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시는데 도대체 누가 그분을 방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마음과 행위로 온전히 하느님께 순종하지 못하도록 악마가 우리를 방해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청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려면 하느님의 뜻, 곧 그분의 활동과 보호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하느님보다 더 힘 있는 자가 없고 오히려 하느님의 관대하심과 자비에 의해 누구나 안전합니다.
주님은 당신 친히 짊어지셨던 약함을 지적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리고 제자들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는 모범을 주시기 위해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느님의 뜻이란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을 말합니다. 곧 겸손한 처신, 확고한 믿음, 절제 있는 말, 의로운 행위, 자비로운 일, 반듯한 품행, 그리고 남에게 모욕되는 일을 할 줄 모르고, 받은 모욕을 참아 받을 수 있으며, 형제들과 평화로이 지내고,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그분을 하느님으로 여겨 두려워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아무것도 더 중히 여기지 않으시므로 아무것도 그리스도보다 더 낫게 여기지 않으며, 그분의 사랑에 밀접히 결합되어 있으며, 그분의 십자가를 힘과 신의를 다해 가까이하며, 그분의 이름과 영예를 위해 싸울 때가 있으면 확고한 말로 고백하고, 고문을 당할 때 신앙을 지키고, 죽음을 인내로이 당함으로써 월계관을 받는 것 등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상속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고,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 14~15장
“예수님의 일생은 순명의 삶”
[해설]
우리가 매일 기도하는 내용인데도 너무나 자주 바치는 기도이어서 그 뜻이 쉽게 간과되는 기도중의 하나가 바로 ‘주님의 기도’인 것 같다.
우연이기도 하고 또한 성령의 도움으로 지난 사제 피정 중에 의정부교구 이한택 주교님의 강의 내용과 그날 아침 독서기도에서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누스 순교자(+258년)가 주님의 기도를 설명하는 내용을 들은 순간, 나는 그 날 피정의 주제를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아버지의 뜻」을!
마더 데레사의 삶
복자품에 오르신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영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수녀님의 삶은 성모님의 삶을 그대로 본받은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냥 복자품에, 그냥 성인품에 올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으리라. 그분의 전 생애가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감격과 감동을 낳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삶을 본받으려는 마음도 갖게 하였기 때문이다. 마더 데레사의 삶은 한 마디로 주님의 뜻을 내 삶 안에서 실천하기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그리고 내 안에서, 나의 행동과 말로써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마더 데레사의 삶이었다.
그런데 마더 데레사나 성모님뿐만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완벽하게 완전하게 실천하신 분이라는 것을 이번 피정에서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이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것이다.
예수님의 30세까지의 생애는 바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때에도 예수님의 판단 기준은 하느님께 대한 순명이었다. 중간 중간에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이루려고 왔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리고 중대한 일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밤을 새워 기도하셨다. 즉 하느님의 뜻을 물어보시고, 그 뜻대로 실천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셨고, 또 중대한 일을 마치고 나서도 예수님은 홀로 산에 들어가 기도하셨다. 이한택 주교님의 말씀대로 하느님과 함께 평가회를 가지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알려 주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하고 말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다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하고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일을 강조하셨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게세마니 동산에서도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하며 기도하신 예수님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기,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분이었다.
이처럼 정말 예수님은 대단한 분이셨다. 그분의 일생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는 길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특히 하느님의 뜻에 따르려는 순명의 마음을 우리들의 마음으로 간직해야 하겠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저를 통하여, 저의 말을 통하여, 저의 행동을 통하여, 저의 손을 통하여, 저의 발을 통하여, 저의 몸을 통하여 이루어지소서. 아멘.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27)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아가 강해’에서
“사랑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이들이 쉬는 곳”
[본문]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 즉 나귀에 타고, 인간이 재난을 당한 곳으로 서둘러 가, 그 상처를 치유하고, 인간을 자신의 나귀 위에 태웁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쉴 곳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이들이 쉴 수 있도록 말입니다(마태 11, 28).
‘아가 강해’ 14, 428에서
“율법, 실천해야 의롭게 돼”
[해설]
올 여름 법정 스님의 오랜 베스트셀러 ‘무소유’를 처음 읽었습니다. 거기에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잊을 수 없는 이야기 하나가 들어있습니다. 법정스님은 젊은 시절, 한번은 수연(水然)) 스님이라고 하는 분과 함께 결제(結制)에 들어갔는데, 그만 도중에 몸살이 나 끙끙 앓아누웠습니다. 그런데 수연 스님은 다음날 새벽 일찍 어딜 가더니 밤늦게야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약을 달여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약을 받아먹으며 법정 스님은 크게 울었다고 합니다. 수연 스님은, 서로 한 푼도 가진 것이 없기에, 도반(道伴)을 위해 암자에서 수십 리를 걸어가 탁발을 하여 약을 사가지고 다시 수십 리를 걸어오느라 그렇게 늦었던 것입니다.
그 잊을 수 없는 수연 스님의 특징을 법정 스님은 다음과 같이 간략히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는 맑은 시선과 조용한 미소와 따뜻한 손길과 말이 없는 행동에 의해서 혼과 혼이 마주치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예수회의 하워드 그레이 신부님은 한 피정 강론에서, 교회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먼저 이웃을 잘 살펴보아야하고(관상적 차원), 깊이 공감하며(정서적 차원), 구체적으로 행동해야한다(실천적 차원)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도미니코회의 미야모토 히사오 신부님은 자신의 여러 저서에서, 인간 상호간 및 성령과 함께 하는 교회 협동태(協同態)는, 자폐적으로 고정된 실체 즉 공동체가 아니라, 스스로도 세계 내에서 이방인(사마리아인)처럼 끊임없이 역사의 한가운데를 여행하면서, 다른 민족, 난민, 다른 문화 등 타자와 만나 화해하고 성장하는 개방태(開放態)이어야함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자기 탈자(脫自)와 타자 환대(歡待)의 모습을 보여주며, 거기에 우리들도 참여하도록 초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가’ 제5장에서, 신랑의 몸 전체의 아름다움을 조목조목 찬미하는 신부의 대담하고도 능동적인 묘사를 읽습니다. 그 옛날에, 남성의 신체가 여성에 의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표현된 노래가 또 어디 있을까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마지막 16절에서, 신부는 신랑에 대한 신체적 찬가 모두를 총괄하는 듯이 “바로 이런 분이 내 가까운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가까운 분’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가 10, 30~35)를 중첩시켜 관상하며 이를 구세사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 이웃은 누구입니까?”(루가 10, 29)
이에 대해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비유를 들어 인간에 대한 사랑의 섭리의 전모를 제시합니다. 즉 인간의 천상계로부터의 하강, 도적들의 함정, 썩는 일이 없는 옷을 빼앗김. 거기에 덧붙여, 죄로 인한 상처, 영혼이 불사에 머물러있는 채 죽음이 본성 한가운데까지 들어와 버리는 것. 게다가 율법이 무익하게도 통과해버리는 것. 즉 사제도 레위인도 도적의 손에 떨어진 자의 타박상을 치유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수소나 숫염소의 피로는 죄를 제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이사 1, 11; 히브 9, 12~13). …그러므로 사람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분을 그 자신 안에 받아들여 환대합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두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그 율법학자도 대답했듯이, 그 하나는 온전한 영혼으로 하느님을 향해있는 사랑이며, 또 하나는 이웃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것과 똑같은 사랑입니다(루까 10, 27). 그러나 “율법을 듣는다고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자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 2,13).
그렇기에 이 두 가지 화폐(즉 하느님에 대한 믿음 및 인간에 대한 착한 양심)를 받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맡겨진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몸소 행위에 의해 무언가 협력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여관 주인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재난을 만난 자의 치료에 관해서 그대가 부담한 몫은, 내가 다시 돌아올 때, 그대의 돌봄의 열의에 따라 지불될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는 인간에 대한 이와 같은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까운 분’이 되었습니다.
여관 주인이 착한 사마리아인에게서 데나리온 은화 두 닢을 받으며 더 필요한 돌봄을 부탁받았듯이, 교회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은화 두 닢을 그리스도로부터 받아서, 우리에게 맡겨지는 타자를 환대(歡待)하는 것입니다.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28) 막시무스의 ‘설교’에서
“자선은 영혼을 씻는 또 다른 방법이다”
[본문]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습니다. 죄사함을 받는 세 가지 중요한 종교적인 행위는 기도와 단식과 자선입니다. 영혼을 씻는 또 다른 방법은 자선입니다. 만일 세례를 받고 나서 인간적인 나약함 때문에 죄를 지었다면, 자선행위를 통해서 그 죄를 깨끗하게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선을 베풀어라. 너의 모든 죄가 깨끗이 사해졌다.’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죄를 더 자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바로 자선입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고 세례를 통해서 받을 수 있는 용서도 단 한 번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선을 베풀 때마다, 우리는 그 자선 행위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세례와 자선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죄를 용서해주는 자비의 두 원천입니다. 세례와 자선, 이 두 기둥을 꼭 붙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비록 세례를 받고 나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자선의 강물에 몸을 담그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비를 얻을 것입니다.”
막시무스의 ‘설교’ 22A장 4절
“자선, 신자임을 증거하는 행위”
[해설]
4세기 말 토리노의 주교였던 막시무스 1세(?~408/423년)는 자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선을 세례와 비교하여 설명한다. 세례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지만 세례는 단 한 번밖에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세례를 통한 죄사함의 기회도 단 한번 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부들은 죄사함을 받는 세 가지 중요한 종교행위로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강조하였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실천함으로써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 2세기 중엽에 로마의 클레멘스가 썼다고 전해지는(실제로는 익명의 저자가 쓴 편지이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도 이렇게 말한다. “단식이 기도보다 더 낫습니다. 그러나 자선은 단식과 기도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클레멘스 2서’ 16장 4절).
전통적으로 사순절과 부활절 강론의 중요한 주제가 바로 단식과 자선이었다. 교부들은 단식과 자선에 대한 아름답고 훌륭하고 주옥같은 강론들을 남겼다. 예를 들어, 레오 대교황은 사순절을 맞이하여 신자들에게 단식과 자선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우리는 이 거룩한 단식의 절기에, 평소 항상 수행해야 하는 자비의 행위를 더욱 더 열심히 수행해야 합니다”(레오 대교황, ‘설교’ 41,3).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가난한 사람이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자선을 베푼 것이 된다고 교부들은 가르쳐왔다. 아우구스티누스도 말한다. “비록 그 분은 우리가 가진 것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진정한 주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우리가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시기를 바라시면서 황송하게도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몸소 굶주리셨습니다. …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배고프신 그리스도를 조롱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아우구스티누스, ‘설교’ 60장 11절).
이처럼 교부들은 가난한 이와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면서 가난의 영성과 자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라는 사실을 가장 잘 알 수 있도록 해주는 행위가 바로 자선이다. 따라서 자선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랑의 실천인 것이다. 자선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실천해야만 하는 의무이다. 히에로니무스에 의하면,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선을 베푸는 의무를 면제받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냉수 한 잔은 대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에로니무스, ‘마태오 복음 주해’ 10장 42절). “당신이 자선을 베풀 때에는 당신의 오른 손이 무엇을 하는지 당신의 왼 손이 모르게 하시오”(마태 6,3)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우리 모두는 겸손하게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 자선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권리이지 선택이 아니다. 자선을 베푼다는 것은 단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일 뿐이다.
교부들은 부자들이 사용하고 남은 것은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으로 베풀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한다. 교부들에 의하면, 부자들이 가지고 있는 잉여(剩餘)의 부는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부자의 잉여물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필수품”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당신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결코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아우구스티누스, ‘시편 상해’ 147장 12절).
옛날 가난하고 못살던 시절, 우리 교회는 유럽 교회와 미국 교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 교회들이 한국 교회를 도와준 것은 잘 사는 몇몇 사람들이 거액을 기부한 돈을 모아서 우리를 도와준 것이 아니었다. 일반 신자들과 할아버지 할머니들, 그리고 고사리 같은 어린이들이 아끼고 절약해서 정성스럽게 낸 돈들을 모아서 가난한 교회인 한국 교회를 도와주었던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도 더 많이 더 자주 가난한 교회를 도와주어야 하고, 도시 본당은 가난한 시골 본당을 더 많이 더 자주 도와주어야 한다. 몇 차례 자선을 베풀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자선의 의무와 권리가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알아보게 하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자선이다. 따라서 자선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행위인 것이다.
신자 여러분, 우리 모두 자선의 강물에 몸을 담가 주님의 자비를 입읍시다.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29) 아우구스티누스의 ‘인내론’에서
“인내의 반대인 자살”
[본문]
삶을 찾는다면서 스스로에게 죽음을 안겨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정말 욥에게서 시선을 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들은 현재의 삶을 없애면서 동시에 미래의 삶도 포기합니다. …
이들은 인내하지 않고 죽음에 굴복하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을 평화스럽게 참아내야 했을 것입니다. 만일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살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욥 성인은 악마의 흉포함이 재물, 자녀, 자신의 몸에 가한 그토록 심한 불행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
물론 욥이 인내를 잃어버렸다면, 아내가 원했던 것처럼 불경스런 말을 했거나, 아내가 제안하지는 않았지만 자살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했다면, 그는 죽었고 “인내를 저버린 자들은 불행하리라!”(집회 2, 14)라는 성경 말씀처럼 불행한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
존속 살인자는 일반 살인자보다 더 죄가 무겁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존속 살해 중에서 자기와 가장 가까운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이 이론의 여지없이 가장 흉악무도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이보다 더 흉악무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보다 더 가까운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인내론’ 14
“수난에 동참하면서 인내 청해야”
[해설]
영혼의 목자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는 인내가 무엇인지 신자들에게 설명한다. ‘인내론’은 미사 중에 행한 강론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어떤 사목적인 긴박한 이유가 있었기에 인내에 관한 주제로 강론을 했을까?
교회에서 봉사를 하다보면 긴급히 해결해야 할 사목적인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5세기 초 북아프리카 교회도 도나투스 추종자와 펠라기우스 추종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야 했다. 도나투스파는 가톨릭에서 분열되어 자살을 마치 순교로 가르치고 있으며 펠라기우스파는 하느님의 은총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우선시하는 가르침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직접적이고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일까? 그래서 잘못된 이론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도 침묵해야만 할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내란 주제로 이 두 가지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다. 먼저 ‘하느님의 인내’를 설명한다. “그분의 질투에는 원한이 없습니다. 그분의 분노에는 격정이 없습니다. 그분의 연민에는 슬픔이 없습니다. 그분의 후회에는 뉘우침이 없듯이 그분의 인내에는 견딤이 없습니다.”(‘인내론’ 1, 1)
이어서 인간의 ‘참 인내와 거짓 인내’를 설명한다. “강도들은 여행자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지새웁니다. 이들은 통행하는 무죄한 이들을 붙잡기 위해 악천후 속에서도 몸을 움직이지 않고 그들의 그릇된 생각을 바꾸지 않습니다. … 여기에는 칭송받을 그 어떤 것도, 또한 배워서 유익할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 인내는 지혜의 동반자이지 탐욕의 노예가 아니며, 선한 양심의 친구이지 무죄함의 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인내론’ 5, 4)
그리고 “인내란 하느님 자녀의 선물입니다”(‘인내론’ 24)라는 결론을 제시한다.
위의 본문은 거짓 인내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에 속하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모범으로 보여야 한다. 덕스런 삶이 요구된다. 교회의 봉사자에게 인내의 덕이 필요함은 부연할 필요도 없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세상 속에서 그냥 고통을 참는 것이 인내가 아님을 강조한다. 시쳇말로 한을 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인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탐욕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참 인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경제적인 가정적인 이유 등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그리스도인은 이를 악물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혹은 절망 속에서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면서 하느님 자녀의 선물인 인내를 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스런 세상 속에서 선한 양심의 친구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는 인내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하느님의 말씀(욥기)에서 찾으면서 당시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성경)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성전=거룩한 전통)이 있다. 만일 삶에 직면한 중대한 문제가 있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해결 방법을 음미해 볼만 하다.
“오, 부패할 육체 때문에 짓눌린 영혼아, 네가 할 수 있다면 알지어다. 수많은 그리고 변화무쌍한 지상의 생각들에 짐 지워진 영혼아, 네가 할 수 있다면 알지어다. 하느님은 진리이시다.”(‘삼위일체론’ 8, 2, 3)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30)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로마서 강해’에서
‘헐벗으신 예수님’
[본문]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마저 내어주셨지만, 여러분은 주님께 빵 한 조각 나누어 드리지 않습니다. 그런 여러분을 위하여 그분께서는 버림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를 위해 고난을 겪은 나를 거들떠보고 싶지 않다면, 나의 가난함이나마 측은히 여겨다오. 네가 내 가난에도 불쌍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내 병이라도 보살펴주고, 묶여있는 나를 한 번이라도 찾아다오. … 나는 값비싼 것을 청하지 않는다. 한 조각의 빵과 걸칠 옷과 한 마디의 위로를 구할 뿐이다. …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발가벗겨진 내가 기억나지 않는다면, 지금도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헐벗고 있는 나를 기억해다오. 그때 나는 너를 위하여 묶인 몸이 되었지만, 지금도 너 때문에 묶여 있다. 전에나 지금에나 너는 조금의 자선도 베풀지 않는구나. 그때 나는 너를 위하여 굶주렸지만, 지금은 너 때문에 굶주리고 있다. 그때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목말랐지만, 지금은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목마르다. … 나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지만, 나를 사슬에서 풀어 해방시켜 달라고 네게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한 가지는 너를 위하여 묶여있는 나를 네가 찾아주는 것이다. … 나는 너를 사랑하기에 너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나는 너를 너무도 사랑하기에 네 식탁에서 함께 먹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로마서 강해’ 15장 6절
“필요 이상의 것은 도둑질한 것”
[해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교부(349~407년)는 날마다 성서를 묵상하고 되새김으로써 마침내 신구약성서를 통째로 외우게 되었고, 감동적인 설교로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황금의 입’(크리소스토무스)이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었다. 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그는 안으로는 교회의 개혁과 쇄신을 추구하고, 밖으로는 황실의 거짓과 불의에 맞서 싸우다가 세상의 미움을 받아 유배길에서 이승의 삶을 마감한 아름다운 성인이다.
그가 남긴 수많은 강론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연대가 가득 배어 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몸을 공경하고 싶다면 헐벗으신 주님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이곳 성전에서 그리스도께 비단옷을 입혀 공경하면서, 저기 바깥에서 추위와 헐벗음에 떨고 계신 주님을 못 본 체하지 마십시오.”(‘마태오 복음 강해’ 50장 4절) 참으로 그는 돌 제대 위에 내려오시는 그리스도(성체)뿐 아니라, 살 제대 위에 내려오시는 그리스도(가난한 사람)를 알아 뵙고 공경할 줄 아는 하느님의 사람이었다.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요한 19,28)고 절규하셨던 주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가난한 형제들 안에서 목말라 울부짖고 계신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물을 주시는 분께서 우리더러 물을 달라고 외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도 우리 모두를 배불리 먹이시지만, 우리는 굶주림과 목마름에 지치신 예수님께 빵 한 조각 냉수 한 잔 건네지 않은 채, 열두 광주리 가득 썩은 음식쓰레기만 채우며 배터지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필요 이상의 것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몫을 도둑질한 것이므로, 자선을 통하여 분배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 교부들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필수적인 물건들을 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것을 선물로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비의 행위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대 그레고리우스, ‘사목 규칙’ 3권 21장 45절)
자선은 부유하고 풍족한 사람들만 행할 수 있는 특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선한 의지요 따뜻한 마음이니, 가난한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선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이웃에게 건넨 냉수 한 사발로도 하늘나라에서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고(마르 9, 4), 과부의 동전 두 닢을 부자들의 떼돈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마르 13, 41~44).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초상(肖像)이다. 가망 없어 보이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를 무시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인간의 초상이 새겨진 돈은 하느님처럼 섬기면서도,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진 형제들을 멸시하는 자가 어찌 그리스도인일 수 있는가! 황제가 누리는 세상 온갖 부귀영화는 언젠가는 허망하게 스러져버리고 만다. 그따위 황제의 것일랑 황제에게 몽땅 되돌려주고 하느님의 것만 찾을 일이다. 내가 지닌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의 모습을 담고 있는 가난한 이웃과 힘닿는 대로 나누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길이다(마태 22,15~22). 이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다.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31) ‘폴리카르푸스 순교록’에서
‘폴리카르푸스의 순교기도’
[본문]
“전능하신 주 하느님이시여, 임의 사랑받고 찬양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여, 저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임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천사들과 권능들과 모든 창생과, 임 앞에 살고 있는 모든 의인들의 하느님이시여, 제가 순교자들의 무리에 들고, 임의 그리스도가 마신 잔에 동참하여 영혼과 육신이 영생의 부활을 누리며, 성령의 불멸을 얻는 자격을 오늘 이 시간에 베푸시니, 임을 찬양합니다. 거짓이 없으시고 진실하신 하느님이시여, 임께서는 미리 마련하시고 계시하고 이루시니, 오늘 저를 순교자들 가운데서 흐뭇하고 살찐 희생제물로 받아 주소서, 하오니 하늘의 영원한 대사제요 임의 사랑받는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만사에 대해 임을 기리고 임을 찬양하며 임께 영광을 드리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과 성령과 함께 이제와 영원히 영광을 누리소서. 아멘.”
‘폴리카르푸스 순교록’ 14장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서 하느님 찬양”
[해설]
1.폴리카르푸스의 순교
폴리카르푸스(69년경~155년경 생존)는 스미르나(지금의 터키 지중해변 항도 이즈미르)에서 주교로 일하다가 장작더미 위에서 불에 타 순교한 성인이다. 그는 예수님과 상종한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사도들 다음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총독이 폴리카르푸스 주교를 심문하면서 “황제의 수호신인 튀게 여신에게 맹세하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을 풀어 주겠소. 그리스도를 모독하시오”라고 다그치자, 주교는 딱 잘라 대꾸했다. “제가 그분을 섬긴 지가 86년이오. 그분이 제게 잘못한 일이 단 한 가지도 없소 그러니 저를 구원하신 임금을 어떻게 저주할 수 있겠소.”(‘순교록’ 9,3) 폴리카르푸스가 화형을 당한 연월일시에 대해선 논의가 분분하지만, 155년 2월 23일 오후 2시로 보는 설이 우세하다 그래서 성인 축일은 2월 23일이다.
2. 폴리카르푸스 순교록
‘폴리카르푸스 순교록’이 씌어진 역사적 배경을 약술하면 이렇다. 사도들의 후계자이며 학덕을 겸비한 원로 주교가 불에 타 죽다니, 이게 어디 보통일인가. 그 끔찍하고 장렬한 순교 소문이 지중해 곳곳으로 퍼져나갔던 모양이다. 사도 바울로가 전도한 바 있던 비시디아 지방의 안티오키아에서 동북쪽으로 한 참 올라가면 필로멜리움(지금의 아크세히르)이란 소읍이 있는데, 이곳 교우들도 이 소문을 전해 듣고 스미르나 교우들에게, 주교님의 재판과 순교 사연을 자세히 적어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스미르나 교우들은 주교님이 순교한지 일 년도 안돼서 주교님의 종생을 자세히 적어 보냈으니, 이 글이 ‘폴리카르푸스 순교록’이다. 이것이 세계교회사상 가장 오래된 순교록이다. 사도행전에 실린 스테파노의 짤막한 순교기(사도 6~7장)를 논외로 하고서 말이다. 폴리카르푸스 순교록이야말로 앞으로 쏟아져 나오는 순교록의 후시요 전범이다. 관심 있는 독자는 하성수 박사가 역주한 ‘폴리카르푸스, 편지와 순교록’(분도출판사, 2000)을 일독하기 바란다.
3. 폴리카르푸스의 순교기도 풀이
폴리카르푸스 할아버지는 장작더미 위에서 양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앞에서 소개한 장중한 찬양기도를 드리고 곧 불에 타 죽었다.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가릴 것 없이 기도는 하느님께 바치는 게 정도이다. 폴리카르푸스의 순교기도에서도 하느님을 부르는데 그 수식어가 다양하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이시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여/ 천사들과 권세들과 모든 창생과, 임 앞에 살고 있는 모든 의인들의 하느님이시여/ 거짓이 없으시고 진실하신 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은 온누리를 만드신 창조주시요 온누리를 구원하신 구원자시니, 극존칭들을 자꾸 포개서 기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탁월한 중보자는 예수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을 안다고 자부하고, 예수를 중보자로 삼아 하느님께 간구하곤 한다. 순교기도의 예수관을 보자. 예수는 하느님의 종이시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시다, 하늘의 영원한 대사제시다. “하느님의 종”은 제2 이사야서(40~55장)에서 따온 존칭이고, “하늘의 영원한 대사제”는 히브리서(2~9장)에서 빌린 존칭이다.
그럼 폴리카르푸스가 불에 타 죽기 직전에 장작더미 위에서 예수를 통하여 하느님께 간구한 내용은 무엇인가? 폴리카르푸스는 순교하는 순간에, 구약성경의 표현을 빌려 자신을 흐뭇하고 살찐 희생 제물로 바치는 순간에 “순교자들의 무리에 들고, 임의 그리스도가 마신 잔에 동참하여 영혼과 육신이 영생의 부활을 누리며 성령의 불멸을 얻는 자격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한다. 표현은 다양하나 내용은 하나같이 구원을 가리킨다. 주교는 순교를 은총으로 여긴 까닭에 그 큰 은총을 주신 “임을 기리고 임을 찬양하고 임께 영광을 드린다.” 한 마디로 폴리카르푸스의 순교기도에는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바람과 사랑이 녹아있다.
1850여 년 전에 지중해변 항도 스미르나 그리스 문화권에서 그리스도 신앙을 물려받은 주교의 신심은 그랬다. 그럼 오늘 동방 금수강산에서 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신심은 어떤 꼴을 갖추는 게 바람직할까? 동방의 성인 다석 유영모(多夕 柳永模 1890~1981년)의 눈썰미 매서운 시각에 따라, 부자유친의 신심을 가꾸면 진짜 토착화 신심이랄 수 있겠다. 다석의 심오한 말씀을 옮겨 적는다.
“예수가 제일 좋다. 부자유친(父子有親), 한아님 아버지와의 부자유친이 기독교다. 유교를 제치고 한아님 아버지와의 부자유친을 세웠다. 한아님 아버지께 유친하자 드리듬벼야 한다. 불서(佛書)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이다. 한아님 아버지와의 부자유친은 신약전서에 나타나 있다.”
4. 스미르나 순례
인천 공항에서 이스탄불 공항으로 가는 터키 항공기를 타고 이스탄불 공항에 내려서 이즈미르행 터키 항공 국내선으로 갈아타면 스미르나 순례를 쉽게 할 수 있다. 4백만 시민을 거느린 터키에서 두 번째로 큰 항도 이즈미르 도심에 폴리카르푸스 순교기념 주교좌성당이 있다. 1690년에 지었다는 성당 내부는 온통 울긋불긋 바로크풍으로 하려하게 치장했는데 그 유치찬란한 모습이라니 영 눈에 거슬린다. 세월이 바뀌면 미적 감각도 달라지는 법이다. 1453년 오스만 투르크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나서 가톨릭 정교회 가릴 것 없이 터키 그리스도교는 전멸했다. 그러니 이즈미르에 토박이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국제적 항구 도시인지라 외국 선원, 상인, 관광객이 제법 있어 이즈미르 교구라는 게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모양이다. 이즈미르에는 옛 유적이 거의 사라졌지만, 인근의 베르가마와 에페소에는 많은 유적이 보존되어 있으니, 함께 살펴볼 일이다. 졸저 ‘위대한 여행, 사도 바울로의 발자취를 따라서’(생활성서, 1997)가 도움이 될 것이다.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32) 디다케(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머리에서 마음으로’
[본문]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길인데, 두 길의 차이가 큽니다. 생명의 길은 이렇습니다. 첫째로, 당신을 만드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둘째로 당신 이웃을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시오.
또 무슨 일이든지 당신에게 닥치기를 원하지 않는 일이거든 당신도 남에게 하지 마시오. …
죽음의 길은 이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길은 악하고 저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살인, 간음, 정욕, 음행, 도둑질, 우상 숭배, 마술, 요술, 강탈, 위증, 위선, 표리부동, 교활, 오만, 악행, 거만, 욕심, 음담패설, 질투, 불손, 교만, 자만, 두려워하지 않음입니다.
‘디다케’ 1장 1~2절과 5장 1절
“마음 넓은 사람이 더 아름답다”
[해설]
세상에는 길(道)의 형태가 여러 가지가 있다. 시골 농부가 걸어 다니는 오솔길이 있고, 동네 꼬마 아이들이 뛰어노는 골목길이 있고, 그리고 좁은 길과 넓은 길이 있다. 또한 사람들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어떤 이는 노동자의 길을 걷고, 어떤 이는 사제의 길을 걷고, 그리고 어떤 이들은 고통의 길, 행복의 길, 기쁨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길이면서도 때로는 가장 먼 길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길이기에 가장 쉽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이면서도, 때로는 가장 먼 길이기에 가장 힘들고 어렵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있다. 어디에서 어디로 걸어가는 길이 세상에서 가장 짧으면서도 먼 길일까? 아마도 30㎝도 안 되는 우리의 “머리에서 마음으로 가는 길”이 세상에서 가장 짧으면서도 먼 길이 아니겠는가!
저자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디다케’(Didache, 100년경 저술)는 사도 교부들 시대의 작품이다. 디다케란 그리스어로 ‘가르침’이란 뜻으로, ‘열 두 사도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주님의 가르침’ 또는 ‘열 두 사도들의 가르침’이라고도 부른다. 이 문헌은 초기 교회 신자들의 윤리적인 의무들, 개인 성화를 위한 지침들, 교회 생활에 대한 전반적인 실천 내용들을 언급한 요약집이다. ‘디다케’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모든 의무들을 ‘두 개의 길’로 귀착시키고 있다. 하나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생명의 길이며, 다른 하나는 악하고 저주로 가득 차 있는 죽음의 길이다.
우리는 머리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생각하며 때로는 우리의 얄팍한 머리만을 믿고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받아들이며 결정지어 버린다. 머리를 쓰면 쓸수록 그만큼 더 고정화되고 그 한계성을 드러내지만, 우리의 마음은 쓰면 쓸수록 더 넓어지고 더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매우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를 늘 따라다니는 문제가 있다. 즉, 머리로 생각하고 결심한 것을 머리로만 실천하려고 하니 모든 것이 ‘작심 3일’로 끝나는 게 문제이다. 만일 머리로 생각하고 결심한 것을 우리의 마음으로 끌어내려 마음으로부터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면 아마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머리만 쓰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을 걷는 사람이다. 머리만 쓰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걷는 사람이며, 죽음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을 쓰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길을 걷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쉬운 길을 걷는 사람이며,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람이기도 하다. 머리만 쓰는 사람은 ‘세상의 논리’를 앞세우는 사람으로 언제나 경쟁적이며, 자신이 살기 위해서 다른 이를 패배시키는 사람이다.
머리만 쓰는 사람은 위급할 때만 하느님을 만나려 하고 항상 “도와달라!”는 청원기도만 드리며, 다른 이와 함께 공존공생(共存共生)할 수 없는 사람이다. 반면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논리’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으로 자신도 살고 다른 이도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마음을 쓰는 사람은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드릴 줄 아는 사람이며,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해서 오히려 자신을 죽여야 하고, 그래서 자신도 사는 사람으로(마르 8, 34~35), 다른 이와 공존공생(共存共生)할 수 있는 사람이다.
머리가 큰 사람 보다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 더 아름답다. 머리만 쓰는 사람보다는 마음을 많이 보여주는 사람이 더 진솔한 사람이다. 얄팍한 머리로 사는 사람보다는 넓은 가슴과 넓은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더 소중하고 그의 삶은 더욱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보람이 있다. 마음으로 사는 삶이 세상에서 가장 짧고 쉬운 길이며, 사랑이신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지름길이고 생명의 길이다. 마음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이 ‘생명의 길’이라면, 머리로만 생각하고 머리로만 판단하며 머리로만 세상을 받아들이려는 삶은 ‘죽음의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