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광민 목사
들어가는 이야기
프랑스의 쟌 칼망이라는 할머니가 97년 8월 4일에 12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분에 관한 재미난 일화가 있습니다. 그 할머니가 90세가 되던 해에 이웃에 사는 47세의 사람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계약의 내용은 할머니가 사시는 동안 매월 200프랑,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약 40여만원을 주기로 하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나면 할머니의 집을 47세의 사람에게 넘겨준다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가 1년에 돌아가시면 500여만원에 집을 사는 것이고 2년에 돌아가시면 천만원에 집을 사는 것입니다. 큰 돈을 안 들이고 집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100세가 되어도 끄떡없다, 110세가 되어도 끄떡없었습니다. 옆에서 돌아가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으니까 더 오래 사는 것 같습니다. 120세가 되어도 안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다가 47세의 사람이 30년을 기다리다가 77세의 일기로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할머니는 그 사람보다도 2년을 더 사시다가 122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웃사람은 집을 얻지 못하고 돈만 날린 셈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인생입니다. 바람을 잡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인생을 논하여 말하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봉독한 전도서의 시작입니다. 그는 "사람이 해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라고 질문하면서 인생의 허무성을 지적하였습니다. 전도서에는 "해 아래에서"라는 말이 29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번 강조하면서 해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되다고 하였습니다. 1장에서 10장까지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결국 1장2절의 말씀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솔로몬은 염세적 허무주의자들처럼 허무에서 출발하여 허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서를 끝까지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앞의 몇장만 읽다가 중단하면 허무주의자로 솔로몬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허무에서 쓰기 시작하였으나 하나님안에서의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삶을 결론으로 쓰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외견상 해아래서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하여 있는 것이지만 내용상으로는 해위의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에서 그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는 인생의 허무성에서 진정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는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 수고의 허무성에서 진정한 만족과 기쁨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또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역사적 허무성에서 진정 새로운 것은 무엇인지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도 솔로몬처럼 신령한 눈을 뜨고 해 위의 세계, 해 위의 삶을 찾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이것을 깨닫게 된 것은 나이가 들어서 입니다. 솔로몬은 젊어서도 꽤나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잠언서를 읽어보면 솔로몬이 얼마나 지혜로왔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솔로몬도 미쳐 깨닫지 못하다가 인생 다 보내고서야 깨달은 것이 전도서의 주제입니다. 그것도 말년에 하나님을 떠나 세상적으로 살다가 무서운 심판의 책망을 들은 뒤에야 깨달은 것입니다. 즉 인생 다 살고 나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70이 넘으신 분들, 60고개는 넘으신 분들이 읽으면 쉽게 "그래 맞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그리 실감나지 않고 가슴에 와 닿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전도서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위 중요성을 인생 다 살고 깨달은 삶의 진리를 미리 깨닫도록 안내한다는 점입니다. 인생 다 살고 나서야 깨닫는다면 너무 늦은 것입니다. 시행착오 다 하고 깨닫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인생 다 살고보고야 깨달은 것을 살아보기 이전에 깨닫게 하니 얼마나 귀합니까? 이 말씀을 60대에 듣는 분들은 복됩니다. 이 말씀을 50세에 듣는 분들도 복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40대에 듣는 분들은 더욱 복됩니다. 이 말씀을 20∼30대에 듣는 분들은 아주 복됩니다. 그리고 10대에 이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는 매우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귀한 진리 미리 미리 깨달아 복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요즈음 우리가 당하고 있는 어려운 시기는 이러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위기가 기회라는 얻을 많은 분들이 즐겨씁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위그를 선용하면 기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경제적으로는 어렵지만 영적인 눈을 뜰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신앙적으로 성장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탄식만하지 말고, 힘들다고 죄절하지 말고 오히려 영적으로 새로워지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더욱 기도하시고 더욱 말씀 상고하셔서 신령한 눈으로 영적인 진리를 깨달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첫째로 솔로몬은 인생의 허무성속에서 역설적으로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았습니다.
4절부터 보시면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 있노라면 길재의 시조가 생각납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보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다.
어즈버 태평년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인생의 허무를 노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깨달음에는 반밖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솔로몬은 인생의 허무성에서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영원한 것으로 알고 붙들고 계십니까? 물질입니까? 명예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이름입니까? 예,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려고 큰 바위에 깊이 새겨 놓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어떤 구두쇠 영감이 있었습니다.
평생을 구두쇠로 살면서 돈을 모아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임종할 때가 되었습니다. 아들 3형제가 모여서 의논을 합니다.
큰 아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평생 수고만 하고 호강도 못했으니 장례만이라도 그럴듯하게 해 드리자. 관광버스는 4대 대절해서 많은 분이 따라갈 수 있게 모시자."
그러자 둘째가 말하였습니다. "버스 4대까지 필요하겠습니까, 한 대만 빌리고 나머지 분들은 알아서 오게 합시다."
그때 셋째 아들이 말하였습니다. "형님, 그래도 그렇군요. 한 댓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친척도 많고, 친구도 많고, 또 운구할 젊은 사람들도 같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던 구두쇠영감이 아들들에게 자신을 일으켜 앉히라고 하였습니다. 아들들은 아버지를 부축하여 일으켰습니다. 간신히 일어나 앉은 구두쇠 영감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운구할 사람 필요없다. 내가 묘지까지 걸어서 가면 될 것 아니냐?"
성경에는 영원한 것 몇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곳에서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시다"라고 증거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베드로도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영영이)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벧전1:24∼25).
또 무엇이 영원합니까?
요한1서 2장17절을 보시면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영원한 영생이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영원한 위엣것을 생각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솔로몬도 전도서의 결론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전12:1).
둘째로 솔로몬은 수고의 허무성 속에서 진정 만족을 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았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민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해보고 싶은 것 다 해 본 사람입니다. 먹고 싶은 것 다 먹어 본 사람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다 누려본 사람입니다. 다 누려보았으나 어떤 것도 만족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깨달음은 권위가 있습니다. 다 해 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못해 본 사람은 잘 모릅니다.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 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깨달음입니다. 실험해 보십시오. 사실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나 실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솔로몬이 깨달은 것을 그의 보고를 통해서 깨달으면 됩니다.
솔로몬은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가 벌였던 연회, 잔치의 규모도 대단했습니다. 왕이 쓰는 그릇은 다 금으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솔로몬 시절에는 은은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은을 돌같이 썼다고 합니다. 열왕기상 4장 22∼23에 보면 "솔로몬의 일일은 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삼십석이요 굵은 밀가루가 60석이요 살진 소가 열이요 초장의 소가 스물이요 양이 일백이며 그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진 새들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궁궐에서의 잔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하게 합니다.
전도서2장8절에 보면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좌우에는 항상 풍악이 울려퍼졌고 게다가 솔로몬에게는 처첩이 100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족이 없었습니다. 쾌락은 있었으나 기쁨의 삶은 아니었습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었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았습니다.
결국 솔로몬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도서 5장18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낙을 누린다는 것은 소유의 개념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쾌락을 즐기는 삶으로는 이룰수 없습니다. 낙을 누리는 삶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아치있게 쓰고 의미있는 일을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록펠러는 53세대 인류역사상 최초로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한창때는 일주일에 백만불씩 벌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는 바싹 말라 있었습니다. 회사걱정하느라 몸이 극도로 쇠하여 있었습니다.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크랙카와 우유를 간신히 연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서 청지기에 관한 말씀을 듣고 영의 눈을 떴습니다.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것이 더 중요하구나"를 깨달았습니다. 그 후에 재단을 만들어 남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문화예술활동을 지원하였습니다. 외국의 유능한 인재들을 불러 장학금을 주어 공부시켰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렵게 하다보니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53세때는 다 죽게 되었던 사람이 98세까지 살았습니다. 낙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삶에 참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솔로몬은 역사의 허무성속에서 무엇이 진정 새로운 것인가를 찾았습니다.
9∼10절을 보심시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lal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르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라고 하였습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던 일 이전 사람들이 다 하던 것입니다. 또 날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고 있습니다.
부인들은 집에서 살림살이하는데 매일 똑같은 일을 하기 때문에 지루하다고 합니다. 남자들은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도 않습니다. 회사 다니는 분들도 똑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상업하시는 분들은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저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고 있습니다. 새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날마다 반복되는 삶속에서 전혀 의미를 깨닫지 못할 때 느끼는 허무입니다. 시베리아에서 최고의 형벌은 얼어붙은 땅을 팠다가 다시 묻게 하고, 또 파게 하고 묻게 하는 일을 (계속)반복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같은 일을 계속시키면 실성해버리고 만답니다. 의미있는 일을 계속한다는 것은 지옥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런 허무성을 통해서 진정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찾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같은 일이라도 의미가 부여되면 지루하지 않습니다. 의미없이 땅을 팠다 묻었다하면 고통스럽지만 보물을 찾는 것처럼 목적을 갖고 팠다 묻으면 지루하지 암큁습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여기에 승리하는 삶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장 큰 동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우리가 종종 새롭다는 말을 씁니다. 같은 일인데 새롭게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완전히 처음하는 것이어서가 아니라 의미가 부여되어 새롭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살림을 살아도 사명갖고 하십시오.
목회를 해도 해야 되니까 한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 힘이 납니다. 일이 새롭습니다. 회사를 다녀도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는 사명을 갖고 다니십시오. 밥벌어 먹기 위해서 다닌다면 피곤합니다. 공부를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 글야 힘이 납니다. 그래야 일이 날마다 새롭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서를 통해서 이 세가지 문제를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진정 영원한 것인가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면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물거품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라는 허무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 무엇이 진정 만죽을 주는가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쾌락주의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쾌락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미있는 삶을 통하여 참 만죽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정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를 찾으십시오. 이를 해결해야 삶의 냉소주의, 즉 "사는 것은 다 그렇고 그런거야 별 것 아냐"이런 치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순응하라 (전도서3:1∼15)
나스룻딘이라는 사람이 나귀에 짐을 싣고 장사하러 다녔습니다. 하루는 나귀의 등에 소금을 싣고 짐이 무거웠던지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소금이 반은 녹아 짐이 가벼워지게 되었습니다. 나귀는 오히려 속으로는 좋아했습니다. 짐이 가벼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너무나 속이 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장날이었습니다. 나스룻딘은 나귀의 등에 솜을 싣고 장으로 갔습니다. 나귀는 짐을 덜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걸려넘어진 것처럼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짐이 가벼워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짐이 점점 무거워지는데 간신이 일어나 가는데 어찌나 무거운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낑낑거리며 장으로 갔다고 합니다.
인생이 이와 같습니다. 좋은 일이 있어 기뻐하는 사이에 예기치 않게 재난이 닥쳐옵니다. 또 재난을 당하여 슬퍼하고 있는 사이 뜻밖에 좋은 일이 찾아옵니다. 인생은 희비가 계속 엇갈리며 계속됩니다. 인생의 새옹지마는 계속 되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뽑을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은 것을 얼리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이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