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필 이렇게 쓴다
-수필의 출발점은 상식이 아니라 인식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누구나' 쓰는 글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씌여지는 글이라는 수필에 대한 인식이 세상의 저변에 깔리지 않는 한 수필의 운명은 서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수필 쓰기의 출발점은 문학적인 취미에서가 아니라 심미적 취향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감성과 지성의 균형 있는 조화를 통해 사물과 사회현상의 실재와 작가 스스로의 인생관을 동시에 노출한 작품이 나와야 한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아는 심미적 의무와 무엇이 '아름다움'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아는 미적 취향을 가진 수필가가 붓을 잡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수필이 문학 단계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한 단계 업그래이드된 상위 개념으로 나아간 '예술'에서 정의되어야 한다.
수필은 자기가 체험한 리얼한 기록을 토대로 씌어지는 글이다. 그 창작의 시작은 '상식'이 아니라 상식을 넘어서는 '인식'에 있다. 수필은 표현 기술의 습득에서가 아니라 소재를 보는 특별한 '관'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가을의 소리 앞에서 낙엽의 겸손을 배우고, 수필가가 되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필다운 수필을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산과 들에는 수만, 수억의 꽃들이 피었다 열매를 맺고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달은 한 번도 웃지 않았다. 아침마다 저녁마다 뜨락을 불고 지나가는 바람이 한 번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꽃은 혼자서 웃고, 바람은 혼자서 춤춘다. 그것이 꽃의 존재성이고, 바람의 존재성이다. 달을 내 방에 끌어들여 대화를 하는 것도 바람을 내 뜰 안에 이끌어 들여 같이 춤추는 것도 다 나에게 맡겨진 과제다. 형이하학적 제재를 통해서 형이상학적인 우주의 본질을 추적해 나갈 때 좋은 수필이 탄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필에 있어서 인생을 그리는 문과 창은 올바른 '인식'이다. 이 인식에 의해 '미'가 보여진다고 하겠다.
수필의 독자는 지적 정신의 소유자들이다. 따라서 수필은 교양인의 글이요, 지성인의 글이다. 심미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진짜 고상한 것, 진짜 훌륭한 것,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수필은 고상하고 세련된 지적 성찰을 요한다. “학교에 갔다와서 종일 놀다가 돌아와서 밥 먹고 잤다.”는 식의 글은 살아있는 사실에 대한 일반적 취미 속에 대치된 기록이다. 이런 글은 사실일 수는 있지만 문학은 아니다. 문학이나 예술은 감동의 창출에 목적이 있다. 수필은 시적 분위기의 산문이다. 그 방법은 '상'과 '정'의 조화에 있다. 수필은 따뜻한 마음이 그려낸, 심오한 발견에 실은 감동이다. 한 여인의 영상이 꽃 위에 머물게 됨으로써 탄생한 ‘국화꽃 옆에서’의 형상화 과정을 보면 인간의 정신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이 시적으로 변용되어 '상'이란 찬란한 의상을 갈아입게 된 것이다. 수필문학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천착이나 사회현상에 대한 날카로운 지성적 성찰을 동반해나가야 한다. 미학이란 누구나가 구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필을 아는 누군가에 의해 세워질 것이다.
비평가인 루카치는 수필을 일러 좀처럼 붙잡기 힘든 인간 영혼의 가장 은밀한 곳에 자리 잡은 마음의 미세한 풍경을 그리는 양식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은밀하고 신비로운 운명의 영역에 비춰보면, 수필은 시적 분위기의 산문이다. 말을 놓을 자리에 놓은 것이 시창작의 첫 걸음이요, 인물을 놓을 자리에 놓은 것이 소설 창작의 첫째 구상이라면, 마음을 놓을 자리에 놓는 것이 수필 창작의 요체다. 수필은 사상과 감정의 체험적 기록이다. 감동스런 체험에서 마음은 꽃이 된다. 자아와 세계의 만남이라는 차원에서 수필은 두 가지의 낯을 가지고 있다. 수필은 이미지를 의미하는 '상'과, 인정을 의미하는 '정'이란 두 축으로 짜여진다. '상'이 머리로부터 오는 학술적, 철학적 느낌이라면, '정'은 가슴으로부터 오는 심정적, 정서적 감정이다. 수필은 문학이기 위해서 문학적이어야 하고, 예술에 속하기 때문에 예술이어야 한다.
수필은 지성에 바탕을 둔 상을 그린다든지, 감정이나 정서에 바탕을 둔 시적 분위기의 글을 썼건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장은 때로는 머리로도 쓰고 때로는 가슴으로도 쓴다. 우리가 지향하는 예술 수필은 정신적 감동을 위주로 하는 시적 분위기의 수필이다. 감성은 수동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나타내는 반면, 인간과 세계를 잇는 원초적 유대고리의 역할을 한다. 즉 이론적 인식에서는 이성적 사고를 위한 감각적 소재를 제공하고, 실천적․도덕적 생활에서는 이성의 지배와 통솔을 받을 소지를 마련하며, 미적 인식에서는 자신의 순수한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인간적 생의 상징적 징표가 된다. 따라서 감성적 세계인식은 매우 소중한 감각적․도덕적․미적 계기를 우리 인간에게 부여한다. 우리 수필문학이 이러한 감성에 토대를 여전히 두고 있다는 것은, 그 점에서 필연적이고 장려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감성 편향이 될 때인데, 그 편향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기능은 인간의 합리성에 바탕을 둔 지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수필가의 지위를 얻었다고 해서 자신이 쓴 글을 모두 수필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 인생을 내가 그린다고 모두 수필이 되는 건 아니다. 적어도 수필의 개념을 알고, 문학을 알고, 예술을 아는 사람만이 수필다운 수필을 쓸 수 있고, 적어도 예술적 차원으로 수필미학을 끌어 올릴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수필을 쓰려는 사람은 일반 수필론이 아니라 본격수필이론을 자주 접함으로써 나름대로 수필에 대한 예술성의 개념을 정립하고 자신의 수필을 끊임없이 예술로 끌어올리려 노력해야 한다. 수필의 개념이 이런 식으로 예술의 바운드리 안에서 엄격히 제한될 때 비로소 수필의 가치와 격이 높아진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예술성이 충분히 제고되어 있는 수필을 누가 잡문이라 폄하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