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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שְׁלַח־לְךָ 슐라흐-레카" : 6월 셋째 주 토라포션 in 5777
민13:1-15:41(To), 수2:1-2:24(Haft), 히3:7-4:1(Brit), 살전1-5(신약)
1부 예배 베드로 목사님
슐라흐 레카
민13:2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코라흐
민16:1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민수기 토라포션은 10개이다. 그 중에서 코라흐까지 5개를 왔다. 바미드바르, 나쏘, 베하알로테카, 슐라흐 레카, 코라흐. 어쩌면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비해서 민수기 말씀을 배우는 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행복한 시간이 아닐 수 있다. 제 안에 있는 모든 악이 드러나더라. 민수기의 대부분의 사건은 다 부정적인 사건을 말하고 있다. 좋고, 복을 내리는 것은 별로 없다. 부정적인 것들을 다 수면 위로 끄집어올린다. 그런데 이 부정적인 사건을 다루는 이유가 있다
사람은 부정적인 것을 통해서 긍정적인 것을 체득할 수 있다. 어둠이 있어야 불을 켤 수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에게 불을 주면, 이 불이 뭔지 잘 모른다. 불은 따뜻하고, 밝게 비춰주는 것보다, 아이에겐 불 조심해야한다, 이 불을 통해서 화상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게 된다. 그러면 이 아이가 이 불을 어떻게 다뤄야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뜻하다고 불 피우다간 다 타버린다
아이에게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을 어떻게 가르쳐줄 수 있을까? 한번은 아이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쳤을 때 호되게 매를 한번 들었다. 그때 이 아이가 도둑질하면 안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더라
사람은 자기의 악한 경향성을 통해서 선한 경향성으로 나갈 수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지난 한주간 슐라흐 레카 말씀을 배웠다. 다 정탐꾼에 관한 이야기였다. 단순히 민13장의 정탐꾼 사건 이전에, 이 자리의 저와 여러분 모두, 이 세상의 사람들 모두는 정탐을 하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정탐하지 않고서는 결코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 예배 드리는 지금도 정탐하고 있다. 누가 왔나 안 왔나? 내 뒤에는 누가? 더운데 에어콘은 킨 것인가? 계단 올라가는 가운데 냄새를 맡고, 점심은 카레야? 짜장이야? 우리는 모든 것을 계속해서 정탐한다
사실 정탐이라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위한 것이다.
투르 : 정탐하다, 완성의 머리, 십자가의 머리
십자가의 영으로만이 우리가 정탐해야하는 것이다. 지난 주 배운 것 가운데 정탐은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아는 열 스파이의 방법이다. 12명의 지파 가운데 지휘관들의 정탐을 보낸다. 그 중 10 스파이는 자신의 오감, 감각으로, 이성을 사용해서 정탐한다. 이러한 것들을 육신의 생각 / 소욕이라고 한다. 자기 자신만을 신뢰하고, 자신의 판단과 지식에 의해서 정탐을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방법이 우리가 아는 갈렙과 여호수아의 정탐 방법이다.
콜레브 : 갈렙
콜 : 모든 / 레브 : 마음
= 모든 마음, 온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예슈아를 말하고 있다. 온 마음은 예슈아만을 쫓는 마음으로 정탐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지난 주 핵심 단어인 루아흐 아헤레트라고 한다. 따르는 영이다. 완성의 영이다. 마지막의 영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너의 판단, 오감, 감각으로 정탐할 것이냐? 아니면 이 정탐을 영의 생각으로 할 것이냐? 이 두 가지로 나눠진다는 것이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두루 다닌다고 했다
עִבְרִ 이브리 : 두루 다니다
바르 : 아들
= 내 눈이 아니라 아들의 눈으로 정탐하는 것이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열 스파이와 똑같은 것을 보았다. 거인을 보았다. 그런데 진짜 거인은 네필림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진짜 거인이시다. 우리 하나님이 가장 크시고, 우리 하나님이면 다 된다는 것을 갈렙과 여호수아는 본 것이다
열 정탐꾼은 허상, 망상을 보았다. 다 죽겠구나. 차라리 애굽으로 가는 것이 낫겠구나. 두려워 떠는 것이다
슐라흐 레카의 핵심은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주님은 이 광야에서, 민13장에서 우리의 육신의 생각을 광야에서 다 죽이시길 원하신다. 왜냐면, 이 육신의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불평과 악평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불평과 악평을 많이 하고 계시는가? 저는 그렇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디바라고 한다
דִבָה 디바 : 불평, 악평
사람은 누구나 말을 하고 살아간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דָבַר 다바르라고 배웠다. 여기서 레쉬를 빼면 디바가 된다. 누구에게 말을 하지만, 영 / 머리가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체가 불평과 악평이다
말의 핵심은 내 입 같지만, 머리가 말하는 것이다. 머리 없이, 개념없이 말하는 것이 다 불평과 악평이다. 조금만 나에게 잘못되었다면 막 쏘아붙인다. 아무리 생각 좀 하고 말하라고 해도 생각이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이 불평과 악평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망을 가져오게 된다.
우리 안의 깊은 곳에 선과 악의 지식나무가 뿌리박혀있다. 이것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잣대로 선악을 판단하고 있다.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할까? 죽어도 나는 선하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환경, 우리 학교, 우리 엄마, 아빠가 문제고, 네가 문제다. 나는 문제가 없다. 모두 남이 문제인 것이다. 곧 죽어도 나는 완성하고 완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악평과 불평인 것이다
(The Man) <== (Pieces)
우리가 그토록 계속해서 많이 그리는 그림이 있다. 나는 개별적인 한 존재로 살아간다. 그런데, 이 위에 있는 분을 The Man, 우리 야훼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한다
갈렙은 이 Piece들이, The Man이 온 마음, 콜 레브라고 한다. 온 마음, 이 조각들이 하나가 되어서 The Man이 되는 것이 진짜 에하드라고 한다. 이 동그라미 하나도, The Man이 하나되기 위해서는 이 조각들이 다 필요하다. 저와 여러분, 가족, 친구들이 다 필요하다. 이들과 다 연결되야지만 The Man이 될 수 있다. 이것을 생명나무라고 한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다 내 이웃을 위함이다. 더 이상 내가 이렇다, 저렇다는 것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 이 세상에 한 사람만이 존재한다. 이것을 The Man이라고 한다. 얘가 나라고 하지 않는다. 이 The Man을 나라고 한다. 나는 The Man이다. 야훼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성 모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야훼 하나님인 것이다.
이 사람에 대한, 내 옆 사람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같다 네 이웃을 사랑해라, 네 이웃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The Man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이 형상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그중의 한 조각일 뿐이고, 나와 같은 조각들이 다 하나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슐라흐 레카라는 것은 슐라흐, 보내다는 것이다. 사도라는 뜻이다. 보냄받은 자란 뜻이다. 그런데 레카라는 말은 뭔가? 너를 위해, For you이다. 슐라흐 레카라는 것은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해 보내라는 것이다. 너가 누굴까? 바로 모세에게 말하고 있다
정탐꾼을 보내라는 것은, 모세야, 너를 위해서 보내라는 것이다. 사실 정탐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것이 모세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다. 신명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정탐하는게 좋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모세가 그렇게 하자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것에 동의하신다.
민13:3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바란 광야에서 그들을 보냈으니 그들은 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령 된 사람이라
이스라엘 자손의 수령된 사람들을 정탐꾼으로 보낸다.
רֹשִׁא 로쉬 : 수령, 머리, 지휘관들
이스라엘 자손들의 머리들을 정탐하라고 보낸 것이다. 각 지파의 머리, 으뜸이 된 사람들을 보내고 있다.
주님은 머리이시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머리가 되게 하신다. 여러분들은 다 머리이시다. 주님이 대제사장이시면서, 여러분 각자를 제사장이 되게 하신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머리냐는 것이다. 주님도 머리고, 나도 머리면 같은 머리인가? 오직 이 세상의 유일한 단 하나의 머리, The head는 주님밖에 없다. 나는 a head이다. 우리는 The head가 되기 위해서 붙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민14: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민13장에서 정탐한 후에, 14장에서 난리가 난다. 가관이다. 14장에서 10 정탐꾼이 모세를 대적한다. 이 10 정탐꾼이 머리들, 로쉬들이다. 영적으로 탁월한 리더십들이고, 각 지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모세를 대적하기 시작한다. 우리 안의 10지파의 리더십들이 The Head에 대해서 반박하기 시작한다.
이 정탐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가 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다시 세우고자 하는 것이 지휘관들, 머리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이 머리 마록, 다시 머리를 세우자. 내가 되어야 할 어떤 형상 하지 말고, 다시 한번 머리를 세우자고 말한다. 무슨 말인가? 나는 더 이상 a head로 살고 싶지 않고, The head가 되고 싶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머리, 내가 만드는 머리로 살겠다고 한다
계속해서 머리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많은 인생을 광야로 표현한다. 인생이 뭔가? 인생은 머리에 붙는 것이다. 여러분은 세상을 살면서 누구의 머리에 붙고 계시는가? 내가 존경하는 위인의 머리? 부모? 스승? 누구의 머리에 붙고 계시는가?
토라는 단 하나의 머리에 붙으라고 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붙으라고 한다. 그런데 이 머리를 지휘관들을 바꾸자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를 바꾸자. 그리고나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정말 힘들게 애굽에서 끄집어냈는데, 다시 머리를 세우고, 다시 머리가 바뀌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내 안에 있는 지휘관들이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했을 때 이렇게 불평, 불만할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야, 슐라흐 레카, 너를 위해서 정탐해야 한다. 이렇게 불평, 불만할 것을 아시면서 왜 이렇게 보내야했나요? 그런데 모세를 위해서 이 머리들을 다 드러내야하신다. 슐라흐 레카에서는 악평과 불평을 드러내야 한다.
이 민13장의 정탐꾼 사건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이 불평과 악평을 내 안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나오고, 예수 믿고, 교회 나오면 다 된거 아닌가? 끝이 아니란 것이다.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면 안된다. 예수 믿었으니까 구원받고 이렇게 살면 되는거 아닌가? 내가 머리가되어서 살면 되는거 아닌가? 이렇게 살면 안된다
구원을 받은 자는 반드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만 한다. 그래서 마지막날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구원을 받으셔야 한다. 구원을 받고, 이루어가고, 나중에 다시 받을 것이다. 하지만 불평하고 악평한다면 우리는 구원을 이루어갈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한 40일의 시간을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약 광야에서 40년 동안 다 죽게 만든다. 불평과 악평한 사람들이 40년 동안 다 죽는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듣고 동의한 사람들도 광야에서 다 죽는다. 광야 40년 동안 주님께서 하시는 것은 뭘까? 진리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진짜 사랑에서부터 나오는 진리로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악평과 불평을 싹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이전에 토라포션 베하알로테카를 기억하시는가? 우리는 계속 불을 켜는 것에 대해서 배웠다. 나를 비추는게 아닌, 반대쪽을 비추는 불. 그 불을 켜기 위해서는 불을 켜는 사역이 필요하다. 그 사역을 하시는 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 어둠 가운데 빛을 비추는 분이 필요하다. 어둠의 상태, 괴물같은 상태로 사는 우리에게 불, 그 개념이 필요한 것이다
נֵר 네르 : 등불, 수동적(נ)인 머리(ר)
불은 내가 켰다 껐다 하는게 아니라, 이 불을 켜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내 머리로 살아가는 한 답이 없다. 수동적인 머리로 살아가야 한다. a head가 The head가 되어서 내가 살아가는거라고 하는 순간 답이 없다. 반드시 진짜 머리가 우리의 불을 켜주셔야 한다
그래서 투르, 정탐의 모든 시작은 네르에서부터 시작한다. 불이 켜져야지 정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하알로테카와 슐라흐 레카가 연결되어있는 것이다
민13:16 이는 모세가 땅을 정탐하러 보낸 자들의 이름이라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 불렀더라
- 눈의 아들, 수동적인 사람이다
마지막에 눈의 아들 호세아만 이름을 여호수아라고 부른다.
קָרָא 카라 : 부르다 = 선포하다
부른다는 것은 다 소망(ק)을 보는 것(רָאָה)이다. 누군가를 부른다는 것, 거기, 친구야, 엄마, 아빠를 부르는 것은 거기 안에 있는 소망을 보는 것이다. 누구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거기 안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의 소망을 내 맘대로 부르면 안될 것이다. 이름, 쉠, 형상에 대한 진리를 부르는 것이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너는 그렇게 될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2주 전에 이삭이가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 형제가 목사님께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던 것이 굉장히 의미가 있었다. 때로는 그 생명이 오래 살 수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름을 지어달라고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울었다. 부를 수 있는 이름이란, 그 아이 안에 있는 소망에 대한 선포인 것이다. 이다윗, 너는 다윗과 같이 될 수 있는 성품인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1kg밖에 되지 않는 아이가 태어났고,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아이지만, 이 교회의 사랑과 기도로 골리앗과 싸울 수 있는 강한 자, 너는 그렇게 될거야. 믿음의 아이, 기적의 아이가 될 것이라는 것의 선포인 것이다. 저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대단하다고 보았다
모세는 호세아 말고 나머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들은 다 수동적인 머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10명의 지휘관들은 다 수동적인 머리를 가지지 않고 다 자기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갈렙도 설명하지 않는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두 사람이 아니라 같은 것이다. 콜 레브 예슈아, 온 마음을 가진 이분이 곧 여호수아, 예슈아이기 때문이다.
이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나머지 10명의 머리는 다 자기의 머리로 살고 있는 것이다. 자기 안의 선악의 개념으로 살아가는 중심에는 오직 나 밖에 없는 상태이다.
( 머리 : 아버지 ) <--- ( 몸 : 아들 )
사람은 몸과 머리로 나뉘어져 있다. 몸은 머리에서 나오는 전달체계로 이루어진다. 몸이 머리를 움직이는게 아니라, 머리가 몸을 움직인다. 그래서 이 몸을 아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머리를 아버지라고 한다.
몸을 이끌고 살게하는 것은 머리이다. 아들은 아버지가 살게한다. 이 둘은 사실 같다. 몸과 머리가 따로 떨어져서 살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다. 한 생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이고, 아들이 또 아버지이고, 아들이 살아가는 생명은 아버지의 생명으로 살게되는 것이다. 이게 네르라는 것이다.
메노라의 네르가 있다. 메노라는 한 덩어리를 쳐서 만든다. 이 7개를 조각낸 것을 붙여서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로 된 한 덩어리를 쳐서 만드는 것이 금촛대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다.
네르라는 것은 수동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눈은 신실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신실한 머리이다. 신실하게 아버지만을 믿는 것이다. 아들 자체가 아버지만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똑같다. 아버지만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많은 것에서 나 자신만을 믿고, 보이지 않지만 내 신들을 만들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아버지가 머리이면 다 되는 것이다
올초에 쿠웨이트를 다녀왔다. 그곳에서 아버지들을 만나고 왔다. 굳이 비싼 돈과 시간을 들여서 갈 이유가 있을까?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나중에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닮아가야 할 아버지들이 거기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만이 아버지라는 것이 영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제가 경험한 것이 그런게 아니다. 이 온 우주는 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되어있다. 아버지의 관점이 동일하게 나에게도 있으면 나는 살 수 있는 것이다
열 정탐꾼이 계속 하는 것을 악평과 불평만 한다. 모세가 이 정탐꾼들의 지휘관이고 머리였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관점을 다 잃어버렸다. 아버지가 없는 상태였다. 나 혼자 살기 원하는 열 정탐꾼의 상태는 아버지가 없는 상태였다. 그들이 그들의 눈으로 보긴 봤다. 눈에 빛이 비춰졌다. 그런데 다 자신들이 원하는 빛으로 본 것이다. 오감이 만들어낸 허상의 빛을 본 것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는 그 빛으로 본 것이다. 보이는게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완전히 모세의 빛으로 보게된다. 아버지의 관점으로 그 약속의 땅을 보게된다. 아버지가 비춰주신 빛으로 아들은 보게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그것이 여호수아를 따로 부른 모세의 이유인 것이다
주님이 약속의 땅에서 처리하기 원하는 것은 악평과 불평이라고 했다. 육신의 생각에서 나오는 가장 핵심적인 것을 악평과 불평, 디바라고 한다. 디바란 다 받기 위해서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것 같지만, 또 받기 원하는 것들이 악평이다
민13
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정탐한 땅에 대한 불평과 악평을 하고 있다.
אֶרֶץ 에레쯔 : 땅 = 마음
רץ 라쯔 : 원하다, 갈망하다
땅은 하나님의 신성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땅에 대한 악평과 불평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에 대한 악평과 불평이다. 곧, 그리스도 자체에 대한 악평과 불평을 하고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란 다른 이웃, 존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존재이다. 자기 생명을 잃는 것,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만 살겠다고 하는 것을 완전히 버리는 것, 이것을 단 하나의 비전, 제자라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되는 것, 이것이 곧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 제자 또한 내가 만들어내면 이것을 악평과 불평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자가 되는 유일한 방법이 네르, 불이 켜지는 것이다. 수동적인 머리로 살면 그 사람이 바로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 수동적인 머리를 통해서 정탐하는 것이다. 완성의 머리가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머리로 살면 그 사람을 제자라고 한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제자가 되는 것은 자기를 위해 사는게 아니라,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제자가 되는 것은 다 For me로 사는 것을 끝내고 For you, 이웃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게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하아레쯔, 약속의 땅이라고 한다.
이런 삶은 마음이 새롭게되어서 변화를 받아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살고 계신가? 다 주고 싶은 마음, For me가 아니라, For you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이것이 정말 여러분들의 비전인가? 살아가는 이유가 나를 위해서 아니라, 제자를 삼고 제자가 되기 위해서 살아가시는가?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내 생명을 아낌없이 주는 것이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시는가? 이 비전으로 레크 레카 하시기 바란다. 이 비전으로 사시기 바란다
우리가 바라는 약속의 땅,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The Man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이런 마음을 가져야지만 하나가 될 수 있다. 단 하나의 비전, 제자의 비전을 가지는 것 밖에 없다. 이런 비전을 사람이 가지면 약속의 땅에 간다고 한다. 이 비전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 비전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맛보아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계속 두루 다니며 정탐한다.
완성의 머리, 십자가의 영으로 살기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탐을 하면 그 순간 악평이 계속해서 나온다. 그런데 이게 정말 가능한가?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이웃을 위해 주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꼭 이것밖에 없는가? 저는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다
악평에서의 핵심은 무엇을 보고 있느냐이다.
민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정탐꾼들은 다 네필림들을 본다
נפלים 네필림 : 거인
창6장에 보면 최초로 사람의 딸들과 불법적 성관계를 한 자들이다. 자기 사랑이 굉장히 큰 거대한 거인들이다. 나는 너무나 날 사랑해..!
נָפַל 나팔 : 떨어지다, 넘어지다 / 엎드러지다
단3장에 보면 금신상 앞에 엎드러질 때, 다 네필이라는 말을 쓴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계속해서 금신상에 엎드리라고 할 때 이 친구들은 안 엎드린다. 금신상에게 엎드러 절하라, 절하지 아니한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부물 가운데 떨어지게 된다.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다른 어떤 것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그것을 네필이라고 한다. 완성의 머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내가 만든 머리에 엎드러지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다
민11: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한다고 한다. 비트오나님 라아, 오난이라는 사람이 뭔가? 자기의 씨를 땅에 설정한 사람이었다. 유다의 자식이었다. 그런데 이 오난이 너무 악하다. 악하다는 것은 머리에 있는 관점이 악하다는 것이다. 오난과 같이 살지 않기 바란다.
씨를 자기 형에게 주지 않고, 땅에 다 설정해버린다. 씨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열매는 좋은데, 그 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그 씨 안에는 원래의 개념이 들어있다. 그게 중요하다. 오난은 이 씨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파괴한 사람이다. 자신이 만들어논 선악의 개념으로 원래 만든 생명나무의 개념을 완전히 파괴한 사람이다.
זֶרָע 제라 : 씨
이웃을 향해서 빛을 비추는 것인데, 이것을 완전히 죽여버린다. 그러면 이것이 라아, 악이 되어버린다. 이웃이 아니라 나만 비추고, 내 생명만 귀하게 여기는 것이 오난의 모습이다.
이것을 נפל 네펠이라고도 한다. 유산, 낙태라는 뜻도 있다. 자기 기쁨, 만족을 위해서 불법적 성관계를 하는 것, 씨를 파괴해버리는 것이 바로 네펠이다.
지금 열 정탐꾼은 이것을 본 것이다. 씨를 파괴하는 것, 나의 기쁨을 위해서 씨를 죽이고, 생명나무를 잘라버리는 것을 보는 것이다. 불평과 악평은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출산한다. 해산할 때, 내 몸매가 망가지고 있는 것 같고, 내 취미가 중요하고 아이는 알아서 크겠지, 생명을 줄 때 내가 받을 것을 체크하는 것이 네필림이다. 세상은 적당히 받기도 해야지 뭘 그렇게 퍼주고 있냐? 너도 좀 받으면서 살라고 한다
교회가 빡빡하다. 그렇게하다 어떻게 살라고? 너의 노후를 위해서 챙기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불평과 악평은 강력하다. 이 디바의 정체를 알기 바란다.
דִבָה 디바 -> דוֹב 도브 : 곰
삼상17
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37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 예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다윗이 사울의 진영에 나타난다. 블레셋 군대와 싸우는데, 골리앗이 있다. 싸우기 전에 다윗이 사울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뒤쫓아가서 곰을 쳐죽인다. 곰이 달려들면, 턱을 붙잡고 때려 죽이거나 찢어죽인다고 이야기한다.
이 디바는 늘 양 떼를 물어간다. 우리 안의 양 떼를 물어간다. 늘 많은 양 떼를 죽인다.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양들을 다 죽인다. 그게 불평과 악평이다. 곰처럼 강하다. 곰은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늘 자기가 다 이기는 줄 안다. 그런데 곰은 다윗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양 치는 목자는 늘 때려죽이고, 늘 찢여죽여야 하는 것이 바로 디바이다. 이 세상에서 맨날 The Man하지 말고, 나 혼자 단독자로 살겠다, 바드로 살겠다고 했을 때 여기서 도브, 곰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악평과 불평이 나오게된다.
우리는 한 생명이다. 우리는 에하드이다. 이것을 The Man이라고도 말한다. 하나의 몸에서 나온 60만개로 나눠진 한 조각들이다. 한 Piece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Piece가 내가 나이고, 내가 다 할거고, 내가 이 세상의 짱이야, 내가 다 할 수 있어, 내가 나라고 하는 순간 도브가 나오기 시작한다. 나의 비전, 나의 삶을 위해서 돈을 많이 벌고, 나밖에 모르는 관점이고, For me, 나를 위해 사는 것을 바드라고 한다
세상은 너를 위해 살아야지, Self centered, 나를 위해 살라고 한다. 나를 위한 삶 밖에는 관심이 없다. 내 이웃이고 뭐고 관심이 없고, 내 이웃을 돌아보지 않을 때 거기서부터 디바가 나온다. 그러면 곰이 나와서 우리를 다 죽인다. 유일하게 이것을 끝장낼 수 있는 사람을 다윗이라고 한다.
다윗이가 우리 가운데 온 것은 참 중요한 것 같다. 나쏘에 태어난 이 아이가 우리에게 하고자하는 메세지가 있는 것 같다. 이 도브를 끝내기 위해서 이 땅에 온 것 같다. 엄마, 아빠, 이모, 삼촌, 할머니, 할아버지, 디바로 살지 말라고. 나 혼자 살기 원하는 바드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이 악평과 불평을 하지 말라고 태어난 것 같다. 다윗이가 태어나서 우리의 모든 악평과 불평을, 여전히 내가 받기 위해 주고 싶은 그런 나의 모든 것들, 이 곰을 찢어죽이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
참 감사하다. 이 디바를 찢어죽일 수 있는 다윗이를 통해서 우리 안의 이 전체의 빛이 우리 안에 비춰져서 참 감사하다. My name이 아니라, The name인 하쉠 예슈아를 보게되어서 참 감사하다.
이 슐라흐 레카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위해서, 그리고 리더십 중에서 이 디바를 다 빼내라고 하신다. 광야 가운데 내가 머리라고 하는 그런 머리들을 다 죽인다. 반드시 하나님은 다 죽이신다.
불평과 불만, 이 악평을 우리 입에서 완전히 제거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40년 동안 한다는 것이 재미있지 않는가? 하루, 이틀로는 결코 되지 않는다. 너무나도 잘 포장되어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늘 존재하고 싶어서 말이다.
이 디바라는 것이 자기의 의와, 자기의 선으로 잘 포장되어있다. 그래서 이게 하루 아침에 되지 않는다. 이것을 약 40년 동안에 하게된다. 죽어라 40년 동안 우리는 이것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모세는 이런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계속해서 모세를 죽이려고 한다. 갈렙과 여호수아가 아니라고, 우리는 바드로 살지 않을 것이라고, The Man으로 살거라고, 저 디바, 네필림은 우리의 밥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랬더니 이 백성들이 여호수아와 갈렙도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만히 두지 않으시고, 전염병으로 다 죽이려고 하신다. 다윗도 가만두지 않고 이 곰을 반드시 찢어죽일 것이다.
고후6
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사도바울은 고후6장에서 마음을 넓히라고 한다. 넓은 마음, 열린 마음, 주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라고 한다. 약속의 땅에서는 좁은 마음, 닫힌 마음으로는 살 수가 없다. 받기 위해서 주는 마음으로는 살 수가 없다. 디바 / 악평과 불평은 다 닫힌 마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좁은 마음이실까 넓은 마음이실까? 넓은 마음이실 것이다. 사도바울이 마음을 넓히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같아지라는 것이다. 너만 보지 말고, 넓은 마음을 가져야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엔 물질이 많고 적음이 없다. 바드, 단독자, 나 중심으로 사는 가운데, 그것은 다 좁은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나만 보고, 내 중심으로 사는 것이다. 이 바드를 제거하고, 이웃이 나라는 관점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이웃이 잘되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다. 바드는 이웃은 상관없이 나만 잘되면 된다는 것이다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한다. 그런데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라고 한다. 뭘 주긴 줘야 하는데, 줄게 없으면 거름이라도 줘야할거 아닌가? 축하해줘야할거 아닌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이웃을 위한 마음이 넓어져야 한다. 안 그러면 약속의 땅에 갈 수가 없다. 한 몸이라는 이 비전만이 우리를 살린다
슐라흐 레카의 말씀을 통해서 마음이 넓어지기 원한다. 디바를 제거하는 방법은 마음이 넓어지는 것밖에 없다. 나를 바라보는 관점 가운데는 절대 불이 켜지지 않는다. 바드로서 나만 보았군요. 나만 보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제 전체를 볼 수 있는 그 불이 켜져야 할 것이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한 마디로 너는 내 아들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다윗에게 말한다. 이 아이는 내 아들이다. 너와 나는 한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한 생명이시다. 그리고 주님과 우리는 한 생명이다. 그래서 예슈아 비전교회는 제자 교회이다. 예슈아 비전교회를 회중교회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이다. 회중 교회는 그냥 모여서 좋은 영적 이야기 듣고 가는 교회이다. 백날 좋은 이야기를 들어도 마음이 넓혀지지 않는다. 나를 위해서 좋은 이야기 듣는 것이다. 내가 싫은 이야기 듣고 싶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 이 제자 관계만이 이 바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계속 이야기하신다. 네 마음을 넓혀라. 나와 하나가 되자.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믿지 않는 자가 뭘까? 내 주변에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교회에서 말하는 주는 사랑, 하나님과 하나가 되야한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안 믿고, 나 혼자 살거야. 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과는 멍에를 함께 멜 수 없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들어각 위해선,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멍에를 함께 멜 수 없는 것이다. 나와 함께 멍에를 멜 수 있는 파트너는 같은 레벨인 것이다. 이웃을 위해 살거야, The Man으로 살거야라는 사람과 멍에를 멜 수 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빛과 어둠, 의와 불의, 열린 마음과 닫힌 마음은 함께 있을 수 없다. 내 안에 있는 정상 세포와 암세포는 함께 있을 수 없다. 반드시 찾아내서 찢어죽여야 한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떻게 조화가 되겠는가?
בליעל 벨리야알 : 벨리알
- 사탄의 이름이다
בל 벨 : 없다, Without
벨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벨이다. 벨은 없다는 것이다. 바벨탑은 시스템, 집이 없단느 것이다.
없긴 없는데 על 알이 없다. 알은 상승이다. 올라가는 것이다. 위의 것, 올라갈데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그리는 그림이 있는데, 올라갈 것, the man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나 혼자 살면 된다는 것이다. 영적 상승, 에하드, The Man이 없다는 것이다. 위에 있는 것을 제거해버리는 것이 벨리알이다
교회에서 그토록 이야기하는, 이웃과 하나되어서 하나님께로 올라가고, 하나님처럼 되자고 하는 것이 없다고 하며, 나 혼자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것이 벨리알이다. 가장 높은 지존자를 없애는 것이다
민14: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라고 한다. עלי 알라이이다. 위,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과 불만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고 있는 것이다.
부부는 에하드를 향하여야 한다. 반드시 하나됨을 향하여 가야한다. 에하드와 에하드가 만나서 에하드가 되고, 에하드된 부부끼리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열린 마음, 마음이 넓어지면 집을 Open하게 된다. 그런데 여전히 닫힌 마음으로 초대하면, 나에게 오는게 뭐야? 저 사람은 왜 저래? 다시는 오지마. 피곤하고 힘들고, 왜 사람을 집에 들이는거야? 자기 의가 불쑥 튀어나오고, 교회에서 말하는 비전에 대해서 원망한다. 이게 무슨 가족이냐? 뭐가 아버지, 어머니냐? 악한 말을 쏟아내고, 디바가 끊이지 않는다. 내 삶이 이 모양인데 토라가 무슨 필요가 있냐? 교회는 맨날 훈련하고 제자되라고 한다. 맨날 쟤는 사랑하고 나는 사랑 안 해준다고 한다. 그게 불만과 불평이다
על 올 : 멍에
- 벨리알은 멍에를 지고싶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멍에를 같이 메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시는데, 벨리알은 그런거 없어도 된다는 것이다. 멍에를 메지 않는 소나 말은, 말도 안 듣고, 자기 맘대로 한다. 이 세상이 무법 천지가 되는 것이다. 토라가 없는 상태, 그렇게 사는 존재가 벨리알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는가?
상관하다는 말은 몫을 나누다는 것이다. 나한테 주어져있던 어떤 일부분들을 나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의 몫은 다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몫은 다르다. 그리스도의 몫은 The Man이다. 하지만 벨리알의 몫은 나 한 사람, 바드이다. 바드로 살다가 가는 곳을 지옥이라고 한다. 믿는 자들은 에하드로 갈 것이고, 믿지 않는 자들, 벨리알은 지옥으로 갈 것이다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은 결코 일치가 될 수 없다. 우리의 각 조각들이 합쳐지면 이것을 The Man, 성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Piece 자체가 나 혼자 바드로 살겠다고 하는 것을 우상이라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은 늘 성전에 거하신다. 우리가 성전에 되어야 할 목적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원하는 것이다.
민14: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하시느니라.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올라가자. 임마누엘이라고 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이번 한주간에 여러분들의 마음을 넓히고,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원한다. 디바를 찢어죽이고 열린 마음으로 사시길 축복한다
* 기도
주님, 우리 안에 정탐이 있게 하소서. 투르, 진짜 십자가의 머리를 가지고, 십자가의 영으로 정탐하게 하소서. 이것을 통해서 영적 성장을 이루게 하소서. 십자가의 머리, 이 완성의 머리가 필요합니다.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콜레브이신 예슈아로 살겠습니다. 내 안의 이 디바를 완전히 제거하기 원합니다. 내 안에 있는 이 디바를 찢어죽이기 원합니다. 여전히 내 머리로, 받기 위해서 주는 이 악평과 불평을 좀 그치게 하소서. 이제 내 머리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나는 수동적인 머리, 네르, 신실한 머리로 살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생명으로 살게하소서.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제자의 삶을 살게하소서.
슐라흐 레카 기간에 수동적인 머리가되어 투르, 정탐하기 원합니다. 콜레브이신 예슈아로 내가 살기 원합니다. 여전히 받기 위해 주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내 모습을 돌아봅니다. 내 입술에 악평과 불평을 그치게하소서. 이 디바를 제거하시고, 도브를 찢어죽이게 하소서.
아버지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생명으로 살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아버지, 내가 당신과 같이 살게 하소서. 제자의 삶을 살게하소서. 넓은 마음으로, 열린 마음으로, 주는 사랑의 마음으로 살 수 있는 내가 되게 하소서.
2부 예배 벤 다비드 전도사
우리는 지난 주 슐라흐 레카 주간을 보내고 코라흐 주간으로 나오고 있다. 지난 주부터 대형 사건 사고들이 터지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사건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감자를 캘 때, 하나를 뽑으면 줄줄이 엮여서 나온다. 민수기 사건에서 이거 터져서 메꾸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죄악을 꺼내는 시간인 것이다. 죄의 큰 줄기, 아본이 슐라흐 레카에서 고라로 이어지고 있다.
열 정탐꾼 사건과 고라 사건의 공통점이 둘 다 머리가 없고, 스스로 리더가 된 것이다. 열 정탐꾼 사건은 머리가 없어서 누가 말하면, 전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고라 사건은 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건 나 밖에 못한다. 나 아니면 누가 할 수 있냐? 너만 하냐고 고라이고, 난 못하는 것이 열 정탐꾼이다.
그래서 코라흐가 있기 위해 반드시 우리는 슐라흐 레카를 지나야한다. 모든 일에는 다 순서가 있고, 그 모든 일의 순서를 토라가 가르치고 있다. 특별히 고라는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탐낸 사건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자 하는데, 남이 가진 것이 더 커보인다. 다른 사람의 은사가 더욱 더 빛나보인다. 그것을 취하고자 하는 사건이 고라 사건이다. 이것으로 인해 고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벌을 받는데, 산채로 스올에 빠지는 형벌을 고라가 받게된다.
이 사건 이후에 주님은 제사장과 레위를 구별하신다. 그래서 제사장과 레위의 질서를 정확하게 세워주신다. 제사장은 온전한 주기 위한 Give to give의 존재를 의미하고, 레위는 주기 위해 받는 Receive to give이다. 레위의 역할은 뭐냐면, 제사장의 역할을 할 수 있는게 아니라, 제사장을 섬기는 역할이 바로 레위에게 주님이 허락하신 포지션이 되는 것이다.
제사장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레위, 그리고 온전히 주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제사장, 이 코라흐 주간에는 이러한 질서가 우리 가운데 세워지게 된다. 여러분 안에도 이런 질서가 세워지길 축복한다
이러한 고라의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지난 주 슐라흐 레카의 말씀을 정리해봐야한다
첫 번째로 정탐을 보내는 일이 있게되고, 오는 일들이 있게된다. 와서 하는 보고가 악평이었다. 그러니 불평을 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다 없애시려고 하시던 일들이 있게되고, 아비 세대, 애굽에서 나온 세대가 광야에서 죽을 것이고, 40년 동안 유아 세대가 광야에서 방황할 것이라고 하시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이 드릴 제사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리고나서 부지중에 짓는 죄의 속죄를 말씀하시고, 안식일에 나무하는 자를 돌로 쳐죽이는 주님의 판결이 있게되고, 마지막에 자신의 눈과 마음으로 음행하지 않기 위해서 옷단에 술을 달라는 말씀으로 슐라흐 레카의 말씀이 마무리가 된다.
שְׁלַח־לְךָ 슐라흐 레카 : 너를 위해 보내라
슐라흐 : 보내다, Send / 레카 : For you, To you
원래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을 배워오고 있다. 원래는 정탐을 보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원래 우리의 상태였다. 원래 지음받은 인간은 뭔가 알아보려고 정탐을 보내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타락이 일어났다. 위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원래 우리가 위에 있었을 때는 아래가 다 보이니까, 모르는게 없었다. 다 알았다. 여기서 다 보이니까, 굳이 가서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내려오니까, 타락하니까 위가 안 보인다.
우리는 올라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지금까지 주님을 몰랐어도, 우리는 더 나은 삶을 목적으로 하고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정탐을 하게 되어있다.
우리가 영적이던, 육적이던 새로운 스테이지에 들어가면 늘 하는 것이 정탐이다. 새로운 스테이지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이전의 나의 지식이 소용없는 단계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관이 명관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익숙한 것이 좋다. 특히나 어른들일 수록 새로운 것을 하는 것보다, 먹던거 먹는거, 안 하던거 하지 말라고 한다. 꼭 안 하던거 하려고 할 때 실수하면 그게 더 화가 난다. 그게 잘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데, 안 하던 것을 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더 화가 나고, 차라리 하던거 할걸, 괜히 한다고 해서라는 자책들을 많이 한다
우리에게 있는 익숙함은 우리를 편하게 해주지만, 주님을 닮아가는 위로 올라가는 길에 있어서 익숙함을 다른 말로 하면, 죄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새로운 생명의 성령의 지식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나에게 익숙하지 않다. 나는 새로운 주님 필요없다. 예전에 내가 배웠던 주님이라면 이렇게 하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하지 않는 주님이라면, 나는 좀 어렵네요. 이러한 것들이 우리 안에 많고 깊게 자리잡고 있다
어떤 새로운 것을 만날 때 정탐을 한다. 이 2개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이것을 부지중에 짓는 죄, 샤가그의 상태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2개의 김멜, 자유의지가 있어서 이 2가지가 충돌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도 맞는데, 내가 살아온 삶에서는 아닌 것 같다는 것이 부딪히는 상태이다. 어느 누구도 이 상태는 그냥 지나갈 수가 없다
민15:26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타국인도 사함을 받을 것은 온 백성이 부지중에 범죄하였음이니라
בִּשְׁגָגָה 비슈가가 : (온 백성이) 샤가그 안에 있다
- 김멜 2개, 2개의 자유의지, 내 육신에 속한 정욕의 자유의지와 속사람의 성령의 소욕이 부딪히는 상태에 있다
이 충돌은 새로운 상황을 만나야만 일어난다. 죄가 드러나는 것이 괴로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죄로 인해 괴로움이 생긴 것은, 새로운 스테이지에 올라왔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나는 주님의 일하심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상황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른다.
비슈가가를 영어로 Crazy라고 한다. 대놓고 말하면, 사실 우리가 미친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안 만나고 싶다. 언제나 하나, 나는 언제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예스, 죄는 노, 그러나 우리의 삶은 언제나 Crazy의 상태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한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고 한다. 이런 제정신이 아닌 상태, 그런데 우리의 성장에 있어서,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데 있어서 이것은 꼭 필요하기에, 주님이 슐라흐 레카 하신다. 너를 위해 보내라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위한다면 이 미친 상태가 안 와야하는데, 주님은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에 너를 위해 그 상태로 가라, 그 스테이지로 가라, 거기서 네가 미친 상태를 경험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매번 영적 성장을 하는 시점마다 이 제정신이 아닌 상태의 정탐을 하게된다. 내가 이렇게 해도될까? 미칠 것 같은데, 이거 안 하고 여기서 주님 더 사랑하면 안될까? 이러한 경험들이 다 있다. 우리는 그냥 하는 고민인 것 같지만, 이것들이 우리가 부지중에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이것을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해주신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시는데, 우리는 미쳐서 죄를 짓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주님이 우리를 위하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우리를 위해 보내시는 주님을 받아야 한다. 주님이 슐라흐 레카에서 너를 위해서 아나씸을 보내라고 하신다. 이때 내가 얼마나 주님 닮기 싫어하는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 이 열 정탐꾼이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 열 정탐꾼, 이스라엘의 굉장한 리더십이다
사람들이 여러분의 신앙을 우러러보고, 존경하는데, 그 안에 감춰진 변화되기 싫어하고, 이 상태로 인정받고 싶어하고, 주님 앞에 인정받고 싶어하나, 주님을 닮고 싶어하지 않은 죄성이 반드시 드러나야 할 것이다
베하알로테카 주간에 배운 것이 선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에 대해서 배웠다. 이러한 영적인 지식이 드러났을 때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은 충돌이다. 육과 영, 기존의 지식과 새로운 지식, 기존의 관점과 배운 새로운 관점이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우리는 충돌을 없애기 위한 삶을 살고자 함이 아니다. 충돌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새로운 환경에 가면 시행착오가 없을 수 없다. 시행착오를 이겨낸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성공했다는 사람이다
이러한 충돌의 상황에서 주님은 우리가 할 일, 지침을 주신다
민13:20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라 담대하라 또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 하니 그 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그 다음이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라고 하신다. 이것 전에 이스라엘이 배운 것이 지식나무,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배웠다. 그런데 주는 지침이 가서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 봐라, 정탐하라고 한다. 그 말은 정말 생명나무가 그 약속의 땅에 있는지 찾아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고 하는 것이다.
25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정탐은 40일 동안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뭔가를 자료를 찾아보시고, 정탐하신다. 이해될 때까지 한다. 그리고 누구에게 그런거 아니고, 이런거야라고 이야기한다. 40은 진리이고 사역을 의미한다. Physical한 40일수도 있지만, 우리는 내가 본 것이 맞다고 할 때까지 하는 것이다. 이 맞다고 하는 것이 사역할 때까지 정탐하고 돌아오게 된다. 정탐이 안 끝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더 큰 소리로 이야기하면 그게 맞네. 하면서 정탐이 끝나는 것이다.
12명의 정탐꾼들이 진리를 얻고 왔는데, 이 열 정탐꾼이 이야기한다.
27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정말 그 땅이 그렇다고 한다. 젖과 꿀이 흐르고, 그 땅의 과일이라고 하는데, 광리이 굉ㅈ아히 크고, 보암직하고, 먹음직했다. 그것을 따왔다. 그리고나서 한 말이 31절에 나온다. 사실 이게 우리의 옛 자아의 고백이었다.
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그들, 아말렉이다. 세상이 우리보다 강하다. 이 중심에 누가 있는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다. 그게 드러난다. 또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내가 나의 안위를 살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מִמֶּנּוּ 미메누 : 우리보다
이것을 똑같이 다른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바브가 단어의 끝에 오면 3인칭 단수가 된다.
= He, 그보다 강하다
여러분은 주님과 한 몸이신가? 여러분이 우리보다 강하다고 하는 고백은, 주님보다 강하다고 하는 고백과 똑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과일을 먹고 와서 하는 말이 아말렉이 주님보다 강하다는 고백을 하고있다.
우리가 주님 말씀을 배우고, 용서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상황에 처하게되면, 아직 내 상태로는 안된다. 제자의 비전을 받았다고 해서 주님의 은혜로 직장을 들어갔다. 가기 전에 정복하겠다고, 아멘하고 갔는데, 가니까 오래 걸리겠다고 판단을 한다. 지금은 안되겠고, 이 사람들 먼저 그만둬주고, 새로운 사람들이 와야 내가 이 사람들은 제자삼을 수 있겠다는 정탐이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오고 하는 말이, 직장 못 다니겠다는 고백이다. 내가 이렇게 살아야하나? 라는 고백이다. 새로운 직장에 들어가서 1년도 안 한 사람이 사회 초년생 같은 애가 하는 말이 이런 것이다. 많은 어르신분들이 듣기에는 웃으실 수도 있다.
똑같이 영의 길을 걸어간다고 하면서 아멘하지만, 제자의 비전, 아멘, 무조건 순종, 알겠다고 하지만, 막상 상황을 만났을 때는 그건 아닌거 같은데.. 그리고 세상에선 이게 안 통하는데, 이렇게 하다가는 죽겠다는 고백이, 세상이 주님보다 더 크다는 고백이 얼마나 우리 가운데 많이 나오는지, 여러분들은 다 아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 때 은혜받고, 너무 좋다고 하지만, 한주 어떻게 지냈냐고 하면 정신없이 지냈다고 한다. 이 말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정신은 영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김멜로 살아야 하는데, 두 가지가 있으니까 뭐가 내 정신인지 모르겠다. 새벽예배 말씀 들으면 올라갔다가, 직장 생활 하다보면 화넀다가 이러면 안되지 하고, 웃었다가 짜증난다고 한다. 뭐가 내 정신인지 모른다. 제정신이 아닌 미친 상태로 일주일 보내고 주일날 와서 주님 한다. 이것들이 우리 안에 당연한 것 같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미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슐라흐 레카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묵상하던 중에, 되게 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정탐꾼 사건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저지른 메이저급 3대 죄악 중 하나이다(금송아지, 정탐꾼, 싯딤 광야 사건). 그런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더라. 말씀을 묵상하는데, 그동안 내 삶을 지배하던 큰 정탐꾼의 사건을 깨닫는 시간들이 되었다
제가 뭘 할 때 겨우 40일 정탐해서, 세상은 너무 크고, 나는 너무 연약하고, 내가 세상에 대해 정탐한 것, 내가 나에 대해서 정탐한 것, 내가 나의 리더에 대해, 아내에 대해 정탐한 진리들 안에서 제대로 숨도 못 쉬어서, 맨날 한숨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이 시즌만이 아니라, 모든 인생이 그러한 삶이었더라. 굉장히 메이저급이다.
제가 37년 가까이 살면서 살아왔던 삶의 메이저 비율에 해당하는 삶이 열 정탐꾼의 정탐으로, 그것을 진리로 살아왔던 삶이었다. 주님이 아무리 정복하라고 하셔도, 나는 안되고, 더 배워야하고, 더 힘이 생겨야 한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샤가그의 상태, 두 개의 김멜 속에서, 나에게 좋은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 기뻐할만한 것만 하고, 아닌 것들은 안 하고, 맨날 혼동하는 삶들을 살아가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저는 제자도가 말하는 제자는 강한 리더십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저의 정탐이었다. 어디서든 강하고 담대하고 제자로 일어서고, 언제든지 나를 꺾는 것, 할 말이 있을 때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제대로된 제자이고, 제자도의 핵심 중 하나라는 생각들이 있었다. 그러니 늘 있는 생각이 이걸 못하는 나는 약하다. 아직 제자라고 하기 뭐하다는 것이었다.
이 유약한 성격, 조금 더 담대한 성격으로 태어났더라면, 조금 더 사람들의 말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더 멋있는 삶을 살 수 있었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제자도라는 것이 틀렸다는 생각은 한번도 안 해봤고, 이렇기 때문에 내 삶을 바꿔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안되는데,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 거기서 다시 힘을 쌓고, 거기서 주님을 더 깊이 만나서 힘을 얻어서 다시 나오자는 이 삶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아니면 이것이 맞기 때문에, 내가 더 힘을 내서 가보자. 이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뭔가 힘을 더 키워야하지 않겠냐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고, 이렇게 삶을 교정하려고 하고 있었던 저의 생각의 큰 흐름들, 줄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스라엘도 그랬다. 너는 죽을 것이다라고 하니까, 이스라엘이 뉘우쳤다. 음행의 근본을 해결하는게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셨으니까, 우리 이러면 안되지. 가자! 하고 아말렉 치러 간다. 그런데 거기에는 주님이 함께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복음의 진리를 잘못 정탐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게 맞으니까, 내 삶을 여기에 맞춰야한다고, 주님이 계시던 없던 상관없다. 주님 명령이 맞으니까, 기뻐하실 것이니까, 주님이 함께하실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져서 가는 것이다. 모세가 가지 말라고 해도 듣지 않는다. 나의 죄책감을 해결하기 위해서 가야한다. 이게 주님께 내가 잘못한 것을 만회하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미 이전 Stage에 가지고 있었던 나의 약속의 땅에 대한 생각들, 우리는 제자도라는 깨달음을 얻게되면 새로운 단계로 가고,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스테이지를 주님이 주시는데, 우리는 예전 차원에서 살아낸 것을 가지고 살아내려고 한다. 그러니 이게 음행으로 흐르게 된다. 정탐을 내 육의 개념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를 음행에서 돌이키게 하시는 사역을 하신다. 정탐은 내가 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보는게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Searching, 뭔가를 조사했던 것은 어떻게하면 내가 할 수 있는가를 위해서 조사했다. 이게 겉사람의 삶의 패턴이다. 그리고 영적인 것도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게 뭔가를 정탐한다. 이것을 말씀하시는데, 여기로 갈 수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그렇게 노력한다. 그래서 간증이, 내가 이거 했다는 간증을 하게된다.
무조건 나쁘다는게 아니다. 그러나 정탐은 그것을 위해 하는게 아니다.
תוּר 투르 : 정탐
정탐이라는 뜻은 조사하다, 부지런히 행하다는 의미가 있다. 정탐꾼들이 하는 것은 몰래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조사하고 찾았다. 그들이 찾은 것이 뭐냐?
תוּר 투르라는 말을 해석해보면 십자가(ת)의 못 박힌(ו) 머리(ר)이다. 우리는 머리를 찾으려고 정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정탐하는게 아니다. 그리스도가 되려면 어떻게 하실 것인지가 다 머리 찾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아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머리를 찾으면, 그 머리가 우리에게 지식을 준다. 그 머리가 앞서 행하면 우리가 그것을 따라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탐을 하는 이유가, 이 상태에 있으니까이다. 이 미친 상태에서 머리를 찾는 것을 하게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나를 완성하는 머리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머리를 끊임없이 찾고, 그 머리를 만나야 한다. 열 정탐꾼이 정탐에서 보는 것이 무엇인가?
열 정탐꾼과 두 명의 정탐꾼의 보고가 달라진다. 12명 모두가 같이 가서 같이 왔다. 그런데 여기서 10명과 2명으로 나눠진다. 정탐꾼들이 본 것(ה)을 나눈다.
תוֹרָה 토라
헤이는 주는 호흡이지만, 뒤에 붙으면 방향성을 상징한다
- 이쉬를 향하는 이샤이다
투르를 전적으로 행할 수 있게 하는 토라이다. 토라는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올라가야 하는데, 올라가서 뭘 봐야하는가? 어떤 정탐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방향성을 계속해서 제시해주는 것이 토라이다. 그래서 토라의 의미에 가르침, 지침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신4: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투르하고 투르하면 만난다. 그런데 어떤 투르를 하느냐? 그 방향을 우리에게 정확히 제시해주는 것이 토라이다. 여호와를 찾고 찾으면, 만나고 만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필요한 토라가 얼마나 귀한지 알 것이다
요4: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여기서도 모세는 토라를 의미한다. 토라를 믿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한다. 토라가 가르치는 방향, 어떻게 정탐하는지를 가르치는데, 결국 투르, 이 목적이 십자가에 못 박힌 머리를 보게하는 것이고, 정탐은 그 머리를 찾게하는 것이다. 너희가 그 토라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으리라. 그 토라를 믿은 여호수아와 갈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다
열 정탐꾼과 두 정탐꾼의 차이는 믿음에 있었다. 어떤 믿음으로 바라보는가? 토라는 두 가지 토라가 있다. 죄와 사망의 토라와 생명과 성령의 토라가 있다. 겉사람의 토라와 속사람의 토라가 있다. 내가 살려는, 나를 살리는 토라가 있고, 이웃을 살리는 토라가 있다. 우리가 영의 토라의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믿음으로 정탐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머리를 더 믿는다. 더 신뢰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누군가 이야기하면, 머리 속에서 순식간에 돌아가면서 판단하고, 저건 괜찮으니까 받아들이고, 아닌 것은 배척한다. 이것을 최대한 논리적 오류 없이 취합하고, 이것들로 살아가게 된다.
주님은 이런 나의 머리를 믿고 신뢰하는 이 머리를 제거하는 사건을 이야기한다. 반대로 말하면, 주님만을 믿는 그 믿음을 드러내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극명한 어둠 속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만이 찬란하게 빛난다. 온 장정만 60만의 이스라엘에게 너는 죽을 것이라고 하는데, 두 사람은 살 것이다. 특별히 두 사람은 이름까지 언급되면서 살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있게된다
10이라는 말은 토라에서 전부를 뜻한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 10을 드리는 것은 우리 삶의 전부를 드린다는 것이다. 12명의 정탐꾼을 보냈다고해서 10:2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나의 전부가 악한 보고를 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한다. 내 전부가 악한 보고로 죽게 될 때, 이 두 사람의 생명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마치 이게 바톤터치처럼, 10명, 나의 전부의 악한 보고가 죽음으로 들어가게 되고,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이라는 생명이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인격이 무엇인지 알게된다.
이 죽음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맛보는 일들이 있게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이다. 주님은 이것을 위해서 겉사람의 관점으로 보는 육의 토라를 끝내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나를 머리로 하는 것, 그 머리에 연결된 모든 것들을 다 제거하시는 사건이 바로 이번주에 있는 것이다. 엄청 시원할 것이다. 그동안 작게작게 해왔던 것을 주님이 날 잡으시고, 싹 쓸어버리시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떄는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니까 할말이 없다. 음행의 현장에서 발견되면, 아무리 억울해도 할말이 없는 것이다. 이때 그동안 쌓였던 것들을 다 풀어낼 수 있는 찬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제거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이것이다
민14
31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유아들이 들어간다. 자기 관점이 아직 없는 아이들이다. 그리고 너희의 시체는 광야에서 엎드러진다. 여러분들의 육의 소욕, 겉사람의 시체가 광야에서 엎드러진다.
נָפַל 나팔 : 엎드러지다, 수동적(נ)으로 말(פ)을 훈련(ל)하는 것
- 이것이 겉사람에게는 죽음이다.
억울한 상황에 할말이 있는데, 하지 말라고 한다. 죽을 것 같다. 답답해서 죽을 것 같다.
현대 심리학도 참으면 병난다. 말하라고 한다. 예전에 치유받는 단계에 갔었는데, 방망이를 때리면서 그때 생겨난 상처, 감정을 일으키면서, 그 감정을 이야기하라고 한다. 그 감정을 이야기해야 풀리고 치유가 일어난다고 말이다. 그때 못했던 말을 해서 내가 속시원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 시체, 겉사람은 광야에서 수동적으로 말하는 훈련을 하게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아까 유아들이 들어간다고 했다.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유아들이 가진게 많은가, 없는가? 어린 아이들은 가진게 전혀 없지만, 아빠 것이 내 것이니까 다 가졌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희 유아들은 나를 가졌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이것이 극명해도록, 시체가 광야에서 엎드러질 것이라고 이야기하신다. 말을 훈련하는 것은 육이 죽는 것이다. 겉사람을 죽이는 훈련이 뭘까라고 생각했을 때 핵심은 말이다. 내 뜻대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시체는 광야에서 엎드러지고, 자녀들은 너희의 죄악을 진다. 십자가를 지고 너희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된다고 한다.
시체라는 말은 잔해라는 말이다. 죄를 해결했지만, 살아온 삶의 잔해들이 있고, 이것들 때문에 힘든 것인데, 이것들이 소멸되기까지 너희 자녀들이 십자가를 지고 광야를 40년 동안 방황할 것이라고 한다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된다는 말이 무섭지 않은가? 그런데, 시체가 광야에서 썩지 않고 있다. 길을 가다가 비둘기 시체 보신적 있는가? 조금 안타깝다고 하시는가? 어떤가? 시체들은 빨리 소멸되어야한다. 육신의 잔해들은 빨리 소멸되어야 한다. 썩어서 없어져야 한다.
תָם 탐 : 소멸되다 = 온전하다
- 노아, 야곱은 의인이었다. 탐 했다고 토라는 이야기한다.
겉사람의 소욕이 다 썩어지는 사람들이 온전한 사람들이다. 소멸된 사람들이다. 시체가 소멸된다는 것은 잔인한 것이 아니다. 육신의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주님은 잔인한 분이라는 것이 우리를 사망으로 인도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תָם 탐 : 십자가의 사역
- 겉사람의 잔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온전해지는 것인데, 십자가의 소욕으로 소멸되고 완성되기까지 자녀 세대들이 십자가를 지고 이 광야를 방황하는 것. 즉, 자기 부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מדבר 미드바르 : 광야 = דבר 다바르 : 말씀
자녀 세대들이 자기의 관점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관점을 배우면서, 그 말씀 속에서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을 한다. 이 방황도 놀랍다.
רֹעִים 로임 : 방황 = רֹעֶ 로에 : 목자 = 풀을 뜯다
우리는 방황하면 광야에서 쟤 때문에 고생하겠네 하면서, 광야 40년을 형벌의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이전 겉사람의 지식으로 형벌로 받아들이고, 그때 열 정탐꾼 때문에 40년을 돌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내 잘못된 관점이 먼저 온전해지고, 겉사람의 소욕이 죽어지고, 나는 광야에서 머리이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풀 뜯는 삶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양 떼가 되어서 목자이신 예호슈아, 예슈아의 뒤를 갈렙이 따른 것이다.
כֹלֵב 콜레브 : 갈렙 = 모든 마음
여호수아 = 예슈아
갈렙은 루아흐 아헤레트, 다른 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다른 영은 열 정탐꾼과 다른 영이다. 오직 여호와의 뒤를 전심으로 따라가는 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녀들이 이 삶을 훈련하게 된다. 광야에서 이 삶을 훈련하게 되는 것이다
토라도 모르는 답답한 자녀들이 있으신가? 얘가 언제쯤이면 말씀을 깨달을까? 말씀을 하나도 모르고, 관심도 모르고, 언제 크지? 라고 했던 자녀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한다.
슐라흐 레카의 마무리는, 이스라엘이 너희 눈과 마음으로 보면서 음행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찌찌트, 옷단에 술을 만들어 달라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다.
צִיצִת 찌찌트 : (옷단) 술
먼저 우리에게 의가 나타난다. 그래서 그 의가 나타나면, 의로운 자가 되고 싶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그 의가 완성이 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구원이 시작된다. 이스라엘이 의로워서 나온게 아니라, 의가 먼저 애굽에 나타나서 구원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이 어디로 가는 거냐면, 그 의를 완성하는 삶으로 가야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손이 없이 하려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찌찌트, 내 손으로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옷에 달라고 말씀하신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우리를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한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정탐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바라봐라. 내가 믿음으로 인도하겠다고 말씀해주시는데, 이것을 해주시는 분이 여호수아, 예슈아이시고, 이것을 전심으로 따르는 콜레브에 의해서 이것이 이루어진다. 가난한 자가 전심으로 따르게 되어있다. 이거밖에 없는 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전부인 자가 전심으로 따를 수 있다. 예수님 말고 가진게 많은 사람은 전부, 콜레브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콜레브가 아닌 것들을 죽이신 것이 정탐꾼 사건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 같은 자, 예수 그리스도만 전심으로 따르는 자만 그 땅, 약속의 땅, 하나님의 레벨로 주님이 상승시키신다.
민15: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옷단 귀에 찌찌트, 술을 다는데, 색깔이 청색이다.
תָכֶלֶת 타켈레트 : 청색, 만유를 완성으로 이끄는 것이다
- 청색은 하늘색이다. 하늘이 여러분들을 완성으로 이끈다. 여러분들의 노력이 아니라, 하늘을 이끈다. 그래서 그 하늘을 네 옷단 귀에 붙이라고 하는 것이다.
옷을 입는다는 말은 훈련하겠다는 것이다. 훈련은 땅에서 한다. 여러분들이 밟고 있는 Field가 있다. 학교, 직장, 거기서 하는 것은 훈련이다. 훈련할 때 어떻게 하면 잘하지? 하고 정탐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내가 편한 훈련을 찾아가려고 한다. 내가 빨리 승진할 수 있고, 대박날 수 있는 것들을 찾아간다. 그런데 주님은 그 훈련에 찌찌트를 다는데, 내 손이 완성하는 그 의를 달라고 하시는데, 그것을 청색으로 하라고 하신다. 하늘이 이룬다.
그래서 이것을 다는 것은, 하늘을 땅에 내리는 것이다. 나는 하늘을 땅에 내리는 삶을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옷에 더하다라는 말이 알이라는 말이다
עַל 알 : 더하다 = 붙이다
여러분들의 훈련은 무엇에 붙어있는가? 알은 붙어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올라가는 것이기도 한다. 이것을 붙였다는 것은, 내가 하는 훈련은 여기로 올라가는 것이다. 청색 찌찌트를 옷에 알 했다는 것은, 나는 여기에 올라간다.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같이 되겠다. 나는 내 육체의 소욕과, 내 마음을 따라서 다시 세상에서 성공하는 훈련, 더 성공하기 위한 토라의 정수를 배워서 훌륭한 말씀 사역자가 되겠다. 이런 유혹은 굉장한 것이다.
제가 사실 처음에는 그런 것으로 목사님을 만났고 기대하는 면이 컸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음행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네가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훌륭한 설교자가 되고, 그것을 위해서 배우고, 그것을 위해서 하는 모든 너의 삶은 음행이다. 너는 지금 음녀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너에게 그렇게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찌찌트, 술을 옷단에 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을 왜 다냐면,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하늘이 내려오지 않으면 우리는 계명을 지킬 수가 없다. 실 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늘이 여러분의 삶에, 여러분이 하늘을 목적으로 살지 않으면, 주님의 계명은 여러분에게서 먼 것이다. 지금 연약해서 안된다고 한다. 예외 상황이 늘 있다. 어떻게 살았어요 라고 나눴는데, 우리에게서 핑계, 악한 보고, 불평이 나오기 시작한다. 왜 내 삶에는 저 사람같은 잘 갖춰진 환경이 없어서, 주님을 닮아가고 싶은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하게된다. 이 모든 것들이 악평이고 음행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청색의 찌찌트를 반드시 여러분의 훈련, 옷에 더하시기를 축복한다.
그렇게되면 우리가 교정을 하는 자녀들의 교정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삶을 교정하시는게 힘드신가? 왜 그런가? 지금까지 내가 음행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전처럼 사는게 편하기 때문에, 거기서 뭔가를 하나씩 바꾸려고한다. 그래서 교정하고 훈련하는 삶을 힘들다고 여기는데, 사실 40년의 광야 생활을 힘든게 아니다.
Flying wheel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가?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 힘들다. 그런데 어느정도 임계점에 도달하면 날듯이 간다.
애굽에서 나온 세대는, 슐라흐 레카는 나온지 1년이 좀 넘었다. 마치 저랑 좀 비슷하다. 제일 말이 많다. 더 받는데가 있지 않을까? 태*이네 회사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거긴 서로 터치하지 않는 것 같은데.. 생각한다. 이 1년이 좀 넘는 시간 가운데 그렇게 주님을 만났지만, 그렇게 사건 사고가 많은 것이 광야 시작 후 1년의 시작이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자녀들의 삶이 시작되는 40년 가까운 삶, 거의 38년의 삶은 언급 없이 휙기 지나간다. 재밌는 것은 휙 지나간다. 그래서 늘 아쉽다. 괴로운 것은 왜 이렇게 긴가? 그런데 재밌는 것은 너무 아쉽다. 광야 생활은 재밌는 것이다. 주님이 인도하는대로 가서 먹고, 마시고, 쉬고, 가자고 하면 가고, 토라가 말하는 것을 믿음으로 보고, 그대로 호흡하며 사는 삶은 그렇게 꿀처럼 달아서 휙 지나간다. 그렇게 천년이 하루같이, 38년이 휙 지나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또 우리는 그것을 겪게 될 것이다
우리는 힘겹게 페달을 밟고 있는 아비 세대와 같다. 주님은 그런 아비 세대를 끝장내겠다고 하신다. 그래서 주님이 41절 말씀으로 슐라흐 레카를 마무리하신다.
민15:41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 이 말씀을 들으셨을 때 어떤 것이 떠오르시는가?
출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1계명이다. 토라, 주님의 시내 산에서의 프로포즈이다. 주님의 프로포즈를 받고 주님의 신부로 살겠다고 한지 1년도 안 지났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주님이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려고, 이스라엘의 신랑이 되려고 신부인 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꺼냈다.
주님이 여러분을 애굽에서 꺼내셨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이 주님의 신부라는 것을 기억하신다면, 주님은 여러분을 약속의 땅으로 반드시 인도하시는 신랑이라는 믿음까지도 우리는 가져야한다.
주님은 애굽에서 나오는 짜릿한 잠깐의 즐거움을 주려고 이끌어내신 것이 아니다. 약속의 땅까지 그분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이끌어가신다
시23
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편은 슐라흐 레카를 지난 다윗의 고백이다. 신부의 고백이다. 겉사람의 다윗이 죽고, 이제 새 생명, 자신의 관점을 버린 어린 아이 같은 다윗이 걸어갈 광야에 대해 주님께 화답하는, 프로포즈를 떠올리신 하나님 앞에 다시 화답하는 다윗의 고백이다.
실제적으로 이 고백이 우리에게 더 특별한 것은 우리에게 다윗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윗이가 삶으로 이 메세지를 주고 있다. 이제 우리 가운데 시작되는 40년 광야 생활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다윗이이다.
우리 안에 이런 다윗의 고백이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더 이상 나의 안위가 아니라,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에, 광야의 그 삶이, 내가 짊어져야할 십자가의 삶이 푸른 풀밭을 거니는 것이고, 척박한 땅이 생명이 되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삶이 어느 때보다 내게 가장 달콤하고 깊은 사랑의 시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우리는 또 그것을 위해서 기꺼이 우리를 내어드릴 것이다
청년부 예배 다니엘 형제
우리가 이번 슐라흐 레카에서 정탐에 대해서 배웠다. 우리는 끊임없이 정탐을 한다. 정탐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 인간에게 있는 정탐의 욕구가 가장 최고치에 달하는 주간이었다.
우리가 주로 정탐하는 때는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할 때이다. 그리고 더구나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 정탐한다. 회사에 지원한다면, 그 회사의 연봉이 얼마인지, 복지시설, 휴가일수는 어떻게 되는지, 직원 관계는 어떤지, 회식자리는 힘들지 않은지.. 정탐하지 않고 들어갈 수 있는 용감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청년들이 가장 크게 정탐하고자 하는 부분이 뭘까? 직장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학교도 아니다. 아마 결혼일 것이다.
저도 나름대로 한 정탐 해봤다.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줄 사람을 찾는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Better. 더 괜찮은 외모에, 더 괜찮은 성품에, 더 괜찮은 신앙에, 더 훌륭한 집안에, 더 가정교육이 잘된 사람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꼭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찾아 이리저리 수년을 헤메었다.
그런데 사실 내가 아무리 정탐한다고 해도,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단 1%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1%의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해서 교제를 시작했는데, 99%에 속한 것이 점점 드러나자, 차갑게 마음이 식어버리는 것도 수차례였다. 벅차올랐던 감정이 언제였는가 싶게, 하루사이로 그냥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린다.
오늘 토라포션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앞에 섰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님이 주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내 삶을 조금 더 행복하게 하고자 한 수많은 노력들을 애굽에서 한 경험이 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되었다. 그래서 주님을 따라 이 뜨겁고 목마른 광야로 따라나왔다. 불평도 하고, 투정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약속의 땅 앞까지는 왔다.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기쁨, 영원한 평안, 정말 그 언약적인 삶에서 오는 영원한 기쁨을 얻고 싶었다. 나를 행복하게 하고자 결혼하는 것은 재앙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목사님한테 말한다. 목사님이 데려오신 여자와 결혼하겠습니다.
이게 약속의 땅까지 온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이다. 그런데 꼭 그 약속의 땅이 어떤 땅인지 보아야 하겠다고 한다. 청년들 중에 많은 이들이 언약적으로 결혼을 했다. 그런데 그들의 최대 관심사가 바로 이것이었다. 분명 아버지가 하라는대로 결혼할건데, 그 상대방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우리가 이 약속의 땅 코앞에까지 오기 전에 목사님은 절대로 그 약속의 땅을 숨기신다. 그전에는 절대로 정탐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왜냐면 그전에 약속의 땅이 어떤지 정탐하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를 지나, 민수기에서도 바미드바르, 나쏘, 베하알로테카를 거쳐서 슐라흐 레카에 왔다.
이것은 굉장히 높은 영적인 단계이다. 주님을 나의 머리로 고백한 상태이다. 이제 나는 제자가 되고,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적임을 고백하고, 나는 주님의 몸이라고 고백한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나는 나 밖에 보지 못하는 어둠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았고,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자였으나, 오직 주님이 나의 빛이 되신다는 것을 고백한 자들이 오는 높은 단계인 것이다.
제가 작년 10월 초막절 때 결혼 발표가 난 뒤, 12월 하누카 때 결혼을 했다. 발표 2달 전 작년 8월에 결혼 세미나 이후에 목사님께 결혼하겠다는 고백을 드렸는데,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너 40대도 괜찮냐였다. 너는 안목의 정욕이 너무 크기 때문에, 너가 결혼하기 제일 싫어할 스타일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약속의 땅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열 정탐꾼들이 울부짖기 시작한다.
민15
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겉으로 울부짖진 않았지만, 속에서 이 열 정탐꾼들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 울부짖는 소리가 한동안 가득했다. 이건 나를 죽이려고 하는거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자손처럼, 목사님을 원망한다.
태경이형이 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목사님은 아름답고 10살 어린 사모님을 만났으면서, 우리만 죽이려고 한다. 나도 애굽에서 아름답고 내 안목의 정욕을 충족하는 여자 만나서, 죽을 것 같이 괴롭다곤 하는데, 애굽에서 한번 다시 살아보겠다. 라는 것이다. 어떻게 감정이 생기지 않는데 결혼할 수가 있는가? 이 되돌아 갈 수 없는 길을 건넜다간 내 인생은 완전히 망한다. 차라리 애굽에서 나의 왕국의 바로가 되서 살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한가!? 돌아가자. 이건 말도 안된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게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이다. 애굽의 노역도 경험하고, The Man도 알고,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고 인카운터에서 눈물도 흘려봤다. 고아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도 알고, 그런 인생은 죽음이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서 아낙자손 한번 보고 오더니, 이건 할 수 없다고 울부짖는 것이다.
슐라흐 레카의 마지막에 부지중에 짓는 죄가 나온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의 땅을 나의 오감과 감각으로 정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혼의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언약적 사랑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나는 나의 이성과 감각으로밖에 정탐하는 방법을 모르기에, 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게 되어있는 것이다.
새벽기도에서 배웠지만 이 부지중에 짓는 죄를 샤가그라고 한다.
שָׁגַג 샤가그 : 부지중에 짓는 죄 = Crazy
- 하나님의 형상을 향해서 나가는데, 자유의지가 2개가 있다.
샤가그는 Crazy라는 뜻도 있다. 미친 생각이다. 생각이 미쳐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도 구분을 못한다. 목사님이 나를 해치려고 한다. 자기의 심복들을 결혼시키려고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가고자 왔지만, 자신의 오감과 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실 이 오감이 죽어야만 하는 그런 상황이 오자 헷갈리는 것이다.
지금까지 오감과 감각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따라온 것이다. 말로는 The Man, 하나됨, 에하드, 말은 하지만, 실제로 그것도 나의 오감과 이성, 감각으로 이해한 것임을 깨닫게되는 시간이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에하드된 가정, The Man의 한 부분을 이루는 가정을 세우기 위한 결혼임을 배우고 따라왔음에도, 여전히 그런 결혼 생활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결혼생활이라고 생각하고 따라왔던 것이다.
저는 학교나 직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결혼 이야기들을 들어왔다. 그들의 결혼생활을 들어보면,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다. 부부가 처참하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하지 못할 말들을 하고, 이혼하지 못해 사는 그런 이야기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남편은 당연히 바람을 피는 것으로 생각하고, 아내는 남편을 ATM 기계 이상으로 보질 않는다. 그리고 이혼해서조차 서로 아이를 안 맡으려고 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언약적 결혼에 대해서 배웠다. 이게 진짜 결혼이구나. 이게 진짜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결혼생활이구나라고 지금까지 따라왔다. 그런데 40대라니, 띠동갑 위로의 자매라니. 내가 결혼하기 제일 싫어할 스타일이라니? 이건 안된다. 이것만은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 약속의 땅 앞에서 열 정탐꾼의 정탐을 하게 되어있다. 이것은 주님의 깊은 모사이다. 내 안에 이성과 감각으로 정탐했던 이 리더들을 해결하시고, 여호수와 갈렙을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깊은 모사이다.
하나님의 원리는, 우리는 다 부정을 통해서 긍정을 배우게 되어있다. 어느 누구도 긍정부터 배울 수가 없다.
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 긍정의 말을 먼저 배울까? 부정의 말을 먼저 배울까? 아이들이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 중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싫어"이다. 미운 3세병, 싫어병이라고 한다. 한번 싫어병이라고 검색해보시면, 수없이 많은 엄마들의 고통이 나온다. 밥 먹기도 싫어, 옷 입기도 싫어, 세수 싫어, 양치 싫어, 머리묶기 싫어, 장난감 가지고 놀기 싫어....
그런데 이 아이들이 그 부정의 말을 통해서 좋다는 것의 개념을 배운다. 싫지 않은 것은 좋은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언어를 배워야하는 어린 아이이다. 나의 모국어밖에 할 줄 아는게 없어. 하나님 나라의 말을 한 마디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싫어"인 것이다. "약속의 땅 싫어, 언약적 결혼 싫어"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긍정을 배우게 되어있다. 내가 어떻게 약속의 땅을 좋아할 수 있게 되는가? 약속의 땅 싫어 -> 싫지 않구나라는 개념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시는 방법이다.
바로 우리가 약속의 땅을 처음 정탐하고 허걱한 상태를 부지중에 짓는 죄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이것을 깨닫고 돌이키기만 한다면 반드시 이 부지중의 죄를 용서하신다. 왜냐면, 이것은 어린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발생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지중의 죄의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이다.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였다. 다윗만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자유의지가 큰 자가 없었을 것이다.
다윗이 왕이 되고, 이제는 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왔다. 수많은 전쟁을 하였고, 이제는 용맹한 장수들이 굉장히 많았기에, 이제는 다윗 왕께선 전쟁에 나오시지 말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전념하라고 하면서, 장수들이 대신 나가서 전쟁을 하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장수들이 전쟁에서 늘 승리의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밧세바 사건이 일어난 당일도 장수들이 암몬 자손을 진멸한 때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다윗이 왕들이 출전할 때가 왔는데, 전쟁하러 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윗이 옥상, 지붕 위에 올라갔다고 한다
גַג 가그 : 지붕
다윗의 자유의지가 2개가 되는 순간이다. 다윗은 그 지붕 위에서 밧세바가 정결예식을 하는 장면을 보고 만다. 그리고 자신의 감각과 오감으로 정탐을 하고,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야를 죽이는 죄를 범하게 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 밧세바로부터 솔로몬을 낳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여인으로부터 오게 하셨을까? 우리는 여기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다윗이 죄를 지었고, 한 사람을 살해한 창피하고 부끄러운 과거인데, 하나님은 그 과거를 절대로 숨길 수 없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렇게 적어놓으셨다.
마1:6 ...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가 보는 이 다윗의 사건과, 하나님이 보시는 이 다윗의 사건이 조금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같았으면, 이런 부끄러운 죄는 감추고, 적어도 제사장 집안의 신앙생활 잘 하고, 바람피지 않고, 경건한 아내를 얻어야 그리스도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지명하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메시아의 계보를 잇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 다윗이 지은 죄를 부지중에 짓는 죄로 보셨기 때문이다.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자신의 Destiny가 뭔지 몰랐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Destiny가 단순히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정복 전쟁을 하고 끝인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탄생시키는 것임을 아셨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알지 못했기에, 지붕 위에 올라가버린 것이다.
밧세바는 어쩌면 다윗과 결혼해서 메시아의 계보를 이어야 할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다윗 성 안에는 다윗의 최측근만이 살 수 있었다. 밧세바의 아버지는 아히도벨이다. 그런 사람이 이방인 사위를 맞이하였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굉장히 이상한 일이다. 그는 이방인임에도 강직한 신앙을 가진 우리야라는 사람을 사위로 삼았다. 그가 이렇게 꼬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다윗에 대해 꼬여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윗에 대해서 자신의 관점으로 정탐했기에, 자기 눈에 보기에 다윗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압살롬과 암논 사건이 있을 때 다윗이 암논에 대해 징계하지 않자, 더 이상 다윗은 왕으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 공정해야 하는데, 자기 아들에 대해서만 그렇게 편파적일 수 있는가? 아마 그래서 그는 압살롬이 반역했을 때, 그의 참모가 되었을 것이다. 다윗을 잘 알던 그는 압살롬에게 다윗을 곤경에 빠뜨릴 전략을 제시했으나 후새에 의해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자살해버리고 만다.
이것을 고의로 짓는 죄라고 한다. 머리를 부인해버리고, 내가 맞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속함을 받지 못한다. 아히도벨과 압살롬은 이 고의적인 죄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다. 압살롬 또한 암논 사건을 통해서 아버지가 틀렸고, 내가 맞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자기가 머리가 되어서, 심지어 그 아버지를 죽이려고 한다. 그 죄는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지 않았다. 지붕위에 올라가서,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범하였지만, 나탄 선지자가 와서 경책하자, 주님 앞에 완전히 엎드린다.
삼하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다윗은 나탄 선지자가 너가 죄를 지었다, 너가 짓는 죄가 부지중의 죄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바로 그 순간에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고, 즉각적으로 하나님이 내리신 그 평가를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 다윗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바로 사해주신다. 카파르, 고쳐주신다는 것이다.
유다가 다말 사건에서 이 사건이 나로 말미암았다, 미메니라고 고백했을 때 메시아의 계보를 이은 것처럼, 다윗의 내가 범죄하였다는 이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윗이 메시아의 데스티니를 나타내게 한다
히3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다윗은 마음이 겸손한 자였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였다고 한다. 또한 이를 가난한 자라고도 한다. 나는 형상이 된 것이 아니라, 아직 형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한 자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죄를 깨달을 때 겸손하게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인다. 또한 어린 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사람이 크면 변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들은 더 좋은 약 드시라고하면 이전에 먹던 약을 드시겠다고 한다. 크면 변하지 않겠다고 한다. 자기가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는 이미 형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잘못했다는 평가가 내려오면 어른들은 Accept하지 않는다. 이 약보다 좋다고 해도, 이전 것을 먹겠다고 한다. 그게 자기의 형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린 아이들은 바꾼다. 성장하고, 아버지와 다른 것들, 위험한 것들을 하지 말라고 하면 어린 아이들은 교정할 수 있다. 이것이 어린 아이들의 특성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거역하던 것 같이 완고하게 되지 않길 축복한다. 하나님의 평가가 내려올 때, 나의 머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와 같이 그분의 평가를 받아들이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우리가 되길 축복한다.
다윗이 찢어죽인 것들이 있다. 그것을 도브, 곰이라고 한다. 사자나 곰이 자기 양 떼를 물어갈 때 다윗이 입을 찢어버리고 양 뗴를 건져왔다고 한다. 또한 다윗이 물리친 큰 장수, 골리앗이 있다. 곰과 골리앗은 같은 맥락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약속의 땅을 정탐할 때 어떤 마음을 가지는가? 언약적 결혼을 해야해! 했는데 허걱한 상태가 약속의 땅을 정탐한 상태인데, 그게 바로 골리앗이고, 우리 안의 곰의 상태이다. 그것이 우리를 죽일 것 같고, 저것들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다윗은 용맹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 곰의 입에서 양의 새끼를 건져내고, 아낙 자손 골리앗을 물리친 사람이다. 우리가 그 다윗의 용맹을 어떤 관점으로 볼지 생각해보자
약속의 땅을 정탐해 봤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은 할 수 없다는 정탐으 한다. 머리 속의 계산기로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렇게 살면 행복하지 못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계산기가 돌아간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다윗이 용맹하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99%의 세계를 믿는 믿음으로 1%의 세계를 찢어죽인 것이다. 나의 경험이 아낙 자손, 네필림들의 후손이 거인처럼 보이고, 어떻게 저들을 이길 수 있을까? 나는 메뚜기같아 보일지라도, 다윗의 용맹함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진짜라는 믿음으로 전쟁한 것이다. 언약적 결혼을 하면 죽을 것 같으냐? 그럴 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뚫어낸 것이 다윗의 믿음이고, 이것이 약속의 땅을 정탐한 여호수아와 갈렙의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은 땅으로도 비유가 된다. 우리의 마음이 돌 같이 딱딱하면 하나님의 씨앗이 심길 수가 없다. 천국은 심겨진 겨자씨 한알과 같은데, 우리의 마음이 말라버리고, 딱딱해져 있으면 어떤 씨앗도 그 안에서 자라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평가이다. 그 평가는 토후 바보후, 너는 영의 세계의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어둠이라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내가 맹인임을 고백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목사님이 한동안 계속해서 너의 짝이 누구인 것 같냐고 물어보셨다. 한동안 완강하게 우리 교회엔 없습니다 목사님, 저는 아직 결혼은 아직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했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도, 모든 결혼세미나와 그 모든 목사님의 말씀을 녹취하는데도 이 딱딱한 마음에는 하나님의 씨앗이 심길 수가 없었다. 맹인으로서 나의 반쪽을 볼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그런 나의 이 완고한 마음을 갈아버리시기 위해 수많은 작업들을 하셔야만 했다. 나의 삶에 죽음의 냄새를 포진시키셔야 했고, 부모님은 신천지에 빠지셔야 했고, 동생과 아버지는 우울증에 걸리셔야 했다. 재정적으로도 극심한 어려움을 경험하게 하셔야했다. 그 사건들을 통해서 내가 하는 것은 다 죽음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 마음이 곱게 갈려서 겸손해졌을 때, 그제서야 나의 머리를 온전히 주님께 내어드리기로 결심하고, 주님의 평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나님이 뭘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런 상황들을 주셔야만 했을까? 부모님은 왜 저렇게 이단에 가시고, 부부간에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삶을 사실까? 이게 다 결혼의 문제구나. 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결혼 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결국 상대방이 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자, 서로에게 상처주고, 너가 나를 무시했다, 그렇게 지옥을 만들어갔던 것이구나.
그런데 그런 유전적인 죄가 바로 내 안에도 있었다. 나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안목의 정욕으로, 안목의 정욕을 채워줄 평생 볼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러기에 나이가 중요했었다. 그런데 목사님이 나의 머리를 때리는 한마디를 해주셨다. 나이를 보는 것도 안목의 정욕으로 찾는 것이다. 왜 나이가 중요한가? 너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나이가 아닌가?
곱게 갈린 상태였기에, 주님 앞에서 그 평가를 바로 Accept하고 바로 주님 앞에 다윗처럼 무릎꿇을 수 있었다. 주님 내가 안목의 정욕으로 정탐하였군요. 제가 회개합니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 당신이 맞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부지중에 지은 죄를 사하여주신다. 하나님이 언약적 사랑이라는 약속의 땅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을 때, 어쩔 수 없이 오감과 감각, 이성으로 정탐을 하게된다. 이것이 인간의 존재적 부조리이다. 하나님의 영원의 세계를 살고 싶어하지만, 우리의 육신은 계속해서 사망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7장~8장이다. 이것이 서로 반대되는 것 같지만, 사도바울이 이것에 대해서 정확히 이야기하는 구절이다.
롬7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사도바울이 부르짖는 것이 이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렇게 하나님의 기적을 많이 체험했지만, 나는 여전히 오감과 감각으로밖에 정탐하는 법을 모르고 있구나.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롬8장의 말씀이다. 왜 그런가?
롬8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어떻게하면 우리가 주님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인정할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죄악을 주님 앞에 인정하기만 한다면, 주님께서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탐을 통해서 부지중의 죄가 드러나는데, 그 부정함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를 긍정으로 이끄실 것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화제와 속죄제를 드린다고 한다.
민15
24 회중이 부지중에 범죄하였거든 온 회중은 수송아지 한 마리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리고 규례대로 소제와 전제를 드리고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라
25 제사장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면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니 이는 그가 부지중에 범죄함이며 또 부지중에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헌물 곧 화제와 속죄제를 여호와께 드렸음이라
אִשֶׁה 이쉐 : 화제 = 이샤(신부, 아내), 나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א)의 형상(שׁ)을 향해서 자라가는 것이다.
우리가 부지중의 죄를 지었을 때,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평가를 Accept했을 때 바로 이 화제를 드려야하는 것이다. 이샤는 또한 신부라는 말이다. 지금 나의 오감과 감각이 말하는 것은, 이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신부가 되냐는 것이다. 이렇게 부족하고, 또 죄를 짓고, 몇년 동안 토라공부 했는데도 변한 것도 없는 내가 하나님의 신부가 된다는 것은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절대 불가능해보인다. 그러나 화제는 나의 삶의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라고 다시 고백하는 것이다. ה 헤이는 방향을 의미한다. 지금 내 삶의 결과들이 증거하는 것은 내 컴퓨터의 계산으로는 불가능이지만, 지금의 나를 완성된 하나의 형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아직 형상이 되지 않았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향해서 자라가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이런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기 원한다.
그리고 속죄제를 여호와께 드린다.
חָטאָת 하타트 : 속죄제
= 주님이 나를 כָפַר 카파르, 고치실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교정하여서, 열매(פַר)맺게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고백을 드리는 것이 속죄제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 안에 이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살아나야 한다. 주님, 내게 많은 악한 경향성과 죄가 있으나, 주님이 카파르, 교정하시고, 새롭게하셔서, 완성하십시요.
우리는 부정을 통해서 긍정을 배운다고 했다. 그래서 하타트는 죄를 완성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죄를 통해서 완성까지 가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형상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끊임없이 짓는 부지중의 죄를 용서하신다. 그분의 용서는 한이 없다. 아이들이 자라가면서 수없이 많이 넘어지는 것을 통해서 서는 법, 걷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우리도 수없이 많은 부지중의 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을 주님은 "죄"보다는 "실수"로 정의하시고, 카파르, 용서해주신다. 이것을 고쳐주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고의로 짓는 죄는 결코 사함이 없다고 하신다.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
민15:30 본토인이든지 타국인이든지 고의로 무엇을 범하면 누구나 여호와를 비방하는 자니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בְיָד רָמָה 베야드 라마 : 자기 손(י)의 능력을 머리(ר)로 드는 것
יד 야드 : 손 / רָמָה 라마 : 들다
- 고의로 짓는 죄는 하나님께 완전히 손 들고 반역하는 것, 나가겠다는 것이다.
고의로 짓는 죄는 한 몸에서 떨어져나가서 애굽으로 가자고 하는 것, 머리를 바꾸겠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 안의 열 정탐꾼이 늘 오감과 감각으로 정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땅에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울부짖을 때가 분명 있다. 하지만 절대로 머리를 바꿔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안된다.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생활에서 다음 세대, 어린 아이의 세대가 다시 성장할 때까지 다 죽어야만 했다.
만약 목사님이 언약적 결혼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나는 그거 할 수 없다고, 손을 들고 나가버렸다면 그것은 고의적인 죄가 되어버린다. 우리가 제자교회이다. 제자 교회는 특히 이런 고의적인 죄로 인해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는 일들이 많다. 무슨 영의 아버지냐고 하면서, 손을 들고 나가버린다. 더 이상 당신은 나의 머리가 아니라고 하면서, 나의 머리는 오직 하나님이라고 하며, 자기 자신이 머리가 되어서 신앙생활 잘 할거라고 하면서 나가버린다. 이렇게되면 상황은 굉장히 심각해진다.
이것이 슐라흐 레카에서의 가장 큰 교훈이다. 절대로 손을 들고 나가지 말아라. 고의적인 죄를 짓지 말아라. 주님은 이것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찌찌트, 옷단에 술을 달라고 하신다.
찌찌트, 옷단 귀, 옷의 날개에 찌찌트를 달라고 하신다. 옷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 카나프, 옷의 날개이다. 이것을 옷단이라고 표현했다.
민15
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이 찌찌트를 다는 이유는,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함이다. 우리가 눈의 욕심을 따라서 하는 것을 음행이라고 한다. 열 스파이 사건은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한 사건이다. 즉, 영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음행이라고 한다.
주님은 우리를 이 음행에서 건져주실 너무나 중요한 무기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것이 바로 찌찌트이다. 이스라엘에 가면 거의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 찌찌트를 달고 있다. 찌찌트는 옷단 술이 라는 것이다
그림 ) 옷단 술
צִיצִת 찌찌트 : 옷단 술
기도숄, 탈릿에는 언제나 찌찌트가 달려있다. 우리가 찌찌트를 보고 계속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바로 슐라흐 레카의 교훈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음 영적 Level로 올리시려고 할 때, 우리는 오감과 감각으로 정탐하는 일이 벌어진다. 우리가 이 부지중에 짓는 죄를 지을 때, 이 찌찌트를 보고 다시 기억하라는 것이다.
주님, 당신이 말하시는 것이 이해가 되지도 않고, 사실 무척이나 두렵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감과 감각으로 정탐한 이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화제와 속죄제를 드리겠습니다. 나는 주님, 당신만을 향해 갈 것이고, 주님이 오늘 드러난 죄를 고치시는 속죄제가 되셨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열매를 맺게 할 것입니다.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이 저의 정탐의 결과로 봤을 땐 죽음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내게 죽음으로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죽음과 같고, 나를 괴롭히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만 생각하면 마음이 무너집니다. 하지만 주님. 이것이 바로 씨앗이 땅에 심기워 죽는 것임을 봅니다. 이 부지중에 짓는 죄를 사하시고, 주님의 평가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우리가 주님의 평가가 내려올 때, 즉각적으로 무릎꿇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가 그 약속의 땅에서 날마다 당신을 닮아가는 삶을 살게 하소서
이것이 찌찌트를 보고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이 찌찟에 청색 끈을 더하라고 하신다
פְתִיל 프틸 : 줄(끈), 입(פ)으로 완성(ת)하는 것을 훈련(ל)하는 것
= 하나님의 해석
프틸, 줄은 해석을 다룬다. 우리가 약속의 땅을 정탐할 때 나의 감정의 언어, 이것을 도 사모님은 모국어라고 했는데, 이것을 사용했다면, 이제는 그 이야기를 재구성해보는 것이다. 내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해석을 붙잡는 것이다.
이것을 잡고 삶이 달라진 한 사람이 있다. 바로 혈루증으로 앓아온 한 여인이다. 주님의 이 찌찟을 잡았더니, 12년 동안 흘러온 혈루 근원이 말랐다.
혈루증
막5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열두 해 = 이 여인이 이스라엘 12지파를 의미한다.
이것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하는 열두 지파를 말한다. 약속의 땅을 오감과 감각으로 정탐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상태가 혈루증에 걸린 상태이다.
그동안 많은 의사에게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나 아무 효험이 없었다. 내 삶을 완성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해보았다. 그런데 결국 내 삶은 생명을 낳지 못하고 계속된 죽음을 낳을 뿐이다. 혈루증에 걸리는 것은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인데, 그 자궁이 결코 잉태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 자궁에서는 어떤 생명도 낳지 못하고, 죽음만, 난자가 생명이 되지 못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상태밖에 의미할 수 밖에 없다. 내 삶에서는 죽음의 냄새만 가득하다. 나의 배는 하나님의 생명을 잉태할 수가 없다. 내가 제자 삼겠다고 한 모든 사람들은 더 큰 상처를 받고 떠나가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생명을 받아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죽어가고만 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점점 죽어가고 있다.
혈루증 : 피에 관련된 병
피는 דָם 담이라고 한다. 닮아가는 것이다. 청년의 때에 피가 끓는다고 한다. 우리의 피는 하나님을 닮아가는데 계속해서 끓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지 못하게되는 것을 혈루증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교회도 오고, 토라공부도 하고, 기도도 하는데, 계속해서 우리 삶에는 죽음이 찾아온다. 다음 단계로 올라가질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이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분의 뒤로 왔다. 그리고 그의 찌찟을 잡는다.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 이 혈루증의 몸에서 구해낼꼬? 라고 한탄한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를 해방하였다고 한다.
찌찌트는 기도숄에 달려있다. 기도란 하나님의 언어를 말한다. 나의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어를 말해내는 것이 방언이라고 배웠다. 우리는 오감으로 정탐한 뒤에 부지중에 짓는 죄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지르고 있다. 그런데 그때 바로 이 디바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기도라고 한다.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숄의 찌찟을 잡고 기도하자, 그 혈루증이 즉시로 나았다.
디바는 불평과 악평이라고 했다. 약속의 땅을 보고 불평과 악평했던 것이 떠오를 때, 또한 다윗은 도브, 곰을 찢어죽인 사람이다. 디바가 곰처럼 보이고, 아낙 자손, 골리앗처럼 보일 때 그것을 찢어죽일 수 있는 것은 이 찌찟을 붙잡은 즉각적인 기도이다. 이것이 다윗이 곰을 죽였다는 고백이 되는 것이다.
צִיצִת 찌찌트는 짜딕, 의가 2개가 있다. 우리의 의(צ)는 하나님의 의(צ)가 완성(ת)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완성된 하나님의 의는 The Man이다. 우리가 The Man에 가기까지 하나님이 계속해서 우리를 교정하시고 고치시게 하기 위해 나를 주님 앞에 드린다, 내가 겸손하게 주님이 평가했을 때 그 수술대 위에 내가 눕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이 찌찌트의 삶인 것이다
우리 삶에서 매 사건이 생기는 순간마다, 용서하기 싫은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내적인 수많은 갈등과, 이런 것들이 발생할 수 있고, 그때마다 오감과 감각으로 정탐하면서 부지중의 죄를 지을 때, 즉각적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즉시, 즉각적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사실 부지중의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한다. 토라 배웠으면 한번에 되야지 어떻게 또 죄를 지을 수 있는가? 토라를 배웠는데 이 사람 하나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가? 이게 우리가 부지중의 죄를 짓지 않고 싶어하는 우리의 마음이다. 빨리 나는 사망의 몸 벗어버리고, 영의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것이다. 이것도 하나님이 보시기엔 악한 것이다.
그러나 부지중의 죄는 성장하려는 사람 모두가 짓는 죄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넘어졌기에, 나는 넘어지지 않는 나라는 자신을 완성하고 싶은 사람은 부지중의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성장하려고 해야한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 해야한다. 그때 그것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주님의 찌찟을 붙잡고 기도해야 한다.
민15:40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우리가 이 슐라희 레카의 계명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거룩할 것이라고 한다. 성도가 될 것이다.
* 기도
1) 우리가 약속의 땅을 정탐한 뒤, 우리 안에 있는 오감과 감각의 부르짖음이 너무나 큽니다 주님. 그 땅의 주민들은 너무나 거인이고, 나는 메뚜기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가 부지중에 짓는 그 부정을 통해 하나님의 긍정을 배우겠습니다. 주님께 화제와 속죄제를 드리겠습니다. 주님의 형상을 향하는 길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이 부지중의 죄를 통해서 완성을 향해 나갈 것입니다
부지중의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약속의 땅을 오감으로 봤을 때, 너무나 나의 악함 / 부족함이 드러나고, 나는 오늘 또 넘어졌구나.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고, 사랑한다고 달려왔는데, 나는 왜 이 작은 것 하나 하지 못하고, 나는 오늘 또 왜 화를 내고 있고, 나의 유익을 위해 일하고 있는가? 이 부지중의 죄가 일어날 때 즉각적으로 회개할 것입니다. 부정을 통해 언어를 가르치시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 안에 긍정의 언어가 하나도 없습니다. 애굽에서 너무나 육신적으로 살아왔기에, 어떠한 긍정의 언어가 없습니다. 가르쳐주소서. 끝까지 용서하시는 주님, 우리가 당신을 붙잡겠습니다. 우리가 부정을 통해 긍정을 배우겠습니다. 늘 속죄제와 화제를 드릴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늘 나아갈 것입니다. 죄를 완성하시는 주님을 통해서, 죄의 반대편에 계신 하나님의 형상을 향해서 한 걸음씩 걸어갈 것입니다.
2) 주님 우리가 당신의 찌찌트를 잡을 것입니다. 우리가 부지중의 죄를 지을 때 다윗처럼 즉각적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나의 의를 완성하시는 분은 오직 당신의 의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온전히 내어드립니다. 우리를 카파르, 고쳐주시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열매맺게 하소서
우리가 부지중의 죄를 지을 때 즉각적으로 주님의 찌찌트를 붙잡겠습니다. 나를 완성하려고 12년 동안 혈루증 앓는 여인처럼 달려왔으나, 우리 삶에는 어떤 생명도 없고, 삶에는 죽음의 냄새만 가득하고, 에덴동산보다 지옥의 냄새가 가득합니다. 내 삶에는 원수같은 사람들밖에 없고, 그렇게 사랑하기 힏든 사람들밖에 없는가요?
그것이 바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부지중의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가 손을 들고 주님 앞에 내 머리가 맞다고 나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머리를 떠나겠다고 않을 것입니다. 압살롬과 아히도벨처럼 배반하지 않고, 다윗처럼 가난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를 고쳐주시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열매맺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죄를 고쳐주시옵소서.
작성자 Daniel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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