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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 올라오는 짐승(30)
말씀: 계 13:11-18. 2025년 1월 19일 오후 2시
오늘 말씀은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입니다. 앞에서 요한이 본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깊은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적그리스도란 인물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계시록을 읽으면서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계시록의 문학적 상징, 비유 등에 대해서 주로 말합니다. 12장에서 해로 옷 입은 여인, 사내 아이, 큰 붉은 용 등이 나오는데 13장에서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짐승이 일어납니다.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붉은 용은 사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이 스스로 그렇게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비유니 상징이니 하면서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속임수입니다. 원어를 알아야 한다느니 중동 문화나 전통, 관습 등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말씀을 우리가 충분히 깨달을 수 있도록 설명하고 명료하게 밝혀 주십니다. 원어 사전이 없이도 여러분은 12장에 나오는 해로 옷 입은 여인이 이스라엘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큰 붉은 용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큰 용 즉 저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상을 속이는 자”(계12:9)라고 주님께서 그 용이 에덴에서 여자를 속였던 뱀이요, 성경에서 마귀라고 언급되는 인물이며 사탄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문자적 해석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해석이란 말을 오해하는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문자적 해석이란 주님께서 그 의미를 문자적으로 설명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흔히 세대주의자들이라고 하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라면서도 그들은 문자적 해석이란 뜻을 전혀 모릅니다.
자, 하늘에 있는 큰 붉은 용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합니까? 신화적 동물, 상징적 동물이라고 하지 않고 “큰 용은 옛 뱀, 마귀, 사탄, 온 세상을 속이는 자”(계12:9)라고 해석합니다. 이것이 기록된 대로 해석하는 문자적 해석입니다.
13장에서는 바다에서 올라온 큰 짐승을 봅니다. 이 짐승은 용과 마찬가지로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올라왔습니다. 바다 괴물이 아닙니다. 그는 바다 밑 지하의 깊은 구덩이에서 올라온 것입니다. 그 짐승의 정체를 알기 위해 우리는 다니엘서를 비롯해 관련 성경을 펼칩니다. 그것이 바로 문자적 해석입니다. 성경을 성경의 기록(문자, 단어, 구절)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자적 해석입니다.
성경 공부는 누구의 주장이나 견해를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기록된 말씀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모습은 매우 복합적인데 표범, 곰, 사자의 모습과 특성을 모두 합쳐 놓은 것과 같았고 용은 그에게 자기의 권능과 자리와 큰 권세를 주었습니다(13:2).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이 세상의 신이요 공중권세 잡은 통치자에게 모든 것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머리와 오른 팔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어 죽게 된 자 같았다가 살아났는데 이 사건을 통해 온 세상이 그를 따르게 됩니다(3).
13장 전반부는 이 짐승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용과 짐승을 경배하며 찬양하며 따릅니다(3). 온 세상은 세계 단일 종교가 됩니다. 용은 짐승에게 신성 모독하는 입을 주고 마흔두 달 동안 지속할 권능을 주었습니다(5). 짐승은 입을 벌려 하나님을 대적하며 모독했고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성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했습니다(6). 그가 성도들과 전쟁하여 이기는 것을 허락받고 온 세상의 모든 족속과 언어와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능을 받았습니다(계13:7).
그는 종교와 정치를 통합한 절대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온 세상의 모든 민족은 모두 짐승의 통제와 지시를 따릅니다. 어느 민족이나 그에게 권력을 바치고 복종합니다.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들은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입니다. 이 때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목이 잘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혼은 구원 받습니다. 주님께서 왕국 복음을 전할 때 하신 말씀, [자기 생명을 찾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나로 인해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그것을 찾으리라.](마10:39)는 말씀은 큰 환란 때 문자 그대로 적용됩니다. 자기 생명(육신의 생명)을 얻고자 하거나 찾으려 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려 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로 인해 자기 생명을 잃으려 하는 자는 그것을 찾으리라.](마16:25). 여기서 자기 생명은 육신의 생명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려 하는 자는 잃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에 이르도록 그것을 간직하리라.](요12:25). 모두 큰 환란 때 문자 그대로 성취될 말씀들입니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은 저항하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포로로 끌려가고 .......칼로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계13:10).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은 고난 속에서 드러납니다. 고난이 없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견디고 기뻐하는 것이 성도들의 인내요 믿음입니다. 주님은 이런 성도들을 이기는 자들이라고 하시며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다니엘 7장은 계시록 13장과 짝을 이루며 왕국의 배경이 되는 장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이 그 왕국을 취하고 영원히 곧 영원무궁토록 그 왕국을 소유하리라, 하니라.](단7:18).
큰 환란 때 이기는 자들에게 주신 복입니다. 포로로 끌려가고 칼로 죽임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마침내 [옛적부터 계신 분께서] 오셔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에게 공의의 판결을 주셨으므로 때가 오매 성도들이 그 왕국을 소유하였더라.](단7:22). 성도들을 죽인 자들에 대한 심판은 주님이 해 주십니다.
주님은 복수의 칼을 들고 철저히 원수를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는 그 왕국을 소유할 수 있게 하십니다. [왕국과 통치 권세와 온 하늘 아래 왕국의 위대함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의 백성에게 주어질 터인데 그분의 왕국은 영존하는 왕국이며 모든 통치 권세가 그분을 섬기고 그분께 순종하리라. 하니라.](단7:27). 이런 말씀으로 인해 큰 환란 때 성도들은 끌려가면 끌려가고, 죽이면 죽임을 당합니다.
이 짐승의 통치 기간에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은 왕국의 상속과, 부활 후에 그리스도와 함께 철장으로 다스리는 권능이 주어지며 둘째 사망의 해를 입지 않습니다(계20:4). 이것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며 이들은 패배자가 아니라 이기는 자들입니다.
자, 오늘은 또 다른 짐승에 대한 기록입니다. 우리는 늘 그러했듯이 성경의 문자적 해석으로 넉넉히 진리를 깨닫고 풀어나갈 것입니다. 사사로운 해석이나 견해, 주장을 무시하고 오직 기록된 말씀만을 따라 가면 됩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또 내가 보니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는데 그는 어린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계13:11).
사도 요한은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하에서 또 하나의 짐승이 올라왔는데 이번엔 바다가 아닌 땅에서 올라왔습니다. 이미 알고 있듯이 지옥의 문들은 여러 개입니다. 지옥의 넓이는 계속해서 확장되어 가며(사5:14) 바다 밑과 땅 밑에 모두 지옥이 넓게 펴져 있습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면 그 위가 바다일 수도 있고 땅일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짐승은 자기 처소에서 올라왔는데 위는 바다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바다 위로 올라오는 짐승이라고 했고 두 번째 짐승은 땅 위로 올라왔습니다.
지옥은 매우 좁은 협소한 공간이 아니라 대륙의 크기보다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지옥과 멸망이 결코 가득 차지 아니하는 것같이 사람의 눈도 결코 만족하지 아니하느니라.](잠27:20), [그러므로 지옥이 자기를 확장하고 한량없이 자기 입을 벌렸으니 그들의 영광과 그들의 무리와 그들의 영화와 또 기뻐하는 자가 거기로 내려가리라.](사5:14).
바다에서 올라왔다고 할 때 그는 바다 밑 지옥(바닥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온 것입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 역시 땅 밑 지하 세계(지옥)에서 올라온 것입니다. 주님은 이곳을 땅의 심장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2:40). 지옥에는 방들이 여러 개 있고 문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옥의 문들”(마16:18),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이라고 한 것은 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계1:18). 깊은 구덩이도 문이 있고 열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짐승이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짐승이었는데 요한이 지금 본 짐승은 “어린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는”(11) 짐승이었습니다. 두 짐승 다 용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용은 사탄으로서 자신이 하나님처럼 흉내를 내고 적그리스도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가장합니다. 이 짐승은 성령을 흉내 냅니다.
“어린양같이 두 뿔이 있고” 그는 생긴 모습은 양이지만 용처럼 말을 합니다. 그자의 역할은 말을 하는 자 즉 대언자의 역할을 하는 거짓 대언자입니다. [또 내가 보니 개구리 같은 부정한 영 셋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대언자의 입에서 나오더라.](계16:13). 사탄의 삼위일체를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비둘기 같은 거룩한 영은 아버지의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인데 이 셋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삼위일체입니다.
[짐승이 잡히고 또 그 앞에서 기적들을 행하던 거짓 대언자도 그와 함께 잡혔는데 그 거짓 대언자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그 기적들로 속이던 자더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으로 불타는 불 호수에 던져지고](계19:20). 짐승이 잡히고-적그리스도,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입니다.
‘거짓 대언자’는 땅에서 올라온 짐승입니다. 거짓 대언자가 하는 일은 기적을 행하여 사람들을 속여 짐승의 표를 받게 하고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게 합니다. 용, 짐승, 거짓 대언자의 역할이 정확하게 아버지, 아들, 성령의 사역을 모방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보내시고 그분이 죽고 부활승천하신 후에 곧 성령을 보내십니다. 용은 거짓 대언자가 죽은 자 같았다가 치명적인 상처가 낫고 다시 살아나자 거짓 대언자를 보냅니다.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각종 표적과 이적과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거짓 대언자 역시 이적과 권능을 행합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분을 증언하고 믿게 합니다. 거짓 대언자 역시 짐승을 높이고 그를 증언하고 믿게 합니다. 첫째 짐승은 정치적인 권력을 잡고 있고 둘째 짐승은 종교적인 지도자입니다.
12절입니다. [그가 첫째 짐승 앞에서 첫째 짐승의 모든 권능을 행사하고 땅과 그 안에 거하는 자들이 첫째 짐승 곧 치명적인 상처가 나은 자에게 경배하게 하더라.](계13:12).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하는 일을 보십시오. 첫째 짐승 앞에서 첫째 짐승의 모든 권능을 행사합니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존재처럼 같은 일을 행합니다. 이 짐승은 땅과 그 안에 거하는 자들로 하여금 첫째 짐승 곧 치명적인 상처가 나은 자에게 경배하게 합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자기에게 경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믿으라거나 섬기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의 사역의 초점은 첫째 짐승입니다. 그는 ‘치명적인 상처가 나은 자’를 증언합니다.
성령께서는 결코 자기를 믿으라거나 섬기라거나 경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그분에 관해 말씀하시며 그분을 믿고 경배하라고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분에게 경배하라고 합니다. 마귀들의 사역이 얼마나 비슷한지 주목하십시오. 참으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위조품은 진품과 거의 같아야 합니다. 마귀는 빛의 천사로 자신을 가장합니다.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속이는 자입니다. 거짓 대언자는 말로만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큰 이적과 권능과 표적을 통해서 사람들을 속입니다. 이렇게 비슷함으로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자들이 마귀에게 속고 이단에게 속아 넘어갑니다.
자, 그렇다면 속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록된 주의 말씀입니다. 체험이나 느낌은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절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거짓 대언자의 손에는 성경이 들려있을지 모릅니다. 그는 “땅과 그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첫째 짐승을 증언하고 그를 경배하라고 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13절입니다. [그가 큰 이적들을 행하여 사람들의 눈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 위로 내려오게 하고](계13:13).
이 부분은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큰 이적들을 행하는데 사람들의 눈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 위로 내려오게 했습니다. 왜 그가 거짓 대언자라 불리는지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린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를 대적하던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불을 보내어 심판하셨습니다(민11:1,3).
주님은 불평하던 무리들에게 불을 보내셨는데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것을 듣고 분노하시매 이에 야곱을 대적하여 불이 붙었으며 또한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분노가 올라왔나니](시78:21), [그들의 무리 속에 불이 붙어 불꽃이 사악한 자들을 태웠도다.](시106:18).
이 말씀들은 민수기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모세는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대언자로 그를 통해 일어난 표적과 권능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또 한 명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 바알의 대언자들을 응징했고 참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입증했습니다. 또한 자기를 잡으러 온 무리들을 하늘에서 내린 불로 응징했습니다.
그런데 큰 환란 때 그런 권능과 표적을 행하는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부터 불을 내렸습니다. 이 사람이야 말로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대언자라고 믿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파라오의 궁에 있던 얀네와 얌브레는 거짓 대언자로 모세가 행하던 표적과 권능을 따라 했습니다. 바알의 대언자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일은 실패했지만 사탄에게 그런 권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사탄은 얼마든지 하늘에서 불을 내릴 수 있는 역사적 예가 욥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아직 말 할 때에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이르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양들과 종들을 태워 없애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여 주인께 고하나이다, 하더라.](욥1:16).
종은 욥에게 달려와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라고 보고했지만 이 불은 하나님이 내린 불이 아니라 사탄이 욥을 시험하기 위해 내린 불이었습니다. 욥의 종이나 욥이나 욥의 친구들은 이 불이 사탄에게서 온 것임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내린 불로 알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큰 환란 때 거짓 대언자가 모세와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을 내릴 때 사람들은 그가 참 하나님의 대언자인 줄로 속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권능, 이적, 표적에 한없이 약합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이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너무나 쉽게 속습니다.
거짓 대언자는 하늘에서 불을 내림으로써 성경을 인용할 수 있습니다. “......불로 응답하는 신 곧 그분이 [하나님]이시니라.”(왕상18:24)고 외치면서 사람들을 속이게 될 것입니다.
14절입니다. [또 그 짐승의 눈앞에서 기적들을 행할 권능을 소유하여 그 기적들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속이며 또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말하여 그들이 칼로 상처를 입었다가 살아난 그 짐승을 위해 형상을 만들게 하더라.](계13:14).
거짓 대언자의 사역은 철저히 첫째 짐승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마치 성령의 모든 사역이 철저히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고 오직 예수님을 위해 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지금은 성령의 시대란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 말, 그런 주장은 거짓입니다. 성령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하십니다.
거짓 대언자는 그 짐승의 눈앞에서 기적을 행할 권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기적들로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땅에 거하는 자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속임수, 가장 위대한 사기꾼이 마귀입니다. 그는 온 세상을 속이는 자입니다. 이 일에 거짓 대언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다시 14절b입니다. “......또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말하여 그들이 칼로 상처를 입었다가 살아난 그 짐승을 위해 형상을 만들게 하더라.”(14하). 거짓 대언자는 사람들에게 “칼로 상처를 입었다가 살아난 그 짐승을 위해 형상을 만들게” 합니다. 사람들은 위대한 인물들에 대해 초상화를 그리거나 형상을 제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캐톨릭은 작은 동산을 만들고 마리아 상(像), 예수 상(像) 세우는 것을 즐겨합니다. 크리스천들은 주로 십자가를 만들어 목걸이, 귀걸이, 팔찌로 쓰고 교회 건물에 세웁니다. 불교도들은 아무데나 부처상을 만들어 세웁니다. 종교인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북한에는 곳곳에 김일성 김정일 동상을 세웁니다. 그들이 형상을 왜 세웁니까? 거기에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큰 환란 때 사람들은 성모상, 예수상이나 불상(佛像)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짐승의 형상”을 곳곳에 세울 것입니다. 거짓 대언자가 하는 일의 핵심 사역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광장이나 거리마다 짐승의 형상이 세워질 것입니다.
만약 성경을 알거나 믿는 신자라면 거짓 대언자가 기적을 행하든지 불을 하늘에서 내리든지 간에 형상을 만들도록 하는 이 한 가지만으로도 그가 거짓임을 쉽게 알 수 있고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형상을 새기는 것을 금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철저히 형상 제작을 금지하고 계십니다. [너는 너를 위해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도 만들지 말며](출20:4).
이 말씀과 다른 음성은 모두 낯선 자의 음성입니다. 다른 이의 음성입니다.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킹제임스 성경과 다른 성경의 음성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학적, 교리적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입니다. 참 목자의 음성과 우상목자의 음성을 분간하지 못하면 참으로 불행합니다.
[너희는 너희를 위해 우상들이나 새긴 형상을 만들지 말고 너희를 위해 서 있는 형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돌로 된 형상을 세우고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레26:1).
형상을 만들거나 세우거나 거기에 절하라는 어떤 가르침도 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가 교황이든 대언자로 추앙받는 선각자이든, 유명한 신학자이든 목사이든 간에 그렇게 절하고 경배하라고 말하며 가르치는 자는 거짓 대언자요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고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거짓 대언자는 왜 적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들게 할까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기 좋아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우상 숭배 문제로 시험에 빠졌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드는 일은 출애굽 때부터 몇 백 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민족적 문제였습니다.
어느 종교나 신들에 대한 형상이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서양 배우의 얼굴을 예수님의 얼굴인 줄로 알고 액자에 걸어 둔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십시오. 브라질에 서 있는 거대 예수상은 관광 명소입니다. 그 앞에서 기도하는 이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적그리스도는 우상과 형상을 사용하는 우상 숭배자인데 그 스스로가 우상 목자입니다.
스가랴 11:13에는 은(銀) 삼십 개로 예수님을 판 유다가 나오는데 아래 17절에 보면 “우상 목자”라고 나옵니다. 우상(idol) 목자인데 현대 역본들에서는 게으른(idle) 목자, 못된 목자 등으로 단어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먹이고 섬기는 선한 목자입니다. 양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놓습니다. 우상 목자는 “어리석은 목자”(슥11:15)이며 양떼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어린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고 잠잠히 서 있는 자를 먹이지 아니하며 오히려 기름진 것들의 고기를 먹고 또 그것들의 발굽들을 갈기갈기 찢는(슥11:16) 목자요, 양 떼를 버리는 목자입니다(계11:17). 거짓 대언자가 그 짐승을 위해 형상을 만드는 것은 그가 선한 목자가 아니라 우상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15절입니다. [또 그가 그 짐승의 형상에게 생명을 줄 권능을 소유하여 그 짐승의 형상이 말도 하게 하고 그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려 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다 죽이게 하더라.](계13:15).
거짓 대언자가 하는 놀라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가 땅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짐승의 형상을 만들게 한 후에 만들어진 형상에게 생명을 줄 권능을 소유합니다. 형상이 그냥 나무나 돌, 금, 은으로 만든 조각상이 아니라 말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마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콧구멍에 숨을 불어 넣은 것과 같은 창조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흙이나 나무 조각에 직접 생명을 불어 넣어 살아 있는 혼이 되게 하지는 못할지라도 생명을 줄 권능을 소유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에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성당 앞에 서 있는 성모 형상상이나 가정에 모셔둔 성모형상이나 예수 형상에 땀이든 눈물이든 물만 흘려도 기적이 일어났다고 온 세상에 특종 보도되고 그곳은 성지(聖地)라 불립니다. 순례자들이 모여 들고 그런 표적이나 기적의 현장에서 뭔가 얻을 것이 없는지 궁금해 합니다. 해마다 터지는 사건 중에 하나가 어느 지역의 성모 마리아상의 눈에서 피가 흘렀다는 식의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은 농담으로 여기거나 조작으로 여기지만 한 번 기사가 뜨면 사람들이 경배하러 달려갑니다. 자작극이나 조작이 의심되는 상황에서도 그러한데 진짜 형상이 생명을 소유하고 말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상상을 불허하는 경이로운 일이 됩니다. 온 세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 짐승은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를 경배하기 위해 만든 형상이 입을 열어 말을 합니다. 또한 그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려 하지 않는 자들은 다 죽이게 합니다. 거짓 대언자는 성령의 권능, 표적을 그대로 재현해 보이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생명의 영이듯 거짓 대언자는 생명을 줄 권능을 가지고 형상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말을 하게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것이로다. 그것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사용하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고 목구멍으로 말도 하지 못하나니 그것들을 만드는 자들도 그것들과 같고 그것들을 신뢰하는 모든 자도 그러하도다.](시115:4-8).
성경에 따르면 사람들이 만든 우상은 헛된 것이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거짓 대언자가 형상에게 생명을 부여하면 이와 달리 말을 합니다. 원격 스피커를 달아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 자체가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큰 환란 때 짐승이 통치하는 42개월 동안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짐승의 형상이 말을 할 때 유대인들조차 “저것은 우상이 아니다, 성경에 따르면 우상들은 말을 할 수 없다. 그런데 저 형상은 말을 한다.”면서 속게 됩니다. 표적을 믿음의 증거, 수단으로 삼던 사람들은 표적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나무에게 이르기를, 깨라, 하고 말 못 하는 돌에게 이르기를, 일어나라. 하며 그들에게 이르기를, 그것이 가르치리라, 하는 자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보라, 그것은 금과 은으로 입혀졌으므로 그것의 한가운데에는 전혀 숨이 없느니라.](합2:19). 거짓 대언자는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그것이 가르치리라” 하는 자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화가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짐승과 거짓 대언자를 산 채로 불 못에 던져 버리십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오해하는 한 가지는 사탄은 생명을 줄 수 없다, 생명을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생명을 줄 권능이 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는 바와 같이 성경의 분명한 기록입니다.
모세를 대적하던 얀네와 얌브레는 모세처럼 지팡이를 뱀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이적과 권능이 구약에서 행해졌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탄은 치명적인 상처로 죽은 자 같았던 첫 번째 짐승을 다시 살렸습니다. 그는 짐승의 형상에게 생명을 주어 말을 하게하고 경배하려 하지 않는 자들은 죽이게 합니다.
사람들이 미리 정립해 둔 교리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기록된 말씀이 말하는 대로 교리를 정립해야 합니다. 배반자 가룟 유다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분명히 육신의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마귀’(요6:70-71)였고 ‘사악한 자’(살후2:8,9,))였고, ‘멸망의 아들’(요17:12)이었고 ‘죄의 사람’(살후2:3)이었습니다. 그는 마귀 들린 사람이 아니라 그의 정체가 마귀였습니다. 그는 누구에게서 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자의 씨로 오셨듯이 그는 ‘뱀의 씨’로 왔습니다. 마귀는 짐승의 형상에게 생명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육화될 수도 있습니다.
16절입니다.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로운 자나 매인 자에게 그들의 오른손 안에나 이마 안에 표를 받게 하고](계13:16).
거짓 대언자는 모든 자에게 짐승의 표를 받게 합니다.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로운 자나 매인 자에게 그들의 오른손 안에나 이마 안에 표를 받게 합니다. 거짓 대언자의 핵심 사역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짐승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오해와 오류가 많은 부분이 이 표에 관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상품 정보를 표시하는 바코드가 짐승의 표라고 외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베리칩이 짐승의 표라고 외치는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몸속에 칩을 하나 심어서 그걸로 신분증은 물론이고 의료보험증이나 예금 통장이나 모든 정보를 담는다는 내용입니다.
자, 본문을 잘 보십시오. 표를 받게 하는 것이 언제입니까? 큰 환란 때입니다. 그것도 짐승이 통치하는 후삼년 반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짐승의 형상이 세워지고 그에게 경배하게 할 때입니다. 짐승의 표는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표시입니다.
성도들이 구원 받은 후 선한 양심이 구원받은 고백으로 물 침례를 받고 성령으로 인침을 받듯이 거짓 대언자는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한 혼들에게 표로 인치는 것입니다. 짐승의 표는 적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맹세한 증거이며 신분증입니다. 짐승의 표는 누가 줍니까? 거짓 대언자입니다. 어느 나라 정부나 독재자나 사회 보장국에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의 표를 받는 위치는 오른손이나 이마 안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사람의 몸(손, 이마) 피부 속에 표를 넣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에(in)란 말은 피부 속, 몸속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마, 손의 범위, 경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들의 손에, 라고 하면 신체에서 손 부위(부분) 즉 손에 해당하는 부위 안에다 표를 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이마 안이라고 이마의 피부를 칼로 찢어서 그 속에다 표를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이마’에 해당하는 부위(범위) 안에다 표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이마 위에나 손 안에 짐승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더라.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통치하였으나”(계20:4하)란 말씀이 나옵니다. “이마 위에나 손 안에...”라고 합니다. in은 표를 받는 신체 부위이며 upon은 표가 찍히는 위치입니다.
이마에 표를 찍는 일은 창세기에서 우리 주님께서 가인의 이마에 표를 주신 것이 처음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몸 속, 이마의 피부 조직 밑에 뭔가를 집어넣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자신의 성도들에게도 이마에 표를 하게 하셨는데 이마 속에다 뭔가를 넣은 것이 아니라 이마 위에다 뭔가를 표시한 것입니다. 마치 인도나 아프리카 어느 부족들처럼 이마에 색깔 있는 흙을 바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몸(손이나 이마)에 뭘 집어넣는다고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이 매우 많습니다. 주님은 ‘사람(성도)들의 이마 위에 표를 찍으라.’(겔9:4) (set a mark upon the foreheads of the men)“이마 위에”라고 하셨습니다. 큰 환란 때 144,000명의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주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계14:1, 22:4). 그것이 봉인(7:3,4)입니다.
짐승 위에 탄 여자의 이마에도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계17:5). 마귀는 자신을 하나님처럼 (살후2:4)속이고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흉내 내고 위조하고 가장합니다. 거짓 대언자가 사람들의 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는 표의 위치는 ‘안’(in) 과 ‘위’(upon)입니다. 몸속에 넣는 것이 아니라 손이나 이마에 해당하는 신체 부위의 범위(경계) 안(in) 어느 부위 위(upon)에 기록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불교의 중들, 티벳의 라마승, 인도의 힌두교도들 중에 이마에 점(mark)을 찍은 사람들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이마 안에(in), 이마 위에(upon) 점(표-Mark)을 찍습니다. 이와 같이 피부 속에 뭔가를 집어넣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 대언자는 짐승을 경배하고 섬기는 자들에게 표를 줍니다. 거짓 대언자가 표를 주어 그들을 자신의 소유로 인치는 것입니다. “안에”란 말과 “위에”란 말이 모두 성립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습니다(롬10:9). 사역자들은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로 이마, 머리에 안수를 받습니다.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자들은 손바닥을 앞으로 손을 번쩍 들어 하이 히틀러! 하고 외칩니다. 겉에 보이는 표식도 중요하지만 마음으로 믿고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진짜 표입니다.
17절입니다. [그 표나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수를 가진 자 외에는 아무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하더라.](계13:17).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라는 명령은 예루살렘과 유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일입니다. 광야로 도망을 가거나 산으로 피하거나 숨은 사람들을 제외한 시민들은 모두 표를 받아야 일상의 생활이 가능합니다. 거짓 대언자는 그 표나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수를 가진 자 외에는 아무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합니다. 식량으로 사람들을 통제합니다. 짐승의 표를 받지 말라는 것은 우리 주님의 명령입니다. 표를 받지 않으면 먹고 사는 일이 어렵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일련의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 배경을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큰 환란은 온 세상의 모든 지역,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는 것이며(계13:8). 이 사건이 일어나는 곳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 민족입니다. 주님께서 다니엘에게 마지막 날들에 일어날 사건을 “네 백성과 네 거룩한 도시”(단9:24)라고 말씀하셨고 “그날은 곧 야곱의 고난의 때”(렘30:7)입니다.
계시록 12,13장의 사건이 모두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일어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용은 하늘에서 떨어져 한국으로 온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내려가 여자와 여자가 낳은(이스라엘) 사내아이를(십사만 사천) 삼키려 하고 그녀의 남은 성도들과 싸웁니다(계12:17).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지키는 히브리인들로서 크리스천들이 아닙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예루살렘의 성전에 들어가 자신을 높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대언자 다니엘을 통해 말씀하신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 서서는 안 될 곳에 서 있는 것을 너희가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지어다.)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할지어다.](막13:14,마24:15).
주님이 말씀하신바 배경은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 땅의 사람들입니다.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은 적그리스도로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입니다. “서서는 안 될 곳에 서 있는 것을 너희가 보거든”이 곳은 성전을 말합니다. 이 짐승은 성전을 자신의 거처로 삼을 것입니다.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지 아니하면 그 날이 오지 아니하리라. 그는 대적하는 자요, 또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 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 안에 앉아 자기가 [하나님]인 것을 스스로 보이느니라.](살후2:3,4). 적그리스도의 주 무대가 미국이나 유럽이나 아시아나 동방의 한국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유대 땅 예루살렘의 성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일차 대상이 유대와 유대 땅에 있는 사람들인데 큰 환난 당시 예루살렘에는 남은 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방인들입니다.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장악하고 유대인들은 광야로 도망갔거나 산으로 도망을 간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는 너무나 유명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이들은 땅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두 증인입니다. 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이 예루살렘에서 1260일 동안 대언합니다. 땅과 바다에서 올라온 두 짐승과 굵은 베옷을 입은 두 증인이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거짓 대언자는 표적을 행하며 용의 말을 합니다. 두 증인은 표적과 권능을 행하며 주의 말씀을 대언 할 때 이들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은 모두 불에 타 죽습니다.
18절입니다. [여기에 지혜가 있으니 지각이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볼지니라. 그것은 어떤 사람의 수요,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계13:18). 주님은 “여기에 지혜가 있으니 지각이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볼지니라.”고 합니다.
이는 짐승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짐승이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의 수를 세어 보면 됩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수요”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짐승이라고 부른 존재는 어떤 사람으로 그의 수는 666입니다. 믿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을 읽어보며 추적하고 확증할 수 있듯이(요5:39) 적그리스도로 나타나는 이 사람의 신원, 정체 역시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가룟 유다입니다.
수를 세어 보라는 것은 그 이름에 숫자 값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는 문자에 고유의 숫자 값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캐톨릭이 공식 예배 언어로 채택한 라틴어는 {I(1), V(5), X(10), L(50), C(100), D(500)}의 여섯 개이며 이 6개의 문자의 합계가 666입니다.
교황이 머리에 쓰는 관에 “VICARIUS FILII DEI”란 하나님의 대리자(아들)란 뜻입니다. 숫자를 세어 보면 666입니다. 이와 같이 큰 환란 때 자신을 하나님이라 자처하는 한 인물, 경배를 요구하는 한 인물이 있을 때 그의 수를 세어 보면 간단하게 그가 성경에서 말하는 적그리스도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지혜가 있으니...”란 말씀은 다니엘서를 연상하게 합니다. [많은 사람이 정결하게 되고 희게 되며 단련을 받을 것이나 사악한 자들은 사악하게 행하리니 사악한 자들 중에서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지혜로운 자들은 깨달으리라.](단12:10).
지혜로운 자들은 큰 환란 때 적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그 정체를 정확히 깨닫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 중에서는 아무도 깨닫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시편을 읽을 때 마스길이란 말이 붙은 시편을 볼 수 있습니다. 마스길이란 말이 “지혜, 깨닫는 자”란 뜻입니다. 마스길 시편을 보면 적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 정체가 정확히 나옵니다.
시편 32편을 보면 주님을 신뢰하는 자는 은신처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시편 42편에는 하나님으로 인해 겪는 혼의 낙심, 불안, 근심, 공포가 잘 나옵니다. 큰 환란 때 성도들이 겪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주는 시편입니다. 시편 74,78, 89,142편 등 온통 큰 환란 때의 일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편을 당대의 사건으로만 이해하고 해석함으로 성경의 위대한 예언들을 모두 놓쳐 버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은 땅에서 올라온 짐승인 거짓 대언자가 이 땅에서 하는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첫째 짐승의 권능을 행하고(2), 짐승을 경배하게 하며(12), 큰 이적들을 행하고(13),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13), 기적들로 사람들을 속이며(14), 짐승 표를 받게 합니다(16).
사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도들을 미워합니다. 사탄은 하늘에서 쫓겨나 땅에 와서 여자의 씨와 이스라엘의 남은 성도들과 사역자들을 멸하려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처럼 경배를 받고 싶어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사역, 왕국 등을 그대로 흉내 냅니다. 사람들은 짐승을 경배하고 표를 받습니다. 사람들의 욕망은 신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우상 숭배자들이 될 뿐입니다. 이로써 용과 짐승, 거짓 대언자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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