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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도초등학교 총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56이세진
1. 공룡능선, 나한봉 가는 길에 뒤돌아본 1,280.1m봉, 그 뒤 왼쪽은 1,275m봉
1.
부여안은 치맛자락, 하얀 눈바람이 흩날린다. 골이고 봉우리고 모두 눈에 하얗게 뒤덮였다. 사뭇 무릎까지 빠진
다. 나는 예가 어디 저 북극이나 남극 그런 데로도 생각하며 걷는다.
파랗게 하늘이 얼었다. 하늘에 나는 후 입김을 뿜어 본다. 스러지며 올라간다. 고요-하다. 너무 고요하여 외롭게
나는 태고(太古)! 태고에 놓여 있다.
2
왜 이렇게 자꾸 나는 산만 찾아 나서는 겔가? 내 영원한 어머니……. 내가 죽으면 백골이 이런 양지짝에 묻힌다.
외롭게 묻어라.
꽃이 피는 때, 내 푸른 무덤엔, 한 포기 하늘빛 도라지꽃이 피고, 거기 하나 하얀 산나비가 날러라. 한 마리 멧새도
와 울어라. 달밤엔 두견! 두견도 와 울어라.
언제 새로 다른 태양, 다른 태양이 솟는 날 아침에, 내가 다시 무덤에서 부활할 것도 믿어 본다.
―― 박두진(朴斗鎭, 1918~1998), 「雪岳賦」 3연 중 제1연과 제2연
▶ 산행일시 : 2023년 2월 5일(일), 맑음, 무박산행
▶ 산행코스 : 오색,대청봉,중청,소청,희운각대피소,공룡능선(신선대,1275m봉,나한봉),마등령,금강문,금강굴,
비선대,소공원,주차장(버스승강장),B지구 상가
▶ 산행거리 : 이정표 거리 19.5km
▶ 산행시간 : 11시간 35분
▶ 교 통 편 : 다음매일산악회(28명) 우등버스로 가고 옴
▶ 구간별 시간
00 : 40 - 복정역 1번 출구
02 : 20 - 인제( ~ 03 : 00)
03 : 40 - 오색
03 : 55 - 산행시작
04 : 50 - 끝청 남릉 갈림길(OK쉼터)
06 : 58 - 대청봉(大靑峰, △1,708.1m)
07 : 43 - 중청대피소, 아침식사( ~ 08 : 01)
08 : 16 - 소청봉(1,581.0m)
08 : 48 - 희운각대피소
09 : 17 - 신선대(1,233.1m)
10 : 33 - 1,275m봉
11 : 56 - 마등령, 점심( ~ 12 : 10)
13 : 18 - 마등봉 동릉 갈림길
14 : 14 - 금강굴( ~ 14 : 22)
14 : 42 - 비선대
15 : 30 - 소공원, 주차장(버스승강장), 산행종료
15 : 40 - B지구 상가, 버스출발(18 : 00)
20 : 45 - 복정역
2. 대청봉에서 바라본 일출 직전
3. 대청봉에서 바라본 일출 직전, 앞 오른쪽 안부는 단목령
4, 대청봉에서 바라본 일출 직전, 앞은 중청봉, 달은 정월대보름 D-1일
5. 대청봉에서 바라본 일출 직전, 앞 안부는 단목령, 멀리 오른쪽은 방태산
6. 대청봉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
7. 동해 수평선 붉은 띠는 두른 지 오래되었다
8. 일출
▶ 대청봉(大靑峰, △1,708.1m)
설악산 신명이 지폈는지 불현듯 대청봉에 올라 일출이 보고 싶어졌다. 그간 적조했던 설악의 겨울이 그립기도 했
다. 일기예보 주간 날씨는 계속 쾌청한 날씨였다. 동절기 설악산 개방시간은 하절기에 비해 1시간이 늦은 04시다.
그래서 다음매일산악회 버스는 복정역을 12시 40분에 출발하는데 그 시각에 맞출 수 있는 전철과 버스는 이미
끊겼다. 택시 타고 복정역에 간다. 다음매일산악회 28인승 우등버스는 만석이지만 널찍하여 잠자기 썩 좋다.
잠깐 졸았는가 싶었는데 인제버스터미널이다. 한계리 설악휴게소는 찾는 손님이 적어 휴업중이라 인제 버스터미
널에서 잠시 휴식을 하면서 설악산 개방시간을 맞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제는 설악산을 가는 관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내제 홍태유(耐齋 洪泰猷, 1672∼1715)의 「遊雪嶽記」를 살핀 김장호는 그가 인제를 지나는
기록을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홍태유는 먼저 인제에서 30리를 올라 삼차령(三叉嶺)에 이르렀다고 했으니, 거기는 영마루 삼거리 지금의 원통
일시 분명하다. 거기서 해와 달이 한낮 한밤중이나 머리 위에 걸린다는 자오곡(子午谷)을 지나, 물줄기가 합수하
는 곡백담(谷百潭) 하류에 이르렀다고 했으니, 거기는 한계령 어구가 틀림없다. 더 나아가 평지인데도 수십 길
소나무 숲이 우거진 속에 8, 9채 농가가 보였다는 난계역(亂溪驛)은 지금의 남교리요”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 1903~1982)이 그의 「雪嶽行脚」에서 인제를 지나는 대목도 지금과는 전혀 딴판이다.
“險山石路를 낑낑대며 올라온 우리車가 新月嶺을 썩넘어서서부터야 한번 긴숨을 쉬며 내려가게되니이嶺은 楊口
麟蹄의 郡界요 여기서 麟蹄邑이 四十里라합니다. 길이 내려간다고 해서 決코 平坦한것은아닙니다마는 死力을다
하여 이峻嶺을 올라온것에 比하면참으로쉽습니다. ‘모든苦難을 격은 값이로다’하엿습니다. (…) 이疊疊山中에 자
리를 잡은 麟蹄란고을은 옛날 高句麗에서는 猪足縣, 新羅때에는 蹄縣, 高麗때에 今名을 얻은곧으로 우리全國에
서도 次席을 설어할深山僻郡입니다. (…) 人家는 물에잠긴듯 고요합니다. 이곳 主人들은오늘밤 아 淸秋月色을
손차지로 빌려주시고 다깊은잠이 들엇습니다.”
하기야 근년에만 해도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하고 인제가 궁벽한 산간벽지임을 한탄했다.
우리는 인제버스터미널 버스 안에서 40분을 늘어지게 졸다가 준령인 한계령을 훌쩍 넘어 오색에 당도한다. 다음
매일산악회 진행대장님은 그간 폭설로 출입이 통제되었던 공룡능선(희운각대피소~마등령~비선대)이 어제야
개방되었다면서, 그래도 혹시 모르니 통제금줄을 둘렀다면 부디 가지 마시고, 천불동계곡으로 하산하실 것을
주문한다.
하절기에 한계령에서는 설악산 개방시간 03시를 정확히 지키던데, 동절기 오색은 개방시간 04시를 5분이나 앞당
겨준다. 5분이 크다. 한겨울 추운 새벽에 5분은 매우 긴 시간이다. 여기 오는 버스 안에서 버벅이 3인조(덩달이,
동그라미, 칼바위)를 만났다. 그들은 대청봉을 올랐다가 천불동계곡으로 하산하겠다고 한다. 시간여유가 있으면
소공원에서 권금성을 들르거나 토왕성폭포를 보러가겠다고 한다. 아무리 공룡능선을 나랑 함께 가자고 해도
확고부동한 산행계획이라 바꿀 수 없다고 하니 반가운 만남도 잠시다.
9. 일출 직후 바라본 점봉산, 그 뒤는 한석산 연봉
10. 화채봉
11. 멀리는 향로봉, 그 앞은 칠절봉, 그 앞은 황철봉, 그 앞은 마등봉과 공룡능선
12. 왼쪽은 귀때기청봉, 맨 오른쪽 멀리는 안산
13. 가리봉
14. 중청대피소에서 바라본 점봉산
15. 맨 오른쪽 뒤는 북설악 신선봉과 상봉
오색에서 대청봉까지 이정표거리 5km는 대청봉을 오르는 가장 짧은 거리이지만 결코 만만하지 않다.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은 한계령에서 대청봉을 오르는 8.3km보다 덜하지 않다. 오늘 대청봉 일출시각은 07시 23분이다.
한계령에서 그 시각에 대기란 너무 늦고, 오색에서는 너무 이르다. 그렇지만 이른 편이 낫다. 쉬며 쉬며 가리라.
산행시작은 수대로 줄지어 간다. 헤드램프 행렬이 볼만하다. 새벽바람이 차디차다. 얼마간은 아이젠을 맬 필요가
없게 눈이나 빙판이 없다.
나뭇가지 끝 훑는 거센 바람소리에 지레 움츠러든다. 돌길 가파른 오르막이다. 날이 훤하다면 수시로 뒤돌아 점봉
산을 바라보고 그와 키 재기하며 오를 텐데 캄캄한 밤중이라 아무런 물상 모르고 그저 걷는다. 예전과는 다르게
등로 옆 곳곳에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이제나 저제나 만날까 한 끝청 남릉 갈림길을 오른다. 오색에서 1.7km 온
지점이다. 끝청 오르는 눈길은 조용하다. 등등했던 가파름은 당분간 설악폭포 위쪽 철교를 지날 때까지 수그러든다.
이제부터 눈길이거나 빙판이다. 아이젠 맨다. 잘 다져진 눈길이라 또각또각 아이젠 박히는 소리가 경쾌하다. 산허
리 길게 돈다. 더러 잠깐 가파르게 오르다 너덜 덮은 데크로드도 지난다. 대청봉까지 온 길보다 갈 길이 더 멀다고
한 이정표는 설악폭포 위 철교를 지나면 역전하였음을 알린다. 계류 또한 한밤중이다. 전에 못 보던 데크계단을
오른다. 그리고 설벽이 이어진다. 난간 붙든다. 이때는 바람도 잔다. 땀난다.
능선에 올라선다. 줄 이은 헤드램프도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곧추선 긴 데크계단을 연속해서 오른다.
찬바람을 하도 맞다보니 변덕스런 생각이 든다. 대청일출이 별거더냐 그냥 가자 하다가 하늘 우러르면 나뭇가지
사이로 초롱초롱한 별들이 보이고, 끝청 위 둥근 달이 등로 밝히니 언제 보고 또 보랴 하고 걷는다. 일출시각에
맞추려고 갖은 해찰을 다 부린다. 바람벽 바위에 기댔다가 쉼터마다 들른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한기가 엄습하여
다시 걷기를 반복한다.
동해 수평선은 아까부터 붉은 띠를 둘렀다. 점점 진해진다. 일출을 준비하는 중이다. 괜히 마음이 급해진다. 일출
시각을 뻔히 알면서도 여러 등산객들이 서둘러 앞 다투어 가니 덩달아 내 발걸음도 조바심 낸다. 정상 0.3km 남겨
둔 안내판이 주의를 환기한다. 정상에는 늘 찬바람이 거세게 부니 방한 옷 단속을 철저히 하고 오르시라는 내용이
다. 그랬다. 키 작은 나무 지나고 벌판 지나고 너덜 바위 위에 서니 몸 가누기가 힘들 정도로 바람이 불어댄다.
일출은 아직 멀었으나 중무장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올라 일출을 기다리고 있다. 일출을 기다리는 것은 우리뿐이
아니다. 중청 너머 서편 멀리 열나흘 둥근달이 그렇고, 점봉산, 한석산, 매봉산, 대바위산, 방태산 등 뭇 산들도
일출을 기다린다. 날이 쾌청하여 해가 수평선 위로 얼굴을 내밀자마자 눈부시다. 이 순간에는 극성스럽던 바람은
물론 삼라만상이 숨죽였다. 갑자기 사방천지가 부산해진다. 내 여태 대청봉에서의 조망은 단조롭다고만 여겼는
데 나의 좁은 안목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16. 멀리 가운데는 방태산
17. 멀리 오른쪽은 방태산
18. 멀리는 향로봉, 그 앞은 칠절봉, 그 앞은 황철봉, 그 앞은 마등봉과 공룡능선
19. 가리봉과 귀떄기청봉
20. 무너미고개 전망대에서 바라본 중청봉과 소청봉
21. 신선대에서 바라본 귀때기청봉
22. 신선대에서 바라본 범봉
23. 왼쪽부터 대청봉, 중청봉, 소청봉
▶ 공룡능선
이보다 더 나은 조망처가 있던가? 만학천봉은 물론 침봉의 제국, 유장한 산릉, 섬세무비한 만물상 등등을 한꺼번
에 이곳 선 자리에 이울러 본다. 어지간히 어질해진 눈으로 대청봉을 내린다. 대청봉을 오른 사람들 모두 득의의
표정이다. 첫 햇살 받는 설산들 또한 전에 보지 못한 가경이다. 대청봉을 내리는 걸음걸음이 경점이다. 중청대피
소가 의외로 한산하다. 취사장으로 내려간다. 아이젠을 벗고 출입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이 없다. 공단에
서도 아이젠을 벗고 매는 게 번거로운 줄 아는 모양이다.
취사장에서 라디에이터 껴안고 아침요기 한다. 찹쌀꽈배기다. 이때 목 축이려고 보온물통에 담아온 커피는 냉커
피로 변했다. 훈훈한 몸을 만들어 대피소를 나서고, 중청봉에 올라 키 작은 나무들 위로 머리 내밀어 또 산 첩첩
감상한다. 소청봉 가는 길도 전후좌우로 조망이 아주 좋다. 소청봉 정상 헬기장은 하얀 눈밭이다. 왼쪽 소청대피
소 가는 눈길도 잘 닦였다. 나는 희운각대피소를 향한다. 거기까지 가파른 내리막 1.3km 절반은 데크계단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울퉁불퉁한 돌길을 눈으로 미끈하게 포장하였다. 걷기 좋다. 아이젠을 매지 않았더라면 봅슬레이
로 더욱 신날 뻔했다.
희운각대피소는 들르지 않는다. 오색 오는 버스 안에서 산악회 진행대장님은 안내하기를 공룡능선을 탈 사람은
희운각대피소를 하절기에는 09시까지, 동절기에는 08시까지 통과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아무래도 이 시
간을 맞추기란 무리다. 오색에서 줄달음한다면야 못 지킬 바도 아니지만, 대청봉 일출시각 07시 30분을 감안하면
거기서 30분에 희운각대피소를 오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내 희운각대피소 통과시간이 08시를 훨씬 넘긴 08시
48분이다.
그래도 무너미고개 가기 전에 데크전망대는 들러 신선대 만물상과 천불동계곡을 둘러본다. 공룡능선 눈길은
확실히 뚫렸다. 여러 발자국이 났다. 나도 간다. 마등령 5.1km. 세 차례 준봉을 넘어야 한다. 신선대, 1,275m봉,
나한봉이 그들이다. 그렇지만 그 사이에도 극복해야 할 이름 없는 숱한 준령과 준봉들이 있다. 신선대만 해도
산허리 돌아 골짜기로 내렸다가 곧추선 설벽과 대슬랩을 두 차례 올라야 한다. 주눅 들기 딱 알맞다.
신선대도 찬바람이 거세게 분다. 신선대는 공룡능선 최고의 경점이다. 대청봉과 소청봉의 푸짐하고 넉넉한 품은
한편 푸근한 느낌이 들고, 1,275m봉을 위시한 공룡능선의 침봉들은 이를 앙다물어 긴장케 한다. 귀때기청봉이
대가족이다. 저토록 숱한 봉우리들을 거느린 줄은 예전에는 몰랐다.
새삼 공룡능선이 이제야 출입통제가 풀렸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곳곳 눈 깊은 설벽을 발자국계단으로 오르내린
다. 나는 출입통제가 풀리지 않았더라도 몰래 가려고 했다. 그게 얼마나 무모한 일이었을지 깨닫는다.
지난 가을에 가다 서다를 반복했던 등로는 텅텅 비었다. 오늘 아침 대청봉의 그 많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
까? 나 혼자 간다. 내가 선두일까, 아니면 후미일까? 도무지 모르겠다. 1,275m봉은 공룡능선의 하이라이트다.
그 주변에 몰려 있는 침봉군도 그렇고 거기를 오르고 내리는 가파른 눈길도 그렇다. 이 깊은 눈길에 선답의 발자
국이 없다면 나 혼자 과연 골로 가지 않고 제대로 갈 수 있을지 매우 의문이다.
1,275m봉을 넘으면 공룡능선 절반을 지난다. 나한봉보다는 그 전위봉을 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아이젠도 힘들
어 하는 설벽을 오르고 내린다. 자칫 스텝이 흐트러져 선답의 발자국에 맞추지 못하면 눈 속 허벅지까지 빠진다.
그 발을 빼내려고 하면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다. 등로 약간 벗어난 경점은 다 들른다. 바람에 자세가 무너질 수
있으므로 4족 보행하여 오른 다음 납작 엎드려 온 길 갈 길 살핀다. 이전에 보지 못한 눈부신 설경이다. 호사를
누린다.
나한봉을 넘고 너덜 지나 부드러운 눈길 내리면 마등령이다.
남난희는 그의 『하얀 능선에 서면 - 태백산맥 2천리 단독 종주기』(1990)에서 공룡능선 통과를 다음과 같이 얘기
하고 있다.
“공룡릉에서 마등령이 가까워지면서 설악이 가장 잘 보였다. 설악의 눈 덮인 산과 계곡, 속초시와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운치 있는 등반을 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힘든 공룡능선 등반이었다. 나한봉을 지나며 그 좋던 날
씨가 심술을 부렸다. 서서히 가스가 몰려와 설악의 모든 봉우리와 모든 능선과 계곡을 숨겨버렸다. 5미터 전방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역시 날씨는 봄인데 산은 완강히 겨울이기를 고집하고 있었다. 이 산에는 영원히 봄이
오지 않을 듯 눈은 견고했다. 봄을 잊어버렸는지 봄을 거부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 눈이 키를 넘는 곳에서는
1미터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30여 미터를 되돌아오는 데 30분이나 걸렸다. 마등령에 다시 도착해서 기진했
다. 한 발걸음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
나도 마등령에서 기진한다. 설원인 마등령은 찬바람만 횡행할 뿐 아무도 없다. 안내판을 바람막이 삼아 점심 도시
락 편다. 밥을 입맛이 아니라 먹어야 갈 수 있다는 절박감에서 먹는다. 반찬으로 싸온 알타리 무김치가 얼어 서걱
거린다. 나는 이러한데 버벅이 3인조는 이 시각 어떠했을까? 그들은 소청산장(여기는 대피소보다는 산장이라
해야 더 어울린다)에서 버너에 부대찌개 끓여 점심을 즐겼다고 한다. 물론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공룡능선의
가경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나는 소청산장의 테라스가 스위스 클라이네 샤이덱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융프라우 오르는 길목
에 있는 클라이네 샤이덱에서는 아이거 북벽을 근접하여 가장 잘 볼 수 있다. 대청봉 오르는 길목에 있는 소청산
장은 공룡능선을 근접하여 가장 잘 볼 수 있다.
24. 울산바위
25. 공룡능선 1,275m봉과 그 주변
26. 범봉
27. 가운데가 1,275m봉
28. 공룡능선 1,275m봉 가는 길에서
29. 공룡능선 1,275m봉 가는 길에서 뒤돌아 봄
30. 맨 오른쪽이 공룡능선 나한봉
31. 오른쪽은 공룡능선 나한봉 전위봉
▶ 금강굴, 비선대, 설악동 소공원
마등령에서 오세암 가는 길도 잘 뚫렸다. 마등령에서 비선대 가는 길도 눈이 깊다. 마등봉을 완만한 긴 한 피치 오
르면 쉼터가 나오고 가파른 데크계단 내리막이 이어진다. 데크계단 내리기가 까다롭다. 단단하게 언 눈이 계단에
뭉쳐 있어 한 계단 한 계단 내리기가 무척 조심스럽다. 데크계단 끝나고 금강문 지날 즈음에야 눈에 덮인 공룡능
선, 그 1,275m봉과 범봉을 바라본다. 이정표는 0.5km 간격으로 온 길과 갈 길을 알려준다.
마등봉 남쪽 사면을 길게 돌아 비선대 가는 길에는 등로 약간 벗어난 너럭바위 전망대가 세 군데 있다. 누군가 먼
저 들렀다. 나도 배낭 벗어놓고 살금살금 들른다. 설사면을 오르고 내리기 수차례 하여 마등봉 동릉 갈림길이다.
이제부터는 줄곧 내리막이다. 이곳은 웬만해서는 눈이 녹기 마련인데 오늘은 여전히 깊다. 돌길을 포장한 셈이니
걷기는 한결 수월하다. 장군봉 아래 긴 너덜 내리막은 올 때마다 무릎이 화끈거린다.
오늘 산행 마감시간은 18시라고 했다. 이대로 내린다면 마감시간이 3시간 넘게 남는다. 오랜만에 금강굴을 들른
다. 등로에서 0.2km 벗어나 있다. 절벽에 잔도를 설치하였다. 잔도를 오르다 밑을 내려다보면 아득한 절벽이라
오금이 저린다. 0.2km가 엄청 멀게 느껴진다. 금강굴 안은 예나 지금이나 비좁다. 스님 한 분이 굴 안쪽 법당에
들어가 예불 중이다. 내 금강굴을 35년 만에 온다. 그때는 (지금은 돌아가신) 나이 70이 넘으신 내 장모님과 함께
왔다.
그때 장모님은 한복 차림에 흰 고무신을 신고 왔다. 그때 금강굴에 먼저 오른 여러 젊은이들이 대단하시다며 기립
하여 박수로 맞이하였다. 그때 금강굴에서 바라보는 비경이 오늘과 다르지 않았을 텐데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공룡능선과 천화대, 화채능선, 칠형제봉, 바로 옆의 유선대 등이 아까와는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특히 유선대와
그 릿지를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다. 주변 경치가 이토록 화려할진대 쉽사리 도가 닦일까 의문이 든다.
계단 내리고 돌길 내리고 눈길 지쳐 비선대다. 비선대에서 소공원 가는 길 3km도 눈길이다. 이곳에는 폭설이 내
렸었다. 소공원 가는 길 주변의 나무들은 마치 태풍을 맞은 듯 쓰러졌고, 부러진 나뭇가지들은 사방에 널려 있다.
설악동 버스승강장이 의외로 한산하다. 1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는 속초 가는 버스가 금방 온다. B지구 상가 승강
장에 내려 산악회 지정음식점에 들어갔다. 여성 일행 한 분과 합석하여 감자전과 황태국밥을 주문했다. 이곳 신사
임당 탁주도 맛이 좋다.
버벅이 3인조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칼바위 님에게 전화했다. 방금 척산온천에서 온천욕 마치고 택시 타고 이곳
으로 온다고 한다. 얼마 후 만난 그들의 얼굴은 산행한 것 같지 않고 해끔하다. 탁주 한 병 더 달라고 하여, 서로의
술잔을 맞대고 무사산행을 자축한다.
32. 공룡능선 1,275m봉
33. 공룡능선 나한봉 전위봉
34. 멀리 왼쪽은 화채봉, 앞 오른쪽은 1,275m봉, 그 왼쪽은 범봉
35. 나한봉에서 바라본 마등봉과 세존봉, 저렇게 보여도 상당히 눈이 깊다
36. (금강굴에서 바라본) 멀리 오른쪽은 화채봉, 가운데는 칠성봉(?)
37. 금강굴에서 바라본 1,275m봉과 천화대
38. 금강굴에서 바라본 천화대
39. (금강굴에서 바라본) 앞 오른쪽은 유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