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링크를 보면 사진들도 있는데요. 군산 전주 김제 완주 등 돌며 선교 유산들을 탐방하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주기독교근대역사관 인근 언덕에는 선교사 묘역도 조성되어 있습니다. 혹시 인근에 여행 갈 일이 있으면 한번 방문하고 선교적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1903년 2월 미국 예수교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 전킨 (Junckin, W. M. / 한국명 전위렴) 이 군산영명학교(群山永明學校)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립하였다. 당초의 설립취지는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아울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전킨 선교사는 영명학교 뿐만 아니라 군산멜본딘여학교도 설립하였다. 1919년 3월 5일 한강 이남 최초로 전 교사, 학생들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1940년에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하였다. 해방 이후 195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군산노회에서 군산영명중, 고등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았고 이후 1975년 세대제지(주)[3] 회장이었던 고판남이 영명중학교와 영명고등학교를 인수 한 후 각각 현재 교명인 군산제일중학교와 군산제일고등학교로 변경했고 그 이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1908년 1월 2일 당시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던 윌리엄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한국명 전위렴, 1865~1908) 선교사가 갑작스럽게 별세했다. 호남지역의 초기 선교사로서 군산과 전주지방에서 지역 선교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한 대표적인 인물이었지만 갑작스럽게 별세한 것이다.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전킨 선교사의 묘비 바로 앞에는 시드니, 프랜시스, 조지의 묘비가 있다. 전킨 선교사는 군산 선교의 개척자로 1904년부터 4년간 전주서문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으며, 군산 영명학교를 세웠다. 부인 메리 레이번은 기전여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다. 기전여학교의 ‘기전’은 ‘전킨 선교사를 기념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전킨 선교사와 서문교회의 종각 설립 이야기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자식을 3명이나 잃고 본인도 젊은 나이에 폐렴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버렸군요. 전북 지역을 조선의 갈릴리로 불렀을 만큼 선교사들의 활동이 먹혀들었고 효과적이었나 봅니다. 미국에서 제작한 종이 남아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전킨 선교사, 레이놀즈, 알렉산더 피터스 모두 다 서로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위봉교회 역사의 시작에는 마로덕(馬路德)이라는 재미난 이름을 가진 서양인 선교사가 존재합니다. 위봉교회를 비롯, 여러 유서 깊은 교회의 연배 있는 성도들에게는 ‘루터 올리버 맥커친’이라는 본명보다 한국식으로 지은 세 글자의 이름이 훨씬 친숙한 인물입니다. 위봉교회 설립자인 마로덕 선교사. 그를 추모하며 어느 시인이 써내려간 한시에는 이 이름의 절묘한 풀이가 담겨있습니다.
‘어찌하여 이름이 마로덕이던가(何如作名馬路德), 올라탄 말 재촉하며 포교하러 다닌 덕이리라(促馬行路布敎德)’
전북 동남부의 산악지대를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해 무려 80여 개의 교회를 개척한 그의 위대한 자취는 세상을 떠난 지 60여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전설로 남아있습니다.
구암교회의 설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 1893년에 설립되었다는 의견이다. 1893년 1월 선교사공의회에서 호남지방을 선교지역으로 배당받은 전킨(William M. Junkin, 전위렴)과 드루(Adamer D. Drew, 위대모) 선교사는 공의회의 유일한 한국인 장인택(張仁澤)을 조사로 하여 호남선교를 시작하였다. 이 장인택 조사가 이후 구암교회의 회계집사가 되었기 때문에 그때를 교회 설립연도로 하는 주장이 있다. 둘째, 1896년을 주장하는 의견이 있다. 이것은 1896년 4월 6일 전킨 선교사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전킨과 드루는 1896년 4월 가족과 함께 군산으로 이사해 군산 스테이션을 설립하였다. 당시 50불을 주고 구입한 두 선교사의 집 가운데 전킨의 집에서는 복음선교가, 드루의 사랑방의 진료소에서는 의료선교가 시작되었다. 1896년 4월 6일 전킨의 집에서 드린 주일예배에서 장인택, 김봉래(金蓬來), 송영도(宋永道) 등 세 사람이 문답을 거쳐 원입교인이 되었는데, 이 시점을 구암교회의 시작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셋째, 1899년이 교회 설립 시기라는 주장이 있다. 군산항이 개항되면서 일본인들이 몰려들자 전킨과 드루는 그들의 선교를 돕는 배가 정박하기 좋은 궁말의 언덕을 사서 집을 신축하게 되었고, 남장로교 선교부의 결정에 의해 군산 스테이션이 1899년 12월 21일 임피 궁말로 옮겨 첫 예배를 전킨의 집에서 드렸다. 이때 전킨의 집에서 예배드렸던 교인들이 흩어지거나 궁말교회로 옮겨오면서 궁말교회가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1899년에 구암교회가 시작되었다는 의견이다.
전북 지역이 기독교 초기 역사의 보고로써 꽤나 가치가 높고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 같습니다. 유서 깊은 교회들이 이런 역사 자료 보존 활동들을 많이 해나가니 좋네요. 여행 기회가 되면 다 다녀보고 싶네요. 전남 지역에도 산골 마을들에 저런 선교사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교회들이 꽤 있습니다.
첫댓글 전위렴 선교사
1903년 2월 미국 예수교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 전킨 (Junckin, W. M. / 한국명 전위렴) 이 군산영명학교(群山永明學校)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립하였다. 당초의 설립취지는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아울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전킨 선교사는 영명학교 뿐만 아니라 군산멜본딘여학교도 설립하였다. 1919년 3월 5일 한강 이남 최초로 전 교사, 학생들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1940년에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하였다. 해방 이후 195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군산노회에서 군산영명중, 고등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았고 이후 1975년 세대제지(주)[3] 회장이었던 고판남이 영명중학교와 영명고등학교를 인수 한 후 각각 현재 교명인 군산제일중학교와 군산제일고등학교로 변경했고 그 이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https://namu.wiki/w/%EA%B5%B0%EC%82%B0%EC%A0%9C%EC%9D%BC%EA%B3%A0%EB%93%B1%ED%95%99%EA%B5%90
전킨이 전위렴 선교사이군요. 존경할 만한 훌륭한 선교사 같습니다.
1908년 1월 2일 당시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던 윌리엄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한국명 전위렴, 1865~1908) 선교사가 갑작스럽게 별세했다.
호남지역의 초기 선교사로서 군산과 전주지방에서 지역 선교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한 대표적인 인물이었지만 갑작스럽게 별세한 것이다.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전킨 선교사의 묘비 바로 앞에는 시드니, 프랜시스, 조지의 묘비가 있다. 전킨 선교사는 군산 선교의 개척자로 1904년부터 4년간 전주서문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으며, 군산 영명학교를 세웠다. 부인 메리 레이번은 기전여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다. 기전여학교의 ‘기전’은 ‘전킨 선교사를 기념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https://culturelive.tistory.com/15954913
전킨 선교사와 서문교회의 종각 설립 이야기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자식을 3명이나 잃고 본인도 젊은 나이에 폐렴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버렸군요. 전북 지역을 조선의 갈릴리로 불렀을 만큼 선교사들의 활동이 먹혀들었고 효과적이었나 봅니다.
미국에서 제작한 종이 남아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전킨 선교사, 레이놀즈, 알렉산더 피터스 모두 다 서로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전주 서문교회
1893년 미국 남장로 교회 선교회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선교사의 파송을 받은 정해원(鄭海元)이 설립한 호남 지역 최초의 교회이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75985
마로덕 선교사
위봉교회 역사의 시작에는 마로덕(馬路德)이라는 재미난 이름을 가진 서양인 선교사가 존재합니다.
위봉교회를 비롯, 여러 유서 깊은 교회의 연배 있는 성도들에게는 ‘루터 올리버 맥커친’이라는 본명보다 한국식으로 지은 세 글자의 이름이 훨씬 친숙한 인물입니다.
위봉교회 설립자인 마로덕 선교사.
그를 추모하며 어느 시인이 써내려간 한시에는 이 이름의 절묘한 풀이가 담겨있습니다.
‘어찌하여 이름이 마로덕이던가(何如作名馬路德), 올라탄 말 재촉하며 포교하러 다닌 덕이리라(促馬行路布敎德)’
전북 동남부의 산악지대를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해 무려 80여 개의 교회를 개척한 그의 위대한 자취는 세상을 떠난 지 60여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전설로 남아있습니다.
https://culturelive.tistory.com/15953840
네, 재미있고 의미 있는 마로덕 선교사의 한국 이름이네요.
마로덕 선교사와 위봉교회 이야기도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초창기엔 선교사들의 주 교통 수단이 마차나 말이었는데 산악 지대이니 말을 타고 다니며 사역의 결실을 맺느라 고생과 보람이 컸을 것 같습니다.
초창기 호남 선교 기지인 구암교회
구암교회의 설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 1893년에 설립되었다는 의견이다. 1893년 1월 선교사공의회에서 호남지방을 선교지역으로 배당받은 전킨(William M. Junkin, 전위렴)과 드루(Adamer D. Drew, 위대모) 선교사는 공의회의 유일한 한국인 장인택(張仁澤)을 조사로 하여 호남선교를 시작하였다. 이 장인택 조사가 이후 구암교회의 회계집사가 되었기 때문에 그때를 교회 설립연도로 하는 주장이 있다. 둘째, 1896년을 주장하는 의견이 있다. 이것은 1896년 4월 6일 전킨 선교사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전킨과 드루는 1896년 4월 가족과 함께 군산으로 이사해 군산 스테이션을 설립하였다. 당시 50불을 주고 구입한 두 선교사의 집 가운데 전킨의 집에서는 복음선교가, 드루의 사랑방의 진료소에서는 의료선교가 시작되었다. 1896년 4월 6일 전킨의 집에서 드린 주일예배에서 장인택, 김봉래(金蓬來), 송영도(宋永道) 등 세 사람이 문답을 거쳐 원입교인이 되었는데, 이 시점을 구암교회의 시작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셋째, 1899년이 교회 설립 시기라는 주장이 있다. 군산항이 개항되면서 일본인들이 몰려들자 전킨과 드루는 그들의 선교를 돕는 배가 정박하기 좋은 궁말의 언덕을 사서 집을 신축하게 되었고, 남장로교 선교부의 결정에 의해 군산 스테이션이 1899년 12월 21일 임피 궁말로 옮겨 첫 예배를 전킨의 집에서 드렸다. 이때 전킨의 집에서 예배드렸던 교인들이 흩어지거나 궁말교회로 옮겨오면서 궁말교회가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1899년에 구암교회가 시작되었다는 의견이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76691
전북 지역이 기독교 초기 역사의 보고로써 꽤나 가치가 높고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 같습니다. 유서 깊은 교회들이 이런 역사 자료 보존 활동들을 많이 해나가니 좋네요. 여행 기회가 되면 다 다녀보고 싶네요. 전남 지역에도 산골 마을들에 저런 선교사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교회들이 꽤 있습니다.
네, 공감합니다. 특히 전주 서문교회는 한국교회사에 사료를 많이 제공하는 교회입니다.
평양에서 부산 경남을 잇는 선과 원산에서 호남을 잇는 선을 이야기하는 교회사 연구자들이 많은데요. 호남의 교회들은 신학적 경향성은 덜 보수적이지만 사회참여와 역사적 보존에는 더 우세하고 합리적이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좋은 포스팅을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