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하피첩 이야기
얼마 전 서울옥션에서 특별한 경매가 이루어졌다. 예금보험공사가 파산한 부산저축은행 등으로부터 받은 고서적 18점에 대한 경매였다. 정약용의 필적 하피첩이 최고가인 7억5천만 원으로 국립민속박물관에 낙찰되었다.
보물 1683-2호인 하피첩霞巾皮帖은 다산 정약용이 1810년 귀양지인 전남 강진에서 부인이 보내준 치맛감에 학연, 학유 두 아들을 위해 쓴 편지를 모은 것이다. 본래 네 첩이었으나 하나는 사라지고 세 첩만이 전한다. 하피첩은 김민영 전 부산저축은행 개인 컬렉션에 나온 문화재로, 추정 가격은 3억5천만 원에서 5억천만 원이었고, 2억5천만 원에서 경매가 시작되었다.
경기도 양평에 있던 정약용의 아내 홍혜완이 바래고 해진 치맛감 여러 폭을 귀양지에 부쳐오자 다산은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될 구절을 직접 짓고 썼다. 그 치마는 홍 씨가 시집올 때 입고 온 붉은 치마였는데, 오래되고 빛이 바래어 노을빛 치마, 하피가 되었다. 다산은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에 유배된 몸이었다.
병든 아내 치마를 보내 / 천 리 먼 길 애틋한 마음 부쳤네
오랜 세월 붉은빛이 바래니 / 만년에 서글픔 가늘 수 없네
마름질로 작은 서첩을 이루어 / 자식들 일깨우는 글을 적는다
부디 부모 마음을 잘 헤아려 / 종신토록 가슴 깊이 새기려무나
집안의 경제적 운영에 대한 조언과 인간답게 사는 훈계의 내용을 담아 좌우명으로 삼기를 바랐다. 서첩은 정약용의 전형적인 행초行草서풍을 잘 보여주며, 세 번째 첩에 실린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는 다른 서첩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다.
얼마 뒤 남은 치맛자락을 다시 붙여 딸의 결혼을 축하하는 글과 그림을 그려 족자로 만들어 보냈다. 아버지와 헤어질 때 딸은 여덟 살이었다. 마음속으로만 그리던 딸이 21살이 되어 부모의 품을 떠나 시집을 간다고 했다. 그 화조도花鳥圖에는 ‘꽃이 풍성하니 열매도 많이 열릴 거야’라고 썼다.
이 하피첩은 6․25 전쟁 통에 사라져 기록만 전해왔다. 다산의 종손 정향진이 수원역에서 열차에 오르다 분실한 것이다. 뒤늦게 하피첩을 잃어버린 것을 깨달은 정 씨는 실신할 정도로 애통했다고 한다.
2004년 수원 어느 공사장에 파지를 수집하러 온 노인이 있었다. 그가 가져온 수레에 든 고서를 건물주가 파지 대신 넘겨받았는데, 그 속에 하피첩이 들어있었다. 건물주는 2년 뒤 TV 고미술품 감정 프로그램에 그 물건을 내놓았고, 감정 결과 정약용의 하피첩임이 밝혀졌다. 감정가는 1억 원이었다. 당시 감정위원이었던 고미술 전문가 김영복은 책을 보는 순간 충격을 받아 ‘덜덜 떨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국보와 보물이 개인 소장품인 경우 소유자 변경 신고만 제대로 하면 사고팔 수 있다. 단 국외에 반출해서는 안 된다고 문화재보호법에 명시되어 있다.
고미술계에서는 영영 사라질 뻔한 문화재가 기적같이 구출된 이야기들이 전한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겸재謙齋 화첩도 그렇다. 1934년 한 골동품 거간꾼이 용인의 부잣집 별장에 갔다. 사랑방 아궁이 앞에 쌓인 종이뭉치 속에서, 비단으로 꾸민 책자를 발견하고 아찔했다. 화가 정선이 금강산을 여행하고 그린 작품을 모은 화첩이었다. 어차피 불쏘시개를 할 것이니 자기에게 팔라고 청하여 골동품상은 쌀 한 가마니 값을 주고 샀다. 그 뒤 거간꾼은 몇십 배의 이문을 남기고 문화재 수장가 전형필에게 팔았다.
다산 선생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한 게 무슨 죄가 될까? 자신을 믿어준 선대왕 정조를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아내 걱정, 자식 걱정으로 무수한 밤을 뜬 눈으로 새웠을 것이다.
다산은 처음 경상도 영일 장기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긴 뒤 동문 밖 주막집 노파의 인정으로 거처할 방 한 칸을 얻었다. 동네 아이들을 모아 서당을 열고 호구를 이었으며, 차츰 문인, 유학자들과 교류했다. 18년의 긴 유배생활을 다산은 헛되이 보내지 않고, 503권 182책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중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는 대표적인 저서다.
다산은 아내의 치마폭을 보며 아내의 사랑에 눈물지었다. 그에게도 꽃다운 신혼의 시절이 있었고, 예쁜 분홍치마를 입은 신부가 떠올랐다. 그 치마폭을 오래 간직하고자 서첩을 만들었고, 자손에게 교훈이 될 글을 지었다. 가을밤이 짧게 새었다. 그것이 후손에게 전해지다 혼란한 시대, 이리저리 굴러다녔으리. 아내 홍 씨는 어떤 마음으로 치마를 보냈을까? 영원한 이별을 고한 것이라는 설과 자신을 잊지 말라는 정표로 해석하기도 한다.
최근 국문학자 임형택이 연작시 <남당사南塘詞> 한 편을 발굴했다. 작자는 강진의 문인으로 짐작되는데, 그가 다산의 강진 여인이었던 ‘홍임이 모’가 되어 시를 썼다.
천고에 빛나는 문장 세상에 특출한 재주
만금을 주고도 한번 만나기 어렵거니
갈가마귀 봉황과 어울려 짝이 될 수 있으랴
미천한 몸 복이 넘쳐 재앙이 될 줄 알았지요.
홍임이 모는 22세에 청상이 된 표 서방의 딸로, 유배 시절 정약용의 소실이었다. 다산초당에 살았던 10여 년 동안 그녀는 다산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18년간의 유배가 풀려 경기도 마현으로 돌아갈 때 홍임이 모는 딸과 함께 낭군을 따라나섰다. 그러나 그녀는 본댁 홍 씨에게 내침을 당한 뒤 강진 다산초당으로 내려가 홀로 딸을 키우며 살았다고 전한다. 매년 새로 돋는 찻잎으로 정성스레 차를 만들어 마현으로 보내곤 했다. 다산은 시를 한 수 지었다.
기러기 끊기고 잉어 잠긴 천 리 밖에
매년 오는 소식 한 봉지 차로구나
내게 교훈이 될 좋은 글이 생각나면 아내의 옛 치마폭에 적어 길이 후손에게 남겨줄 수 있을까? 연구하고 도전해 볼 일이다.
(2015. 10. 29.)
* 신유사옥 : 1801년(순조 2년) 1월 26일에 일어난 천주교도 박해 옥사로 이승훈, 정약종 등 신자 100여 명이 처형되고, 권철신, 이가환 등이 옥사했으며, 정약전, 정약용 등 400여 명이 유배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