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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평행장이 심유경과 더불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서 적괴(賊魁)와 면대하여 의론하고 두 명 나라 사신은 그대로 부산에 머물면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심유경이 그의 말 백 필을 골라 데리고 가고 남은 2백 필은 호남으로 보내어 각 고을에 나누어 먹이게 하였는데, 그의 부하 우파총(牛把總)이 관리하였다.
○ 천장 호 도사(胡都司)가 서울로부터 남원에 와서 머물렀다.
○ 경상 좌우도를 합하여 한 감사를 두는데, 나주 목사 이용순(李用諄)을 감사로 삼았고 이복남을 나주 목사로 삼았다.
2월 16일 전라병사 박진(朴晉)이 순천ㆍ남원으로부터 순시하여 완산(完山)으로 향하였다.
○ 전라도 선비와 백성에게 내리는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이르노라.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니 내가 비록 어두우나 나라의 의지하는 바이니, 백성을 궁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진실로 알고 있다. 하물며 지금 하늘이 화(禍)를 내리시길 그치지 않은 지 5년에 나라가 거의 망하고 겨우 실낱같이 부지된다. 우리 조종(祖宗) 2백 년간 길러 놓은 백성들이 칼날에 죽고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살아 남은 이가 얼마 없어 국토는 폐허가 되고 불 때는 연기가 끊어져서 천리가 쓸쓸하고 갈대와 풀이 하늘을 가리웠다. 이러한 때에 안정된 삶을 누리게 할 방법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침노하고 괴롭혀서 그들의 힘을 다 쓰게 하고 재물을 없앤다면 어질지 못함이 심한 것이니, 내가 비록 덕이 엷으나 또한 이와 같이는 차마 하지 못한다. 그러나 전란이 일어난 이후 국가에 일이 많아 늘 들어가는 비용이 매우 많아서 수비하고 운반하는 노역과 양식을 싸 보내는 비용이 정당한 부역과 세납 외에 내는 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는데, 아침에 받고 저녁에 내라 하고 인구의 수를 따라 긁어 모으니, 힘은 다 되지 않을 수가 없고 재물은 마르지 않을 수가 없어 나의 백성들로 하여금 곤궁해지고 떠돌아다니게 하여 장정은 혹 길가 나무에 목을 매고 늙고 병약한 이는 모두 구렁과 개천에 쓰러지니, 나의 몸에 화가 내린 것을 어찌 나의 백성이 당하게 되었는고. 죄지은 나의 허물이라 마음이 불타는 듯하다. 아! 임금과 백성의 관계는 아비와 자식과의 관계와 같다. 백성도 또한 마음이 있으니 누가 임금을 사랑해야 할 것과 나라를 걱정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하리요. 무릇 지금 백성에게 재물을 받아내고 힘을 부리는 것은 모두 어쩔 수 없는 국가의 계책으로 나온 것이요, 군사를 훈련하고 성을 쌓고 둔전(屯田)의 농사를 짓게 하는 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오늘날에 나라를 보존하고 외적을 방어하는 데에 늦출 수 없는 급선무이다. 비록 그 일을 맡은 사람이 시행하기를 적절히 하지 못하여 혹시 백성을 거듭 괴롭히는 일이 있더라도 그 근원을 생각하면 내가 백성을 못살게 굴려는 것이 아니다. 편안케 할 도리로 백성을 부리면 비록 괴로워도 원망하지 않는 것이니, 너희 백성들은 아마도 나를 이해함이 있을 것이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으로 하여금 날로 곤궁하게 만든 것은 내가 생각하여 보아도 진실로 백성에게 변명할 도리가 없도다. 지금 봄날이 따스해져 응달의 얼음이 점점 풀리고 화한 바람 불고 단비[甘雨] 적시니, 말랐던 것이 소생하고 묻혔던 벌레가 나와서 온갖 것들이 모두 새 생명을 기뻐하는 뜻이 있는데, 슬프다! 우리 백성들만 유독 이와 같지 못하여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산 자는 스스로 살 길이 없어, 길에는 굶어 죽은 송장이 서로 잇달았고, 들에는 미처 수습하지 못한 해골이 뒹구니, 무슨 죄로 이 지경에 이르렀는고! 말이 이에 미치니, 뼛속까지 절통하다. 한밤중에도 자지 못하고 밥을 대해도 먹을 마음이 들지 않는다. 무릇 백성을 도울 수 있는 일은 생각지 아니함이 없으나 진휼(賑恤)할 것을 의론하자니 창고는 비었으며, 부역과 세납을 면제하자니 적을 방어하기가 정히 급하다. 그리하여 나의 백성 사랑하는 마음을 여기에 이르러 베풀어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백성은 혹시 내 허물을 용서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무슨 면목이 있겠는가. 듣자하니 민간에 계사년의 포흠(逋欠)이 아직도 많은데 오랫동안을 궁한 백성에게 살을 깎아내듯 한다 하니, 지금 특히 일체 면제해 주라. 오래 미결로 있는 죄수들은 또한 급히 심리하여 석방하도록 하여 원통함을 부르짖거나 옥중에서 고통을 겪어서 천지가 만물을 살리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상함이 없게 하노라. 무릇 나쁜 정치와 폐단 있는 법이 백성에게 해가 되는데도 백성이 스스로 진달하지 못하는 것은 또한 따로 방백(方伯)과 어사(御使)에게 타일러서 마음을 다하여 묻고 캐내게 하여 보고되는 대로 제거하도록 하노니, 만번 죽다 살아난 우리의 백성들은 한 푼의 힘이라도 쉬게 되어 나라를 평안케 하는 근본이 되어 나의 덕을 저버림이 없기 바란다. 아! 작은 은혜라 두루 미치지 못하나니 감히 너희들에게 깊이 들어가겠는가마는 지성이면 믿음을 사는 것이니, 그래도 나의 말에 감동됨이 있기를 바라노라.
○ 권율을 도원수로 임명하니, 권율이 서울로부터 호남으로 향하였다.
3월 전라 감사 홍세공, 운봉 현감 남간(南侃)으로 팔량현(八良峴) 복병장을 삼아서 남원부로 하여금 협동하여 수축하게 하였다.
○ 비변사(備邊司)의 공문으로 인하여 각 도의 산성을 수축하여 감사 이하가 다 들어갔다. 홍세공은 담양의 금성으로 주진(主鎭)을 삼아서 관아(官衙)를 배설하고 거처하였다.
○ 권율이 호남 우도로부터 순시하여 순천에 이르러 머물렀다.
4월 3일 책봉상천사 이종성(李宗城)이 도망하여 돌아왔다. 5일 밤에 정사(正使 상천사(上天使))의 답응관(答應官)이 부산으로부터 나와서 달려서 남원에 이르러 부중에 머물던 호 도사(胡都司)와 더불어 달려서 서울로 향하였다. 6일 아침에 왕 중군(王中軍)이 혼자서 말을 타고 남원에 도착하니 부사(府使) 최염(崔濂)이 낭청방(郞廳房)에서 영접하였다. 중군이 말하기를, “상사(上使)과 밤중에 흩어져서 생사와 간 곳을 모르고 나도 또한 여러 날 굶주리고 피곤하여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겠는데 다만 흉한 적이 상사를 추적하여 올 것이다.” 하고, 밥을 다 먹자 곧 서울로 향하였다. 이때에 온 나라 인민들이 강화의 약속을 믿고 다시 살아날 길이 있는가 바라다가 이 변고를 듣고는 내지(內地)가 술렁이며 두려워하였다.
○ 권율이 순천으로부터 달려서 영남으로 가서 변고를 살피었다.
18일 도찰원군문차관(都察院軍門差官)이 부천사의 가정(家丁)과 더불어 부사(副使)의 아뢰는 글을 가지고 가면서 남원에 들러서 말하기를, “심유경과 행장이 아직 건너오지 않아서 일본의 소식을 자세히 알지 못하겠고 정사(正使)는 다만 고향 생각이 나서 술 취한 김에 나왔다. 운운.” 하였다. 김수(金晬)가 영남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왔다.
○ 이원익이 영남에 주재하면서 변방의 보고로 인하여 내지(內地)에 공문을 급히 전하여 군사와 말을 정비하게 하였다.
○ 경상 우병사가 양산 군수의 급한 보고로 인하여 호남에 공문을 보내기를, “정사가 나온 뒤에 아문(衙門)의 소속들이 일시에 도망쳐 흩어져 동래 밀양의 파발(擺撥)들과 더불어 산과 들에 숨어 엎드려 있었는데, 적병이 추적하여 와서 혹은 죽이고 혹은 포로로 삼았다. 운운.” 하였다.
○ 경상 좌병사 고언백(高彦伯)은 꿇어앉아 정사의 접반사 합하[正使按伴使閤下]에게 아뢰나이다. 상천사가 나온다는 기별을 듣고 즉시 군관(軍官) 문세휘(文世輝)와 아병(牙兵) 김득일(金得一) 등을 선택해 임명하여 함께 적의 병영에 들어가게 하여 모든 소식과 중국인이 소동을 피웠는지의 여부를 상세히 정탐하여 돌아와 보고하게 하였더니, 정한 시각에 돌아와 보고한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월 5일 진시에 출발하여 부산으로 가서 밤을 타서 산에 올라 바로 그곳에 가서 천사(天使)가 나온 연유와 적들이 소동을 피운 일을 물으니, 이달 3일에 상사ㆍ부사와 왜장이 연회를 크게 베풀었는데 종일토록 마시고 취하여 거짓으로 한 마디 말을 내기를, “오늘 어사(御史 당인(唐人)이 나가서 조선 통신사를 데리고 오겠다.” 하여, 한참 동안 떠들다가 상사(上使)가 미복(微服) 차림으로 탈출한 뒤에 모시고 호위하던 명 나라 사람이 곧 함께 도망하여 흩어지자, 왜인들이 비로소 그 연유를 알고 군사를 시켜 추적하여 산과 뜰에 퍼져서 숨은 자를 수색하니 흩어져 나갔던 명인이 거의 반이나 잡혀 돌아왔습니다. 왜인들은 오늘 내일간에 행장이 나오면 즉시 모두 철병할 것이라 하여 일체 짐을 모두 배에다 실었다가 천사가 나간 것을 듣고 실었던 짐을 도로 풀면서 여러 왜인들이 통곡하기를, “우리들은 귀국할 기약이 없다.” 하였으나, 부사는 조금도 놀라고 동요함이 없이 태연히 왜인들에게 타이르기를, “우리들이 여기에 도착한 지 여러 달이 되도록 너희들이 진작에 철병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사가 크게 노하여 나갔다. 비록 상사가 없으나 인신(印信)과 내가 있다. 상사는 아마 지금 남원에 도착하였을 것이니, 너희들이 만약 속히 철병하면 마땅히 다시 돌아올 것이다. 만약 믿지 못하겠거든 나를 배에다 실어 놓고 추이를 지켜 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러므로 왜놈들이 그대로 부산에 주둔하여 별로 요동하는 일이 없었고, 부사가 거느린 사람들은 평시와 같이 있고, 상사가 거느렸던 사람들이 잡혀 들어와 구류되었으나 별로 곤욕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상사를 수호하던 왜장은 말하기를, “내가 일본에 들어가면 살아남을 리가 없으니 남원으로 나가서 천사를 모시고 오겠다.” 하는데, 오직 두모포(豆毛浦)에 있는 왜장 청정은 천사가 도망하여 돌아갔다는 기별을 듣고는 매우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가 천사가 실로 천사가 아니라 우리나라를 속이는 것이라 하였는데 지금 이와 같으니, 과연 내 뜻과 같다. 정예한 군사를 바로 경주에 있는 여러 장수의 처소로 보내어 그 이유를 물어서 그들이 만약 상세히 숨김 없이 말하면 싸우지 않고 물러올 것이요, 그들이 행여 망동하여 접전한다면 우리 군사가 어찌 다 그들의 손에 죽으랴.” 하였으니, 오늘 내일간에 발송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밖에는 별다른 소식이 없습니다.
또 8일 술시에 도달된 언양(彦陽) 땅 복병장 이천생(李天生)의 보고 내용은 “당일 오시에 명 나라 사람 3명이 언양으로 나왔기에 물으니, 상사와 호위하던 명 나라 사람 두 명은 3일에 왜영에서 나와서 5일 동안 먹지 못하여 인사불성이어서 죽과 밥을 제공하였다.” 하고, 동일에 노곡(奴谷) 복병장 정천우(鄭天佑)의 보고 내용은, “정사가 이곳에 도착하여 말하기를, ‘3일 밤에 왜영에서 나와서 5일 동안 먹지 못하고 지금 막 이곳에 왔는데 중방(中房)이 한 사람이요, 종인(從人)이 한 명인데, 종인은 보행(步行)이니 말을 보내라.’ 하니, 부윤(府尹)이 영접할 일입니다. 당일 묘시에 정사가 경주에 도착하여 잠깐 쉬고, 진시에 곧 영천(永川)의 길로 향하면서 갈 길에 먼저 글월을 띄웠는데, 신녕(新寧)ㆍ의성(義城)ㆍ안동ㆍ죽령(竹嶺)으로 해서 서울로 향하겠다는 것이며, 또 정사가 당초에 기장(機張) 땅 단유산(丹逾山) 빈 절에 숨었다가 4일 만에 언양에 나왔다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 부천사를 모셨던 통역이 이 접반사에게 통지한 것은 아래와 같다.
본월 4일 새벽에 남 동지(南同知) - 이름은 호정(好正)인데 상정사의 통역이다- 가 데리고 온 역자(驛子)가 와서 말하기를, “천사가 밤에 몰래 나갔는데 남 동지와 박응욱(朴應昱)과 작은 통역이 다 달아났다 하기에 아문(衙門)에 가서 물었으나 부사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또한 알 수가 없다 하며, 왜놈들은 혹은 걷고 혹은 타고 분주히 왕래하며, 평의지(平義智)가 아문에 달려와서 양노야(陽老爺)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들어 알고는, 그의 무리들에게 ‘좋다.’ 하였으며, 날이 밝자 왜추 사고아문(沙古衙門)이 3백 왜인을 거느리고 추격하므로 부사가 의지를 불러 이르기를, ‘추적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이요, 한갓 소란만 피우게 될 것이니 움직이지 말라. 내 스스로 적당하게 처치할 수 있다. 일이 만약 말과 다르면 마땅히 스스로 들어올 것이니, 지금은 추적하지 말라.’ 하니, 평의지가 말하기를, ‘노야의 말이 아주 일리가 있다.’ 하고, 곧 몇 사람을 시켜 추적하는 것을 중지시켰다.” 합니다. 부사의 관가(管家)가 이야(李爺)의 아문(衙門)에 가서 물으니, 관가(管家) 노례영(潞禮永)의 부자(父子)와 원(元)ㆍ풍(馮) 두 소동(小童) 등 7ㆍ8명과 하인 10여 명이 있고, 유 상공(兪相公)도 또한 있고, 그 나머지 장관(將官) 등 10여 인은 따라갔으며, 선봉(選鋒) 등은 다 있었습니다. 사고아문은 추적하여 양산(梁山)까지 갔다가 돌아왔으며, 통관(通官) 박응욱과 소통사(小通事) 최측복(崔測福)ㆍ손춘동(孫春同) 및 당관(唐官) 한 사람과 당인 20명은 잡혀서 성중으로 들어왔으며, 소통사(小通事) 박개동(朴介同)과 당인 4명은 피살되었고, 박응욱은 여러 왜인이 마구 때려 왜인의 집에 갇혀 있었고, 또 청정이 3백 왜병을 내어 정사를 추적하였다는 기별이 있었는데, 혹은 이미 경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하였습니다. 부천사(副天使)가 소인(小人)을 불러 이르기를, “천하 만고에 너는 이와 같은 추한 일을 보았는가? 당당한 천조의 사신으로 작은 나라에 왔으면 마땅히 광명정대하게 처사할 것이지, 어찌 스스로 미리 도망하는 천사(天使)가 있단 말이가? 또 왜중의 소식도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좋은 소식도 없거니와, 또 믿을만한 소식도 없다. 다만 행장의 돌아오기만 바랄 뿐인데 도망하여 나간 뜻이 어디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대장부가 죽으면 죽었지 구차스러운 짓을 해서는 안 되는데 어찌 한몸만 돌아보고 조정의 체면을 돌아보지 않는단 말인가? 일이 마침내 난처한 지경에 이르렀다면 절(節)을 받들고 몰래 가는 것도 또한 가하지마는 지금은 그렇지도 아니하여 행장이 돌아오지 않는 때에 흑백(黑白)도 가리기 어려우니, 그가 나오기를 기다려서 진퇴를 하더라도 늦지 않다. 본국과는 한 집안이지마는 왜놈들의 웃고 모욕함을 어찌하랴! 수치스럽다, 수치스럽다. 그가 반드시 밤을 새우며 달아났을 것이니, 만일 전라도에 머물지 않으면 지금은 반드시 서울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너희 나라에서 놀라 소요하여 군사를 가벼이 일으켜 망령되이 의혹한다면 끝내 말할 수 없는 큰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였습니다. 답하기를, “본국이 군사를 늘 훈련하고 있으니, 이야(李爺)가 나온 것을 보면 반드시 놀라 소요될 것인, 다만 노야(老爺)께서 여기 계시니, 어찌 감히 망동하겠습니까? 하물며 큰일이 끈타지 않아서 조정의 명이 아직 부산에 있으니, 어찌 도망한 천사를 따라 노야를 돌아보지 아니하겠습니까? 비록 혹시 하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노야의 분부를 기다려 사체의 여하를 볼 것이니, 어찌 망동하는 바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노야께서 염려하실 것이 아닙니다.” 하니, “너는 이 뜻을 이 접반사에게 전해 보고하여 국왕에게 아뢰어 삼가고 가벼이 동하지 말도록 하면 이 일은 마침내 결말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다음날 양야(楊爺)가 친히 이야(李爺)의 아문에 이르러 각 관(各官) 선봉(選鋒) 이하가 행례(行禮)한 뒤에 각 관에게 분부하기를, “너희들은 각자가 방심(放心)하여 국가의 명령을 받아 함께 나왔다가 서로 통문(通問)도 하지 않고 가벼이 스스로 몰래 나가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외국의 웃음거리가 되니 몹시 수치스럽다.” 하니, 하인 등이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사가 웃으며, “이야(李爺)가 비록 나갔으나 내가 여기에 있으니, 너희들은 방심하여 외이(外夷)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라.” 하고, 곧 각관 선봉 이하를 다 이르게 하여 이름을 확인한 후에 유 상공과 안에 들어가 행장을 조사하여 친히 봉하기를 마치고 서 상공(徐相公)ㆍ오 천총(吳千摠)으로 하여금 칙독(勅督)과 금인(金印)둘을 받드니, 하나는 관백(關白)을 봉해 줄 인이요, 하나는 이야의 인이었으니, 이야는 다만 절(節)만 가지고 나갈 것입니다. 왜놈들이 이야의 아문에 수직하여 문을 닫아 출입을 허락하지 않고, 밤 동안에 관가(管家) 두어 명 외에는 뜰 가운데 결박하였다가 날이 밝으면 풀어주는데, 원(元)ㆍ풍(馮) 두 소동(小童)과 본국의 방자(房子) 김덕수(金德秀)도 역시 결박되어 있는데 불쌍하여 차마 말할 수가 없습니다. 부사의 아문은 전일과 다름이 없고, 다만 야간에 수직하는 왜졸 3ㆍ40명이 문 밖에서 호위하여 숙직하고, 혹 문 안에는 두어 사람뿐이요, 그 나머지 명나라 사람 및 소통사(小通事) 등은 모두 성문 출입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성밖 주민들은 인심이 별안간 달라져서 전연 말을 듣지 아니하고, 또 외면에 왜의 복병이 사방에 서서 사람들이 통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므로 진작 보고하지 못하였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동래 현령 – 이때에, 동래는 현으로 강등되고 현령도 부임하지 못하고 다만 허명(虛名)만 가지고서 멀리 우리나라 진중에 있었는데, 간혹 본현에서 적에게서 탈출해 온 인민들이 있어 따라와 심부름하였다. 연도(沿途)의 수령이 모두 이와 같았다 - 차인(差人)이 왔으므로 그 편에 보고서를 부칩니다. 양산(梁山)의 파발도 또한 모두 도망하였다 하니, 이 뒤의 소식은 더욱 전할 방도가 없습니다. 일본의 소식은 행장이 금명간에 나오는데 마침내 어떤 결과가 있을는지 알 수 없으며, 혹은 말하기를, “인(印)과 칙서(勅書)가 있으니 곧 이야에게 절(節)을 보내라고 요청하여 적당하게 처치할 것이다.” 하며, 또 들으니, “금명간에 부사가 북경에 아뢰어 처치하리라.” 하며, 양야의 거느린 각 관과 하인들은 모두 말하기를, “이야와 호(胡)ㆍ두(杜)가 도망하여 나간 것을 조정에서 반드시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합니다. 소인이 상사가 거느리고 있던 본국의 방자(房子) 김덕수에게 정사가 몰래 도망한 연유를 물었더니, 답하기를, “복건(福建) 사람으로 포로로 잡혀 왜놈이 된 자 두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노야께서는 바다를 건너가지 마십시오. 일이 극히 헤아리기 어려우니, 한 번 가면 반드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원컨대 노야는 일찍 결정하십시오.’ 하여, 네 번이나 말하니, 이야가 그 말을 믿었을 뿐이요 별로 다른 일은 없었다.” 하였으며, 또 관가에 물어도 역시 이이와 같이 말하는데, 그 사람은 가덕도(加德島)에서 왔다 합니다. 대개 이곳에서는 별로 대단한 기별은 없고 다만 행장이 이미 낭도(浪島)에 이르렀는데 금명간에 나온다 하니, 왜와 당인들이 날마다 그의 돌아오기만 바라고 있으며 모든 동정이 조금도 의심되거나 위태로움이 없습니다. 양야는 동정이 태연하여 의심하거나 두려워하는 태도가 없고 선유(宣諭)하기를 더욱 친절히 하니, 왜인들이 감격하고 칭찬하여 인칙(印勅)이 여기 있고 양야가 여기에 있으니 다시 두려울 것이 없다 하고, 또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사람에게 전해 들으니 수길이 지난 10월부터 병이 중하여 정월에 죽었다 하기도 하고, 혹은 쾌차(快差)했다 하기도 합니다.
○ 평조신(平調信)이 우리나라 역관에게 말하기를, “정사(正使)가 여기 있으면서 우리 군졸을 꾀어 황금으로 매수하여 정보를 탐지하였는데, 무지한 졸병들이 불측한 말로써 고하자 이로 인하여 나갔다. 금품으로 꾀어서 이간질을 하는 것은 싸울 때의 일로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니, 3국이 화친을 하여 성실함과 신으로써 서로 믿어야 할 것이요, 간사함과 거짓으로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윗사람이 이미 이와 같으니 어찌 아랫사람을 책할 수 있으리요. 천사는 천조에서 명령을 받는 날에 이미 일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만리 타국에 절(節)을 가지고 왔으니, 천하의 일이 이 한 걸음에 있거늘 졸병들의 말을 곧이 듣고 거의 성취되려는 큰일을 문득 그르치니, 이것이 천사의 역할인가? 우리들은 상국(上國)의 후한 은혜를 받은 지 오래라 밤낮으로 오직 화친이 성사되지 못할까 염려하는데 지금 이와 같으니 통한(痛恨)을 이길 수 없다. 운운.” 하였다. 부사가 또 역관에게 이르기를, “지금 밖의 말을 들은즉 나도 또한 나갈 것이라 한다니 그러하냐? 나는 다만 베개를 높이 베고 단잠을 잘 뿐이다. 일간에 관하(管下)에 일이 없어 나는 이 상서(李尙書 접반사 이항복(李恒福))를 조선(朝鮮)에 보내고, 행장의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별다른 뜻이 없는데 어떤 괴이한 사람이 이러한 말을 지어내는가.” 하였다.
20일 부천사(副天使)의 접반사 이항복이 부사가 전하(殿下)에게 드리는 서한을 가지고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여 이튿날에 서울로 향하였다.
○ 배신(陪臣) 심우승(沈友勝)을 보내어 천사가 도망한 일을 상세히 아뢰었다. 황제가 각국에서 조공(朝貢)하러 온 배신들을 궁정(宮庭)에서 연회를 열어 대접하는데, 본국의 사신이 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엎드렸다. 황제가 그 연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흉한 적이 국경에 눌러 있어 군부(君父)가 경황이 없는데, 초국(楚國)을 위해 우는 소신이 어느 겨를에 즐거워하오리까?” 하니, 황제가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짐(朕)은 요망한 기운이 싹 사라져 동방이 맑아진 줄로 알았으니 어찌 짐을 속임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 줄을 알았으랴.” 하였다.
22일 이종성(李宗城)이 서울에서 출발하여 명 나라로 돌아갔다. - 북경에서 국문(鞠問)을 받고 은 3만 냥을 속(贖)으로 바치고 용서를 받았다 한다.
24일 권율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여 그대로 머물렀다. 방어사 이시언(李時言)이 전주로부터 와서 종사관 최상중(崔尙重)을 거느리고 원수(元帥)를 뵈옵고, 29일 순천으로 향하였다.
○ 심유경과 평행장이 일본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돌아왔다. 행장이 상사(上使)가 도망하여 나갔다는 말을 듣고 크게 군사를 발하여 남원으로 보내어 명 나라 사신을 끌어 오겠다는 것을 부천사가 타일러서 중지되었다.
○ 영남 여러 곳에 주둔해 있는 적이 여전히 농사를 지으면서 철거할 뜻이 전혀 없었다.
5월 가물었다. 국토의 명산에 다 불이 났는데 그때에 왜적이 몰래 불질렀다는 설이 있었다. 또 각처의 도로에 마른 풀[堅草]을 꺾어 두었는데, 역시 왜적의 정탐군이 한 짓이라 하였다.
○ 이항복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영남으로 향하였다.
3일 권율이 남원으로부터 곡성에 이르러 머물면서 10일에 십사관(十四官)의 군사를 모아 순자진도(鶉子津島)에서 열병식을 크게 하였다.
11일 우박이 크게 내렸다. 이때에 천둥치고 비가 조금 오더니 미시ㆍ신시 사이에 이르러 소낙비가 급히 퍼붓고 뇌성 벽력이 치고 천지가 캄캄해지면서 우박이 쏟아지는데 크기가 계란 만\하더니 한참 만에야 그쳤다. 나는 새도 부딪혀 죽고 구멍에 든 쥐도 죽었다. 보리ㆍ밀과 제반 곡초와 초목의 잎이 떨어져서 타작해 놓은 것 같았는데 남원ㆍ순창이 더욱 심하였다.
○ 청정이 철병하여 바다를 건넜다. 경상 좌병사가 원수에게 보고하기를, “본월 10일에 두모포 적장 청정이 영책(營柵)을 모두 불사르고 군사를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가고 서생포(西生浦) 등지의 적이 연달아 철거하였습니다.” 하였다.
20일 전라 감사 홍세공이 장수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22일 금성(金城)의 유진(留鎭)으로 향하였다. 권율이 곡성으로부터 순시하여 우도를 지나 전주로 향하였다. 이원익은 이때에 경주에 있었다.
○ 부천사가 아뢴 글이 북경에 도달하자, 조정에서 양방형(楊邦亨)을 승격시켜 상사(上使)로 삼고 심유경을 부사로 삼았는데, 유격장군 진운홍(陳雲鴻)이 조칙(詔勅)을 받들고 나왔다.
○ 전라ㆍ충청도의 인민들이 농사 짓는 일을 즐거워하여 전답을 매는 사람들이 5ㆍ60명씩 떼를 지어 깃발을 날리고 북을 치며 노래와 춤을 서로 겨루었다. - 정유년의 전란에는 전라ㆍ충청도가 몹시 참혹하였으니,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슬픔이 온다는 말이 과연 헛말이 아니로다.
26일 진운홍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 길을 한층 더 재촉하여 부산으로 향하였다.
○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이 각 도로 하여금 아동들을 징발하여 삼수기예(三手技藝)를 가르치게 하니, 관리들이 그것으로 인연하여 민폐를 끼침이 끝이 없었다. 어떤 이는 고하기를, “베 백 필을 나에게 주면 전쟁에 쓸 말 백 필을 마련하겠소.” 하니, 이덕형이 말하기를,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하니, “제주에 들어가서 어린 말 백 필을 사서 4ㆍ5년을 먹여 기르면 싸움에 쓸 수 있을 것이요.” 하여, 이덕형이, “흉한 왜적이 지금 국경에 주둔하고 있어 아침저녁으로 충돌할까 걱정인데 5년이라는 말은 오활한 계책이 아닌가?” 물으니, “상공(相公)들은 말만 알고 사람은 모릅니다. 5ㆍ6세 아동들이 또한 오늘날 군중에 있겠습니까? 말을 기르는 것은 비록 더디더라도 후폐는 없겠지마는 아동을 징발하는 일은 멀고 화는 빠릅니다.” 하였다.
○ 일본에 가랑비가 내렸는데 사람이 상하거나 죽은 자가 많았다고 한다. - 뒤에 강항(姜沆)의 아뢴 글을 보니 헛소문이 아니었다.
○ 여러 번 황제에게 아뢰어 세자책봉(世子冊封)을 청하였으나 매양 예부(禮部)에 거부하는 제사(題辭)를 내리자 인하여 전하께서 왕위를 전하는 명을 내리었다. 왕세자가 아뢰기를, “신이 본시 용렬하여 조금도 학식이 없어 나이는 비록 장성하였으나 덕업(德業)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외람되이 세자의 자리에 있는 것도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줄로 아옵고,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 몸둘 곳이 없는데 하물며 난리를 당하여 병이 생겨 반년 동안 앓고 나니, 정신이 또렷치 않습니다. 비록 심상한 처사라도 결코 감당하기 어려우니, 감당하지 못할 명령이 못난 신에게 갑자기 미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명령을 듣고서 놀라고 떨려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성스러운 자애로 저의 마음을 밝게 살피어 빨리 명령을 중지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분수를 보전하게 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의 답답하고 절박한 마음은 천지신명이 보살펴 비추지 않음이 없사오니, 간절히 빌고 원함을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는데,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두 번째, “신이 어제 땅에 엎드려 부르짖어 호소하였으나 아직 윤허를 얻지 못하고 물러가 생각하오니 황공하옵기 그지 없습니다. 신의 어리석고 용렬한 것은 다시 일일이 들어서 천청(天聽)을 번거롭히지 않겠으나, 지금의 국사로 말하면, 노적(老賊)이 아직 변방을 점거하여 흉한 꾀가 헤아릴 수 없사오며, 명 나라 장수가 길에 연달아 왕래하여 접대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국가를 회복하여 남은 백성을 건지는 것은 비록 성명(聖明)의 큰 덕과 지극한 인(仁)으로서도 혹시 쉽지 않을까 하거늘, 하물며 신과 같이 둔하고 불초한 자야 어떠하겠습니까? 반복하여 헤아려 봐도 결코 신의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신이 죄를 얻는 것은 족히 생각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종묘 사직에 대해서는 어찌하며 백성에 대해서는 어찌하오리까? 조그마한 정성이 드러나지 못하여 천청(天聽)을 돌리지 못하오니 이것은 실로 신이 도리를 다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어서 겁나고 떨리어 용납받을 곳이 없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 다시 생각하시어 빨리 윤허를 내리소서. 황송하기 그지없어 삼가 엎드려 아뢰나이다.” 하였다. 답하기를, “오늘의 역수(曆數)는 세자에게 있으니, 세자는 사양하지 말라. 나는 실로 병이 심하니 어떻게 감당하랴. 만약 어느날 물러나 휴식할 수 있다면 뜻과 원함을 마치겠노라. 나와 세자는 마음속을 서로 잘 아는데 아직도 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오늘 바람과 날씨가 좋지 않으니, 세자는 급히 돌아가 조리하라. 부모는 오직 자식의 병을 걱정하느니라.” 하였다.
○ 세 번째, “신이 연일 정성을 다하여 호소한 것은 실로 속마음에서 나온 것이온데, 천청이 더욱 들어주지 않으시고 ‘역수가 너에게 있다, 마음속을 서로 잘 안다.’는 등의 말씀까지 하시니, 명령을 받고서 두렵고 놀라 살지 못할 듯하옵니다. 우러러 생각하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미세(微細)한 것까지 다 비추어 보시니, 어리석은 신의 놀랍고 답답하고 절박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심정을 아마 반드시 환히 살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도록 허락하는 말씀을 아끼시다가 도리어 엄한 명령을 내리시니, 한갓 스스로 눈물만 흘러 정신을 차리지 못하여 차라리 땅을 뚫고 들어가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여러 해 난리에 국사가 위급하여 밤낮으로 걱정하고 애쓰시다 보니 옥체가 안녕하지 못하게 되신 것은 신이 비록 어리석고 용렬하나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지금 적병이 조금 물러갔으나 아직도 변방을 점거하고 있고, 민심이 설레고 두려워하여 그 종말이 어떠할는지 알지 못하여 앞으로의 걱정거리가 전일보다 더함이 있사오니, 난을 평정하여 국토를 수복하는 것은 결코 나이 어리고 어리석고 불초한 신의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자애로 깊이 조종(祖宗)의 큰 계책을 생각하시어 속히 윤허함을 내리시면 다만 신의 어리석은 분수가 잠깐 동안 안심될 뿐 아니라, 국가와 생민에 대해서도 매우 다행하지 아니함이 없겠나이다. 혹시 정성이 하늘에 이르지 못하여 한 번의 윤허를 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대궐 아래에서 목숨을 마칠지언정 다시 천지간에 스스로 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어리석은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빨리 윤허하는 명령을 내리소서.” 하였다.
○ 네 번째, “어리석은 신의 답답하고 절박한 심정을 연일 땅에 엎드려 대궐문에서 슬피 부르짖었으나, 아직 윤허하는 명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러 번 준엄한 말씀을 내리시니, 물러나 생각하니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보잘것없는 신이 전후로 계사(啓辭)에 모두 진달하고, 명을 받은 이래로는 밤낮 걱정하여 음식을 먹어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한 지가 이미 5일이 되어 정신이 다 달아나고 기력이 거의 다 되어 오늘은 심지어 인후병과 모든 병이 거듭 발생하여 찌르고 아픕니다. 이때를 당하여 신의 몸의 병은 진실로 족히 생각할 것도 못 되므로 결단코 붙들고 끌고 대궐 아래에 나아가고자 하나, 움직일 수 없어 저의 심정을 이루지 못하오니 더욱 답답히 우는 것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혹시 천지 부모의 어진 마음에 힘입어 특별히 한 번의 윤허를 주시면 비록 죽어도 유감이 없겠나이다. 엎드려 비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위로 종묘 사직을 생각하고 아래로 저의 심정을 살펴 빨리 윤허를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답하기를, “올린 글을 살펴보니, 이것은 대의(大義)에 통하지 못한 말이다 대저 순(舜)이 요(堯)의 선위(禪位)를 받을 때에 순이 사퇴하였다는 말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국가의 일이 중하여 구구한 가인(家人)의 정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이때에 종묘 사직이 중함이 되는데, 나는 실로 병이 깊이 들어 번거로운 정사(政事)를 능히 감당하지 못하겠으니, 세자는 깊이 생각하고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 다섯 번째, “신이 어제 성교(聖敎)를 받고 보니, 다만 윤허하는 말씀을 삼갈 뿐만 아니라, 굳게 거절하심이 날로 더하시어 요순(堯舜)의 주고 받은 일로써 말씀하시기까지에 이르렀으니, 명령을 듣고 놀라고 떨려서 스스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삼대(三代)는 어떤 날이며, 오늘은 어떤 날입니까? 요순은 어떤 사람이며, 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당우(唐虞) 때로 말하면 천하가 태평하여 백성이 편안하고 물자가 풍족하였으니 오늘의 국사가 위급한 때와 비교하면 어떠합니까? 하물며 우리 성상(聖上)의 하늘과 같은 큰 덕은 높고 넓기가 요(堯)와 다름이 없사오며, 춘추가 한창이시니 요가 연로하여 기력이 쇠한 때와는 너무도 다르며, 시국의 어려움은 요의 때에 만방이 다 편하던 것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사람으로 말한다면, 순이 깊은 지혜와 문덕(文德)이 빛나 현묘(玄妙)한 덕이 위로 알려진 것이니, 신과 같이 용렬하고 어두운 데 비교하면 어떠합니까? 하물며 순의 거룩한 덕이 그와 같은데도 30에 등용되어 28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을 정치에 대하여 시험한 뒤에야 비로소 요가 순에게 네가 대위(大位)에 오르라는 명령을 하였으나, 오히려 하남(河南)에서 지위를 피하였으니, 사양하는 말이 없었다 하겠습니까? 아! 성상(聖上)께서는 춘추가 한창이심이 요의 연로한 것과는 다르오며, 오늘날 시국의 어렵고 위태로움은 한두 가지로 다 말할 수 없는데, 어리석은 신은 어리고 어둡고 약한데다 병까지 날로 더하여 목숨이 실낱 같아, 종묘 사직을 받들고 승전을 이끌어 대업(大業)을 회복하는 책임은 결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어리석은 신이 위 아래에 허물을 짓고 신(神)과 사람에게 죄를 얻은 것은 진실로 족히 근심할 것이 못 된다 하더라도, 조종(祖宗)에 누가 되고 성상께 욕이 될까 몹시 두렵습니다. 못난 신의 정성이 위에까지 미치지 못하여 혈성(血誠)으로 부르짖어도 천청(天聽)을 돌리지 못하오니 황공하기 그지없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깊이 생각하시어 불쌍히 여기고 민망히 여겨 특별히 윤허하여 주시면 저의 죽게 된 목숨이 잠깐 동안이나마 보전되어 다시 성명(聖明)께서 태평을 이룩하는 성대함을 보겠나이다.” 하였다.
○ 여섯 번째, “소신의 답답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여러 날 땅에 엎드려 혈성(血誠)으로 호소하였으나 하늘의 뜻은 더욱 막막하니, 이것은 실로 못난 신의 정성이 위에서 믿어지지 아니하여 힘이 하늘을 돌리지 못한 것이니, 황공하고 떨려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성상(聖上)께서는 비록 짐을 벗고자 하시나, 이러한 전란의 때를 당하여 신과 같은 어리고 둔한 자에게 문득 어려운 대업(大業)을 맡기려 하시니, 한갓 조종에 욕될 뿐 아니라 반드시 일을 그르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종묘 사직의 큰 계책에 어찌 이렇게도 생각하지 않으심이 심하옵니까? 엎드려 비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책임의 중함을 깊이 생각하고 답답하고 절박한 마음을 굽어 살펴 다시 생각하시어 빨리 윤허하여 주시면, 아침에 명을 듣고 저녁에 죽은들 어찌 유감이 있으리까?” 하였다. 답하기를, “내가 실로 병이 깊으니, 세자는 위로 종묘 사직을 생각하고 다음으로 나의 뜻을 알아주어 문득 힘써 받을 것이요, 고집을 하지 말라.” 하였다.
○ 일곱 번째, “신의 간절한 심정을 혈성(血誠)으로 부르짖은 지 거의 열흘이 되어도, 아직 윤허하신 명령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엄한 말씀으로 비답(批答)하시어 날로 더욱 굳게 거절하시어, 전후에 편치 못한 말씀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으시므로 감히 명을 거역하여 억지로 머물지 못하옵고, 눈물을 머금고 물러나 엎드려 생각하오니, 죽고 싶을 따름입니다. 신이 본래 병이 있는데 연일 슬피 부르짖노라고 묵은 병이 점차 더하고, 마음에 병이 거듭 일어나니, 계속해서 이러하면 반드시 미친 병이 되겠사오니, 혹시 마침내 윤허를 얻지 못한다면 한 번 죽음이 있을 따름이요, 다시 다른 길이 없습니다. 가령 어리고 무식한 자에게 막대한 책임을 부탁한다면 한갓 신이 답답하고 절박할 뿐만 아니라, 또한 종묘 사직의 불행이요 백성의 불행일 것이온데, 성명께서 어찌 차마 이다지도 굳게 고집하십니까?” 하였다. 답하기를, “병으로 능히 감내(堪耐)할 수 없어 마음이 답답하다. 자식은 마땅히 부모의 마음으로써 마음을 삼아야 하는 것이니, 세자는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6월 6일 천둥치고 큰비가 와서 물이 넘쳐서 떠내려가 죽은 사람이 많았다. 북극(北極)에 치우기(雉羽箕)가 나타났다.
9일 적추 평행장이 두 천사(天使)를 모시고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향하였다.
○ 상천사(上天使 이종성(李宗城))가 도망해 나간 까닭으로써 상통사(上通事) 남호정(南好正)이 형을 받아 죽었다.
13일 큰 장마비가 왔다.
21일 아침에 해와 같은 붉은[紫] 기운이 하늘의 남북에 나타났다가 한참 만에 그쳤다.
28일 접반사 이항복(李恒福)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다음날 서울로 향하였다.
○ 홍세공(洪世恭)을 체차하고 박홍로(朴弘老)로써 전라 감사를 삼았다. 홍세공은 천성이 강하고 밝아서 위엄으로 탐관(貪官)을 제어하여, 각 고을 수령들이 손을 움츠리고 남아 있는 백성이 발을 펼 수 있었는데, 홍세공이 체차되자 토색질이 도로 방자해져서 백성들이 의탁할 데가 없기가 이원익(李元翼)이 평안 감사를 그만둘 때와 같았다. - 나도 역시 호남 사람이므로 감히 추모하는 시를 읊기를, “서도에서는 이원익을 생각하고, 남방에서는 홍세공을 생각하네. 감당(甘棠)을 자르고 베지 말라 하더니, 천재(千載)에 유풍(遺風)을 남기었네.” 하였다.
○ 동지(冬至)를 축하하러 갔던 배신 민여경(閔汝慶) 등이 유구국(琉球國)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는데, 그 자문에, “이웃 나라의 우호(友好)를 도탑게 하고 후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글을 올립니다. 한 천지간에 살고 있으나 땅이 남북으로 떨어져 있어 비록 일당(一堂)에 모여 만나지는 못하나마 실로 마음속[肝膈]으로 사모합니다. 이 정(情)과 의(義)는 사람으로 하여금 간절히 감격하게 합니다. 만력(萬曆) 18년에 본국에 소속된 요우(要宇) 등이 쌀과 베[布]를 운반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되어 귀국의 해안에 도착되었는데, 유구의 인민인 것을 조사해 알고는 후하게 구휼(救恤)하여 요동으로 보내어 북경으로 나아가 다시 고토(故土)에 돌아오게 해 주시어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공덕을 칭송할 따름입니다. 후면에 기록된 비단과 보물을 공손히 사자(使者)에게 부탁하여 가지고 돌아가 바치게 하여 조그마한 정성을 표시하나이다.” 하였다. 고사(攷事)에서 나왔다.
○ 청정ㆍ행장 등이 비록 철병하여 소굴로 돌아갔으나 영남 연로(沿路)에 뒤떨어진 왜적이 또한 거의 20여 둔인데, 각기 수천 명의 병사가 머물렀다. - 강화한 뒤에도 오히려 이 군사를 머물게 하니, 강화가 성사되지 못할 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다.
7월 충청도 홍산(鴻山)에 사는 역적 이몽학(李夢鶴)의 군사가 일어났다. 이몽학은 본시 흉하고 교활한 무리로서 처음에 편비(褊裨)가 되어 종군하였다가 국사가 어렵고 위태한 것을 알고 감히 하늘을 쏠 꾀를 내어 동료 한현(韓玄) 등과 가만히 반역을 도모하여 도당을 모았다. 이때에 백성들이 난리와 온갖 침노에 곤궁해졌다가 한 번 풍문을 듣자 따르는 자가 바람에 풀 쓰러지듯 하여 수일이 못 되어 군사가 만여 명이 되었다. 6일에 나아가 임천(林川)과 홍산을 함락시키고, 그 길로 청양(靑陽)ㆍ정산(定山) 등 여섯 고을을 함락시켰다. 임천 군수 박진국(朴振國)이 아전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늘 적중에 머물렀다. 이때 이시언(李時言)이 본도 병사(兵使)로서 군사를 발하여 잡으려 하다가 관군이 두 번이나 무너졌다. 이에 원수에게 위급함을 보고하니 권율이 전주에 있다가 곧 전라 감사로 하여금 군사를 전주에 모이게 하였다.
○ 이몽학이 홍주(洪州)를 포위하니 목사 홍가신(洪可臣)이 굳게 지켜 막아 싸우니, 이몽학이 수일 동안 성을 공격하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물러나면서 말하기를, “만약 한현이 오면 목사의 머리를 기 끝에 달 것이다.” 하였다. 덕산(德山)길로 향하면서 도처에 거짓말로 꾀기를, “읍내나 촌에 사는 백성들은 편안히 있고 동하지 말라. 이번 거사는 남아 있는 백성을 수화(水火) 가운데서 구제하려는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장군 김덕령(金德齡)과 영천 군수 홍계남(洪季男) 등은 다 우리와 공모되었으니, 마땅히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함께 서울로 향하리라.” 하였다. - 이름 드러난 사람들을 거짓 끌어대는 것은 저희들 군사가 믿을 데가 있다는 것을 보이려 함이니, 음흉하고 교활한 꾀가 불측하다.
12일 도원수 권율이 전라 감사 박홍로(朴弘老)와 모든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여산(礪山)을 거쳐 이산(尼山)으로 향하였다. 권율이 길에서 적세가 매우 치성함을 듣고 충용장군(忠勇將軍) 김덕령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게 하고, 또 군관을 영남 여러 진(鎭)에 나누어 보내어 항복한 왜병을 수합하여 거느리고 오게 하였다. 이때에 남원 판관 김유(金騮)는 이미 갈리고 이덕회(李德恢)가 대신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군사를 거느리고 따라와 토벌하였다.
○ 적병이 서울로 간다고 큰소리를 치니 서울이 술렁거리고 두려워하고, 진위(振威)ㆍ수원(水原) 땅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짐을 꾸려 가지고 있었다. 이때에 반군이 지나는 곳마다 밭을 매던 자는 호미를 들고, 행상(行商)하던 자는 지팡이를 들고 분주히 즐겨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아! 이것이 어찌 그 본심일까?
○ 임천 군수가 적중에서 나와서 원수에게 고하기를, “서산 군수 이충길(李忠吉)이 그의 동생 3명을 거느리고 몰래 역당에게 붙어서 왕래하면서 서로 돕는다.” 하므로, 권율이 본도 감사로 하여금 비밀리에 이충길을 잡아서 공주에 가두었다.
○ 권율이 호남 군사로 하여금 나아가 석성(石城)에 주둔하도록 하였는데, 전주 판관 □□이 척후장(斥候將)으로서 먼저 들어가 적을 정탐하였다. 판관의 아병(牙兵) 윤계(尹誡)가 장사 10여 명을 모집하여 밤에 적의 진중에 들어가서 총통을 연달아 쏘며 큰소리로 외치니, 적도들이 크게 놀라 떠들었다. 윤계가 외치기를, “도원수와 전라 감사와 충용장군이 각기 군사와 말 수만을 거느리고 이미 이 땅에 도착하였으니 내일은 마땅히 소굴을 무찔러 죽여 남김이 없게 할 것이다. 너희 적들 가운데는 아마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따른 자가 많을 것이니, 만약 적장을 베어 가지고 와서 항복하면 몰사하는 화를 면할 수 있으리라.” 하였더니, 적의 무리들이 들어 알고는 다투어 칼을 가지고 장막 가운데 돌입하여 이몽학을 누운 자리에서 베어 죽이고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한현이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홍주 땅에 주둔하였는데, 이시언이 본주의 목사 홍가신과 진군하여 치니 적병이 패하여 달아나고, 한현은 생포되어 군중(軍中)에서 베었다. 충청도가 다 평정되었다. 그 뒤 33년 을사년에 홍가신 등 4인을 정난공신(靖亂功臣)으로 녹(錄)하였다.
○ 충용장군 김덕령을 잡아다가 국문하였다. 처음에 역적 이몽학이 잡혀 죽은 뒤에 문서를 수색하여 보니, 김ㆍ최ㆍ홍 삼성(三姓)이 있었다. 한현이 생포를 당하자 원수가 물으니, 공술하기를, “김덕령ㆍ최담령ㆍ홍계남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곽재우(郭再佑)ㆍ고언백(高彦伯)도 다 우리의 심복이다.” 하였으므로, 권율이 곧 갖추어 아뢰고, 군관을 나누어 보내어 김덕령 등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때에 김덕령이 역적을 토벌하라는 원수의 명령을 받고 진주로부터 운봉(雲峯)에 도착하였다. 충청도가 평정되었다는 것을 듣고는 원수에게 휴가를 청하여 광주(光州)에 갔다 오려 하였으나 권율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김덕령이 본진으로 돌아왔다가 곧 진주 옥에 잡혀 갇히었다. 임금이 원수의 계를 보고 조정의 신하에게 의논하게 하니, 어떤 이는 말하기를, “김덕령은 용기와 힘이 뛰어나 소홀히 할 수 없으니, 사람을 체찰부에 보내어 일이 있다고 핑계하여 덕령을 불러와서 그 자리에서 사로잡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고, 어떤 이는, “그것은 불가합니다. 김덕령은 일개 미친 자이니 염려할 것이 못됩니다. 하물며 간사한 꾀를 써서야 어찌 아랫사람을 통제하겠습니까? 법대로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옴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선전관은 무인이라 위임하여 보낼 수 없으니, 근신(近臣)을 보내라.” 하고, 승지(承旨) 서성(徐渻) 등을 보내어 선전관과 도사를 거느리고 가서 김덕령을 잡게 하였더니, 당도한즉 덕령이 옥에 갇힌 지 며칠이 된 상태였다. 27일에 서성 등이 김덕령을 잡아서 남원을 경유하여 서울에 이르러 옥에 가두고 국문하였다. 곽재우 등도 또한 잡혀서 서울에 왔다가 얼마 안 되어 석방되어 진으로 돌아갔다.
○ 중외의 대소 신료ㆍ기로ㆍ군민ㆍ한량인 등에게 내린 교서는 아래와 같다.
왕은 이렇게 이르노라. 민망하다. 임금인 내[矛]가 이 큰 난리를 만나서 큰 원수를 갚지 못하고 큰 수치를 씻지 못하여, 비록 너희 신민의 위에 있으나 항상 슬프고 답답하여 궁한 사람이 돌아갈 데 없는 것과 같더니, 지금 이 역적의 변이 또 위급한 때에 발생하였으니, 진실로 내가 나라 다스림을 잘 못하므로 말미암아 화란이 생긴 것으로, 마음이 아프고 얼굴이 부끄러워 진실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노라. 아! 충청도 한 지방이 어찌 모두 올빼미의 당이리요마는, 조그마한 한두 놈이 휘파람을 불어 모으자 수일이 못 되어 따르는 자가 바람에 풀 쓰러지듯 하였으니, 고요히 생각하니 허물이 돌아갈 데가 있다. 감히 백성이 죄가 있다 하랴. 나는 생각하니, 전란의 결과로 백성의 죽은 것이 대개 열에 여덟, 아홉이 되고, 다행히 살아 남은 자도 겨우 실낱 같은 목숨을 보전하고 있는데도 위로하여 안정시키기를 먼저하지 않고, 토색을 일삼아서 가혹한 납세와 부역의 명목이 고슴도치털처럼 많아서 명 나라 병사가 먹을 것을 여기에서 판출(辦出)하고, 경비의 지출이 여기에서 나오고, 이것으로써 군사를 교련하고, 이것으로써 성을 쌓아서 골수가 이미 다 빠졌는데도 납세를 독촉함이 더욱 준엄하고, 근력이 이미 다 되었는데도 부역에 징발하기를 더욱 급히 하였고, 하물며 전라ㆍ충청도에 조금 완전하다 하여 역(驛)의 징발이 더욱 심하고, 더구나 형벌을 함부로 혹독히 하여 사람 보기를 풀 보듯 하니, 백성들이 해독을 못견디어 원망이 일어나 흙처럼 무너지고 지붕의 기와처럼 풀릴 형세가 이미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나는 위에서 전혀 몰라서 일찍이 능히 몸으로 고충을 겪고 비용을 절약하기를 구천(句踐 월(越) 나라 2대 왕)과 같이 하여 백성의 힘을 조금 쉬게 하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위로하며 어루만지기를 연 소왕(燕昭王, 전국 시대 제 민왕(齊湣王)이 연(燕)을 쳐서 임금을 죽였다. 연왕의 아들 소왕(昭王)이 다시 국력을 기르고 인재를 등용하여 제(齊)를 쳐서 원수를 갚았다)과 같이 하여 민심을 조금도 위로하지 못하여, 나의 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이 맺혀 일어나 난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내가 백성을 저버렸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이 꾀는 말에 빠진 것이 또한 어찌 그 본정이랴. 이에 특히 협박당하여 붙은 자들을 치죄하지 않기로 뜻을 두었으나, 또 능히 때에 미쳐 선처하지 못하여 체포할 즈음에 옥석이 함께 타는 화를 면하지 못하여 거듭 백성에게 죄를 얻었으니 더욱 부끄럽고 슬퍼함이 깊도다. 돌이켜 보건대, 내가 비록 어두우나 또한 백성의 힘이 다 되어서 조금 쉬게 하여야 할 것을 알지마는, 왜적이 변방에 눌러 있은 지 이미 5년에 충돌의 화가 조석지간에 긴박하니, 사세가 속수무책으로 앉아 망하기를 기다릴 수는 없으므로, 군사를 교련하여 적을 방어할 계획을 하여 성을 쌓아 험한 데를 질러 막을 준비를 하고, 양식을 모아 군사에게 공급할 차림을 한 것은 모두 백성을 위하여 화(禍)를 제거하여 함께 보존하자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오히려 백성들이 이해하기를 바라노라. 나는 살릴 도리로써 부리는 것인데, 받들어 시행하는 자들이 나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서, 백성을 보존하려는 거사가 한갓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결과가 되어 점차 원망이 쌓여 도적이 일어나게 만들었으니, 모두 내가 밝지 못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생각하건대, 우리 조종(祖宗)이 태평을 거듭하여 경사를 쌓은 2백여 년에 사람으로 태어난 이는 모두 길러줌을 받아서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운 덕택 속에서 살고 죽고 하였는데, 보잘것없는 나의 몸에 미쳐서 외난(外難)이 이미 극심한데 내란이 또 일어나서 한 물(物)도 편안함을 얻지 못하고 죽은 이가 서로 베개하였고, 태(胎)와 알[卵]까지도 싹 없어졌으니, 한밤중에 반성하여 일찍이 슬퍼하지 않은 적이 없다. 역적의 괴수가 이미 처형되었으니 마땅히 위로하여 안정시킴이 시급하다. 대개 법으로써 백성을 안정시키려 하면 백성이 더욱 요란하고, 덕으로써 백성을 감화시키면 백성이 복종하기 쉬운 것이니, 난을 겪은 지방에는 빨리 연좌(連坐)의 법을 생략하고, 너그러운 덕을 펴서 전과 같이 안심하고 살게 하라. 또 사람을 말로써 감복시킴이 실천으로써 감복시킴만 못하고, 어질다는 소문은 실지로 어진 정치를 하는 것만 못하다. 오늘날 백성에게 해독(害毒)이 되는 것이 공납과 부역과 성지(城池)를 쌓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또한 마땅히 그 많고 적음을 요량하고, 그 완급(緩急)을 알아 내어 감할 것은 감하고, 중지할 것은 중지하여 한 가지 한 가지를 조치하여 백성들의 편의를 위주하여서 거듭 걱정과 해를 끼침이 없게 하고,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부역을 줄이어 정치가 공평하고 백성이 편안하도록 하여 한 가지로 태평의 정치에 이르게 하라. 이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노라.
8월 24일 충용익호장군(忠勇翼虎將軍) 김덕령이 옥에서 죽었다. 김덕령이 전에는 비록 죄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죄가 아니었으므로 잡히는 날에 원통하게 여기는 이가 많았으나, 당국자들이 모두 시기하여 하나도 구(救)하는 이가 없어서, 어떤 이는 모함하기를, “김덕령이 사람 죽이기를 삼[麻] 베듯 하였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고, 또 반역할 골상(骨相)이니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다.” 하고, 또 몰래 옥리(獄吏)를 사주하여 속히 죽이도록 하였다. 옥중에 있은 지 무릇 20여 일에 형벌로 문초하기 여섯 번에 다리뼈가 이미 부러졌으나 그래도 능히 무릎으로 걸었고, 볼기에 곤장을 때렸으나 목숨은 오히려 붙어 있어 동정이 평상시와 같았다. 조용히 스스로 변명하기를, “신이 만약 다른 뜻을 품었다면 어찌 당초에 원수의 명령을 받고 운봉까지 도착하였으며, 또 명령을 받고는 군사를 거느리고 진으로 돌아갔겠습니까? 다만 신이 만번 죽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는 것은 계사년에 자모(慈母)가 죽었는데, 3년상의 애통을 잊고 원수를 갚으려고 분발하여 상복을 벗고 칼을 들고 일어나서 여러 해 종군하여도 조그마한 공도 세우지 못하여 충성도 펴지 못하고 효도에도 어기었으니, 죄가 이에 이르니 만번 죽어도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구구한 속마음은 천지가 굽어 보시나이다. 신은 지금 목숨이 다 되어 가니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마는 다만 원하옵건대 죄 없는 최담령(崔聃齡)은 죽이지 마옵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김덕령이 형장(刑杖)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니, 참으로 적(賊)이로다.” 하고, 옥중에서 문초받기 위하여 대궐 뜰에 출입할 적에 그가 힘을 부릴까 의심하여 큰 나무에다 묶어서 옹위하여 다니게 하더니 이에 이르러 죽었다. 김덕령이 군사를 일으킨 지 3년에 이름이 중국과 오랑캐 지역에 가득 찼었다. 전에 영남에 있을 때에 손으로 범 두 마리를 때려 잡아서 왜인에게 자랑하여 팔았다. 온 나라 사람들이 그를 의지하여 안심하였고, 왜놈도 또한 겁내어 항상 스스로 계엄하여 경계를 지키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는데, 국운이 불행하여 죄가 아닌데 죽였도다. 하늘이 그에게 수년의 수명을 더 주었더라면 정유년의 적이 어찌 전라ㆍ충청도에 쳐들어 올 수 있었으랴. 당시에 뜻 있는 이는 개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뒤에 뒤떨어졌던 왜적이 듣고는 그 진위(眞僞)를 알고자 하여 원수에게 통지하여 충용장군을 보기를 요청하니, 원수는, “집에 돌아가 상(喪)을 마친다.”고 답하였다. 그가 죽은 것을 자세히 알고는 모든 적추(賊酋)들이 술을 마시며 서로 축하하고 날뛰며, 기운을 내기를, “전라ㆍ충청도에는 걱정이 없다.” 하였다.
○ 체찰사 이원익이 경주로부터 진주에 와서 주재하였다. 이때에 부체찰사 김륵(金玏)이 체차되고, 한효순(韓孝純)이 대신하였다. 한효순이 서울로부터 수군에게 무과(武科)를 보이라는 명령을 받고 바로 한산도로 내려갔다.
○ 박진(朴晉)을 갈고 원균으로써 전라 병사로 삼았다.
윤 8월 을축 일식이 있었다. 이날 아침에 천지가 맑고 백일(白日)이 하늘에 오르더니, 오시(午時)가 되자 일식하여 우주가 어두워 지척을 분변할 수 없어 별을 헤아릴 수 있다가 한참만에야 회복되었다.
○ 통신사 황신(黃愼)ㆍ박홍장(朴弘長) 등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향하였다. 황신이 바다에 맹세하는 글[誓海文]을 지었는데, 그 대략에, “이리와 범의 총중(叢中)에 2년 동안 절(節)을 가졌고(중국 사절의 접반사로 부산의 왜진중에 있었다는 말이다), 교룡(蛟龍)의 굴 위에 또 8월의 뗏목을 띄우노라(중국의 전설에 8월이 되면 바닷가에 난데없는 뗏목이 떠오는데 그 배를 타면 은하수에 간다 하였다). 비록 험하고 어려운 것을 갖추 겪으나, 말이 다른 오랑캐에게도 또한 행할 수 있으리라(공자의 말에, “말이 충신(忠信)하고 행실이 돈독하면 비록 오랑캐의 나라에 가서라도 행(行)할 수 있다.” 하였다). 운운.” 하였다. 대마도에 이르러 천사와 더불어 대판(大坂)으로 향하였다.
16일 이원익이 진주로부터 순천에 이르러 머물렀다. 권율이 또한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왔다가 순천으로 가고, 박홍로(朴弘老)도 또한 순천으로 가서 그대로 머물렀다.
○ 부체찰사 한효순이 한산도에 이르러 무과초시(武科初試)를 보였다.
○ 영천 군수 홍계남이 익명서(匿名書)를 얻어서 올렸는데, 그 글에, “곡성에 사는 총군대장(總軍大將) 조계숙(趙啓叔) 부자와 그 옆에 사는 김사총(金射總) 두 사람이 말하기를, ‘이 장군(이몽학(李夢鶴))은 함부로 행동하다가 실패하였으니 그만이지마는 와룡(臥龍, 물속에 누워 있는 용이 장차 일어나면 풍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갈 수 있다는데 비유한 것이니, 장차 새 임금이 될 사람이 나오리라는 뜻이다)이 아직 있다. 인심이 이반되었으니 나라를 얻기는 손바닥을 뒤집기보다 쉽다. 운운.’ 하였다.” 한다. 금부도사를 보내어 조회(趙晦 자는 계숙(啓叔)) 부자와 김장석(金長碩) 등을 잡아 서울에 이르러 추국(推鞫)한 뒤에 조회 등은 석방되고, 한 고을에 사는 충의위(忠義衛) 마윤(馬倫) 등이 무고죄로 반좌(反坐)되어 죽음을 당했다.
○ 이원익이 연해(沿海) 지방으로 향하고, 권율은 남원으로 돌아오고, 박홍로는 금성(金城)으로 돌아갔다.
9월 10일 이원익은 나주에 머물고, 권율은 곡성에 머물고, 한효순은 한산도로부터 남원에 나왔다.
20일 이원익ㆍ한효순이 명령을 받고 환조(還朝)하는데 이원익이 남원을 지나다가 부민(府民)들의 진정에 의하여, 명 나라 병사에게 공급하는 건어물과 염찬(鹽饌)을 연해의 고을에 나누어 배정하여 납품하게 하고, 또 상번(上番) 군사와 각 사찰의 노비(奴婢)의 신책(身責)을 면제하고, 강군(扛軍)으로 나누고, 을미년 이전의 각종 미납(未納)된 물품을 감면하여 주니, 남방 백성들이 손을 모아 축원하고 즐거워 뛰었다. 다음날 서울로 향하였다. - 간 곳마다 백성을 구해 주니 백성들이 살 길을 얻었다. 옛적에 사직(社稷)의 신하가 있다더니, 이 대감이 거기에 가깝도다(한 무제(漢武帝)가 급암(汲黯)을 가리켜서, “옛적에 사직의 신하가 있다더니, 급암이 거기에 가깝도다.” 하였다. 사직의 신하라는 것은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될 대신이란 뜻이다).
○ 두 천사의 패문(牌文)이 일본으로부터 나오므로 가선대부 호조판서 이광정(李光庭)으로 부천사(副天使)의 접반사를 삼았다. - 천사가 대판(大坂)에 이르자 수길(秀吉)이 나와 보는데 조금도 절하거나 봉(封)함을 받을 뜻이 없고, 어린애를 안고 걸터앉아 거만스럽게 말하기를, “무릎 사이에 상처가 있어서 절을 할 수 없다.” 하였다.
○ 이해 병신(丙申) 크게 풍년이 들었으나 목화는 흉년이었다. 중우(中牛)의 값은 곡식 30여 석이요, 굵을 베[麤布]의 값은 한 필에 곡식 80여 말이었다. 벽어(碧魚)는 일찍 났는데 전후에 줄지 않았고, 은순(銀唇 은어(銀魚))이 많이 나기는 고금에 없었던 것이었다. 밭곡식이 더욱 잘되었다.
10월 13일 이광정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는데 본도 감사 박홍로도 또한 금성으로부터 와서 접대할 일을 상의하고, 박홍로는 곧 금성으로 돌아가고, 이광정은 8일 동안 머물다가 20일에 영남으로 향하고, 권율도 또한 영남으로 향하였다.
○ 통신사 황신이 일본에 있으면서 먼저 밀계(密啓)를 보내기를, “행장 등이 천사를 따라 들어가 수길을 보았는데, 수길은 조금도 봉(封)함을 받을 뜻이 없었습니다. 천사가 조칙을 받들고 그에게 절하고 꿇어앉아 받으라 하니, 수길이 말하기를, ‘무릎 사이에 상처가 있어서 절을 할 수 없다.’ 하고, 이내 구류하고 욕보일 마음이 있었습니다. 신에게 대하여는 모욕이 더욱 심하여, 도리에 어긋난 오만한 말로 자꾸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 네 가지 큰 죄가 있으니, 왕자가 석방되어 간 뒤에 아직까지 와서 사례를 하지 않고, 사신(使臣)도 역시 벼슬이 낮은 사람으로 수만 채워서 들여보내었다. 너희 작은 나라가 전부터 나를 무시하여 세공(歲貢)을 바치지 아니하고, 조빙(朝聘)하는 사신이 오지 아니하고, 또 책사(冊使)가 도망하여 돌아가서 다 너희 나라에 머물렀다. 운운.’ 하고, 또 행장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조선에 오랫동안 있었어도 성공한 일이 없으면서 지금 화친을 약속하고 군사를 돌리고자 하니,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니, 청정이 말하기를, ‘다시 출동하여 조선을 평정하고 오겠습니다.’ 하니, 가강(家康)과 행장이 힘껏 만류하여도 안 됩니다. 운운.” 하였다.
11월 두 천사가 대판으로부터 대마도에 이르러 바람을 기다리는데 접반사가 여러 도에 관문(關文 공문서)을 보내어 접대할 일을 준비하게 하였다.
○ 천사의 짐[卜駄]이 대마도로부터 먼저 도착하였는데, 접반사는 영남에는 인력(人力)이 다 되어 운반할 수 없으므로 배에 실어 전라도 광양(光陽)으로 운반하여 남원으로 수송하도록 하였다.
○ 조정에서 황신의 밀계를 보고 일본에 갔다 온 사람들을 통해서 청정이 다시 나온다는 소식을 탐지하였으나 피하자니 갈 땅이 없고, 방어하자니 상대가 안 되어 이에 청야(淸野, 들을 맑게 치우고 사람이나 물자를 모두 성 안으로 들이는 것을 말한다)할 방책을 세워 급히 각 도의 대소 인민들로 하여금 부모 처자가 모두 부근 산성으로 들어가고, 가재(家財)와 곡식을 모두 실어 들이고, 수량이 많아 옮길 수 없는 것과 길이 멀어 운반하기 쉽지 아니한 것은 근처의 깊은 산중에 단단히 묻어 감추고 청야하고서 기다리게 하였다.
○ 이원익이 입시(入侍)하였는데 임금이 적의 상태를 말하고 또 방어할 계책을 물으니, 이원익이 역시 청야할 것을 아뢰었다. 임금이 울면서, “적을 막는 일을 오로지 경(卿)에게 일임하니, 경은 양남(兩南)으로 달려 내려 가서 여러 장수와 더불어 힘을 다하여 조치하고, 죽음으로써 방어하여 적을 나한테로 보내어 다시 용만(龍灣)의 고생이 있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원익이 명을 받고 조복(朝服)으로 눈물을 닦고 물러나와 바로 영남으로 내려와서 청야하고, 성을 지킬 방책을 하여 양남과 호서(湖西)에 명을 전하기를, “여러 장수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모두 관내(管內)의 산성에 들어가고, 대소 사민(大小士民)들은 집에 저장한 곡식을 모두 산성으로 운반해 들여서 청야하고 성을 지켜라. 오는 1월 5일에 종사관을 보내어 적간(摘奸)할 때에 명령을 어긴 자는 일체 군률로 시행하리라. 운운.” 하였다.
○ 배신 정기원(鄭期遠)을 보내어 일본의 봉사(封事)가 이루어지지 못하였음을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다. - 고사(攷事)에서 나왔다.
12월 통신정사(通信正使) 황신과 아사(亞使) 박홍장 등이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건너 먼저 왔다. 이원익이 그들에게서 적이 온다는 경보(警報)가 매우 긴박함을 들어 알고, 각 도에 급히 공문을 보내어 정해진 기일 안에 청야하도록 하였다.
13일 황신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이튿날에 서울로 향하였다.
21일 두 천사(天使)가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건너 돌아왔는데 행장이 같이 왔다. 이튿날에 정사 양방형(楊邦亨)이 부산을 출발하여 밀양으로 나오는데 행장이 호송하여 양산(梁山)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26일 정사가 거창에 도착하고, 27일에 함양에 도착하였다. 이날에 부사(副使)가 부산을 출발하는데 행장이 길 중간까지 전송하였다. 28일에 양방형이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이튿날에 서울로 향하고 이내 명 나라로 돌아갔다.
○ 적장 평행장이 우리나라에 말을 전하기를, “조선에서 대신(大臣)으로써 일본에 인질(人質)을 두겠다는 문서를 만들어 들여보내면, 내가 마땅히 도로 건너가서 관백(關白)에게 이롭고 해로움을 놓고 힘껏 진술하여 청정이 건너오기 전에 중지하도록 하려 한다.” 하였다.
○ 통제사 이순신이 아뢰기를, “신이 마땅히 힘을 다하여 청정의 오는 길을 막으려 하니, 각 도의 수령으로 하여금 진력하여 수병(水兵)들을 들여보내도록 하소서. 운운.” 하였다. 조정에서 부체찰사 한효순에게 수군의 일을 전담하게 하여 3도의 수병 및 격군(格軍), 격량(格糧)을 밤낮으로 조발(調發)하여 들여보내고, 병선(兵船)과 기계를 급히 수리하여 이순신이 적을 막는 힘을 부추겨 주게 하였다.
○ 의주목(義州牧)을 승격하여 부윤(府尹)으로 하였다. - 행재소(行在所)가 되었기 때문이다.
○ 판결사(判決事) 곽재우로 경상도 방어사를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