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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축 우보만리 한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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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이야기 스크랩 충절(忠節)과 애민(愛民)의 땅 아산
우보만리 추천 0 조회 46 15.01.06 22: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충무공의 호국정신이 깃든 고장 아산 - 충절의 고장 아산은 많은 훌륭한 위인들을 탄생시키고, 그 가운데서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이 어린 시절 성장한 곳이자 관직에 나아가기까지 독서와 무예에 힘쓰며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아산에는 이충무공을 모신 현충사를 비롯해 그의 충효사상을 엿볼 수 있는 여러 유적지가 있어, 4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민족의 호국정신을 상징하는 고장으로 이름 높다.

1. 이충무공 영정을 모신 현충사 전경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은 1545년 서울의 건천동에서 태어나 외가가 있는 아산으로 내려와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했다. 젊어서는 아산의 유력가문 상주 방씨에게 장가들어 살았다. 32세 무과에 급제한 후 아산을 떠나 관직 생활을 하다가 1598년 순국한 후 아산에 묻혔다. 그의 사후 뜻있는 선비들이 그가 살던 집 근처에 ‘현충사’를 짓고 제향을 지내면서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전통이 확립됐다.

 

2. 이순신 장군의 표준 영정으로 1953년 장우성 화백이 그렸다. ⓒ현충사
3. 임진왜란 중 쓴 난중일기(국보 제76호) ⓒ현충사

 

호국정신의 요람 ‘현충사’를 돌아보다


현충사는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방화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1706년 충청도 유생들은 충무공 이순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건립했고, 1707년 숙종으로부터 ‘현충사(顯忠祠)’라는 사당의 편액을 하사받았다. 현충사는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됐다가 1930년대 초에 중건됐다. 1931년 국내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신간회가 해체된 후 새로운 민족운동의 방법으로 민족문화 보존운동을 추진했는데, 그 핵심이 이충무공 유적보존운동이었다.

1931년 5월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한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동아일보와 함께 현충사 중건 운동을 전개하면서 성금을 모금했다. 이렇게 모은 성금을 기반으로 현충사가 중건됐고, 영정이 새로 제작됐다. 1932년 6월 5일 아산에서 현충사 낙성식과 영정 봉안식이 거행됐는데, 강원도·경상도·충청도·전라도 등 전국 각지에서 약 3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운집했다. 이렇듯 국내 민족운동 세력은 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아 재결집해 독립의지를 재확인했다. 정부에서는 1957년부터 현충사를 사적 제155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현재의 현충사 건물은 1960년대 성역화 사업으로 경내가 확장된 후 현재의 자리에 새롭게 건축한 것이다.

현충사 경내에는 이순신이 살았던 본가의 고택이 있는데, 원래 월곡(月谷)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처가인 상주 방씨 집이었는데, 부인이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무남독녀여서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살게 됐다. 이순신은 결혼 후 문과에서 무과로 바꾸어 공부했는데, 본가 바로 앞 은행나무 아래에서 활쏘기 훈련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2011년부터는 현충사 앞에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을 새로 지어 이순신 관련 자료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에서 소장 전시하고 있는 대표적인 문화재는 국보 제76호로 지정된 『임진장초』·『난중일기』·『서간첩』이다. 『임진장초』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1592년 4월부터 1594년 1월까지 조정에 올린 장계 즉 공문을 모아 놓은 자료이다. 이순신은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 임진왜란 7년 동안 매년 1권씩 일기를 썼는데, 임진·계사 등 간지를 써서 연도를 구분했다. 정조 때 『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며 일기를 하나로 묶어 간행할 때 『난중일기』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지금까지 『난중일기』로 불리고 있다. 『임진장초』와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의 활약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인데, 전자가 공식적인 기록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이순신의 개인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서간첩』은 이순신이 친척들에게 보낸 편지 여섯 편을 모은 것이다. 이 편지 속에는 자신이 지키고 있는 호남 지역이 국가를 지키는 보루라고 여기고 한산도에 진을 쳤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충무공이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확고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현충사 본전 ⓒ현충사
5. 거북선 모형 ⓒ현충사

 

이순신이 생전에 쓰던 유물들은 일괄해 보물 제326호로 지정했다. 충무공의 장검은 길이가 2미터에 달하고 무게가 4㎏이 넘는다. 1594년 4월 한산도의 진중에서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든 것으로, ‘삼척서천(三尺誓天) 산하동색(山河動色) 일휘소탕(一揮掃蕩) 혈염산하(血染山河)’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는 ‘석자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의 색깔이 변하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는 뜻이다. 명과 왜가 강화 교섭을 벌이고 있는 때라 행여 마음이 흐트러질 새라 장검을 만들어 왜적을 소탕하겠다는 결의를 하늘에 대고 맹세했음을 보여준다. 보물로 지정된 이순신의 유품으로는 갓 머리에 장식하는 옥로(玉鷺)가 있으며, 명나라 장수로부터 선물로 받은 요대와 복숭아 모양의 술잔도 있다.

『초계 변씨 별급문기』·『상주 방씨 정경부인 교지』·『무과급제 교지』·『사부유서(賜符諭書)』·『둔전검칙유지(屯田檢飭有旨)』 등의 이순신 관련 고문서는 일괄해 보물 1564호로 지정되어 있다.

『초계 변씨 별급문기』는 이순신의 어머니 초계 변씨가 1576년 아들의 무과 급제를 축하하기 위해 이순신과 형제들에게 토지와 노비를 나누어준다는 문서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은 1576년의 문서가 아니다. 처음 작성된 문서는 1584년 불에 타서 없어져서 1588년 다시 작성됐다. 현재 보관 중인 문서는 1588년에 재작성된 것이다. 이 문건을 보면 이순신과 형제들에게 분급된 노비는 모두 22명이다. 그리고 분급된 토지와 노비가 아산과 인근 온양은 물론 은진·영광·나주·영변·평산 등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이를 볼 때, 이순신 가문은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양반가였다고 하겠다.

『상주 방씨 정경부인 교지』는 1598년 이순신이 전사한 뒤인 1603년 이순신에게 우의정을 증직할 때 부인 상주 방씨를 정경부인으로 봉한다는 교지이다.

『무과급제 교지』는 이순신이 1576년 32세 때 식년 무과에 병과 제 4인으로 급제할 때 받은 교지이다. 병과 4인은 합격자 29인 중 12위에 해당되는 성적이다. 이순신은 1572년에 시행된 훈련원 별과시험에서 낙방한 바 있다. 그로부터 4년 뒤 절치부심해 노력한 끝에 과거 급제한 것이다. 이순신은 어려서는 집안 어른들의 뜻에 따라 문과 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상주 방씨네에 장가든 22세 이후 무과 출신인 장인의 영향을 받아 무과 시험공부를 했다. 그로부터 10년 만에 무과 급제의 뜻을 성취한 것이다.

『사부유서(賜符諭書)』는 1594년 7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될 때 받은 임금의 명령서로 군사지휘권을 부여한다는 문서이다. 임금은 이 유서와 함께 군사를 동원해 지휘할 수 있는 ‘발병부(發兵符)’를 반으로 쪼개어 군사 책임자에게나누어 주었다. 군사 책임자는 군사를 동원하라는 왕명을 받게 되면 왕이 보낸 반쪽의 병부와 자신이 갖고 있던 반쪽의 병부를 맞추어 보고 왕명의 사실 여부를 판단했다. 『사부유서』는 당시 군사 동원 체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둔전검칙유지(屯田檢飭有旨)』는 선조가 1595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군량 확보와 백성 구휼 등을 위해 둔전 경영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 문서이다. 이를 보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왜적과의 전투를 수행한 군사지휘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통제사 관할 지역의 경제와 민생도 챙기는 목민관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 이순신 장군 장검(보물 제326호) ⓒ현충사
7. 이순신 장군 옥로(玉鷺, 보물 제326호) ⓒ현충사

 

충무공의 얼을 만나는 아산의 유적지


현충사 이외의 이충무공 사적지로는 이충무공 묘소가 있다. 묘소는 현충사에서 북쪽으로 9㎞ 떨어진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고룡산로 어라산에 있는데, 조상들의 묘와 함께 있다. 본래 충무공은 1598년 순국한 후 전남 완도의 고금도에 모셔졌다가 1599년 2월 아산의 음봉면 산정리 금산 동남쪽에 옮겨 모셔지고, 1614년 현재의 위치로 이장됐다. 이 지역은 이순신의 외가 초계 변씨의 땅이었는데 이순신 집안의 선산이 됐다고 한다. 아산에서 이충무공 유적지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게바위 나루터로, 인주면 해암리 곡교천 하류에 위치해 있다.

이순신은 1597년 4월 백의종군을 위해 서울에서 내려와 아산 본가에서 묵고 있던 중 여수에서 아들을 보기 위해 배를 타고 오던 어머니의 부음을 듣게 됐다. 이에 급히 게바위 나루터에 가서 배에 올라 어머니의 시신을 입관하고 본가로 모셨다. 효심이 지극했던 이순신은 백의종군 중이어서 어머니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남쪽의 근무지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큰형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을 일찍 여의어서 이순신은 어머니와 함께 집안 식구들을 돌보야만 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어머니를 ‘천지(天只)’라고 불렀는데, 이는 『시경』에서 따온 말로 ‘오직 하나 뿐인 하늘’이라는 뜻이다. 그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국가와 가족의 위기 상황을 극복해야만 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가졌는데, 어머니는 그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하늘과 같은 존재였다. 게바위는 백의종군하는 죄인의 처지에서 어머니를 잃고 장례도 치르지 못한다는 탄식과 아픔을 전하고 있다.

한반도를 인체에 비유한다면 아산은 바다가 내륙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아산만을 끼고 있어 생명의 탯줄이 있었던 배꼽 부위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에서 아산을 ‘동남(東南)의 길방(吉方)’이라고 했는데, ‘학문과 시문에 뛰어난 현달한 선비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산은 세종대의 명재상 맹사성(孟思誠), 과학자 장영실(蔣英實),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홍가신(洪可臣),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제창한 이간(李柬), 19세기 산림(山林) 유학자 임헌회(任憲晦), 대통령 윤보선(尹潽善) 등 수많은 역사인물을 배출한 민족문화 발전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8.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1등으로 책봉한다는 내용의 증직교지(보물 제1564호) ⓒ현충사

 

글 김기승(순천향대학교 국제문화학과 교수, 아산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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