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교육부서 말씀일기 본문은 시편 68:29-33 인데
지난번에 통째로 올려서
오늘은 교회전체 말씀일기 본문인 욥기 3장을 정리해서 올려보겠습니다.
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2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3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4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5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6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7 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8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9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10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욥의 재산이 날아가고 자식들이 한꺼번에 다 죽어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순전함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그의 몸이 침을 받았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나서 쓰레기 더미에 앉아서 기왓장으로 긁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욥의 아내는 당신처럼 그렇게 순전하게 여호와를 경외하였는데도
이런 재앙을 내리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욥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화도 받지 않겠느냐며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욥의 아내도 사라지고,
더 이상 천상에서 사탄의 참소도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욥의 세 친구들이 등장하였습니다.
드디어 욥이 입을 열어 자기 생일을 저주합니다.
결국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탄식하면서
왜 나를 태어나게 하였느냐고 그 날이 없었다면 좋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무효화하고 싶은 마음인 것입니다.
사탄과 욥과 욥의 친구들의 말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욥이 어떻게 고난을 이기고 복을 받았는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욥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봐야 합니다.
자신이 잉태한 날, 자신이 태어난 날이 없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무효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기 생일에 대한 저주와 탄식은
결국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서려 있습니다.
그런데 욥의 이러한 탄식에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증언한 내용들이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한 자들의 탄식’입니다.
자신이 잘못하여 오는 고난이 아닙니다.
욥도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까닭 없는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예표하고 있습니다.
욥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리스도의 까닭 없이 당할 고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그 아들의 희생으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의 비밀이 담긴 고난입니다.
이러한 ‘고난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제 그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그 영을 자기 백성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로마서 8:18~23절.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욥의 탄식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의 완성으로 부활이 있습니다.
그 부활의 생명을 넘겨받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특징이 ‘탄식’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유 없는 탄식이 아닙니다.
구약에는 그림자로 보여주시는 탄식이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된 탄식이 성도에게 일어납니다.
이러한 탄식은 몸의 속량이 일어날 때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그 몸의 속량 곧 몸의 부활이 일어날 때까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도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눈에 보이는 소망이 아닌 보이지 않는 소망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4~30절.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성도는 묵시 안에서 이미 의롭고 영화롭게 된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이 역사 속에서 탄식하며 고통 하는 것은
몸의 구속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탄식이 나올수록 성도는 몸의 구속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성령님과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성도를 끊어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이 땅에서 탄식하는 중에 받는 위로입니다.
오늘도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로서
고난 가운데 ‘탄식’하며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