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도 운문면과 경남 울주군의 경계 운문령(雲門嶺`739m)은 숱한 전설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예전 울산, 경주에서 해물을 지고 내륙 창녕, 고령 방면으로 가려면 운문령 고갯길을 이용해야 가장 단거리로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원광법사가 이곳 가슬갑사에서 주석하고, 화랑들이 국경지대에서 무예를 연마하며 삼국통일의 원동력을 샘솟게 한 곳이 바로 운문령 일대다. 청도군은 운문면 일대에 신화랑 풍류체험벨트를 조성, 화랑정신 발상지로 면모를 세우고 있다.
운문령 주변 산은 형형색색 단풍길로 변신할 준비를 하고 있다. 길을 따라 먼 옛날 신라 화랑도와 민간 전설을 따라가면 단풍이 든 옛길이 한결 운치있게 다가올 듯하다.
◆구름이 멈추어 구름문을 이루는 운문령
청도 운문댐을 지나 방지초교 문명분교 앞 삼거리에서 왼쪽 울주 가는 길을 따라가면 운문령 가는 길이다. 운문령은 왼쪽은 문복산(1,014m), 오른쪽은 가지산(1,240m), 운문산(1,188m)을 이고 그 사이를 지나는 고갯길이다.
운문령 정상 좌`우편은 해발 1,000m가 넘는 문복산과 가지산이 우뚝 솟아 있다. 이처럼 높은 산이 자리 잡고 있어 지나가는 구름이 산허리를 넘지 못한 채 멈추어 구름문을 이루고 있어 운문령이라 이름 지었다 전해진다.
요즘 운문령 일대는 차량 통행이 빈번하고, 운문 신원리 방면에 펜션이 가득 들어서 여름철에는 피서 인파로 한바탕 법석을 떤다. 하지만 시대를 조금만 거슬러 가면 운문사 입구마을과 통점마을이 사람이 사는 마지막 곳일 정도로 깊숙한 산중이었다.
이런 운문령 고갯길은 6`25전쟁 전후 일대에 포진한 공비 토벌을 위해 군인들이 확장공사에 나섰다는 사연도 간직하고 있다.
청도군 임형수(52) 씨는 “이곳 산 일대는 송진 채취와 병충해 등의 이유로 나무를 베어 내다파는 산판이 곳곳에 있어 인부를 대상으로 한 식당이 있었고, 이후 자연부락을 이루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아쉬운 점은 이곳 운문령 일대가 활엽수로 수종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운문사 일대는 절에서 소나무를 모두 지켜내 울창한 소나무 군락을 유지하고 있다.
◆신라와 함께 호흡한 운문 신원리
운문령이 속한 신원리는 깊은 계곡이 이리 굽고 저리 돌아 흐르고 있다. 신원리는 또한 운문산을 비롯해 가지산`억산`문복산 등 해발 1,000m 이상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은 자연히 신라시대 비밀군사 요지로 중요성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라에 중요한 세속오계 등 국민윤리가 창출된 연관성이 있는 곳이다.
신라 진평왕이 원광국사와 국사를 의논하기 위해 찾아와 머물렀다는 황정리(皇停里)는 운문사 입구마을 이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화랑들은 이곳에 산재한 오갑사에서 정신무장을 하면서 무예를 연마, 장차 국가의 간부로, 또한 삼국통일의 대과업을 이루기 위한 의지를 다져 나갔다.
지역 향토사가들은 원광국사의 밝은 이치, 화랑의 충성심과 기개에다, 이곳의 지형적인 요충지 성격도 혼연일체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신원리의 역사는 신라와 호흡을 같이한 곳이다. 원래 염창(鹽倉`염챙이)이라는 지명은 신라시대 화랑들이 훈련 중 일체의 부식물을 저장`보관하는 곳간이 있던 곳이고, 삼국통일 후에는 운문사가 번창하며 승려들의 부식물을 저장하는 곳이다.
◆신라 화랑들의 무예연마 터전
최근 여름 피서지로 각광받는 삼계리는 신라 원광법사가 머물면서 화랑의 정신교육을 한 가슬갑사가 자리했던 곳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가슬갑사는 운문사 동쪽으로 9천 보쯤 떨어진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슬갑사는 신라 세속오계 발상지였다는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숱한 유적이 후대에 인위적으로 철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나오고 있다.
지역 주민 박정곤(52) 씨는 “가슬갑사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신라 고급 토기 파편과 가마터, 기와 등이 나왔다는 사실을 지표조사단으로부터 전해 들었다”며 “절의 규모가 매우 큰 도량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가슬갑사 추정지 뒤편 문복산은 경주 산내면과 운문령, 삼계리 마을을 아우르고 있다. 화랑들이 무술을 연마하였다는 이곳 문복산록과 운문면 지촌리와 경주 산내면의 경계에 있는 장육산, 육장굴 또한 화랑과 연관된 흔적이 남아 있어 화랑과 군사들의 훈련도장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랑들의 수련도장이었던 만큼 운문령 일대는 무기 제조도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운문산을 중심으로 인근 언양 지역 등과 함께 영남지역에서 철을 다루는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전해진다. 청도 지역의 풍부한 연료(숯 장작), 특수한 점흙 등의 조건과, 언양 지역에 품질 좋은 철광석이 많이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청도 지역에서는 활발한 제련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운문령, 신원리 일대는 제련시설의 찌꺼기인 슬러지 흔적이 남아있으며,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무렵에는 수명이 길고 품질이 뛰어난 솥으로 유명한 속계 솥이 전국 각지에 공급되었다는 기록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지룡산성 등 민간전설도 전해져
운문령 고갯길에는 수많은 민간 전설도 전해진다. ‘호랑이를 사랑한 처녀’ ‘아들을 살린 부덕’ ‘원광의 신통력’ ‘나팔고개’ 전설 등이 있다.
운문면 신원리 지룡산에는 지룡산성 성축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지룡산은 후백제 왕 견훤이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전설에 따른 지명이다. 그 높은 산정에서 견훤이 백제군을 훈련한 후 쓰다가 묻은 백제 동제식기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지룡산성은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는 계기가 되었다. 산성을 축조한 견훤이 경주를 공략하자 신라는 고려에 항복하게 되고, 그 뒤 고려에 의해 후삼국이 통일되었던 것이다.
조선 헌종 때 암행어사 박문수의 봉변 전설도 전해진다. 박문수는 경상도 어사의 임무를 띠고 언양 고을의 민정을 살핀 다음 청도 땅으로 가기로 하고 종인들과 헤어졌다. 깜빡하고 노잣돈을 종인들에게 모두 맡겨 무일푼이 된 어사는 운문령 고개 위에 이르러 수수떡을 부쳐 파는 두 여인을 발견한다.
한 여인에게 떡 한 푼어치를 간청했으나 여자로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밤송이나 까라”는 음담패설을 듣게 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여인은 어사를 위로하며 돈을 받지 않고 떡을 내밀었다.
청도 동헌에 도착한 어사는 까지 않은 밤송이를 준비하고 두 여인을 데려오게 했다. 욕을 했던 여인은 비로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어사는 “네 소원대로 밤송이나 까보라”며 이 여인을 준엄하게 꾸짖고, 착한 여인에게는 상금 100량을 내렸다. 이 소식은 대궐 신하에게도 전해져 조정을 한바탕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청을 들어줄 수 없을 경우 “밤이나 까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부자암, 무장공비와 추모비
삼계마을에서 1.5㎞ 지점 생금비리 계곡 도로변에는 부자암(父子岩)이라는 큰 바위가 모진 풍상에도 버티고 앉아 있다. 차를 타고 가면 연유를 알 수 없는 바위다.
부자암은 독특한 내용을 지닌 바위다. 1994년 일대 가슬갑사지 지표조사팀이 바위의 각문을 판독한 결과 7년간 헤어졌던 부자가 부자암 아래에서 상봉한 지 300여 년이 지난 후에 후손들이 감격스런 뜻을 이어받기 위해 글을 새겼다는 내용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피란길에 오르며 헤어진 아버지를 찾기 위해 아들은 각 지방을 두루 돌았으나 찾지 못하다 1598년 생금비리 계곡 큰 바위 아래에서 밤을 새우게 된다. 이튿날 바위 동쪽에 한 노인이 자고 있다가 일어나는데 바로 부친이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신기함에 감복하였고, 이 기적 같은 만남을 두고 부자암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격언도 있으나 백행의 근본인 효의 덕목을 말해주고 있음이 아닐까 한다.
운문산 자연휴양림 인근에는 정두표 추모비가 자리하고 있다. 1967년 6월 수명의 무장공비가 출현하자 정두표는 쌀을 구하러 간다며 속이고 산을 내려가 경찰을 데리고 온다. 이 사실이 숨어있던 공비에게 발각되면서 격투 끝에 죽음을 당한 의인을 운문면 주민들이 그 정신을 기리며 세운 비다.
청도`노진규기자 jgroh@ms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