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이기영(李箕永, 1895-1984) |
국가 |
한국 |
분야 |
소설 |
해설자 |
노현주(경희대학교 교양학부 강사) |
핍진(乏盡)한 현실에 대한 입체적 형상화
이기영은 일제하 프로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오빠의 비밀편지>(1924. 7)로 문단에 나온 후에 바로 이어지는 카프 가맹은 그의 문학적 진로와 지향을 계급주의에 입각한 리얼리즘 문학으로 이끌었다. 이기영이 일제하에서 창작한 작품 수만 하더라도 90여 편에 이르는데, 이는 프로문학 작가들이 창작과 관련한 방법론과 이론 논쟁에서는 의미 있는 논의를 남긴 반면 실제 창작물에 있어서는 성과가 빈약한 것과 대조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기영이 계급주의 문학의 이론을 구체적 작품을 통해 실체 있는 것으로 형상화했다는 말과 통한다.
이기영의 작품 활동은 1925년 카프 가맹과 더불어 본격화된다. 따라서 그의 소설 세계는 카프의 이론 전개와 더불어 소설 세계가 변화ㆍ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초기에 영웅적 주인공을 내세우며 계급사상에 입각한 계몽주의 를 표방했고, 1927년 카프의 제1차 방향전환 즉, 목적의식기에는 계급의식이 없던 인물이 무산자 계급의식을 각성해 가는 과정을 그리는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이 시기의 주인공들은 추상적인 계급의식을 당위적이고 직설적으로 토로한다는 점에서 아직은 추상적이기도 하다. 1930년대 들어 이기영의 작품들은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과 관련한 볼셰비키화 노선1)을 따라 계급투쟁의 실천을 부각시키는 양상을 보인다. 노동자, 농민들이 진보적 지식인에 의해 계급의식을 각성하고 자본가와 전선을 구축하고 파업을 감행한다든지, 지주에 대항해 단결된 행동을 보여주는 등의 실천적 모습들이 형상화된다.
이렇게 본다면 이기영의 소설들 또한 이론의 우위 현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기영이 프로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평가받는 이유는 이론의 적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탁월한 리얼리즘의 형상화에 있다. 특히 농촌을 소재로 한 작품들의 경우 풍속에 대한 생동감 있는 묘사, 하위 계층의 현장감 있는 언어들, 상징성 짙은 핵심 소재 등을 통하여 이념과 이론의 생경한 흔적을 지우되 비판적이고 고발적인 시각을 살리고 있는 것이다. 이기영이 다양한 노동자 소설, 지식인 소설, 이념 소설 등을 썼으나 농민 소설 작가로 이름이 난 것은 단순히 그 작품의 수가 많아서만은 아닌 것이다.
프로문학에서 이기영의 역할이 이러할진대, 이기영과 관련하여 유독 그의 대표작 ≪고향≫만이 논의와 고려의 주된 대상이 되고, 이기영에 관한 전반적인 연구와 조명이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못한 것은 그가 해방과 더불어 북에서 활동하며 ≪땅≫, ≪두만강≫ 등 북한의 대표적인 작품을 창작하고 북한 문학예술 분야의 고위직을 거쳤다는 것이 그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여기 소개할 세 편의 작품은 각기 1927년, 1930년, 1933년에 쓰인 작품들로서 이기영의 다양한 작품 세계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다. <호외>는 비교적 초기의 작품으로 노동자들의 조합 활동과 파업 과정을 그렸다. 초기의 작품이 띠었던 당위적 계급의식과 추상성이 보이기는 하지만, 노동자들의 세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작품이다. <조희
는 사람들>은 진보적인 지식인에 의해 계급의식에 눈을 뜨고 단결하여 자본에 맞서는 제지공장촌 노동자들의 이야기로, 이기영 소설의 장점인 실감나는 현장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서화>는 당대의 평판작으로서 3ㆍ1운동을 전후한 농촌의 현실을 농민의 시각에서 실감나게 보여준 작품이다. 세상이 문명화된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점점 황폐해지는 농촌의 삶을 풍속의 소멸과 그 대신 횡행하는 노름을 소재로 형상화했다. <서화>는 이기영의 대표작 ≪고향≫의 전주곡에 해당하며, 이기영 소설이 정점으로 향해가는 교두보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서화>가 농촌 현실의 모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황폐화되는 농촌의 모순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에는 이르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면, 식민지적 근대화가 불러온 생산관계의 기형성이 농촌 파탄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마름제도를 통해 형상화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 ≪고향≫이기 때문이다.
<호외>는 C제철소의 노동조합 소속 노동자들의 회합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다. 조합을 이끄는 노동자들은 계급의식을 선취한 이상적 인물들로 그려진다. “그들의 힘 잇게 드듸는 발자옥 억세인 주먹,
는 어둠속에서 빗나는 눈!―그것은 모다 힘의 상증(象徵)이엇다”로 묘사되는 조합의 노동자들은 “다 갓흔 사람으로서 엇지해서 누구는 편하게 놀면서도 부자로 잘살고 누구는 밤낫 일만 하여도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워서 굴머 죽게 되는가”라는 문제제기를 하며 계급운동의 당위성을 제시한다. 이 소설은 공장 측에서 조합 소속 노동자들을 단순한 폭행사건을 빌미로 해고하려 들자, 다른 노동자들이 그 부당성을 근거로 협력하여 대항하는 사건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러한 대항은 파업으로 이어지고 C제철소의 파업에 이어 전기회사의 파업이 이어졌음을 알리는 호외가 배포되는 급박한 장면으로 결말을 맺는다.
이 소설의 미덕은 자본가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을 단순 미화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이 짧은 소설 속의 노동자들은 열성 조합원, 스파이로 의심되는 조합원, 감독 편 노동자, 새로이 계급의식을 각성하는 노동자 등으로 분화되어 있다. 이렇게 분화된 노동계급의 구성은 사실상 노동 현장의 그것과 근접한 것으로서 노동자의 실체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는 노동자들을 계몽ㆍ선도하는 지식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계급주의 운동을 이끌고 선도하는 자들은 노동조합의 노동자 자신들이다. 또한 무각성의 상태에서 계급의식의 각성으로 변모해 가는 노동자인 성득의 경우에도 조합의 중심 격인 박준철에 의해 변화하게 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소설의 절정 부분에서 성득은 준철 등의 조합원들이 해고되는 순간 공장의 파업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는데, 급작스럽게 돌변한 인물의 성격이 자연스럽지 않으나, 목적의식기의 카프 문학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계급적 각성이 어떻게 한 인간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극적 효과를 기도한 장치라고 할 것이다.
<조희
는 사람들>은 제지공장촌의 수공업적 생산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벌인 임금투쟁의 과정을 담고 있다. 임금투쟁이라고 하면 공장을 배경으로 노동자들과 공장 측과의 관계를 떠올리기 마련이나, 이 소설은 전근대로부터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독특한 형태의 생산관계를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산협에 위치한 공장촌은 가내수공업 공장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소규모 물주들이 일공 노동자들을 데리고 종이를 생산하여 지물상들에게 파는 형태를 취하는 구조다. 이곳에 자본을 투자하여 대규모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회사가 나서고 물주들은 이 회사로 편입되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물주들과 노동자들은 공전, 즉 임금을 턱없이 책정하는 교묘한 술책에 어이없이 당하게 된다. 이에 물주들이 연합하여 회사를 상대로 파업을 벌이게 되는 것이 이 소설의 중심 사건이 된다.
여기서 눈여겨볼 사실은 물주와 일공 노동자들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종이 생산 단위가 공장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정상적인 근대화 과정을 거쳤다면 산업화의 근간이 되는 근대적 공장의 형태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소설은 근대적 발전 과정이 아니라, 기형적 몰락 과정을 보여준다. 식민지의 근대화 과정에서 물주를 중심으로 한 초기의 공장형태가 대형 회사의 노동자들로 다시 편입되고 그 지위와 경제적 여건이 점점 더 하락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농촌에서 부농이 빈농으로,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소작농이 머슴으로 점점 지위가 하락하고 빈궁함이 평균화되는 현상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물주인 장 별장과 장 별장네 공장으로 들어온 지식인 황운이 주도하는 동맹 파업은 장 별장과 황운이 체포되면서 실패하지만, 황운의 활동에 의해 각성된 노동자들이 후일을 도모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마무리된다. 지식인이 교사적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프로문학의 전형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파업 과정에서 생계와 당위 사이에서 갈등하는 노동자들의 의식세계를 그림으로써 입체성을 확보하고 있다. 회사 쪽과 내통하는 물주, 투쟁파와 타협파로 분열되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소설에 현실성과 입체성을 부여해 주고 있다. 더불어 소설 내에 등장하는 종이 뜨는 작업 과정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근대적 기계식 공장도 아니요, 농촌의 풍경도 아닌 색다른 형태의 생산과정에 대한 지식에 접근하게 해준다.
<서화>는 제목 그대로 쥐불놀이에서 시작된다. 소설은 주인공인 ‘돌쇠’가 과거에 비해 보잘것없이 행해지는 쥐불놀이를 보며 느끼는 실망과 섭섭함을 이야기하며, 마을 사람들의 살림이 해마다 줄어들고 곤궁해지는 것이 그 이유라고 말하고 있다. 예전의 쥐불놀이는 승벽도 대단하여 동리마다 장정들이 나서서 육박전을 벌이기도 할 정도로 대단한 놀이이자 축제였다. 일 년의 농사를 예비하는 성격을 지니기도 하는 쥐불놀이는 농민들의 건강한 열기를 동반하는 것이었으나, 이것이 점차 쇠락한다는 것은 농민층의 몰락과도 대응하는 것이라 하겠다.
해마다 쇠하여 가는 쥐불놀이가 농촌 마을이 점점 피폐해지는 것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면, 돌쇠가 벌이는 노름판과 그로 야기된 사건은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농촌의 피폐상을 역설하는 서사 축이고, 여기에 돌쇠와 응삼의 처 이쁜이의 관계는 작가의 전근대적 결혼 제도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반영하는 서사 축이 된다.
농촌의 현실은 “사실 해마다 농사를 짓는대야 도조 치르고 구실을 치르고 나면 농사지은 빗은 도리혀 무러느어야 하는 오그랑 장사”다. 때문에 “일 년 내 농사를 지여야 먹을 것은 제 동을 못 대고 식구는 만흔데 굴머 죽을 수는 업스니” 노름이라도 해야 한다는 돌쇠의 변(辯)은 도덕률을 넘어서는 극한의 생활의 진실에 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김원준의 계략으로 정 주사 집에 모인 마을 사람들 앞에서 돌쇠가 자신의 노름에 대해 항변하자, 동경 유학생 정광조는 마을에서 도박하지 않은 자가 있는지를 되묻는다. 농촌의 현실이 도박에라도 기대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모두가 경험하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결혼한 자들의 불륜이 강제 결혼과 조혼의 폐해에서 비롯되었음을 주장하며 자유연애가 합당하다는 주장을 펼치게 되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돌쇠와 이쁜이에 대한 변론이 된다. 돌쇠가 농촌 현실과 전근대적 인습의 모순 속에서 그것을 체득하고 갈등하는 인물이라면, 정광조는 그러한 갈등이 비롯된 현실적 모순을 이론적으로 논리화하는 역할을 한다. 소설은 정광조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마무리되고 있는데,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은 돌쇠로 하여금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갈등과 변화에 대한 갈급함을 더욱 부추기며 빈농으로서의 계급적 각성을 독려하는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이전의 프로 소설들이 다루었던 지주의 횡포, 농민들을 의식화하는 지식인 활동가, 빈농들의 저항 등을 내세우지 않고 노름과 불륜이라는 농촌의 현실적인 일탈 사건을 통해 농촌 현실의 모순의 본질이 어디에서 연원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쥐불놀이와 정월 대보름의 풍속에 대한 묘사를 통해 상대적으로 풍요했던 과거와 당시의 핍진한 현실을 대비하고, 세시 풍속의 쇠락과 농촌의 쇠락을 짙은 상징성으로 연관시킴으로써 계급주의 현실 반영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각주
- 1) 볼셰비키화 노선: 임화, 김남천, 안막 등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예술은 운동에 복무해야 하며 프롤레타리아 당 조직의 지시를 받아 계급운동을 선전ㆍ선동하는 전위적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예술 방향론이다. 카프의 2차 방향전환을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