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전통사회를 이해하는데 큰 몫을 하는 게 성씨(姓氏)이다. 우리는 어디 김씨 어디 이씨 하는 식으로 성과 본관이 있고, 너나 할 것 없이 오래된 족보의 연원도 있다. 대부분이 매우 유명한 분을 시조로 모시고 중간세대쯤에는 현달한 중시조도 있다.
우리 전통사회는 이 성씨를 기본으로 혈연과 지연으로 얽혀 있으며 나아가서는 정치와 사회의 큰 축을 형성하기도 했다.
성씨의 유래에서 성(姓)과 씨(氏)는 한동안 달랐었다. 원래 중국 고대의 성(姓)은 같은 혈족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했으나 얼마 뒤 씨(氏)는 특정성에서 갈라진 분파를 의미했다.
예를 들어 강태공의 성은 강(姜)이고 씨는 여(呂)이다. ‘태공망 여상’이 강태공의 제대로 된 직책과 이름이다. 성은 강씨이나 할아버지 대에서 씨를 呂로 받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과 씨를 구분해오다 전국시대 이후부터는 성과 씨의 구별이 사라지고 하나의 개념이 된 것이다.
성씨는 발생한 이래 계속 분화하면서 같은 조상이면서 성을 달리하기도 하고, 같은 성이면서 조상이 다르기도 했다. 때로는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가 하면 더러는 어머니의 성을 따르기도 했다. 또 남의 성을 모방하거나 변성(變姓), 사성(賜姓), 자칭 성(自稱姓)하기도 했다.
이렇게 성씨가 다양화되다 보니 중국은 2천5백여개의 성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250여개의 성이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성이 보편화된 일본의 경우 밭일하다가 아이 나으면 다나까(田中), 물가에서 낳으면 시미즈(淸水)하는 식으로 창씨를 하다 보니 10만개에 이르는 성이 있는 건 예외로 치고 말이다.
그러나 빼어난 선조의 후손임을 자부하는 우리나라 성씨에 얽힌 내력이 어느 정도가 사실인가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영남대학교 이수건 교수에 따르면 조선조 후기 이래 최근까지 각종 족보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이를 분석해 보면 당대인의 기재에는 큰 문제가 없으나 각 성씨의 유래와 분관(分官)·분파(分派) 그리고 조상 세계에 관한 기술은 역사적인 사실과 너무나 어긋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 교수에 따르면 대체로 조선조 초기에 족보를 발간했거나 초안해 놓았던 가문은 후기에도 내용이 충실한 족보를 속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 정리 단계를 거치지 않고 조선 후기 내지는 말기, 또는 일제시대에 들어와 족보를 편찬하려했던 가문은 그들의 조상 世를 추적하여 계보화 하기에는 자료가 없어 가승(家乘)이나 족보는 자의적인 조작과 수식이 가해 졌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후기에 처음 나온 족보들은 자기 조상이 신라 내지는 고려시대 왕실 후예이거나 공신 또는 주요 고관 요직을 지낸 명문 출신으로 기술하였고, 이를 강조 하다 보니 선대의 세계가 상당히 소급됐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 모화사상에 젖어 자기 조상의 유래를 중국에서 찾으면서 현존하는 족보 가운데는 그 시조가 중국 출신이 많다. 중국인을 시조로 꼽는 성 가운데도 유달리 강태공의 후손이 많다. 중국 역사에도 강태공의 후손으로 다른 성을 받은 경우가 120여개성이나 되니 당연히 그럴 수도 있기는 하다.
서주(西周)가 상나라를 멸망시킬 때 주 문왕을 도와 가장 큰 공을 세운 강태공은 제 땅을 봉 받고 이후 국력을 키워 10여세 후손 환공 때는 춘추전국시대의 패자가 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의 후손들은 사는 지역, 정치적인 역할에 따라 수많은 성을 받게 되면서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성씨만 120여개 성에 이른 것이다.
제나라의 수도였던 중국 산동성 치박시에는 강태공의 사당이 있다. 이곳은 강태공이 서주 호경에 매장됨에 따라 제나라 사람들이 그를 흠모해 옷과 의관으로 무덤을 만들고 사당을 세운 것이다. 중국 병가(兵家)의 초조 대접을 받는 강태공인 만큼 이곳에는 손무와 손빈, 제갈량 등 수많은 후대 병법가들의 위패와 함께 다른 성으로 분파한 후손들의 위패가 있다.
이 가운데 한국에서 누구라 하면 알만한 분의 집안과 다른 몇 성씨에서 오석에 한국어를 곁들여 강씨에서 분파해 나온 후손임을 알리는 비석이나 지석을 만들어 사당 주변에 안치해 뒀다.
2천4백여년을 지탱해온 공자의 후손들이 이제 78대쯤이니 이보다 6백년이 넘는 강태공의 후손들이 중국도 아닌 한국에서 100대를 넘나드는 가계를 이어온 게 사실이라면 정말 엄청 대단한 일일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을 믿느니보다 일본식의 ‘다나까’, ‘시미지’의 성이 더 분명하고 “나는 4대 조상까지 밖에 모른다.”고 하는 게 더 솔직한 일로 인정해야 할 것 아닌가? 거짓의 역사는 현실의 삶도 거짓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일이기에 하는 말이다.(경북매일신문 2008년 8월28일)
임진왜란 이후의 족보와 신분 변화
1392년 조선(朝鮮)이 개국된 후 임진왜란(壬辰倭亂ㆍ1592~1598) 때까지는 양반은 전체 인구의 10% 정도였다. 그런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끝나면서 신분제의 동요가 일어나게 된다. 양반들이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도망질한 다음 도리어 일반 농민, 상민, 서민들이 의병을 조직해서 관군보다 더 큰 전과를 올리자 양반과 지배층에 대한 회의와 저항감이 생겼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 임금과 지배층이 한양을 비우고 평양과 신의주로 떠나자, 가장 먼저 불태워진 것이 노비문서가 보관되어 있던 관청인 장례원(掌隸院)이었다.
▲ 고려 공민왕 3년(1354년) 윤광전이 아들 윤단학에게 노비를 상속한 총8매의 노비문서(보물 제483호).
조선 초의 노비수는 성종(成宗) 때 전국의 호구가 100만 호에 340만 명이며, 노비도 총 150만에 이른 것으로 추산되므로 전체 인구의 1/3에 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려 이래로 노비의 소생은 부모 중에 하나가 노비이면 노비가 되게 하였기 때문에 숫자가 늘어나 군역부담자가 감소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자, 태종 14년(1414년) 양인(良人)을 증가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종부법(從父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에 따른 폐단이 생겨나면서 시행과 폐지에 대한 논의가 거듭되다가 세조(世祖) 때 다시 종래의 법으로 환원하였으며, 이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화하였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국가재정이 악화되고 기근이 발생하면서 납속(納贖)하는 노비에게 면천(免賤)을 허락하였고, 이를 계기로 재정과 변방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납속(納贖)이 계속 시행되었으며, 임진왜란이 끝나고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돈 많은 서민과 양민들에게 돈을 받고 양반직을 파는 공명첩(空名帖)이 생겨났고, 돈으로 관직과 지위를 얻게 되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의 행위들도 생겨났다. 노비들도 일정량 이상의 양곡을 바치는 노비에게는 양인(良人)으로 올려주는 납속책(納贖策)을 이용해서 평민으로 신분 상승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에는 전인구의 40%에 달했던 노비의 비중이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10% 이하로 떨어졌다.
어제만 해도 같이 옆 마을에 살던 돌쇠가 언젠가부터 위조 족보를 들고 양반행세를 하니까, 밥술깨나 먹는 집은 전부 다 신분 상승을 꿈꾸었다. 양반이 되면 군역(軍役)이나 각종 세금도 면제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숙종(肅宗ㆍ1661~1720) 때는 조선 초기에 10%였던 양반이 30% 정도로 증가하고, 철종(哲宗ㆍ1831~1863) 때에 이르러는 50%를 넘기게 된다.
이앙법(移秧法)이 고려와 조선 초기에는 일부의 삼남지방에만 보급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확대 보급됨에 따라서 부농(富農)과 빈농(貧農)이 생기게 되고, 부농들은 자신들의 부(富)를 기반으로 하여 양반이 되고 싶어 했으며, 그래서 조선 말기에 신분의 변동이 크게 일어나게 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양반이 되면 군포(軍布)를 안 내고 여러가지 세금도 면제되었다.
▲ 17세기 황이환(黃以煥)이 소유했던 노비가(奴婢家) 3개 호(戶)의 인적사항이 적힌 희귀한 한글노비문서.
평민의 일부는 공명첩(空名帖)을 이용해서 공개적으로 양반자리를 사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도망가서 아주 먼 지역에서 족보를 위조해서 양반인 척하고 살았다. 결국 세금을 내야할 평민들이 사라지자 국가는 어쩔 수 없이 노비들을 해방해서 평민으로 만들어 주어야 하는 형편에 직면했다.
‘속대전(續大典)’에는 쌀 13석을 지불하면 사노비(私奴婢)가 양인(良人)이 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이에 노비의 신분해방이 현실로 다가오게 되었고, 순조 1년(1801년) 내수사(內需司)ㆍ궁방(宮房)ㆍ관청의 노비안(奴婢案)을 소각하고 6만 여 구를 방량(放良)하였다. 그 후 고종 23년(1886년) 노비해방운동이 전국적으로 격렬하게 전개되자 고종(高宗)은 1886년 2월 2일 노비세습제의 폐지와 노비 소생의 매매를 금지하였고, 그들이 양인(良人)이 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그리고 1894년 7월 갑오개혁(甲午改革ㆍ甲午更張이라고도 한다)으로 최종적으로 노비제를 폐지하였다.
1894년 7월 노비제가 폐지된 후에는 전부 이전의 출신을 속이고 족보를 위조하게 되었다. 그런데 족보를 위조할 때, 자기가 섬기던 주인 양반의 성(姓)을 따다가 위조했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던 양반인 이씨와 김씨, 박씨 등의 성(姓)을 따다가 족보를 위조했다. 그래서 요즘 김씨, 이씨, 박씨 성(姓)을 가진 분들 중에 진짜는 별로 없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며, 조선시대에 조상 대대로 양반을 유지해 온 집안은 종가집 빼고는 믿기가 힘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