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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열 동생에게 하고싶픈야기💜
여보게 동생 내가 한번쯤 동생들한테 하고싶픈 야기들을 내가슴속에 품고 수십년 동안을 살아오면서 그동안에 우리형제들 사이에 이런 저런 많고많은 야기들속에 내가 우리형제들과 부딪쳐 오면서 보고듣고 참 오늘날에 세상들이 야박하고 야속한 세상이다고 나데로 생각하게 되면서 이세상속에 나는 어덯게 처신하며 살아야 바르게 살았다고 내형제 내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살수가 있는가를 다시한번 나데로 생각해보게 하면서 우리형제들간에 그동안 야기들 속에는 모두가 나름데로 사연도 많고 탈도많은 여려가지 사연들 속에는 누구나 자기들 나름데로는 모든 일들을 다할만큼 다잘해 왔는데 다른 형제 사람들이 자기들에 마음들을 알아 주지 않했서 섭섭했고 서훈했다는 야기들을 할뿐 그누구도 자신들이 부족해서 내가 잘못한것 갔노라고 야기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고 제일 가까운 형제들로 부터도 잘해왔다고 인정받지도 못하고 형제들이 받아 들려 주지도 않은데 자기들 만에 생각으로 잘해온 것 처럼 자기들데로 정당화 시켜가며 너도나도 성토하는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어리석은 사람들이 내주변속에도 너무나 많아고 나도 한때는 내능력데로 내형이 처음 집살데 조건 없이 몇백만에 도움도 주워봐고 명오 동생에 도움에 요청에도 조건 없이 내월급에 한두 달치 돈도 주워지만 훗날에 형보고 동생보고 왜 내돈 않주는냐고 나는 단한번도 야기한일 없어고 자네를 대림산업 발령받게 하르라 나데로 노비돈를 얼마를 썻다고 자네한테 단한번도 야기해본적 없었고 형찬이 결혼시키면서도 나데로 돈이 얼마나 들었다고 그누구에게도 야기한번 한적도 없었고 나는 그누구를 도와줘다 해서 그이상에 보답도 은혜도 바라지 않았고 한가족에 형제인 형이 이까 내가 할수있는데로 도와줘고 한세월 지내오다 나도 나데로 어렵고 힘들었던 일들 때문에 형제들이기에 찾아 단이며 도움을 요청하여 도움도 받아왔던 나는 그동안 못느껴왔던 일들을 체험하면서 많은 형제들 간에 한두가지라도 주고받은 마음에 믿음이 형제들 사이속에서도 각자 내나름데로 어더한지을 느껴가며 우리형제들이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우리오남 일녀중에 여동생을 비롯해서 지방에서 살고있는 셋집 형제들 간에은 처음부터 오늘날까지 서로가 소식에 안부들을 주고 받아가며 원활하게 그런데로 잘지내고 있는데 서울에서 살고있는 두집에 형제 사람들은 그동안 우리 형제들 사이속에 자기들이 그동안에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희생하든 독보이게 형제들 간에 잘해왔던 한일들도 별로 없은것 같은데 항상 한자리에 있다보면 그무엇가 미비하고 부족해 불만스럽고 서훈함이 있는든이 밝은 모습들을 찾아 볼수가 없는 그런 느낌을 나는 지울수가 없었네 형제라 할지라도 모두가 각자에 집안에 실정에 따라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만족할수도 없었기에 서훈함도 때로는 느낄수가 있었겠지만 한번쯤 만남는 시간들 속에서 서로간에 마음속에 있는 야기들을 속시원하게 마음터노고 야기들을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면서 서로가 그동안에 몰아던 일들을 알게하여 그동안에 오해가 있었다면 오해를 해소하는 형제인 가족들 같이 풀어가는 지혜가 있었야 하는데도 자신들에 가슴속에 담아 두체 마음 고생하든이 지내면서 살기좋은 오늘날에 세상를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 처럼 왜 스스로 자신들이 고립 되든이 마음아픔 생활을 스스로 자초 하는지을 나로써는 이해하기 힘들고 또 이렇게 사는 내형제들이 답답했네 같이 살고있는 여자들이 여려가지 문제로 이해하지 못하고 속상해 하면서 형제간에 서훈함을 야기하고 성토하면 한집 안에 기둥인 남자로써 같이 동요하며 막장구 칠게 않이라 형제간에 우애를 생각해서 같이 사는 여자를 설득하고 이해를 시켜가며 형제간에 우애를 돈득하게 해야 하는 남자로써 이끌어 가는 지혜가 있었야 하거를 같이 맞장구나 쳐가며 형제가에 우애를 더욱 멀어지게 하는 무능한 우리형제 남자들이 되지 말아야 하거를 한번쯤 옆에서 보고듣고 지켜 보노라면 항상 자기들이 미숙하고 부족했던 자기들 인지 분별 못하고 자기들 데로 할일을 다잘해온 것 처럼 성토하는 모습들이 과관이 않이고 누구나 본인들은 할일들을 다잘해 왔다고 야기들을 성토 하고 있지만 제일 가까운 우리 형제들이 그데로 받아 들여 주지 않고 자신들을 그데로 인정해주는 우리형제 사람 들이 없다면 그건 바로 자기들에 무능함속에 그동안 잘못 살아온 것이다고 나는 생각도 되네 그동안 자기들이 어덯게 처신하며 살아왔는가 한번쯤 자기들이 스스로 뒷돌아 볼줄 알아야 한는데도 그리못하고 형제들한테 서훈하다 섭섭하다고 먼저 야기부터 하는 사람들이 나는 더미숙 하고 더어리석은 사람들 이다고 생각하면서 형제간이라 할지라도 서로에 마음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느낌과 판단이 다를진데 어찌 형제라하여 다알수 있게는가 여보게 동생 우리가 이제 칠십세에 나이가 넘어가는 동안 자네와 나사이에 있었던 지난날에 일들을 생각 하노라면 때로는 마음아파 하면서도 동생은 동생데로 야속하고 배신감에 분게하든이 서훈함들이 앞서는 나날들이 많아 겠지만 이형에 마음도 자네와 만찮가지란에 나역이 동생과 그동안에 믿음과 신뢰감들이 깨져 벌인 내마음도 야속하게 느끼면서 내스스로 내마음 아파고 내가슴이 요동칠때 마다 내눈씨울을 져저가며 금전에는 우리형제들도 어쩔수 없이 서로간에 욕심과 탈욕에는 믿었던 우리형제간에도 불화가 생겨 나는 일들을 체험하든 느껴가면서 그래도 우리 형제들 중에서도 자네와 나는 그래도 조금은 다르줄 알았는데 우리들 역시도 남들과 다를봐 없은 사람들 였나보네 어린시절 힘들고 어렵던 시골농촌에 생활이 힘들다본이 때로는 유별 스럽던 우리들에 아버지 야단치는 호통소리에 어린 우리형제들은 귀가 죽어가 살았던 나날들 속에 자네와 나는 우리형제들 중에서도 유별나게 잊지못할 많은 일들을 우리들에 아버지 한테 체험하며 살아 왔던 자네와 나 내평생 동안 이질수없은 자네와 내가 우리들에 아버지 호통속에 못이겨 울부짖고 무서움 속에 떨며 어려던 우리둘이 손을 꼭 붙들고 서로간에 무서움을 의지하며 칸칸한 밤길에 무섭다고 우리마을 사람들속에 소문난던 망제 고개을 야밤에 넘었던 그사연 그때을 내평생 잊지 못하고 가끔생각 하노라면 나도 모르게 오늘날까지도 눈물을 젖지지만 모든 것이 가난속에 이뤄졌던 슬픔에 체험이 였고 특이나 자네는 바로 내믿에 동생이다 본이 내가 아버지한테 받은 구박에 분풀이을 나는 자네한테 하든이 자네가 나에게 구박을 많이 받아 왔던 동생이 되기도 했지 그런 지난 우리들에 마음 아픈 생활을 나는 잊지 못하고 내가슴 속에 항상 품고 살면서 세월따라 우리들이 성숙되여 가면서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마을 한두살 나이 차이로 아이들 이십명이 가까운 그많은 우리마을에 아이들은 거이가 다중학교로 진학하지만 우리집에 아버지는 우리들에 형님한테만이 목매여 가면서 우리들은 뒷전이 였고 아침마다 마을아이들 학교가며 마을길이 아우성 들인데 나는 논밭으로 부모 따라 단이며 일하던 어느날 우리 아버지 술많이 드시였던 술끼에 차칵으로 영문도 모른체 나는 많은 매질을 아버지한테 당해야 했고 매질를 당한후에야 그것이 아버지가 술을 많이드신 술끼때문에 잘못 계산속에 그많은 매질을 했다는걸 아버지도 알게되고 나도 알게되면서 나데로 분에 못이겨 성결이 유별난던 나는 죽어 벌이자고 악을 쓰고 마을뒷산으로 뜃여 올라가 목매여 죽자했지만 그리 죽지못하고 나데로 한동안 충격속에 행설수설 하던 시간속에 우리옆집 사랑방에서 그동안 금이발을하고 있던 해남에서 왔다 던 그사람이 때맞치 우리 마을을 떠나고 있었기에 그날로 그사람를따라 여기저기 거쳐가며 해남까지 따라가 해남군 황산면 남이장터에 벌여진체 장터에서 맨돌다 그때부터 어려던 나는 남의집 일꾼으로 시작된 서름에 밥을 먹기시작해 해남에서 목포로 서울로 떠돌면서 나만이 알고 나만이 겪거던 그많은 일들을 나만이 체험하든이 거리속에 떠돌이 생활로 한동안 살아왔던 세월속에 나는 내아버지 처럼 술잔을 내입에 되지 않으리라 맹세를 하면서 여기저기 떠돌면서 나만이 그많은 세월속에 착하게 좋은 일들만 하며 살아왔게는가 우리형제들은 체험하지 않아던 많은 일들을 나만이 체험하며 여기저기 많은 세월속에 전전하다 내능력으로는 할수가 없었던 좋은 사람들 만나서 운전을 배우게되였고 운전면허증 하나를들고 나데로 내인생관을 개척해 오면서 학교를 단이고 있었던 친구들보다 나는 일직 월급을 받은 일꾼으로 살아오는 중에 동요들 싸움판에 끼여들어 내손으로 큰사고를 저질려 한동안 여기저기로 피신 생활들을 하던 중에 명오동생이 목포에서 학교단이며 목포 뒷깨란곳에 자치방에 내가 잠깐 있었 기에 동생이 눈치로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한동안 피신 생활을하다 그런 일로 밀미가되여 나도 한동안 방랑하다 나도 안전한 준비도 미쳐 못하고 있던 중에 벼락치기 약혼에 결혼까지 신혼생활이라고 공사판에서 담프트럭 운전일을하며 살고있던 경상북도 선산으로 자네가 나를 찾자들었지 그때만 했도 우리나라에 세상이 모두가 힘들었고 어럽던 시절에 우리들은 글공부도 남들처럼 제대로 배운것도 없은데다 그누가 어디로 알선할 인맥도 없은 우리들에 환경속에서 어덯게던 운전이라도 배워서 남들 처럼 사람답게 살아보자고 힘들고 어려워도 내노력속에 나데로 살면서 작은 꿈일지라도 동생에게도 나처럼 꿈을 안고 살게 해주고싶어 내가 일해주고 있던 사장한테 부탁하여 동생을 석산 골재장에서 일하게 해주는 그대까 대신 나를 혹사 시켜가는 나날 들에 그대까는 나에게는 너무너무 힘든 대까였고 어려워지만 자네에게 그무엇가에 꿈을 각게 해주고 싶어 나는 나데로 참고 인내하며 너무너무 힘이 들었도 자네가 나름데로 골제장에서 배울수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 자네가 모르은 힘든 일들이 나에게 줘져 힘들고 어려워던 모든 일들을 참마야 했고 이겨내야 했었다네 누구나 자기 능력으로 할수없던 일들도 해내고 나면 자기 스스로 쉽게쉽게 일사 처리로 스스로 해내것 처럼 쉽게들 야기하며 당당하게 말하지만 남모르게 당해 보지 않고 체험해보지 않은 자들은 잘모르는 법이고 그런 것들이 힘없는 사람 들에 어려움에 삶이란에 나는 결국에 견디고 견디다 내요구데로 관철되지 않고 나를 일을 시키고 있었던 사장이 내뜻데로 들어주지 않아 내실력 내눈으로 다잃어 볼수도 없던 글씨들로 그시절에 발행되고 있었던 신문구독를 시골 우체국에가서 내손수 신청해 건설현장 기능직 모집 광고를 볼수있는 길을 찾기위에서 시골 공사판에 서는 신문 밖에 없다는걸 나는 알게 되면서 저녁늦게 공사판에서 돌아오며 신문 광고지를 봐야했고 그신문에 기제된 건설현장 기능직 모집 공고에 나는 단여보지 못한 학교들를 졸업했다고 허위로 기재를하고 공사장 경력들를 부풀려 이력서를 작성해서 대림산업 광고 모집에 신청하여 대림산업 건설회사에 기능공 공책로 입사하게 되였고 내가 그동안 일해 오던곳을 그만두게 되자 그동안 나를 뼈빠지게 일시켜왔던 사장은 그시간부로 자네를 일하던 곳에서 회고 시켜벌인 야비하고 비굴한 인간들한테 우리형제가 당했야 했던 체험을 했지 내가 그동안 몇년동안을 뼈빠지게 일해줘는데도 그렇게 야박하고 냉정한 세상이란 걸 나는 여기저기 전전하며 몇번을 경험하며 살아 왔지만 자네는 처음 겪은 일이였기에 당황 스러워기도 했게지만 세상사는 다그렇게 냉정한 우리나라에 세상이 였단에 나는 자네가 그렇게 어렵고 힘들 여건속에 일하면서도 더나은 미래를 위에 무엇가을 해보기 위에 자네와 같이 한곳에 일하는 페루다 기사님를 오래전부터 잘알고 지내왔기에 골재장에서 쓰고있던 중장비운전를 자네한테 가르쳐 달아고 나는 틈나는데로 부탁을 해왔었고 자네데로 그장소에서 참고 인내하며 남들이 일하는 페루다 운전을 어깨 넘으로 동냥 하든 배워가면서 페루다 중장비 면허증을 자네손에 받아 들게되였고 그렇게 일해서 받아든 월급 봉투를 자네는 개봉도 하지않고 내손에 내밀어 줘쓸데 나는 자네 마음를 알았기에 자네 앞에서는 내색할수 없은 자네마음을 형으로써 믿음속에 신뢰하며 고마워 하면서 나는 자네를 유해서는 그무엇도 다해줘야 겠다고 나데로 내입슬를 깨물어가며 맹세을하며 지내왔던 나는 자네를 경북 선산에서 고향으로 보낼수밖에 없었기에 자네를 보내면서 능력없고 인맥없은 우리들에 현실을 원망하며 자네가 돌아가는 자네등을 바라보면서 나는 입를갈며 내가슴속에 칼날 을 품고 보복심에 불태우며 얼마나 울어는지 모르네 그때 나는 맹세 했었지 내가 발령받은 대림건설회사 여수로가면 더나은 길로 내동생을 이끌어주고 말겠다고 그런 일들이 있었던 나는 여수로가서 처음간 여수생활은 한동안 자리을 잡기까지는 낯설은 얼굴들 속에 입숙해 질때까지 힘들었지만 그동안 여려공사장 현장들 경험속에 입숙해져 가면서 마음에 여유도 생겨나자 회사에 휴가를 신청하여 그동안 찾지 못했던 고향집을 찾아던 나를 보고도 못본체 냉정해진 자네를 보면서 실망이 커지만 자네는 자네데로 마음고생이 커게지만 세상살이 일이란 내뜻데로 그리싶게 되지않아 그동안 열락도 못하고 찾지도 못했던건데 오랜만에 찾아든 나를 외면한체 그동안 아버지와 출돌속에 우리집 안이 조용할날 없었다는 가족들 야기에 가슴 아파하며 세상사 마음데로 않되는게 세상사 일들인데 한편으로 동생를 야속하다 하면서도 얼마나 답답하면 그렇게는가 싶어 이해속에 울적한 내마음 달래며 나는 여수로 돌아온 즉이 한달에 시골마을 작은 방한칸에 사오천윈하는 사월세방에서 우리넷식구 비좁게 살고있는데 동생까지 같이 지낼수없어 옆방을 별도로 한칸 더 없어노고 자네를 여수로 오라고 불었지 여수로 찾아왔던 자네를 그냥 놀게 할수없어 자네를 대리고 여수시로가 자동차 면허증을 받게하고 싶어 자동차학원에 입학시켜 노고 학원비도 한번에 지급을 다못하고 월급날에 나루워 지급하기로 하고 자네를 운전을 배우게 했었 는데 고향집에서 아버지와 원만하게 지내고 있지를 못해 여수로 대책없이 불어 오게했지만 당장에 적당한 일자리을 구할길이 없어 자동차 운전학원이나 돈이 더들어가는 한이 있들에도 오래동안 단이기을 나는 바래지만 한달만에 자동차면허증 시험에 학격했다고 방안에 딩굴고 있는 자네를 봐가면서 내가 할수있고 부탁 할수있는 사람들을 여기저기 찾아 단이면서 동생에 일자리를 부탁속에 접대를 하로 단였고 이사람 저사람에게 형님이라 고개숙여 부르고 동생으로 부르면서 이곳저곳에 찾아 단이며 동생일자리 부탁속에 때로는 노비속에 술값에 소개비를 줘가면서 지출 되여 왔던 금전들은 나만이 알고 나만이 그어려움들을 겪거가면서 가슴태워던 일들을 그누구도 이해을 다못할 것시네 내가 하도 여려사람들에게 동생를 부탁하로 단이다본이 오직하면 회사 본사인사과 사람들이 내이름은 누구지 기역하지 못했도 내동생 이름은 기역하고 있었다는 소문들이 나 있었쓴이 누구나 아픔을 느껴왔고 어려움을 느껴왔던 사람들도 살만한 세상이되 후에는 그렇게 어렵던 나날들을 다잊고 누구나 다쉽게 할수있었던 일들 처럼 쉽게들 야기들을 하지만 어렵던 그순간들에 일들을 경험하며 살아왔던 아픔들은 경험자들만이 아는 법이지 자네도 자네되로 그동안 어렵고 힘들게 일했던 그보답에 월급를 단한품도 자네마음 데로 쓰지않고 나에게 다내줜던 월급에 돈들만을 자네데로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나 자네를 유해서 이형은 더많은 금전들을 어덯게 지출하여 자네가 대림산업에 입사하게 되기까지를 자네도 다알수 없든이 동생이 형한테 준것만을 생각하며 살고 있고 형이 동생을 위에 형데로 그이상에 돈들을 어덯게 지출해 왔는지을 모르든이 누구나 자기가 준것만을 가슴속에 품고 알고 있고 자기들이 받은 것들은 다모르면서 서훈하고 야속하다 느끼는 것이 준사람과 받았던 사람들에 마음속에 차이점 이란네 쉽게 받은 사람은 쉽게 잊질수가 있지만 힘들게 일해서 준비했던 돈을 줘던 사람들은 쉽게 잊질수 없는 것이 주워던 사람과 받아쓴 사람들에 차이점이지 나도 동생한테 받은 것보다 내가 동생한테 해줘고 동생을 위에 해왔던 일들을 먼저 생각하다 본이 나데로 야속함이 앞서든이 동생도 받은것보다 주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앞세워 생각하다 본면 서운하고 배신감도 앞서겠지 그누구를 도와 주는 일에는 그이상을 생각하지 않고 도와야지 그이상에 대까을 바라고 도움을 주는 도움은 진실한 도움이 않이고 자기데로 하나에 욕심이 였다고 사람들은 야기들을 하고 있지 나도 수년간 뼈빠지게 일해가며 우리 가족들이 먹고 싶픈것 안먹고 입고싶픈것 안입고 안쓰며 우리가족들에 훗날을 위에 한품두품 모와 왔던 몇천만원에 돈을 사업하고 있던 큰처형집에 이용 하도록 빌려줘던 것이 어느날 큰처형집이 하고 있던 사업에 부도로 하루 아침에 다날인 빈털털가 되여 벌이고 그돈 찾아 보자고 나는 나데로 내형제 들을 찾아 단이면서 돈때문 에 힘들게 하면서 형제들 돈을 쓰게 되였지만 그동안 시작된 사업은 너무나 비약 한 자본으로 시작했기에 재품들에 구색들이 너무나 미약해 더 많은 금전들이 나에게도 더필요했지만 한품두푼 준비가 되는데로 제일먼저 고향에서 마음 고생하고 있쓸 아버지 부체 부터 이자를 포함하여 돌려 들이고 두번째로 내가 힘들게 했던 서울에 형님 부채를 돌려들여 가면서 제일 큰 금액에 돈을 채용해 줘가며 도와주고 있었던 안동시내에서 사체 노리 하고있던 남효령씨란 분에 돈을 조금씩이라도 줄려 가보려고 동생인 자네 돈을 써가면서 자네가 돈이 생기는데로 내가 갔다 쓰면서 평택에 종행이한테 받아써고 아버지가 자네 목으로 논을 팔아준 돈을 써고 이리저리 여려번에 걸쳐 채용해 써던 자네 돈들이 일천여만원에 돈이 도달하게 되였지 우리들에 실정은 속은 골마 있었지만 안동시내 한폭판에서 거창 한 큰간판를 내걸고 하루 하루 손님들이 분비던 대리점 가계는 버창하고 있었지만 처음 시작할때 부터 비약한 소기모 자본에 어렵게 시작된 대리점은 조금씩 불어나는 수입금 으로 그동안 미비했던 재품에 더많은 신발에 구색맞춰 가는데 바빠고 한달에 하루가 더있고 없고 하루 판매점을 계산속에 따져가며 살고 있는데 고향집에 살고 있는 아버지는 혼자서는 사네 못사네 하면서 같이 살고 있었던 넷째 명오동생 부부와 갈등속에 결국에는 한마을에서 서로다른 살림을 하며 살게 되다하여 나는 안동에서 우리형제들이 생각하지도 않았던 소개비를 줘가며 아버지를 위에서 우리아버지와 같이 진내주실 새어머니를 찾게 되였고 한사람이 나타나자 고향에 아버지를 안동으로 오게했지만 단칸굴방에 우리넷 식구도 비좁아던 방에서 아버지와 명오동생과 다같이 한방안서 하루밤도 같이 잘수가 없었기에 오랜만에 오신 내아버지와 동생를 여관방에 주무시게 했던 나는 너무나 내마음를 아파하면서 안동에서 소개 받았던 분을 만나보고 두분에 뜻이 맞아 그분과 같이 진도 우리집으로 보내면서 두분이 한동안이라도 잘지내 주시기를 빌면서 아버지와 같이 가시는 분에게 당분간 여유롭게 생할할수 있는 생활비를 아무도 모르게 손에 지여줘야 했고 나는 이때부터 이런저런 또다른 무엇가을 생각하면서 지내는 동안 내가 근무하고 있던 안동임하댐 공사장에 일들이 끝나 나는 또다시 강원도 평화댐 공사장으로 발영이나자 아직도 자리를 못잡고 힘들어 하고있는 대리점을 아내한테 다막기고 내가 다른곳으로 멀리 갈수없어 회사에 사표를 내고 대리점을 돌보고 있었지만 그동안 내직장은 회사말단에 내직책이라 할지라도 그누구에게 구해받지 않았고 여기저기 많은 협력업체들에 부탁만을 받았왔던 나는 나데로 자존심만 내가슴 속에 가득히 부풀려있던 나는 대리점가계 있노라면 신발 한켈에 구입하기 위에 가계에 들어와 이것저것 트집 잡은 손님들 말과 행동에 천불나서 지켜보지 못하고한마디 내배다보면 내가 신발가게에 안이는 것보다 못한 시간이 되어벌이다 본이 나는 가능하면 가계에 있는걸 피하게 되였고 나는 이때부터 그동안 하지 않았던 안동댐으로 낚시를 단이기 시작하면서 또다른 사람들을 알게되면서 취미생활에 빠져들었고 어느날 여려사람들과 같이 낚시를 단이던 낚시터에서 같이 낚시하며 주고 받은 야기를하다 어느 사람이 작은 집터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돈이 필요해서 자기가 구입했던 금액만 주면 넘겨주게 다며 나를 보고 김사장님으로 부르면서 혹 필요한 사람이 있거든 소개을 좀 해달아 했네 나는 그소리를 듣고 궁금해 다음날 그집터을 찾아가 본이 내가 항상 꿈꾸워 왔던 집터였지 내가 살고있던 세방에 집이 길가 집있데 밤에 잠자리에 누워 잠들려며 지나가는 자동차 울림소리에 방다닥이 흐들려 깊은 잠를 들수가 없었고 밤중에 술취에 오며가며 밤세 소리치는 술주정 뱅이들 아우성 소리에 짜증나 그때마다 내가 만약에 돈이 있어 집을 구하게 되면 절되 길가에 집은 구하지 않게다고 다짐하면서 큰길에서 조금 떨어진 집을 꿈꾸워 왔었는데 낚시터에서 들어던 집터가 그렇게 자리잡고 있는 집터였기에 나는 욕심이나 그날후에 우리는 또다시 낚시터에서 다시만나 그집터를 나에게 넘겨 달아고 했지 그동안 친분이 있던 사람이기에 그사람은 내가 시내 한복판에서 큰간판을 내걸고 대리점을 운용하고 있는줄 알고 있었기에 내가 돈이 아주많은 줄알고 있었지만 나는 돈이 여유가 없었지만 큰소리로 장담하며 땅부터 나에게 이전등기 넘겨주면 부족한 돈을 은행에 담보해서 완불 해주게다고 장담를 해었네 이렇게하여 나는 그집터 땅을 구입하게되였고 내가 단이고 있던 회사 퇴직금 육백오십이 나오게 되자 그돈으로 일부 지불하고 은행에 담보로해서 융자돈 사천만원에 돈을 완불하여 나에게 집터가 생겨던 것이였네 나는 대리점을 하면서부터 안동시내에 있는 은행들이 자기들 은행에 거래를 해달아고 찾아 들었지만 나는 중소기업은행 한곳만 꾸중히 거래하면서 매일매일 판매대금을 입금하면서 신용도을 싾가는 거래를 해오다본이 은행에 돈를 쉽게 흉자을 받아 쓰는법를 은행 사람들한테 알게 모르게 전해 들었고 이렇게 하고난이 욕심이 더생겨 하루는 집터 담보에 융자을 얼마나 더받게는가를 은행국장님과 상담을 해본이 내가 그동안 거래하고 있는 신용도가 좋와 그동안 동생한데 내가 사용해왔던 원금에 돈을 융자로 받을수 있다기에 안동시에서 이부 이자로 쓰고있던 돈은 그데로 둔체 동생 돈부터 대돌려 줄려고 동생부부에 입장을 들어보기 위에 동생이 살고있는 집을 서울로 찾아 갔지 동생부부는 서울 답십리에 작은방 한칸에서 살고 있었고 내가 사전에 찾아 가게노라 열락을 한터라 찾아간이 우리재수가 내가 좋와 했던 간제미 무침에다 여려가지로 상다리가 휘도록 차려진 밥상을 바라보며 감동에 눈씨울이 젖어 들었지만 눈물을 억누려가며 차려진 음식들을 잘먹고 나서 내가 서울에 동생집까지 찾아 들게된 야기를 해주면서 동생부부가 나름데로 혹여나 동생부부데로 또다른 계획이 있어 돈이 필요하면 은행에서 돈을 융자를 받아 동생에게 먼져 갔다 쓴수있게 돈을 돌려 주게노라고 야기를 하면서 동생이 계획이 없다면 내가 하고자 했던 내계획에 일들을 해보게노라 의논차 왔다고 한이 동생부부는 당장에 계획이 없다면서 나의 계획데로 하시라하여 동생부부를 감사하다고 야기를 하면서 내가 더욱 악착같이 대리점을 열심히 운용해서 내생활이 더좋와져 내가 밥을 먹고 살게되는 날에는 동생도 나와 같이 밥을 먹고 살게 해주게다면서 동생부부 앞에 장담하든 고마워하며 나는 안동으로 돌아와 나는 여려면으로 많은걸 생각해 보면서 이사람 저사람 의견도 들어가며 지내고 있는데 우리가족이 셋방살고 있었던 집 형제가 안동시내에서 오래전부터 큰게 건재사란 큰간판을 내걸고 여려자제들을 취급하며 운용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고 모든 자제들을 외상으로 되줄턴이 준비해둔 집턴에 집을 손수들고 짖여보라고 하면서 자기가 여려부분에 사람들을 소개해주고 여려가지에 일들을 내가 그동안 몰아던 부분들를 가르쳐 주면서 권장해 나는 건설 공사장에서 일해왔던 경험을 살려 하나하나 벽돌부터 준비하고 집짖는 인부들을 구분적으로 알선받아 집을 내가 손수 들고 짖기 시작해서 몇달만에 내집을 가져보게 되였지 나는 처음 가져본 그기쁨을 부모형제들에게 보여워고 그동안 내가 대리고 있뎐 우리 막둥이을 내집에서 직장을 단이게 하면서 우리부부가 막둥이를 우리집에서 결혼을 시키면서 부모형제들이 우리집으로 모여들게 되면서 한자리에 모여든 여자들끼리 주고받은 야기들을 나는 지나치다 듣게 되였단에 내가 들었던 야기들은 우리집을 와보고 자기들끼리 시기하고 질투하든이 주고받은 야기속에는 우리가 그렇게 어렵고 힘든다며 자기들한테 도와달아고 자기들을 그렇게 찾아 단이던이 이렇게 잘해노고 살면서 엄살부려다는 식에 말들이였지 내가 오다가다 들었던 여자들에 야기들이 였지만 우리집안도 여자들 때문에 얼마 못가서 우리형제들 간에도 질투와 시기 욕심들 때문에 편탄치 못하게 구나를 내나름데로 우리들에 훗날들을 애감하면서 우리집안 여자들 주고받은 야기소리에 나데로 귀가 차 화도 낫지만 막둥이 동생결혼식에 찾아든 사람들에게 못듣고 모른척하며 있는데 결혼식을 끝내고 내집에서 돌아가면서 우리가 운용하고 있던 신발점에 들여 우리막둥이 결혼식에 오르라고 돈들를 자기들이 많이 쓰고 왔다며 결혼을 하고 신혼 여행을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면 그사람들한테 자기들 신발값을 받으라며 신발들을 한두컬에씩 그냥 싸들고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체 한동안 모든걸 다잊고 지내오는데 전에 큰처형 집이 부도나면서 우리 동서들은 물론이고 처가 집까지 내가 거래하고 있었던 사체 돈놀이 하는 사람 손에 넘어가 있었기에 그동안 나에게 이자를 받아가며 사체놀이 돈으로 나를 도와주고 있었던 사람에게 우리처가집을 나에게 넘겨주면 그돈에 이자를 내가 장사해 가면서 이자를 내가 변제해 줘가며 우리처가 사람들이 변제할수 있쓸때까지 내가 책임을 지고 이자을 변제해 가게다고 약속을 하고 있는동안 안동시내에 있던 안동대학교가 우리처가 집이 있는 곳으로 옮겨 오면서 그지역에 땅값들이 오르고 있었고 결국 처가집에 부체가 많이 부풀려지면서 그집을 결국에는 끝까지 지켜내지 못하고 팔게되였고 처가집을 팔게되자 그동안 내가 앞서 책임을 짖고있던 부체금으로 처가집을 팔어던 돈에서 처남들이 나에게 이천만원을 변재했줘지 나는 내생에 처음으로 이천만원에 현찰에 돈을 내손에 만져봐고 나는 가계도 하고있고 집도 새집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모든 일들은 빗에 돈과 외상으로 이루워진 내현실속에 노여있던 환경속에 있었기에 나는 한달에 하루가 더있고 없고를 판매대금에 계산속에 살면서 내가 살고 있는 내앞날에 일들을 한번씩 긴밤 잠못들며 깊이 생각해보면서 내큰동서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집안 부모님들과 형제들 동서들 처갓집까지 어렵고 힘들게했던 일들을 내눈으로 하나하나 지켜봐왔던 나는 나도 모든 것들이 내형제들에 빗에 돈들과 외상에 돈들로 이루워져 있었기에 단 하루라도 마음편이 두발뻐고 잠들수가 없었기에 나는 요번 이천만원에 큰목돈이 내손에 지여질때 이때를 노치면 언제 이런 기회가 있쓸지 나도 알수없는 내거미줄 처럼 여기저기 돈거래가 걸려있던 내현실에 환경속에 어려워기에 내동생인 자네돈부터 먼져 챙겨줘서 내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가며 동생되로 계획있게 살게해주고 싶픈 생각을 먼져하면서 며칠동안을 여려가지로 고민고민 하다가 동생자네를 안동으로 불려내려지 나는 동생과 마주앉자 내뜻을 전하며 그동안 내손으로 받아가며 내가 기록해 왔던 쪽지와 이천만원에 돈을 동생에게 내주면서 나는 동생에게 야기했지 그동안 고마워다 이돈을 받아 이돈으로 동생데로 한가지라도 계획있게 써보라고 그러면서 나는 야기했지 동생과 이제 금전관계는 끝내자고 그동안 동생으로써 할일을 다해줘쓴이 이돈을 가지고가 동생데로 살아보라고 야기하며 나는 앞으로 내가 하고있는 대리점에 장사가 더잘될지를 장담할수는 없지만 내가 더욱 열심히했서 더나은 내생활에 여건이 되다면 형으로써 그동안 동생한테 많은 도움을 받아 쓴이 내가 밥을 먹고 살게되면 형으로써 동생도 같이 밥을 먹고 살게 할턴이 그때까지 기다려 달아고 야기을 하자 자네는 처음 도착할때는 그날 하루밤을 나와 같이 잠을 자고갔다 했던 동생은 내가 돈을 주면서 이렇게 야기하자 바로 얼굴이 변화면서 그길로 앉자던 자리에서 일어나 서울집로 갔다고 뒷도 돌아보지 않고 붙잡은 내손을 뿌리치고 가벌였지 나는 그때 동생에 얼굴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해을 못하고 붙잡아지만 내손을 애정히 뿌리치고 가벌이는 동생을 바라보면서 나는 나데로 서훈함속에 그날밤 나는 쉽게 잠을 못이루워지 내가 그동안 믿었왔던 내동생은 내가 이렇게 야기하면서 돈을 전해주면 내가 믿었던 동생데로 형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오늘 이돈을 내가 받아가지만 그동안 내가 형에게 해줘던 그공를 쉽게 잊고살면 않된다며 우리같이 끝까지 열심히 잘살아 보자고 내가 믿고 있었던 내동생으로써 이로와 충고에 야기를 한마디쯤 해줄줄 알았는데 냉정하게 돌아서 가벌인 동생에 뒷모습을 바라봐던 나는 동생에 이해할수 없은 그모습를 나데로 상상하며 나는 잠을 못이루며 잠을 설쳐가며 밤을 뜬눈으로 세우고 있는중에 우리집에 전화벨이 울련네 무슨 이른 아침에 전화가 하고 눈을 비비며 전화를 받아보자 제수씨 전화였지 동생이 그전날에 받아갔던 돈에 계산이 백만원이 틀이다는 전화였네 나는 할말을 일었지 내손으로 받았던 돈에 내력을 년도별 날짜별로 기록하였던 나는 내가 돈을 받아던 날짜들에 세월들은 많이도 흐려갔지만 구백오십만원이 였던 돈에서 이천만원 들고갔는데 일백만이 틀여다고 이른 아침에 전화가 왔었네 결국에 일백만원에 돈이 내기록장에 빠진건 내가 직접 내손으로 대리점을 하면서 받은게 않이였고 우리들이 대리점을 하기전에 병희엄마가 필요하다고 별도로 빌려던 돈이였기에 내기록장에서 빠져던 것이였지 하지만 나였다면 그리하지 않아 쓸것이네 내가 그동안에 대리점 운용이 잘되여 내집를 장만했고 이천만원에 목돈을 대리점이 잘되여 그목돈을 만들어 낼수가 있었던 돈도 않이였고 내가 그동안 대리점을 했서 돈을 많이벌어 가며 호화 효식하면형으로써 그렇게 동생부부 앞에서 나데로 장담 하든이 해노고 내가 그렇게 야비하고 비굴한 생각으로 자네한테 그리했다면 나는 천벌을 받아야 맛당할 것시네 나는 나데로 내생에 처음 만져보는 목돈이 생겨고 그동안 나에게는 거미줄 처럼 여기저기 걸여있는 사체돈들을 쓰고 있었던 환경속에서도 동생을 먼저 챙겨주고 싶은 생각이 앞서던 것인데 형제간에 순순한 마음으로 도와주자 했다면 내동생이 그리 해쓸까 나데로 생각도 많이 하면서 설마설마 하면서도 그동안 내가 믿어왔었고 내가 신뢰하며 살아왔던 내동생이 였기에 서훈하고 화도 나기도 하면서 지내오다 어머니 제사날에 진도 고향집에서 동생인 자네를 만나게 되자 사람이 어찌그리 할수있는냐고 야기하자 오이려 동생은 화를 내면서 나를보고 그렇게 어려울때 도와줘는데 돈 이천만원 덩령 더져주며 그것먹고 떨이져라 하는 사람이 어디있냐고 오리려 화를 나에게 내기에 자네를 지켜보면서 나는 할말을 잃었고 내가 형제들 간에 금전거래을 시작을 하게된걸 한없이 후해를 하면서 차라이 그동안 거래해왔던 안동에 사체꾼에 더많은 돈으로 이끌어 갈걸 후해하며 나는 사체꾼에 돈보다 형제들 돈이 더쉽고 상쳐없은 돈이 될거란 생각속에 형제들에게 매달려는데 자기들이 않이면 내가 살길이 없었는걸로 알고 구새주 처럼 자기데로 욕심채우기 바쁜 우리형제들을 보면서 나데로 동생한테 받아썼던 날짜별로 사체꾼에 이자처럼 나데로 계산도 했봐지 얼마가 되는지를 그동안 싾여던 모든 형제간에 주고받은 정들을 다시한번 생각도 해보면서 과연 내동생들이 그동안 내형님 형수가 그리했고 우리부부가 그리했든이 내믿에 동생부부들이 뼈빠지게 일해서 받은 몇달치에 월급에 돈들을 먹고싶픈 것 잘먹지도 않았고 입고 싶픈 옷도 잘입지도 안를면서 있는돈 다털어가며 믿에 동생들을 위에서 자기들데로 조건없이 이런일 저런일에 써봐고 자기들데로 사는것도 힘들고 어려워 비좁은 신혼살림살리 하면서도 나이비슷한 다큰 믿에 씨동생들을 대려다 몇달씩 먹이고 재워가면서 동생들을 위에 힘들게 한번 쯤 살아봐야고 동생 부부들에게 물어보고 싶네 내형부부도 그리하는걸 내눈으로 봐왔고 우리부부도 그리해본이 말로다할수없은 일들이 힘들고 어렵더군 빙산에 일각처럼 가장큰 어렵고 힘든 일들이 무엇신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받은 그커던 공들은 모르고 자기들 능력데로 도와준것만을 내세워 야기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목마를 때 물맛과 물가에 앉자 받아먹은 물맛에 차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들에 일들만 내세우는 모습들을 나는 묵묵히 한세월동안 지켜보면서 살고 있는데 두번 다시는 우리형제들이 기역하고싶지 않은 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네만 불행하게도 동생집에 우리조카에 사고가 난다는 야기에 우리부부는 동생이 살고 있는 광명으로 달려가 나는 나데로 내가 알고 있었던 여기저기 사람들에게 부탁해 가면서 철철한 수사속에 범인을 잡기을 바라면서 나데로 형사님들을 따라 여기저기 단이며 수사에 필요하다는 물품들 다사대줘 가면서 수사관들과 나데로 같이 단이다본이 적지않은 비용도 들었고 결국 우리형제 가족들에 슬픔속에 장래를 치르게되면서 그동안에 병원비와 장래비을 피해자 우리가족들이 부담해야 했기에 우리형제들은 한자리에 모여 앉자 의논하던 중에 모든 비용은 영옥이 동생이 우선 앞서 하고 있다하기에 내가 야기했지 자식잃은 내동생한테 돈까지 쓰게 할수없다며 야기하자 형님은 우리형제들이 조금식 보태서 해결하자고 해었지만 우리형제들이 모두가 너도나도 여유롭지 않았기에 모든 비용을 내가 나혼자 계산하게다고 야기하고 내가 그동안 나데로 경찰서 형사들과 단이면서 들었던 비용도 수십만원이 들었지만 공식적으로 병원에 들었던 병원비와 장래비가 삼백육십만원이 나왔기에 나혼자 부담하기로 우리형들과 그날있었던 자네친구들이 같이 있는데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날 내주머니에 있던 돈으로 일부를 주고 부족했던 돈은 안동에 내려와서 바로 보내주기로하고 저녁 늦게 광명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갑짝이 무섭게 쏘다지는 낙비에 우리는 처음 출할때는 형님과 형수님을 가락동에 살고있던 집으로 대려다주고 우리는 안동으로 그날밤에 늦게라도 내려오려 해었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태고갔던 내차가 부라인드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형찬이가 무섭게 쏘다지는 그소낙비를 다맞아가며 상체을 창문밖으로 내밀고 우인도에 물를 닦아내며 거북이 처럼기여 먼거리에 형님집까지를 오다본이 많은 시간들 걸여기에 늦진 밤늦게야 형집에 도착하여 그길로 바로 안동으로 못내려오고 형집에서 다같이 하루밤을 자고 다음날 안동으로 내려와 바로 주기로 했던 부족했던 비용를 나는 다보내줘고 나는 한동안 아무 말없이 지내오면서 그동안 우리는 동생부부와 몇번을 부딫쳐 왔었지만 오늘날까지 그누구한테도 뒷말이라도 그날에 고생들을 많해고 비용에 돈를 많이 혼자서 써노라고 우리들에게 누구도 한마디 야기들을 해준 사람도 없었기에 우리는 들어본적이 없었네 우리형제들에 비극에 날이였지만 그래도 동생부부가 늦느게라도 형제들에게 그렇게 고생들을 많이들 했쓴이 한번쯤은 해었야 하는게 맞지 않는가 나데로 생각도 해보면서 그래도 우리는 같은 형제들이기에 서로가 참고 인내하며 이해하고 용서해가며 도와야하고 찾아야 한다면서 한동안를 나데로 묵묵히 지내오면서 모든 것들이 내부족한 내탓스로 여기면서 그누구에게도 표연하지 않고 우리들데로 살아오면서 그동안 잠시 잠깐 금전거래 속에 본이 않이게 서로간에 서훈했던 마음들이 사라지고 이런일로 하여 더욱 우리형제들 우애가 좋와진 마음속으로 지낼수있는 우리형제들이 된줄로만 알고 지내오면서 나는 그동안에 살아오던 내집을 팔고 더많은 융자돈를 받아 우리들이 하고 있던 대리점 가계점포를 구입하게 되면서 부족했던 돈때문에 또다시 우리가족은 토끼집 같은 작은 칵막이 복합건물 삼층에서 살고 있었는데 내몸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참고 견디지 못할 정도로 악화되자 나는 서울우리들병원에가서 척추수술를 일곱시간 동안 받아야 했고 며칠후 퇴원하게되자 어덯게 알게 되였는지는 모르나 자네가 차를 가져와 손수 나를 안동집까지 퇴원시켜줘 나는 말할수없은 고마움을 느끼면서 이런것이 내형제구나 느끼며 그래도 우리형제들 중에는 우리셋째 밖게 없는것 같구나 하면 그동안에 모둔 일들을 다잊고 살자고 내동생인 자네가 그렇게 마음먹은 줄로만 알았고 언제가 동생이 동해쪽으로 일하로 왔다며 큰 문어를 사들고 우리집를 찾아들어와 같이 먹고 하룻밤을 같이 밤세도록 야기하며 자네가 임대나간 장비대금이 자네앞으로 일천이백만원이 지급 된다며 자네가 오리려 내가 어렵게 살고있던 내환경을 지켜보면서 나를 이로해줘가며 명오동생과 형찬이 동생들에 생활을 걱정하며 열심히 일해서 동생들에게도 자네가 도움이 될수있게 자네가 도와 줘야겠다며 밤세도록 같이 야기를하며 밤를 지내다 일하던 곳으로 돌아가기에 그동안에 우리형제들간에 싾였던 그모든 상쳐들을 다잊고 형제들 간에 다시 정있게 살게구나 기대속에 나는 기뻐하며 나데로 우리형제들을 다시한번 생각해보는 나날들속에 묵묵히 나데로 변함없이 그런데로 지내 오면서 나역이 대리점을 열심히 운용해서 더나은 우리들에 생활이 되다면 말로만이 않인 실천속에 우리형제들 중에 어려운 형제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꿈꾸워 오면서 살아오고 있던 중에 병희엄마가 몸이 약해져 가면서 여기저기 아프게되여 수술들을 받게였고 결국에는 갑상성 암이란 서울대학병원에서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아야했고 사계월만에 또다시 대구영남대학병원에서 유방암이란 판전을 받아 또다시 결국유방 절개수술를 받아야 했고 항암치료에 너무 힘들어해 더이상에 대리점을 할수 없었기에 결국에는 처음 우리들이 대리점을 시작할때 사백팔십 컬래 신발로 비약하게 개업를 했었지만 그만두개 될때는 신발이 육천컬래란 신발재고가 있었기에 그동안 벌었던 수입금으로 신발들로 싾였던 꼴이되였고 결국 대리점를 남에게 인수를 할려했지만 싾인 재고 때문에 인수받를 사람들이 부담이 커기에 그리 못하고 결국에는 패업하게되자 우리들이 받았던 원금액에서 반액 싸구리 금액으로 회사에 반품처리를 해야했기에 그동안 벌었던 액수는 빙산에 한쪼각으로 되어벌였고 하고있던 점포는 임대를 줘야했고 반품했던 물품대금과 그동안 대리점을 하면서 손님중에 보험설계사들이 신발 한두개 팔아 주고나서 보험들어 달아고 매달려 그동안 친분관계로 거절못하고 병희엄마 앞으로 들어줘던 암보험이 암으로 판정으로 보상를 몇천만원 받게되였고 신발 반품에 대금에 돈까지 합하여 안동시에서도 조용하고 공기좋은 한쪽편에 아픔환자를 위에서 지금에 살고있는 집을 내손수 또다시 들고 짖여 아픔사람 건강만을 위에서 준비하게 되었지만 그동안 아이들은 큰자식은 서울에서 대학를 단이고 있었고 작은 아들은 대구에서 대학를 단이고 있었기에 나는 아픔에 고통받고 있는 환자옆에서 환자를 돌보면서 그동안에 그많은 꿈꾸워왔던 모든 일들이 물거품이 되었기에 그동안에 내가 동생들한테 도움을 주게다던 야기에 일들이 말로 끝나고 말았기에 본이 않이게 실없는 형이 되어 벌였지만 그래도 정를 알고 의리가 있는 우리동생들이 진도에 살고있는 명오동생은 환자에 좋다는 몸보신에 개고기를 떨어지지 않게 수시로 여려달을 보내왔었고 형찬이는 장어를 구입해서 수시로 보내줘고 나도 옛전에 아까워 하면서도 언제가 명오가 자기 병력 문제로 그당시에 일반공무원들에 몇달치에 월급에 돈이 필요하다해서 아까워 하면서도 조건없이 줘던 나는 더이상에 바랄것도 없이 큰보람을 느껴고 막둥이도 결혼까지 시켜줘던 보람을 느껴가며 동생들에게 말로는 다표연 할수없은 그정성들을 고마워하며 병희엄마을 병마에서 새로히 이겨내수있게 뒷바라지를 해오면서 세상사 일들이 내뜻데로 않되는게 태반사란걸 체험하면서 그동안에 내가 하고자 했던 동생인 자네에게도 더많은 보답를 해줘야 한다고 내가슴속에 그꿈을 품고 살아 왔었고 여려 많고많은 꿈을 내가슴속에 품고 살아 왔었지만 그꿈을 다못이뤄서 아쉬워고 안타까워지만 나로써도 어찌할수가 없었네 세상사 일들이란 앞를 볼수없는데 어찌하게는가 자네도 잘해보려고 노력했고 많은 꿈들이 있었겠지만 어찌하다본이 그리하지 못하고 마음에 상쳐가 크겠지 언제가 자네가 믿어왔던 고향 친구였던 길종이와 돈거래가 원만치 못하다는 야기들은 전해들었지만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본이 정확한 내용은 나는 알수가 없었지만 자네데로 믿음에 배신으로 분게하며 마음에 상쳐가 큰줄 알고 있네 그런나 어찌하게는가 오늘날에 세상이 이미 이렇게 꼬여들었는 거슬 하지만 형제간에 사이는 전에부터 서울에 사는 두집에 형제들은 이상하게도 모든 형제들 사이에도 언제는 좋와졌다가 틀어졌다 자기네들 사정과 기분에 따라 이래다 저래다들한이 분간할수 없었고 이해할수도 없은 우리형제들을 지켜보면서 아무 말없이 우리는 우리데로 한쪽에 먼곳에 우리데로 그자리 그데로 묵묵히 살면서 그동안 안동에 내처형이 우리들 돈 다날이고 안동을 도망치든이 떠나 서울에가 다시 종로상가 내에서 사업에 제기하여 우리보다 오늘날에는 더잘살고 있지만 나는 오늘 날까지 내돈 달아고 단한번도 내색해본적 없이 가끔 한번씩 마주칠때마다 서로가 반가워 하며 살고있고 그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피눈물나게 살아도 봐고 기쁨속에 보람도 맛봐가는 나날도 있었기에 그사람들을 오리려 고맙고 감사히 여기며 살고있네 내가 그동안 힘들고 피눈물 나게 서름속에 어려워지만 그사람들로 하여 그렇게 시작되였던 고리로 나는 공사판에 운전수 밖게 않되였던 나를 한지역에 대리점사장으로 호친받게 한동안 변신시켜 줘고 여기저기 좋은곳 한두번 구경하며 사람다운 대접 받은 환경를 한번쯤 맛보게 길문를 만들어 주워다고 생각하며 나에게 또다른 새로운 내인생관에 삶을 표출할수 있었던 기회를 만들어 주워기에 나는 오리려 그사람들을 고마워하며 나는 그돈을 받지 않아도 우리가족들이 여유롭게 잘먹고 잘살지는 못하들에도 우리데로 먹고 살수는 있기에 말없이 표연하지 않고 살면서 지난날 어렵고 불행했던 일들은 다잊고 살아야 한다고 내스스로 이렇게 하는 일들이 형제이고 가족이라 생각하면서 우리형제들도 그렇게 살아주기를 바라면서 여기저기 떨어져 살고 있기에 자주 마주치는 일들은 없지만 서로 각자 살고 있는곳에서 무난히 잘살고 있게지 하며 우리부부도 남들 처럼 묵묵히 아무 뜻없이 살고 있었는데 큰아들 병희가 자기 동생 병수는 먼져 결혼까지 하여 자리잡고 잘살고 있었기에 자기도 자기데로 그무엇가를 해보려고 시작했던 일들이 잘못되여 큰화근이 되면서 자기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수억에 돈을 사체에 휘말이게 되여 자기데로 해결 할수없게 되자 결국 죽내사내 하는 지경까지 도달하게되여 결국 나를 찾아던 아들에 야기에 우리집은 초상집 처지가 되였고 결국 나는 그동안 시달려가며 살아쓸 아들을 가슴아파하며 나는 아들에게 큰소리로 야단에 추궁 한마디 못한체 자식부터 살려노고 보자며 내스스로 내마음를 달래가며 나같은 아버지 만난것이 너는 행복한 놈이라며 내가 지난날 내아버지한테 받았던 상쳐들을 나는 그리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아들에 마음을 달래주며 우리부부는 여기저기 급전에 돈들을 부탁해 채용해가며 아들을 앞세워 서울로 가서 한곳한곳 확인해가며 나도 알고있었던 서울에 아파트 한두채 값에 수억에 많은 돈들을 지불해 가면서 나는 속으로 울고 거틀로는 웃음지며 해결하로 단이며 몸은 지쳐가고 있는데 서울에서 살고있던 영옥이 동생이 어찌 알고 오랜만에 서울에간 우리 부부를 자기집에와 같이 밥이나 먹고 가라고해 마음만은 밥먹은 것조차도 만사가 귀찬아지만 오랜만에 내여동생을 한번 볼겸 찾아 들었는데 영옥이 동생이 자네부부까지 불려는지를 나는 미쳐 몰아고 아무 영문도 모른체 있는데 자네부부가 들이닥쳤고 그동안 별탈없이 잘지내 왔던 터라 나는 반가워 하며 마주치나 했는데 여동생이 밥상이 차려져 식사가 시작되는데 자네부부는 우리부부를 앞에 않쳐노고 서로 자기가 먼져 야기를 하게노라고 앞다투워 가면서 우리부부에게 먼져 야기하게다고 우리부부앞에서 나서는 자네부부를 보면서 나는 나데로 기가찬네 그동안에 우리한테 서훈했다고 우리가 이해할수 없은 야기들을 하는바람에 나는 무슨 야기들를 하고들 있는지도 모른체 넉을 잃었고 이해할수가 없었단에 우리부부는 아들에 큰사로 수억돈을 하루지 수습하는데 몸도 지쳐있었고 귀가차 넉을 잃고 힘이 빠져있었는데 나는 동생부부 행동들을 보면서 이해할수가 없었네 재수씨 말데로라면 우리장인이 돌아가시기 몇년전에 동생장인 어른이 노화가 않인 자기스스로 돌아가셨다는 야기를 오래전에 전해 들은봐가 있었고 무슨일로 스스로 돌아가셨는지는 모르나 자기스스로 돌아가셨기에 여기저기 열락도 제되로하지 않고 초상을 치르셨다는 야기를 오래전에 진도에서 들었는데 그런 야기를 들었던 몇년훗날에야 안동병희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서 동생부부가 안동까지 찾아온줄로 내가 알고 있었는데 재수씨 말데로라면 자기들은 안동까지 찾아왔는데 자기친정아버지가 돌아가 셨다는 야기에도 이로에 말한마디 않해줘 서훈했다는 야기로부터 시작된 불만에 야기에 나는 할말를 잃었네 자내도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싶었는지 모르나 두사람에 그날에 행동에 모습들을 보면서 나로써는 귀가차 말로 대구할 같치도 없어 아무 말한마디 없이 그자리를 일어나 오면서 나는 두번 다시 자네 같은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나는 그누구에게도 이런네 저런네 아무말도 하고싶지 않았고 말이 않이면 듣지을 말고 길이 않이면 가지를 마라했든이 나는 오늘날까지 묵묵히 나데로 살면서도 그래도 내동생이기에 그동안 몰아던 일들을 깨우쳐 가면서 자네들 스스로 행복을 찾기을 바래단에 행복과 기쁨은 그누가 주고 그누가 만들어 주는게 않이고 스스로 자신들이 만들고 계척하는 것이기에 나는 요번 목포 병재 결혼식에 오게되면 그동에 우리 형제들에 좋치않은 일들은 서로가 다잊고 언제 그랜야든이 동생자네가 나를 먼져 찾아 내손를 잡아 주겠지하고 기달림에 있었는데 자네도 나를 본등만등 재수씨도 나를 본등만등 수십년만에 만나기에 얼굴조차도 나는 알아보지 못했던 조카 경수마져도 나를 처다보면서도 본등만등 모두 같이 예식장에서도 막둥이 집에 들어와서도 모두 같이 그런은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소직히 한살이라도 더먹은 형으로써 자존심이 상해서 나도 모르척하며 지내고 있다가 말없이 결국에 서울로 가다고 막둥이 집에서 나서는 자네를 보다못해 뒷따라 나가서 짤분 시간동안 자네 손을 내가 먼져 붙들었지만 내마음은 한없이 섭섭했네 이세상이 다변해 갔다해도 자네와 나는 그리 쉽게 잊고 살수없은 우리들데로 정이 있었지 않았던가 이사람아 나는 항상 그자리에서 그데로 서있고 내마음도 변함없이 혹 내여자가 내형제간에 정를 깨틀려 가든이 삐닥한 야기를하고 섭섭하다 투정한다면 나는 여자와 같이 동조하기보다 한가정에 기둥인 남자로써 형제간에 우해있게 지낼수있게 설득하고 이해시켜가는 리드심있게 지혜가 있어야지 남자로써 장단 치든이 같이 형제간에 우애를 깨틀려가면 되게는가 나는 비록 아들에 문제로 수억에 빗덤이 속에 오늘날 에 내생활들을 쪼달려가며 살고 있지만 나는 그누구에게도 구해받지 않고 당당하게 살고있네 내가 언제 부기영화로 잘먹어가며 잘입고 태평스럽게 잘살아 왔던것도 않인데 지금보다 무엇을 더욕심내며 살게는가 내가 사는동안 먹을것 있고 내가 등데고 잠들곳 있쓴면 되고 내가 그동안 못느껴왔던 귀엽둥이 손자소녀들이 나를 가끔 기쁨을 주고 있고 진도 동생부부가 힘들게 농사짖였던 쌀을 조금이나마 나를 먹어보라며 보내주고 반찬거리 한두번씩 보내주는 명오 형찬이 부부들를 고마워하고 감사하게 여겨가면서 오늘날을 사는데 왜 서울에서 사는 우리 두형제집들은 자기들 마음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변화고 자기들 기분에 따라 이래다 저래다 변덕스럽게 변해가면서 언제는 아무일 없든이 다가왔다가 언제는 또다시 싸늘하게 변해가든이 스스로 고립되여 가면서 힘들게 사는지 이해할수가 없고 모두가 자기들 마음속에 만족에 욕심들을 조금씩만 벌여가면서 자기들이 준것들만 가슴속에 품고 살지를 말고 자신들도 받은것이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았는지도 찾아보며 살면은 모든것이 이해속에 해결도되는 거슬 왜 가슴속에 그리많은 자기들에 준마음에 욕심들만 품고 괴롭게 사는지를 이해할수 없어 형제로써 내마음이 아프네 내가 이렇게 많은 야기들을 자네한테 전해보는건 나데로 수년간에 수천번도 생각하르라 잠못들어기에 말로는 다할수가 없었기에 이렇게 수십장에 글로 전해본단에 이글를 보고 자네가 어덯게 생각하고 어덯게 이해하며 받아들리야는 자네몫이네 나는 형으로써 그동안 보고듣고 느낌속에 내뜻를 이렇게 전하면서 자네가 내뜻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나는 자네를 탓하지 않겠네만 나는 자네 형으로써 충고 하고싶네 이사람아 금전에 돈만이 우리인생사에 전부만이 않이지 않은가 우리가 언제 그리여유롭게 잘살아던가 내품속에서 떠나벌인 금전들은 내것이 않이였다고 다마음속에서 잊져벌이고 모든것에 마음비우고 다내려 노고 마음편하게 몸관리 잘하면서 사시게나 형으로써 부탁하네 그리고 자네가 마음이 답답하고 자네혼자서 마음이 힘들때 언제던지 나를 찾아 오시게나 나는 언제 어느때라도 자네를 따뜻이 마자줄 준비가 항상 되여 있네 나는 자네 형이 않인가 자네와 나 둘이서 시원한 바다가에 찾아가 바다바람에 마음속에 있는 그동안 우리들에 싾여던 우리들에 야기들를 우리둘이 서로간에 좋지않은 과거사에 일들은 가슴속이 시원하게 바다물에 다토하고 좋은것만 우리형제 답게 새로운 마음들을 우리들 가슴속에 가득 담고 자네와 나 같이 돌아오세 그리고 다음부터는 나를 만나거든 자네가 먼져 다가와 내손를 잡아주기을 형으로 부탁하네 사랑하는 내아우님아 이형이 마지막 부탁이 될것시며 두번 다시는 동생한테 이런 내뜻를 전할일은 없쓸것시네 나도 이렇게 하기까지 나데로 천백를 생각하고 또생각속에 내가 이렇게라도 한번쯤은 내동생에게 글로라도 내소원이 없게 다토해보고 내가 사는 동안 후해없게 살아보자고 이렇게 전한다네 동생 마음이 활짝열려 내뜻를 따라주기를 형으로써 기달려보게네 그리고 한세상 살아가는 동안 어찌 좋은 일들로만 우리들에게 있고 마음편한 일들로만 있게는가 기쁨도 우리복이요 슬픔도 우리몫이네 사랑하는 내동생님아 형제들이기에 믿었었고 친구였기에 믿었지만 내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고 내뜻데로 들어주지 않았기에 동생마음속에 상쳐들을 어찌 내가 모르게는가 동생 그많은 가슴속에 상쳐들 다벌리고 있쓴면 있는데로 없쓴면 없는데로 이형처럼 사시게나 그리고 항상 몸관리 잘하여 건강하게지내시기을 형으로써 빌게네 안동에서 작은형이